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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58:49

흥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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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南市 / Hŭngnam City
흥남시
興南市 / Heungnam City
국가 대한민국[1]
광복 당시 면적 130㎢
광역시도 함경남도
광복 당시 행정구역 75리
시간대 UTC+9
1. 개요2. 역사
2.1. 일제강점기 최대의 공업도시2.2. 전쟁 당시2.3. 전쟁 이후
3. 교통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clearfix]

1. 개요

함흥시의 외항이자 공업도시로 흥남시였으나, 2005년 이후 함흥시 아래의 흥남구역이 되었다. 광복 당시 면적 면적 130㎢이었다.

지리적으로는 서쪽에는 성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함흥만을 끼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본적이 바로 이 도시.

남북통일 후에는 함경남도 함흥시 (또는 함흥광역시) (흥)남구로 개편될 가능성이 있다.[2]

2. 역사

2.1. 일제강점기 최대의 공업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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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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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은 조선시대에 함경도 함흥부 운전사(), 구한말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사라는 어촌지대이었으나, 1910년에 운전면이 되었고 이후 동운전면과 서운전면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으로 동운전면과 서운전면을 통합하여 다시 운전면으로 환원하였고, 동명면을 서호면(西湖面)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다 1927년에 거대한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공장이 들어서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 운전면이 흥남면(興南面, 구룡리·동흥리·복흥리·신상리·운성리·유정리·응봉리·천기리·하덕리·호남리·후농리)과 운남면(雲南面, 궁서리·덕리·상수리·송상리·수동리·수변리·신성리·용성리·용암리·용연리·용흥리·운남리·운상리·운중리·운하리·운호리·운흥리·중수리·차인리·창동리·흥남리·흥덕리)으로 분리되었고, 서호면 농양리(), 능서리(, 1948년 이후 릉서리), 능전리(), 대후리, 동도리, 서도리, 서호리, 서흥리, 신경리, 신상리, 신성리, 운동리 12개 리가 흥남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에 읍제가 도입되며 흥남면이 흥남읍으로 승격되었다.

흥남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상술했듯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공장의 설립이었고, 그 전에 있었던 것이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진행된 조선총독부의 제2차 발전수력조사였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의 한계를 경험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이른바 문화통치를 진행하였는데,그 일환으로 전국의 하천에 대한 조사 및 치수 사업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는 '하천'이 가진 '전력 생산의 가능성'에 주목, 을 축조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수력발전소 건설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1925년과 1926년,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와 미쓰비시 사가 부전강과 장진강의 개발권을 획득, 수력발전소를 각각 건설하였다. 또한 공업도시의 개발을 위해 1928년에는 함경선 전 구간을 개통, 원산과 흥남, 함흥 등을 거치며 회령에 이르도록 하였다.

파일:external/cwbpds.imbc.com/23_3.jpg
장진강 수력발전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일본질소비료'라는 회사의 조선 지부를 흥남에 건설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노구치 시타가우(野口 遵)[3]가 1908년 창업한 일본질소비료 회사는, 소유하고 있던 카바이트 공장을 확장해 석회질소 비료 생산 설비까지 만들었으며, 이 비료를 황산암모늄으로 변성하는 설비까지도 보유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산 황산암모늄의 수입이 중단된 시점에서 큰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심지어 1921년에는 이탈리아 기업이 가지고 있던 암모니아 합성기술의 특허를 구매, 일본 최초의 합성암모니아 공장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노구치가 조선에서 사업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것은 조선총독부의 요청이었다. 당시 산미증식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쌀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조선 내에서의 비료에 대한 소유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일본질소비료에게 조선에서의 사업을 제안하였다. 그를 위한 편의를 봐준 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두 발전소를 총괄하는 '조선수전'을 1926년에 설립한 것과 그 이듬해에 '조선질소비료'라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 회사가 설립되며 이곳 흥남에 대규모의 공장지대가 건설되었다. 1925년 1926년에 각각 만들어지기 시작한 두 수력발전소는 1929년에 부전강 수력 발전소가, 1935년에 장진강 발전소가 완성되면서 각각 20만 kW, 33만 kW의 발전량을 자랑하였다. 또한 1941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 출력이었던 70만 kW의 출력을 자랑하는 수풍댐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분명 노구치의 조선질소비료는 흥남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조선의 어두운 현실이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측면도 존재한다. 1927년에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은 사실상 가관이었는데, 노구치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가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땅을 사라"고 지시했고, 해당 지역 480여 호의 1,400여 명의 사람들을 '제 2의 인천을 만들어준다고 속이며 군청과 경찰이 정한 가격에 토지를 강제로 판매하도록 하였다. 결국 부지 내의 조선인 가옥 200여 채가 모두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장이 건설되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마을의 중심이 되어 신성시되던 팽나무 역시 가차없이 베어졌으며, 이주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약속들과 요구사항은 모두 묵살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조선총독부에 낸 탄원서 역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면서 이주민들이 정착한 도시에는 토막집과 움집이 속속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4] 일제가 본토에서 계획을 빠르게 처리하려고 자행한 짓을 식민지에서 똑같이 했다.

이렇게 생겨난 질소비료공장이 새로운 사용처를 찾게 된 것은 중일전쟁 시기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조선은 전시체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만주와 경계를 맞닿는 북선(北鮮) 지역이 있었다. 특히 암모니아를 이용해 질소비료를 만들었던 흥남 지역의 질소비료공장들은 일제히 생산 물품을 바꾸어 질소를 기반으로 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약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말기로 가게 되면서 노구치에게 식민정부에서 ' 알루미늄 제조연구명령'을 내려 공장에서 대규모로 알루미늄을 생산해 본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흥남의 일본인 커뮤니티는 노구치의 일본질소비료공장이 있던 미나마타시(水俣市)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으며,[5] 조선인들은 대개 잡부나 잘 되어야 말단 기술자 정도에 머물렀다. 일본인 노무자는 특별수당에다 빠른 진급으로 많은 수입을 손에 넣은 데 반해 물가는 터무니없이 싸서, 미나마타에서는 "흥남으로 간 주부들은 아침에 이불에 누운 채로 발가락으로 전기밥솥을 켜고, 밥이 다 되면 일어나 아침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흥남 중심가에는 미나카이 백화점(三中井百貨店)의 지점이 있어 주부들의 소비욕을 충족시켰으며, 고향 미나마타에서는 비단 기모노를 입어 본 적도 없던 주부들이 쇼핑 심지어 조선인 시장에 찬거리를 사러 갈 때도 비단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6]

흥남시는 함주군 흥남읍 전체와 운남면 일부로 신설한 시로서 흥남읍 구룡리(九龍里), 송호리(松湖里), 운중리(雲中里), 운동리(雲洞里), 신경리(新慶里), 호남리(湖南里), 용흥리(龍興里), 복흥리(復興里), 응봉리(鷹峯里), 작도리(鵲島里), 서흥리(西興里), 동경리(東慶里), 유정리(柳亭里), 덕리(德里), 풍서리(豊西里), 마전리(麻田里), 쌍도리(雙島里), 신상리(新上里), 하덕리(荷德里), 운흥리(雲興里), 운남리(雲南里), 궁서리(宮西里), 흥경리(興慶里), 능서리(陵西里), 대후리(大厚里), 동흥리(東興里), 천기리(天機里), 흥남리(興南里), 용암리(龍岩里), 중수리(中水里), 흥상리(興上里), 동상리(東上里), 농양리(農陽里), 송상리(松上里), 운성리(雲城里), 흥덕리(興德里), 수변리(洙邊里), 중흥리(中興里), 능전리(陵前里), 서호리(西湖里), 완풍리(完豊里), 송흥리(松興里), 풍부리(豊富里), 송호리(松湖里), 동변리(東邊里), 송동리(松洞里), 상부리(上富里), 수서리(水西里), 신덕리(新德里)와 운남면의영대리(營岱里), 구탄리(舊灘里), 호상리(湖上里), 호남리(湖南里), 축전리(杻田里)를 관할하였다. 이때 능전리·동경리·신경리를 병합하여 능경리(陵慶里)를, 대후리·농양리를병합하여 대농리(大農里)를 신설하여 52개 리를 관할하였다.

흥남은 부 승격 직전인 1944년에는 함주군에 소속된 읍임에도 14.3만의 인구로 흥남이 경성부, 평양부, 부산부, 인천부, 대구부, 청진부[7]에 이어 조선의 7대 도시에 들어갔다. 이는 본래 소속되었던 함흥부(11.2만)는 물론 원산, 신의주, 대전 등을 앞질렀을 정도.[8] 덕분에 흥남읍이 소속돼있던 함주군의 인구는 앞서 시 승격된 함흥을 제외하고도 약 30만에 달하여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군이 되었으며 그 규모는 경성, 평양, 부산의 조선 3대 중추 도시들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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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의 인구 변화(출처: 양지혜, '빗장을 건 도시: 일제강점기 흥남의 탄생과 기업의 도시화 전략', 2021)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667740

흥남과 함흥을 아우르는 흥남 공업지대는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최대의 화학공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아시아 최대의 질소비료공장과 수력/화력발전소 외에도 도쿄의 이화학연구소 분실(分室), 야금제련소, 제철소, 조선소, 각종 군수 공장 등 중화학산업시설이 즐비했고 그만큼 노동자 층이 상당했다. 해방 이후 흥남시로 개칭되었고, 이 때에도 주변구역을 병합해 20만의 인구를 자랑했다.

2.2. 전쟁 당시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지휘한 제1극동전선군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도 흥남 때문에 함흥이 한반도 북부의 중심지인 줄 잘못 알고 함흥에 군정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나 휘하의 25군 사령관이자 이후 소련군정 장관을 맡은 부하 이반 치스차코프의 설득으로 계획을 취소했을 정도. 당시의 평양은 서비스업과 상업이 발달한 소비도시였다.

그러나 1950년에 벌어진 6.25 전쟁으로 인해 미군은 7월부터 8월까지 흥남을 철저하게 공중 폭격했고, 흥남의 공업 시설은 완전하게 파괴가 된다. 1950년 12월에는 유엔군이 실시한 흥남 철수작전도 특기할 만한데, 이 작전을 통해 10만여 피난민이 남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 중에 그나마 남아있던 흥남 부두 역시 다 폭파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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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폐허가 된 흥남의 모습.

1952년에 함주군 운남면 창흥리(昌興里), 룡연리(龍淵里), 룡성리(龍城里), 신성리(新成里), 수동리(水東里), 상수리(上水里)가 편입되었고, 군면리 대폐합으로 수서리·송흥리·완풍리·신덕리를 병합하여 덕풍리(德豊里)를, 풍부리·송호리·동변리·송동리·상부리를 병합하여 풍동리(豊東里)를, 호남리와 축전리를 병합하여 호전리(湖田里)를 각각 신설하였으며, 능경리·동상리·쌍도리·대농리·운동리·릉서리·마전리를 퇴조군(退潮郡, 현 락원군)으로 이관하였다.

2.3. 전쟁 이후

1954년에 덕풍리()와 풍동리()가 함주군에 편입되었고, 1955년에 창흥리와 호전리를 제외한 모든 리를 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56년에 룡성동()·룡연동()·신성동()을 병합하여 룡신리(龍新里)를, 영대동()·구탄동()·호상동()을 병합하여 영호리(營湖里)를, 중흥동()·풍서동()·흥경동()·흥상동()을 병합하여 풍흥리(豊興里)를 신설하였다. 1957년에 동흥동()·신상동()·송상동()을 병합하여 내호동(內湖洞)을, 송호동()·복흥동()을 병합하여 송흥동(松興洞)을 각각 신설하였고 중수동()이 상수동()에, 운남동()이 룡암동()에, 수동동()이 궁서동()에 각각 통합되었다.

1960년에 함흥시에 통폐합되면서 궁서동·상수동·수변동·영호리·호전동 등 4동 1리가 사포구역(沙浦區域)에, 룡흥동·운흥동·흥덕동·흥남동·룡암동·룡신리·창흥리 등 5동 2리가 본궁구역(本宮區域)에 편입되었으며, 송흥동·운중동·운성동·구룡동 등 4동이 룡성구역(龍城區域)에 편입되었고, 원
흥남시 잔여구역인 호남동()·천기동()·덕동()·응봉동()·하덕동()·내호동·후농동()·서호동()·작도동()·류류정동()·풍흥리() 등 10동 1리와 퇴조군(退潮郡, 현 락원군) 마전리()·릉능동리()가 통합되어 함흥시 흥남구역(興南區域)이 되었고, 류정동을 분리하여 류정일동과 류정이동을 신설하였고, 풍흥리가 풍흥동()이 되었으며, 내호동 일부가 류유정이동에 흡수되어 12개 동 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60년부터 직할시로 승격되어 함경남도에서 분리된 함흥시 일부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1970년 다시 함흥시가 함경남도에 편입되었다.[9] 1988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8만 명이 거주하였다. 2001년 8월 잠시 산업도시로서 흥남구역, 해안구역, 흥덕구역 사포구역의 일부가 흥남시로 독립되었지만 2005년 도로 함흥에 합병되었다.

2008년 북한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흥남구역 기준 인구가 약 99,994명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흥남시 땅마저 재편입되면서 함흥시에 빼앗겼기 때문. 흥남시 시절(2001년~2005년)의 인구는 약 36만 명[10]이었다고 한다. 함흥시가 40만 정도. 구 흥남시 지역은 흥남구역, 사포구역, 해안구역, 성천강구역 등으로 완전 개박살났다.(...) 그나마 룡성구역이 평양 룡성구역과 이름 겹친다는 이유로 2013년에 없어져서 이정도지 룡성구역까지 있던 시절에는 완전 헬게이트.

2001년 북한 로동신문 함흥역- 마전역 사이에 해수욕 전용열차가 개통되었다며 "우리나라 계절에서 무더운 삼복기가 오면 해마다 공업도시 함흥시와 흥남시 안의 근로자들은 휴식일을 리용하여 마전해수욕장을 즐겨 찾는다"고 자랑하기도 하였지만 실제 즐길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될듯.[11]

지금도 대표적인 비료, 나일론 공업 지역으로 흥남비료연합기업소가 있다. 이 비료는 북한의 삼대 주체공업 물품( 청진, 김책의 "주체철", 순천 함흥의 "주체섬유( 비날론)") 중 하나인 "주체비료"로 선전된다. 평남 안주시 남흥지구의 남흥청년화학기업소 역시 "주체비료" 공업 지역으로 언급되는 북한의 대표적인 석유화학공장.

궁서리에는 함흥차사의 배경이 되었던 함흥본궁이 있다.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북한 국보 제48호)가 함흥본궁에 보존되어 있다. 황초령비는 함흥역사박물관에 있다.

3. 교통

철도시설로 평라선 창흥역(舊 본궁역), 흥남역, 서호역, 마전역(평라선), 창흥선 련흥역, 서호선 비날론역, 운중역, 룡성역(서호선), 하덕역이 있다.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함경남도 미수복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fff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파일:함경남도 흥남시 휘장.svg
흥남시
興南市
Heungnam City
}}}
<colbgcolor=#670B15><colcolor=#ffffff> 시청 소재지 내호동 하덕리
상위 행정구역 함경남도
하위 행정구역 8 70
면적 130㎢
인구 143,604명[12]
인구밀도 1,104.65/㎢
명예시장 서례미
명예동장 8석
홈페이지 이북5도위원회 흥남시 소개
파일:함경남도 흥남시기.svg
파일:흥남시.jpg
행정동 법정동·리
구룡동 구룡리(九龍里)·운성리(雲城里)·운중리(雲中里)
내호동 동흥리(東興里)·송상리(松上里)·신상리(新上里)·유정리(柳亭里)·하덕리(荷德里)·후농리(厚農里)
마전동 능경리(陵慶里)·능서리(陵西里)·대농리(大農里)·동도리(東島里)·동상리(東上里)·마전리(麻田里)·신성리(新城里)·운동리(雲洞里)·중흥리(中興里)
본궁동 구탄리(舊灘里)·궁서리(宮西里)·상수리(上水里)·수동리(水東里)·수변리(洙邊里)·신흥리(新興里)·영대리(營垈里)·용성리(龍城里)·용연리(龍淵里)·인흥리(仁興里)·중수리(中洙里)·창인리(昌引里)·축전리(杻田里)·호북리(湖北里)·호상리(湖上里)
서호동 서호리(西湖里)·작도리(鵲島里)·풍서리(豊西里)·흥경리(興慶里)·흥상리(興上里)
서흥남동 대흥리(大興里)·동변리(東邊里)·동오리(東吾里)·상부리(上富里)·송오리(松塢里)·송정리(松亭里)·송흥리(松興里)·수서리(水西里)·완풍리(完豊里)·용암리(龍巖里)·운전리(雲田里)·풍부리(豊富里)·흥덕리(興德里)
용흥동 용흥리(龍興里)·운상리(雲上里)·운호리(雲湖里)·운흥리(雲興里)·흥남리(興南里)·흥덕리(興德里)
천기동 덕리(德里)·복흥리(復興里)·부흥리·송호리(松湖里)·응봉리(鷹峰里)·천기리(天機里)·호남리(湖南里)


[1] 흥남시는 북한에서는 폐지되어 사용하지 않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주장하는 행정구역이다. [2] 역사가 오래된 지명인 '운전'을 따 '운전구'가 될 수도 있지만 '흥남'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지명이라 통일 이후 어떻게 개편될지 정확히는 예측할 수 없다. [3] 시타가우는 遵의 훈독이고, 음독하여 준이라 읽기도 한다. [4] 위영금. (2019). 식민시기 중화학공업도시 흥남의 기원, 1927-1945 : 전쟁, 기술,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보, 23(2), 299-321. [5]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면 맞는데, 일본질소비료공장은 훗날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제공한다. 흥남의 성천강에도 유독수은이 유입된 바 있지만, 해방 당시까지는 수은 중독을 유발할 만큼 축적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함흥고보 미주 동창회지 <반룡> 25호, 2008 PDF [7] 1940년에는 대구보다 인구가 많았으나 소폭 감소했었다. [8]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인구 5만 명 이상의 시가지(읍)을 부로 승격시켰는데, 1940년 당시 전국 20개 부 가운데 6개 부만이 흥남보다 인구가 많았다. 그나마도 1940년대를 거치며 증가한 것이고 1940년에는 흥남(12.8만)과 원산(8.6만) 함흥(7.7만)의 격차가 엄청났다. [9] 이때 영구 분리된 동네가 퇴조군(현 락원군)이다. [10] 이 정도면 원산은 물론 개성도 쌈싸먹는다. [11] 원칙적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복지나 노동권은 법적으로는 잘 되어있는 편이다. 북한이 벤치마킹한 소련도 1가정 1 별장 무상분배를 지향했고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실제로 별장 보급률이 세계적으로 대단히 높다. 동독 같은 다른 공산권도 비슷한 정책을 했다. 물론 북한은 땅이 소련만큼 넓지 않으므로 그렇게까진 못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직장 근처에 집단으로 지어진 주택단지에서 생활하며 주말에 국영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여가를 즐긴다고 한다. 수도권의 위성도시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따라서 마전 해수욕장도 여름 휴가철에 노동자들이 신청을 하면 이용은 할 수 있을것이다....만, 한정된 시설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모일지를 생각해보자. [12] 1944년 인구총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