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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
田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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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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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안평군(安平君) | |
성 | 규(嬀) | |
씨 | 전(田) | |
명 | 단(單) | |
최종직위 | 상방(相邦)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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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 말기 제-연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제(齊)나라의 구국영웅. 그 유명한 고사인 화우지계(火牛之計)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5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명장 악의로부터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했으나, 그 밖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라 제나라 왕가의 먼 일족이라는 점 말고는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언제 죽었는지조차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때문에 사마천의 《 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전기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다. 일단 이 사람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하면 본격 나라를 구한 시장관리 말단 공무원.
2. 혜성 같은 등장
제나라는 민왕 시절에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秦)나라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국력을 과시하였다. 당시 제나라의 병력이 호왈 30만이었다. 민왕은 제나라의 힘이 강한 것만 믿고는 오만해져서 이웃 나라들을 핍박했는데, 이에 참다 못하여 연, 진, 한, 조, 위 등의 5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쳐들어왔다.한나라와 위나라는 군사적인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별볼일이 없었고 장수도 한참 부족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쟁쟁했고[1] 무엇보다도 당시 연합군의 총수는 연나라의 명장이었던 상장군 악의였다.
악의의 놀라운 지략으로 제나라는 불과 6개월 만에 70여개의 성을 함락당했고 수도인 임치마저 빼앗기는 등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게다가 제나라 민왕이 거(莒)성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하는 등의 막장스러운 상황이 벌어졌고, 제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거성에는 민왕을 돕기 위해 초나라에서 온 장수 요치가 와 있었으나 민왕의 교만방자함을 보다 못해 그를 죽여버렸다(...). 그러나 거성의 주민들은 끝까지 성을 내주지 않고 연군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기적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전단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전단은 제나라의 수도 임치의 시장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여서 아무도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전단은 집안 수레의 바퀴에 튀어나온 축을 잘라 버리고 철로 단단히 덮개를 씌우라고 시켰다. 사람들은 이러한 전단의 지시에 "수레바퀴를 저렇게 무겁게 만든다면 급히 도망가야 할 피난길에 수레가 어찌 빨리 움직일 수 있겠는가? 전단 이 사람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라며 그의 행동을 처음엔 비웃었다. 하지만 막상 다른 이들의 수레바퀴는 험한 도로를 장시간 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죄다 부서진 데 반하여 철 덮개로 무장한 전단의 수레바퀴만은 오히려 잘 방비되어 있어서 함락되지 않은 즉묵(卽墨)까지 멈춤없이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전단이 선견지명이 있다 하며 칭송했고, 즉묵의 대부들이 모두 전사하자 사람들은 피난길에 유일하게 몸을 빼냈던 전단의 재주가 즉묵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여 즉묵을 지키는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전단은 남은 병력을 마지막으로 남은 제나라 최후의 두 개의 성이었던 즉묵과 거로 집결시켜 철통같이 수비했다.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악의마저 두 성은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두 성을 계속 공성하는 대신 성을 포위하여 장기전을 벌이기로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3. 화우지계
한편, 연나라에서는 악의를 신임하고 등용해주었던 소양왕이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어 혜왕이 즉위했다. 혜왕은 부왕과는 달리 바른말을 아끼지 않는 악의를 미워했는데, 슬슬 궁지에 몰려있던 전단은 이를 알고는 "악의가 일부러 전쟁을 질질 끌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고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간계를 걸었다. 혜왕은 이에 넘어가 악의를 해임시키고 대신 기겁을 대장으로 삼았다.악의가 쫓겨난 사실을 알게 된 전단은 곧 "제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기겁이 사로잡힌 포로들의 코를 베고, 즉묵성 밖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을 파해쳐 욕보여서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용렬한 기겁은 이 말을 곧이 믿고는 제나라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사로잡힌 제나라 포로들의 코를 베어 그 비참한 몰골을 보여주었고, 무덤을 파헤쳐 제나라 조상들의 해골을 들어내고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제나라 군사들은 연나라 군사들이 동료들과 조상들을 욕보이는 광경을 보고는 오히려 울분을 터뜨리거나 혹은 기겁의 잔학함을 두려워하며 되려 죽기살기로 싸울 뜻을 다졌다.
여기다 전단은 제대로 된 병사들은 숨기고 노약자들과 아녀자들만 성벽 위로 올려 연나라 군대에 항복할 뜻을 전하도록 했고, 또 성 안 부자들에게 재물을 싸들고 성 밖으로 나가 기겁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성이 함락되거든 성 안에 있는 자신들의 집과 가족들은 건드리지 말 것을 청하도록 시켰다. 기겁은 즉묵성이 이미 안으로부터 무너져가고 있으니 머지않아 함락될 것이라면서 크게 기뻐했고 연나라 병사들도 다들 싸움이 끝나간다고 생각하여 차츰 기강이 풀려버렸다.
전단은 기겁이 방심한 틈을 타 은밀히 성벽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용무늬를 그린 알록달록한 비단옷을 입히고 뿔에는 칼을 매단 1,000마리 소떼의 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돌진하게 했다. 한밤중에 갑작스레 돌진해오는 이 괴상망측한 소떼의 습격을 받은 연군 진영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고, 뒤따라 나온 5,000명의 결사대가 온 즉묵성의 응원을 받으며 달려들자 단숨에 무너졌다. 연나라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하여 물러났고, 기겁은 난전 중에 전사했다. 전단의 이 기상천외한 전략은 훗날 화우지계(火牛之計)라고 불리며 길이 회자되었다.
4. 전쟁 이후
전단의 화우지계로 연나라 군사들을 한순간에 무찌른 제나라 군대는 곧 역공을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279년에 악의에게 빼앗겼던 70여 개의 성을 모두 회복하고 국토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는데, 악의가 기원전 284년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제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한편으로 거 땅에 숨어있던 세자 법장(法章)을 임치로 모셔와 왕으로 추대하니 바로 제 양왕이다.전단은 멸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건져 낸 공으로 안평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상국이 되어 양왕을 도와 국정을 운영하였다. 《전국책》에서는 조 혜문왕 30년(기원전 269년) 조나라의 명장인 조사와 병법을 논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전단이 "장군님은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데 이것 때문에 농사를 지을 장정들이 부족해집니다. 옛 제왕들은 3만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조사는 "당신은 병법도 모르고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구려. 오나라의 간장검은 말과 소를 토막내고 그릇을 자를 수 있으나 기둥에다 부딪히면 세 동강이 나고 바위에다 내려치면 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는데, 지금 3만의 군대로 강한 나라의 군대와 맞선다면 칼로 기둥이나 바위를 치는 것과 같소. 옛날에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어 아무리 큰 성이라고 해도 둘레 300장에 인구 3,000호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3만의 병력도 충분했소. 하지만 지금은 일곱 강국만이 남아서 수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가 있게 되었소. 제나라는 20만 병력으로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5년이나 걸렸고 조나라도 20만 대군으로 중산국을 평정하는데 5년이 걸렸소. 지금 둘레는 1,000장에 인구는 1만 호인 큰 성들도 있는데 이런 성들은 3만의 군대로는 한 모퉁이도 포위할 수 없고 야전을 치르기에도 역부족이오."라고 반박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는 툭하면 여섯자리 숫자를 동원한 전투가 자주 일어나는데, 이는 춘추시대만 해도 전쟁이 아옹다옹한 동네 패싸움 정도였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국운을 건 총력전 양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조 효성왕 원년(기원전 265년)에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2] 연나라와 한나라를 공격하는 기록이 나오고,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조나라에 와서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기록도 나온다.[3].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조나라에는 제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만들었던 악의도 망명해 있어서 그의 일족들이 조나라 군부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망명 시기가 서로 맞지 않아 두 사람이 서로 마주치지는 않았더라도 과거 두 나라의 흥망을 걸고 싸웠던 라이벌이 한 진영, 그것도 제3진영에 모이게 된 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13 |
삼국지 12 PS3와 PK에서 추가된 전국칠웅이란 가상 시나리오에서 삼국지 시리즈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러스트에서 왼손에 들고 있는 횃불로 화우지계를 고안한 장군임을 묘사.
능력치는 통솔력 96/무력 74/지력 95/정치력 64에 병과가 궁병에 전법은 주유와 같은 신화계.
삼국지 13에서도 능력치는 통솔력 96, 무력 74, 지력 95, 정치력 64에 특기는 훈련 6, 순찰 5, 교섭 8, 언변 7, 분전 8, 견수 9이며 전수특기는 견수이다.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B, 궁병이 A, 중신특성은 공정무사, 고유 전법은 "화우계"로 효과는 "적부대 기동 -1, 사기 -2, 병력 -3, 화계, 수상전 시 화공선"이다. 주유의 신화계나 육손의 열화계에 비해 능력치 디버프는 약한 편이지만 문제는 병력 - 3단계. 범위내의 적의 현재병력의 약 20%를 날려버린다.[4] 거기에 불질에 따른 불 추가 대미지는 고스란히 들어가고.... 거의 삼국지 11시절 주유의 불쑈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며 순간 섬멸력만 놓고 보면 화계계열 전법 중에서는 최고라고 볼 수 있을 정도.
5.2. 세키로: 섀도우 다이 트와이스
전단의 화우지계는 후에 일본의 전국시대에서도 응용되어 여러차례 활용되는데 '불소' 라는 이름으로 아시나 본성의 해자 앞 성문을 지키는 최종 문지기로 등장한다.다만 여기에서는 양쪽뿔에 칼 대신 불을 붙인 짚단을 묶어 달아놨고, 체구가 집체만하다는 것이 다르다.
이 불소는 중국 전국시대의 화우지계를 응용하여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일전에서 활용된 화우의 비쥬얼에 가깝다.
짚단에 불기가 있기 때문에 가드를 하거나 패링으로 튕겨내도 약간씩의 불기가 옮겨붙어 금세 화상 상태가 되 체간이 오링나 가드 불가상태에 빠져 굉장히 난해한 적이다.
그렇기에 보통 3년전 히라타 영지에서 소화가루를 잔득 줏어모아서 불소와의 일전에 대비하는 루트가 정석이다.
물론 적안귀를 상대하려면 어차피 화통과 기름들을 줏어와야 하기 때문에, 히라타 영지를 먼저 가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
[1]
무려 진나라의
백기와 조나라의
염파가 참전했다는 설이 있으나, 염파와 백기의 참전은 소설 《열국지》에 나오는 얘기다. 《사기》에는 총사령관인 악의 외에 어떤 장수들이 연합군에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염파는 기원전 283년에 제나라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종군 가능성이 없진 않다. 여담으로 전단이 연합군을 물리치고 난 기원전 279년에도 염파가 제나라를 친 기록이 있는데, 전단이 영토를 수복하기 전인지 후인지는 불명이다.
[2]
《전국책》에서는 조나라가
평원군의 주도로 제나라에 3개 고을을 떼어주고 전단을 초빙해오려 하자 조사가 "아까운 고을을 3개나 내주다니, 조나라에는 군대를 이끌 대장이 없다는 말인가? 제나라 사람인 전단이 남의 나라인 조나라를 위해 힘껏 싸울 것 같은가?"라고 불만을 표하며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도 전단이 싸움을 질질 끄는 바람에 조나라 국력만 깎아먹었다는 결말인데, 바로 앞의 병법 논쟁과 엮어서 해석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3]
전단이 제나라를 버리고 조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에는 '객경'(客卿)이라고 해서 어떤 나라의 인물이 다른 나라에 등용되어 군사자문이나 정치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전국시대에는 소속 국가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한 인물이 한 번에 두 나라 이상의 국가에서 벼슬을 받는 일이 흔했다.
[4]
게다가 이게 평균치라서 상대의 지력이 낮으면 최대 30%의 병력이 맞음과 동시에 증발해 버린다. 역으로 상대가 지력이 높으면 최소 10%의 피해만 입고 끝나지만 문제는 전단의 지력이 100에 육박해서 최소 평균치는 맞게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