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田齊)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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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2f7b> '''전제 제4대 왕''' | ||
성 | 규(嬀) | |
씨 | 전(田) | |
휘 | 법장(法章) | |
아버지 | 제민왕(齊湣王) 전지(田地)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65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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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씨 제나라(田齊)의 제7대 군주. 4대 왕. 제민왕의 아들. 제왕건(齊王建)의 아버지. 그는 장군 전단(田單)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망친 제나라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한때는 진(秦)나라 못지 않게 강했던 제 민왕 이전의 제나라의 위상을 되찾지 못했다.2. 생애
2.1. 생애 초기
그는 연나라가 악의를 보내 제나라를 칠 때 태사 각(太史 敫)[1]의 집에서 이름을 바꾸어 숨어 살다가 제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2]2.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제 양왕 원년(기원전 283년), 아버지를 죽인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를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태사 각의 딸과 혼인하니 그녀는 군왕후(君王后)라 불렸다.제 양왕 4년(기원전 280년), 제 양왕과 군왕후 사이에서 전건(田建)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훗날의 제왕 건이었다.
제 양왕 5년(기원전 279년), 전단은 계략으로 악의(樂毅)를 실각시키고, 기겁(騎劫)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즉묵(即墨)에서 화우지계[3]를 써서 연나라 진영을 붕괴시키고 기겁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수도 임치는 물론 나머지 땅을 모두 수복했다. 이 과정에서 위나라와 연합해 맹상군 사후 반쯤 무법지대가 된 설읍도 수복하였다. 제 양왕은 전단을 안평군에 봉했다.
제 양왕 10년(기원전 274년), 조나라 장수 연주가 제나라를 쳐서 창성과 고당을 빼앗았다.
제 양왕 13년(기원전 271년), 조나라의 상국 인상여(藺相如)[4]가 제나라의 평읍을 치고 물러났다.
제 양왕 14년(기원전 270년), 진나라가 제나라를 쳐 강읍과 수읍 2개 읍을 빼앗았다.
제 양왕 19년(기원전 265년), 제 양왕이 죽고 그 아들 전건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왕 건이다.
시건방지고 그리고 직언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촌형이었던 맹상군을 추방해 나라를 거지꼴로 만든 아버지 민왕의 사례를 들어 정사를 볼 때 늘 겸손하게 행동했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친척인 전단을 잘 대접했으며 늘 그의 직언을 들어 정사를 보았다.
3. 기타
제양왕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법(法)을 따와서 법으로 씨를 바꾸었다. 법정이 제양왕의 후손이다.나라를 망친 아버지, 나라를 망하게 한 아들을 두었다는 점에서 주선왕과 비슷하다. 그나마 주나라는 주유왕 이후에도 어떻게든 종묘를 지켜냈지만 제왕 건은 비참하게 굶어죽었다. 아들만 잘 두었더라도 노력이 빛을 발했겠지만 자식복이 좋지 못해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