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경력
서울공릉초(강북리틀), 중앙중학교, 중앙고를 거쳐 경희대에 진학했다. 1998년 제53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경성대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할 당시 최우수선수상과 타점상(10개)을 받았다. 이 당시 마운드는 최영완과 정대현이 주로 지켰다.모교에 대한 애정이 많아 2002년 중앙고가 30년만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 진출 및 준우승의 쾌거를 이루자 알루미늄 배트 100자루를 선물했고, 2008년에는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경희대가 단국대를 꺾고 정상에 오르자 우드 배트 20자루를 선물했다.
2. 두산 베어스 1기(1999-2008)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2001, 2004) |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8) |
|
신인 시절 |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nwww75v86f1sqk8veo4_400.jpg | |
팀의 주장이였던 2006년~2007년 당시 |
경희대학교 체육학과(1995학번) 졸업 시즌이던 1998년에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제3의 포수로서 금메달을 땄다.[1] 이듬해인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두산 베어스에서 데뷔, 그 해 타율 0.258/16홈런/63타점을 기록하며 역대 포수로서는 두 번째로 신인왕을 수상하며[2] 김태형, 진갑용 등과의 주전경쟁에서 승리, 2000년에는 타율 0.290/10홈런/59타점을 기록하여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겨내고 두산의 6번 타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으며, 2007시즌 까지 두산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으며 2008시즌 까지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포수지만 준수한 타격으로 대표적인 공격형 포수로 꼽혔다. 또한 평균 이상의 수비력과 파이팅 넘치는 모습, 그리고 잘생긴 얼굴로 인해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03년 부상을 당하며 포수 수비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 이듬해인 2004시즌에는 지명타자 출전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동시에 김동주 역시 그 시즌에 잔부상이 있어서 지명타자를 두 선수가 번갈아 소화하였다. 자연스럽게 포수 내구력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으나 그래도 2006년까지는 수비 능력에 아주 큰 금이 가지는 않았고, 정상적으로 주전 포수를 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2004년에는 정규 시즌 133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여 165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수상, 2001년에 이어 두번째로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3] 2006년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4] 2007년 개막전을 포함하여 시즌 초반까지는 채상병과 번갈아가면서 포수를 소화를 하였으나, 2007년 초 김주찬의 타구가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아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주전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고 #[5], 이때 이대호에게 도루를 허용할 정도로 포수능력이 떨어지고[6] 그 이후 데드암 증세가 온 것으로 추측된다. 정상적으로 2루에 송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7], 결국 채상병에게 밀려 주전 포수 자리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김경문 감독은 포수로서의 홍성흔은 부상 이후 예전의 기량을 되찾지 못한다고 판단, 포수에서 지명타자나 1루수로 전향하여 타격능력을 살리겠다고 말했으나[8] 포수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홍성흔이 이에 반발한다.[9] 이후 트레이드설까지 제기되었고[10] 행선지를 놓고 온갖 설이 나돌았다. 이 때 꽤 진지하게 홍성흔을 원하는 팀이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두산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는 보도[11]가 나오면서 당시 야구팬들 사이에는 '염치가 없고 뻔뻔하다'의 동의어로 '두산스럽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결국 홍성흔 스스로 2008시즌 지명타자로 전환하여 0.330 8홈런 63타점이라는 뛰어난 타격을 보이며 두산이 2위자리에 오르는데 큰 보탬이 되었고, 그 해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그것도 초반에 훈련을 제대로 못해 거의 한 달을 날렸음에도 말이다. 시즌 중반에 채상병이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을 때 몇 경기 잠깐 포수 마스크를 쓴 적도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12]
그 뒤론 예전처럼 포수로 복귀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한 적이 없었는데, 아마 부상으로 인해 약해진 허벅지와 그 동안의 공백으로 인해 더이상 실전에서 포수를 보긴 어렵다고 본인도 느낀 듯하다. 근데 포수를 포기한 이후 타자로서의 성적을 보면 오히려 포수자리에 대한 미련을 좀 더 빨리 버렸더라면 두산 타선은 정말 후덜덜해졌을 듯도 하다. 2009년이나 2010년 기준의 김현수- 김동주-홍성흔이라면.[13] 하지만 어쩌면 이후 포텐이 터져버린 최준석이나 이성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신인 시절 주전이었던 김태형을 은퇴시키고 진갑용을 삼성 라이온즈로 보냈으며 이도형마저 한화 이글스로 보낸 장본인이다. 만약 진갑용과 이도형이 두산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았더라면 프로야구판의 전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14]. 다만 최기문은 홍성흔과 관련이 없다. 최기문은 1998 시즌 종료 뒤에 차명주와 트레이드로 이적했는데, 이때는 홍성흔이 입단하기 전. 물론 당시에도 포수 자원이 넘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적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15년 1월, 딸하고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블래스 신드롬 때문에 포수를 관두었다고 밝혔다. #
2.1. 1차 FA
2008시즌이 끝난 후 FA를 선언한 후 가장 마지막에 롯데 자이언츠와 4년간 최대 30억원, 두산 시절보다 50% 인상된 연봉 2억 7,900만 원에 계약했다.[15] 두산에선 '당연히 남을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다' 라고 말했지만 홍성흔과의 계약 문제로 인한 기사가 없었던 점을 보면 잡을 팀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싸게 계약하려다 놓쳐버렸다.[16] 또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 안경현과 더불어 홍성흔마저 사라지자 분노한 두산팬들이 대거 달까( 김경문 안티)로 돌아섰다. 안 그래도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설을 비롯하여 각종 음모론이 나돌던 판에 의혹을 증폭시킬만한 사태가 터진 셈.[17] 그리고 또 하나는 홍성흔이 팀 분위기메이커여서 선수들이 김경문보다 홍성흔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김경문이 내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보상선수는 이원석.홍성흔 본인도 롯데 이적이 매우 낯선 것은 아니었다. 롯데의 연고지 부산은 아내 김정임 씨의 고향이었기에 개인으로서도 부산이 낯설지 않았고 두산 시절부터 절친했던 정수근이 롯데에서 버티고 있었던 데다가[18]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총애를 받았기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롯데에서는 합류 전부터 팬들이 응원가까지 새로 만들어주며[19] 큰 환영을 받았다.(당시 응원가 #)
3. 롯데 자이언츠 시절(2009-2012)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9~2011) |
|
3.1. 2009 시즌
|
그러나 다시 복귀한 이후로는 다시 예전처럼 똑딱거리면서 어느 사이엔가 다시 3할 타율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2009년 8월에는 타율 1위까지 올라왔다. 롯빠들은 이번 FA는 대성공이라면서 좋아했다. 롯데 자이언츠 4년은 KBO 역사상 가장 성공한 타자 FA영입으로 불릴 만했다.[21][22][23]
이후에도 활약은 계속 이어져 8월말까지 3할 8푼대의 경이적인 성적을 내며 드디어 또다시 4할 타자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마찬가지로 3할 8푼 타율을 찍은 LG 트윈스의 박용택 선수와의 타격왕 경쟁이 불붙으며 시즌 후반의 점입가경이었다. 허나….
2009 정규시즌은 타율 0.371(리그 2위), 홈런 12, 타점 64[24], OPS 0.968(리그 7위)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도 수상했다.[25] 이 시즌에 안타깝게 졸렬한 타율 관리 사건 때문에 아쉽게 타격왕을 차지 못한건 아쉬움이 남는 시즌.
3.2. 2010 시즌
|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선수 경력/201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3.3. 2011 시즌
2011시즌부터 조성환의 뒤를 이어 롯데 자이언츠의 주장을 맡았다. #이대호의 발목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이유로 이대호가 지명에 들어갈 경우가 생김에 따라 좌익수로의 출장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2월 15일 두산과의 연습경기에 첫 좌익수 출장 예정이었다. 관련기사 ...이었으나 시범경기 전 교통사고가 났었다. 자세한건 롯데 자이언츠/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의 홍성흔 교통사고 문단 참조.
시범 경기에서는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면서도 전혀 녹슬지 않은 타격감을 선보였다. 시범경기 타율 0.514(1위), 타점 11(1위), 안타 19(1위), 출루율 0.550(1위), 장타율 0.676(1위)으로 시범경기이긴 하지만 5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거기다 왠지 모르게 김주찬이나 손아섭보다 더 나은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된거 마무리 투수도 한번 시켜보는게 어떻겠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개막이후 수비에서 약점이 확연히 드러났는데 실책만 없을 뿐 그냥 잡기 어려울거 같으면 바운드 처리하는 등, 큰 실책만 없다 뿐이지 외야의 폭탄이 될 소지는 아주 컸다. 더군다나 당시 김주찬이라는 외야진의 폭탄이 있는데 양사이드에 폭탄을 달고 있는 셈이었기에 다시 외야로 돌아간 전준우만 이리뛰고 저리뛰고 개고생했다.
거기다 문제는 애초에 시즌 시작 전 양승호 감독은 주전이 아니라 간간이 백업 수준으로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은 주전 좌익수로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10시즌 때와 다르게 장타율이 급감하였다. 실제로 좌익수로 뛴 11시즌 들어서 체중이 8kg 정도 빠졌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5월 17일에서야 첫 홈런을 쳐냈다. 게다가 장타율은 0.340. 장타율이 급격히 올라간건 롯데로 이적한 이후라고는 하나 그래도 두산에서 있을때도 장타율이 4할을 넘었다는걸 생각하면....
다행히도 손아섭이 복귀하면서 좌익수는 안 갈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번에는 김주찬이 다치는 바람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듯.
5월 17일, 문학 SK 전에서 전준호의 직구를 받아쳐서 시즌 첫 홈런을 드디어 신고했다! 그라운드를 돈 직후 홍성흔은 어찌나 감격스러웠으면 덕아웃에 들어가 김무관 코치와 포옹을 했다. 이날은 박종윤이 만루홈런을 친 날이기도 했다.
6월 9일 삼성전에서 이우선의 공을 받아쳐서 그랜드슬램을 기록했다. 결국 롯데는 이날 장원삼과 이우선을 털어버리면서 13:7로 이겼다.
시즌이 지나면서 조금씩 살아나는지 슬금슬금 3할 타율 가까이 올라갔지만 장타율은 완벽히 망하고 말았다.
7월 23일 타율 0.301, 홈런 4, 타점 38, OPS 0.754을 기록하여 드디어 3할대 타율로 복귀했다.
2011시즌 타율 .306을 기록, 4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7안타 3볼넷 2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368, 장타율 .474, 출루율 .455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떨어졌다.
한편, 여러 기록을 쓰게 되었는데, 포스트시즌 개인통산 최다안타 신기록(82개. 종전기록 김동주, 81개)과 최다2루타(14개. 타이기록 보유자 전준호), 최다루타(115루타. 타이기록 보유자 김동주) 타이기록을 달성했다. 반면 병살왕의 오명에 걸맞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스트시즌 개인통산 최다 병살타 기록도 10개로 경신했다.
3.4. 2012 시즌
|
그리고 3월 31일 SK 와이번스 전에서 드디어 4번 타자로서의 첫 홈런을 쳤다! 하지만 롯데는 스코어 2:3으로 패배했다.
시즌전 이대호라는 핵우산이 사라진 것[26]과 4번 타자로의 부담을 떨칠수 있겠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시즌이 개막되자 맹타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후 미친듯한 삽질로 강민호한테 4번타자 자리를 내주고 5번타자로 밀려나게 되었다.
6월 9일 미세골절 부상으로 문규현과 함께 1군에서 말소되었다.
7월 5일, 7월 6일 경기가 우천취소되어 휴식을 갖게 되고 7일 경기에서 3타점으로 MVP가 되었다. 4일날에는 황재균에게 우천 세레머니를 시키고 선수들을 피신, 호탕하게 홍낄낄거리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7월 24일 화요일. 한밭 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주중 3연전 첫경기에서 류현진에게 4타석 연속 삼진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8월 21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5월 27일 잠실 두산전 이후로 오랜만에 장원삼을 상대로 4회초 솔로 홈런과 8회초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팀은 5:3으로 승리.
9월 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솔로홈런 포함 2득점으로 전준우와 함께 이날 롯데 자이언츠 60승의 주역이 되었다. 결과는 0:3으로 승리.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후 두산 베어스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차전 때 강민호가 부상으로 입원하면서, 남은 포수 자원이 용덕한밖에 없는 상황이라 급하게 백업 포수로 뛸 준비를 하게 되었다. 홍성흔, 4년 만에 포수 마스크 쓴다 다행히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이 포수로 출장할 일은 없었고 홍성흔은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지명타자 겸 4번타자로 출장하여 15타수 6안타 1득점 1도루 3볼넷, 타율, 장타율 .400, 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홍성흔은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지명타자 겸 4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4안타 2홈런 3볼넷 3타점 3득점, 타율 .222, 장타율 .556, 출루율 .33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홍성흔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33타수 10안타 2홈런 6볼넷 1도루 3타점 4득점, 타율 .303, 장타율 .485, 출루율 .410을 기록했다.
3.5. 총평
홍성흔의 최전성기이자 2000-2010년대 KBO 최고의 FA 성공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시기로 인해 홍성흔은 롯데 팬덤에게 있어서 여전히 로이스터 체제를 이끈 레전드급 선수로 회자된다.FA로 4시즌 중 3시즌이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4년 모두 포스트시즌에 오른 선수가 또 있겠는가.[27] 2009년 개인 최고 타율 0.371을 기록하며 두산 시절인 2008시즌에 이어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10년 WAR 5.15를 기록하며 리그 6위를 기록했고, OPS 1.028로 처음으로 OPS 1을 넘겼으며 116타점을 쓸어담았고 처음으로 20홈런 이상을 때려냈다. 2004년에 버금가거나 뛰어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며 3년 연속이자 롯데에서 뛴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2011년에는 의문의 좌익수 변신으로 타격 수치가 감소했으나 여전히 3할 100안타 60타점의 준수한 스탯을 찍으며 개인 4년 연속이자 롯데에서 뛴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12년에도 15홈런 74타점, wRC+ 140대를 기록하며 클래스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고 아름답게 롯데와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3.6. 2차 FA
4년간 뛰어난 활약을 보인 홍성흔은 2012 시즌 종료 후 두번째 FA를 선언했다. 원소속팀 롯데 구단은 최종 3년 25억 원[28]을 제시한 반면, 홍성흔은 4년에 34억 원을 원하여 금액 차로 인해 협상이 최종 결렬 되었다. 홍성흔이 4번타자로 분발하긴 했으나 역할을 다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고, 나이를 생각해보면 4년 계약 만료시 2016시즌 홍성흔은 40세가 된다.거기다 정현욱을 영입한 LG, 김주찬을 영입한 KIA 등은 물론이고 선수 영입이 없었던 한화나 SK, 삼성 등의 구단도 시장 시작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 FA 영입 종료를 사실상 선언했고 NC 역시 이호준을 영입해서 홍성흔의 자리가 마땅찮아졌다. 지난 시즌 무리한 넥센은 당연히 영입할 리가 없고[29] 막상 시장에는 나왔는데 갈 곳은 하필 두산밖에 없는 상황. 롯데 팬들은 홍성흔이 두산에 가든 다시 돌아와서 헐값으로 계약하든 차라리 잘 됐다는 의견인 반면, 두산 팬들은 김태룡 단장이 홍성흔 영입에 뛰어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4년간 총액 31억원의 계약으로 친정 팀 두산에 4년 만에 복귀하였다. 김진욱 감독은 타선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필요했다고 하면서, 홍성흔을 주장에 임명하겠다 밝혔다.
홍성흔의 보상 선수로는 김승회가 지명되었다.[31]
4. 두산 베어스 2기(2013-2016)
|
4.1. 2013 시즌
|
4년 만에 친정으로 복귀한 후 맞이한 첫 시즌 |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4.2. 2014 시즌
|
|
20홈런을 기록하며 주장으로서 반등에 성공한 시즌 | |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선수 경력/201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4.3. 2015 시즌
|
KBO 우타자 최초 2000안타를 기록한 후 두산팬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선수 경력/201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4.4. 2016 시즌
|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선수 경력/201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4.5. 총평
국가대표 외야수 출신이지만 FA 직전 커리어를 완전히 망친 이택근이나, 수비력도 평범하고 타격도 OPS 0.8을 찍어본 게 통산 단 한 시즌뿐이었던 주루 원툴 똑딱이 김주찬이 50억을 받아간 게 당시 FA 시장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2차 FA 자격을 취득하기 바로 전 해까지 4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던 그가 단 31억에 리턴한 것은 2012년에 보인 에이징 커브 조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합리적인 계약이었다. 현역 막판에 터진 부전드 드립으로 인해 불이 붙은 일부 팬들의 험악한 인식과 달리 그는 막판에 급격하게 에이징 커브가 오는 바람에 4년 전체로 보면 팬들이나 구단,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에게 가졌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먹튀까진 아닌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계약이 당시 두산 기준으로는 상당히 큰 돈이었지만[32] FA 시장 전체로 보면 딱 준척급 수준의 계약 규모였고, 성적 역시 계약 전반기에는 김현수와 둘이서 팀 타선을 이끌어나가다 후반기에는 완전히 망해 버리는 바람에 팀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리그 전체를 놓고 봤을 때에는 그럭저럭 지명타자로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지명타자 슬롯을 독점했다는 점, 하필 4년 중 커리어 하이가 팀의 역대급 최악의 시즌이었고 우승 과정에서 힘을 쓰기는커녕 트롤러로 전락했었다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적인 계약은 아니지만 먹튀는 아니었다 정도로 평가받는다. 물론 당연히 먹튀까진 아니다 뿐이지 돈값을 잘 했다고는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그런데 말입니다. 훗날 두산에서 7년 57억[33], 3년 27억[34], 4년 65억[35], 4년 115억짜리 먹튀들이 튀어나오면서 2024년 기준 홍성흔의 4년 31억 계약이 졸지에 전화위복이 되어버렸다.
5. 국가대표 경력
5.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당시 경희대학교 4학년이던 홍성흔은 아마추어 신분으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출전한 1기 드림팀이었다.이 대회에서 홍성흔은 이미 프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성, 진갑용에 밀려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본 대회에서 사상 첫 금메달 획득에 성공하며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5.2. 1999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
김동수의 백업포수로 대회를 시작한다. 당시 주전포수였던 김동수가 대만전에서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마지막경기 일본전에서는 홍성흔이 포수마스크를 쓰고 선발출전한다.일본전 당시, 공격에서는 큰 활약이 없었지만,[36] 대신 구대성의 6타자 연속삼진을 이끌어내는 등 수비에서 공헌했고, 한국대표팀도 일본전에서 승리[37]하면서 본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38]
5.3. 2000 시드니 올림픽
1998년과 1999년, 2년연속 백업포수로 국가대표를 경험한 홍성흔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대회 도중 팀의 주전포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원래 주전포수로 낙점받았던 박경완이, 한국팀의 2번째경기인 호주전에서 골반에 타박상을 입는 바람에, 그 이후부터 홍성흔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한국팀의 전경기에 선발출전한다.[39]당시 (최약체팀인 남아공전을 제외하면) 공격에서는 큰 활약이 없었던 점은 아쉬웠지만,[40] 대신 대회내내 포수로써 화이팅넘치는 플레이로 한국야구의 올림픽 첫메달에 기여한다.
5.4.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한국의 금메달에 기여한다.5.5.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미 한국 최고의 공격형 포수이자 KBO 리그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홍성흔은 야구 유일의 메이저 국제대회인 WBC에 역시 참가했다. 비록 이 대회에서 조인성, 진갑용에 밀려 백업 포수로서 활약했지만 대한민국이 최종 3위를 기록하며 영광을 함께했다.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대회 첫 경기인 대만전은 홍성흔이 가장 눈에 띈 활약을 한 경기였다. 이 날 홍성흔은 6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전하여 3타수 2안타(2루타), 1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3년전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대만 진 빚을 완벽히 갚아주는 순간이었다.
대만전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홍성흔은 이후 경기들에서 중용받지 못했다. 대만과 달리 일본, 멕시코, 미국 등의 팀들이 대한민국보다 수준이 높은 팀이었기에 수비력이 더 안정적인 진갑용, 조인성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홍성흔은 1라운드 3차전 일본전 경기 중간에 교체로 투입되어 1타수 0안타를 기록했고, 일본과 다시 만난 4강전 대수비로서 경기를 뛴 이후 대회를 마무리했다.
6. 은퇴식과 은퇴 후
박찬호의 소개로 2017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루키 팀의 인턴 코치를 맡고 있다.본인의 데뷔 시절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은퇴식을 치르는 장면 |
본인이 제일 오래 몸을 담았던 두산 측에서 선뜻 성대한 은퇴식을 마련해주었다.
홍성흔 본인으로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두산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솔직히 껄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더더욱이 이렇게 롯데와 같이 경기를 하는 시기에 은퇴식을 마련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41] 솔직히 은퇴식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은 적도 있기에 그런 부분이 인정받지 못 할 거란 생각도 했었다고. 그런데 두산에서 뛰면서 한국시리즈 우승[42]을 이뤘던 부분 등에 대해 내 기여를 더 인정해 주셨던 것 같아 감사한 마음 뿐이다라며 두산 구단과 두산 베어스 팬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은퇴식을 위해 일시 귀국, 2017년 4월 30일 잠실 야구장에서 2009 시즌부터 4년간 몸담았던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 전에 공식 은퇴식을 치렀다.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딸 화리, 아들 화철이 각각 시구와 시타를 담당하고, 본인은 시포를 했다. 하지만 두산 베어스는 롯데 자이언츠에게 6:0으로 패했다. 또한, 이날 은퇴식의 일환으로 홍성흔이 카퍼레이드를 하였다. 1루 두산 홈 관중석 쪽부터 시작하여 3루 롯데 관중석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두 팀 팬 모두 팀 명만 다른 똑같은 응원가를 각자의 응원석 측으로 갈 때 불러 주었으며[43] 몇몇 팬들은 기립해 박수를 보내기도 하며 역시 양팀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선수 중 한명임을 알 수 있었다.
7. 수상 경력
7.1. KBO
|
|
홍성흔의 KBO 수상 경력 | |
1999 | KBO 신인상 |
2001 | 한국시리즈 우승 /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 골든포토상 / 동군 올스타(베스트10) |
2002 | 동군 올스타(베스트10) |
2004 |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 최다안타 1위 / 준플레이오프 MVP / 동군 올스타(베스트10) |
2005 | 동군 올스타(베스트10) |
2006 | 동군 올스타(베스트10) / 미스터 올스타 |
2008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2009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
2010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 미스터 올스타 |
2011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
2012 | 이스턴 올스타(베스트10) |
2015 | 한국시리즈 우승 |
7.2. 국가대표
|
|
홍성흔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상 경력 | |
1998 |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1999 |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
2000 |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
2002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2006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위 |
7.3. 기타
홍성흔의 기타 수상 경력 | |
2009 | 한국페어플레이상 남자 개인 부문 |
2010 |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 타자상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타자상 |
2011 | 제12회 대한민국영상대전 포토제닉상 스포츠 부문 |
8. 연도별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홍성흔의 역대 KBO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1999 | 두산 | 111 | 392 | 91 | 14 | 1 | 16 | 63 | 47 | 3 | 22 | 61 | .258 | .304 | .439 | .743 | 78.8 | 1.72 |
2000 | 127 | 484 | 127 | 13 | 2 | 10 | 59 | 55 | 10 | 32 | 50 | .290 | .340 | .397 | .737 | 91.0 | 2.96 | |
2001 | 122 | 452 | 109 | 18 | 1 | 8 | 48 | 50 | 9 | 26 | 53 | .267 | .318 | .375 | .693 | 73.5 | 1.72 | |
2002 | 127 | 484 | 125 | 17 | 0 | 18 | 70 | 51 | 5 | 37 | 63 | .289 | .350 | .454 | .804 | 115.9 | 4.18 | |
2003 | 73 | 263 | 70 | 12 | 0 | 7 | 36 | 20 | 2 | 15 | 44 | .290 | .326 | .427 | .753 | 97.4 | 1.65 | |
2004 |
133 (1위) |
552 |
165 (1위) |
27 | 2 | 14 |
86 (5위) |
62 | 10 | 36 | 70 |
.329 (3위) |
.384 | .475 | .859 | 135.7 |
6.17 (4위) |
|
2005 | 115 | 433 | 107 | 17 | 0 | 11 | 74 | 41 | 2 | 29 | 57 | .272 | .324 | .398 | .723 | 97.2 | 2.68 | |
2006 | 119 | 424 | 112 | 16 | 0 | 10 | 56 | 36 | 1 | 26 | 49 | .287 | .337 | .405 | .742 | 117.8 | 3.65 | |
2007 | 80 | 274 | 62 | 11 | 0 | 5 | 39 | 21 | 0 | 26 | 29 | .268 | .354 | .381 | .735 | 105.7 | 1.87 | |
2008 | 114 | 460 |
140 (4위) |
19 | 2 | 8 | 63 | 45 | 8 | 25 | 35 |
.331 (2위) |
.370 | .442 | .812 | 125.3 | 2.38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09 | 롯데 | 119 | 487 |
158 (4위) |
33 (1위) |
0 | 12 | 64 | 71 | 9 | 49 | 55 |
.371 (2위) |
.435 (5위) |
.533 | .968 | 155.4 | 4.19 |
2010 | 111 | 498 |
151 (2위) |
28 | 1 |
26 (4위) |
116 (2위) |
88 (3위) |
2 | 54 | 49 |
.350 (2위) |
.427 (3위) |
.601 (2위) |
1.028 (2위) |
171.9 (2위) |
5.15 (4위) |
|
2011 | 132 | 535 | 145 | 24 | 2 | 6 | 67 | 70 | 2 | 53 | 80 | .306 | .376 | .403 | .779 | 121.6 | 2.13 | |
2012 | 113 | 443 | 114 | 20 | 0 | 15 | 74 | 48 | 4 | 47 | 83 | .292 | .369 | .459 | .828 | 140.8 | 2.71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13 | 두산 | 127 | 538 |
140 (5위) |
21 | 0 | 15 | 72 | 61 | 5 | 57 | 93 | .299 | .379 | .439 | .819 | 126.9 | 2.60 |
2014 | 124 | 521 | 141 | 19 | 1 | 20 | 82 | 63 | 5 | 64 | 79 | .315 | .405 | .497 | .902 | 137.7 | 3.31 | |
2015 | 93 | 352 | 79 | 12 | 0 | 7 | 46 | 39 | 8 | 42 | 59 | .262 | .362 | .372 | .734 | 97.7 | 0.09 | |
2016 | 17 | 45 | 10 | 2 | 0 | 0 | 5 | 4 | 0 | 5 | 9 | .250 | .333 | .300 | .633 | 65.7 | -0.15 | |
KBO 통산 (18시즌) |
1957 | 7637 | 2046 | 323 | 12 | 208 | 1120 | 872 | 85 | 645 | 1018 | .301 | .366 | .444 | .810 | 117.4 | 49.04 |
[1]
홍성흔은 당시 국가대표로 뽑혔던 야수들 중에서는
신명철이나
강봉규에 비해 살짝은 낮은 평가를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이 둘보다 월등한 커리어를 쌓았다. 한편 신명철과 강봉규는 오랫동안 유망주 딱지가 붙어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뒤늦게 만개하는 듯 했으나 사실 이 두명의 20-20은 1년 반짝 수준이었고 결국 백업행과 방출행.
[2]
첫번째 신인왕 포수는 1990년
김동수.
[3]
01년 박경완는 MLB 이반 로드리게스 이후 세계 야구 역사상 두번째로 포수로써 20홈런 20도루를 기록하는 대업을 세웠고, 04년은 포수로써 무려 OPS 10에 34홈런을 치며 홈런왕까지 차지했다. 그에 반해 홍성흔은 리그 2위의 포수 자리도 간당간당한 성적임이 명백했으니... 세이버매트릭스로 보면 더욱 심각한데, 박경완과 홍성흔의 01, 04시즌 wRC+, sWAR을 각각 비교한다면 01년 123.7, 5.32 - 73.5, 1.72/ 04년 177.9, 8.36 - 135.7, 6.17이다. 박경완의 2004년 시즌은 브룸바와 함께 리그 sWAR 1위(WAR 기준 0.1 이하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이 아니다.)이자 포수 단일시즌 WAR 1위이었는데 MVP 수상은 고사하고 골글마저 빼앗겼다! 세이버 스탯이 현장에서마저 생소했던 데다 클래식 스탯 및 타이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니만큼 04년의 경우 포수 최초 최다안타 타이틀이 표심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하며, 여기에 01년의 경우 홍성흔보다 출장경기 및 공격기록이 더 나은 선수가 박경완 말고도 롯데 최기문까지 있었지만, 롯데의 성적이 꼴찌였던 반면 두산은
역대급 업셋 우승을 이뤄냈고, 현대는 그 업셋의 희생양 중 하나가 되었던 부분이 표심에 영향을 미친 골든글러브라고 할 수 있다.
[4]
이 시즌에는 투고타저 시즌 속 최고의 타격 능력을 지녔던 박경완이 크게 부진하는 바람에 포수로서는 클래식, 세이버 성적이 가장 뛰어났으나 삼성
진갑용의 우승 프리미엄으로 골든글러브는 수상하지 못했다.
[5]
그래도 기능에 손상은 없었던 모양인지 이 부상 이후에 화철이를 가지게 됐다고.
[6]
물론 단독 도루는 아니고 풀카운트 상황에서의 히트&런 작전이었던 상황에서 잡지 못한 것이었는데, 공이 안 좋게 왔고 타자가 스윙하면서 방해했다곤 해도 홍성흔 자신도 충분히 주자를 잡을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황당해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긴 했다.
영상 2회부터 보면 된다.
[7]
이후 방송에 출연해서 블래스 신드롬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8]
사실
김경문 감독 부임 이후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김경문 감독의 부임 첫해인 2004년, 홍성흔은 2003년에 당했던 부상 후유증으로 경기의 절반 가량은 지명타자로 나서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찍게 되고 3년 만에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후 포수로서 경기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고 2006년 시즌 후에는 발목수술을 받았다. 주전 포수가 경기에 꾸준히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홍성흔의 타격 재능이 부상에 발목잡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김경문 감독은 홍성흔에게 지명타자 전향을 제의한다. 구체적인 제안은 2006년에 이미 있었으나 홍성흔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9]
실제로 홍성흔은 2008년에 다시 포수 복귀를 타진하였고, 이 문제로 인해 김경문과의 관계가 많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스토리는 결국 홍성흔이 FA를 통해 롯데로 이적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10]
이 때문에 전지훈련도 못 가서 학교 등지에서 홀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11]
이미 포수로 전성기가 끝난 홍성흔을 주면서 10승 투수를 원했다는 카더라가 무성했다.
[12]
포수로 복귀 첫 경기 상대가 당시
정근우를 비롯해 달리는 야구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SK였는데 도루 저지를 두번이나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말도 나왔지만 그 경기 다음부턴 역시나 도루 5개를 허용했다. 그 중 2번이 발이 빠르지도 않은
이범호.
[13]
2009 시즌 이 세 타자는 모두 3할5푼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14]
물론 반론도 있다. 병살타로 악명높았던 이도형은 그 후로도 공인된 뜬금포였고
진갑용은 두산에서 내쳐질때만해도 수비 잘하는 포수가 아니었다. 지금의 강민호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전부 젊은 시절
진갑용이 지적받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진갑용은 삼성에서 약을 빨고서야 만개했다
[15]
엄밀히 말하면 표면상의 액수. FA 제도가 이상한 덕분에 벌어지는 촌극인데 절대로 저 연봉일리가 없다.
[16]
정황상 홍성흔이 배신을 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FA 시장에서 과하게 짠손으로 통했던 두산의 계약조건이 너무 낮았다는게 중평.
[17]
롯데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구단측과 마찰이 있었고,
김경문 당시 감독, 김현수를 깎아내리는 태도로 인해 두산 베어스 팬들은 이적 후 홍성흔을 흑역사 취급 중. 그리고 다시 두산으로 돌아온 뒤 까임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우승을 해도.
[18]
다만 롯데에서 홍성흔과 정수근의 공존은 실질적으로 1년도 채 못돼서 끝났다. 2009년 시즌 중 정수근이 음주 난동으로 불명예 은퇴했기 때문이다.
[19]
영입 확정한 그날 새벽에 열혈 롯데 팬이 작곡하고 미디찍고 보컬넣어서 완성해서 올렸다. 롯데의 홍성흔 오오오오~ 홍성흔 오오오오~ 라는 가사. 경기장에서 다 같이 부르기에는 좀 빨라서 응원단장이 <What's Up>에 입힌 홍~성~흔~ 홍~성~흔~ 화이팅! 롯데의 홍성흔!으로 바뀌었다.
[20]
결국 10 시즌에는 장타 포텐셜까지 터뜨린다.
[21]
물론 타자 FA로서 성공한 케이스는
정성훈.
이진영,
최준석 등도 있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홍성흔만큼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고, 홍성흔과 달리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지 못했다.
[22]
2016년 시즌에
KIA 타이거즈의
김주찬이 데뷔 후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홍성흔에 이은 2호 이적생 FA출신 골든글러브를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긴 했다.
[23]
양의지가 19~22시즌 4년 누적 sWAR 23승을 넘기며 역대 최고의 영입 타이틀은 그에게 넘어갔으나, 그게 홍성흔의 롯데 4년을 비하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경제적인 논리까지 따진다면 금액대비 최고 영입이다.
[24]
근데 이타점이
어느 미친페이스를 달리던 팀의 규정타석 타율꼴찌인 포수보다 1타점이 더 적다. 심지어 둘의 홈런갯수는 같다.
[25]
다만 이 수상 또한 잠실에서 역대급 타격기록을 세웠던
로베르토 페타지니를 제끼고 받았는지라 말이 많다. 물론 당시엔 세이버매트릭스에 기반한 기록계산이 없던 시절이라 그리 논란이 되지 못하고 묻혔지만, 현 시점에서 공격기록을 계산해보면 이 당시 리그에서 나름 뛰어난 타자였던 홍성흔과 달리 페타지니는 wRC+ 172.9를 기록하면서 리그 MVP였던
김상현보다도 높은 wRC+를 기록하는 등 손색없는 훌륭한 기록을 냈기 때문.
[26]
반대로
최형우와
최진행은 적절한
핵우산을
얻었다.
[27]
FA로 NC로 이적한
양의지가 4시즌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홍성흔은 롯데에서 못 한 우승까지 달성했으니 기록상으로는 홍성흔보다 우위에 있지만 애초에 계약 금액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다만 10년 사이 FA 몸값이 급상승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28]
보장 22억 원, 옵션 3억 원
[29]
애초에 모기업이 없는 구단 특성상, 홍성흔을 저 가격에 영입할 이유는 없다.
[30]
다만 김동주가 은퇴할 때, 팀케미 관련 구설수를 남기면서, 이 영입은 재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팀의 구심점을 다지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선택이였다는 평이 대다수. 아마 이 시점에서 김 감독과 두산 프런트는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김동주를 버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1]
이루 김승회는 2016년
윤길현의 보상선수로 SK로 간 뒤에 2017년 두산으로 다시 돌아와 2019년에서야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홍성흔이 4년 30억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는데 윤길현은 4년 38억으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9년 윤길현이 방출되고 홍성흔은 부전드 그 자체가 되었으며 김승회는 두산에서 생애 첫 우승반지를 끼우게 되었다.
[32]
애초에 두산이 구단 특성상 FA를 잘 영입하지 않는 편이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몫 한다. 2023년까지도 두산의 외부 FA 영입은
장원준이 유일하다.
양의지는 홍성흔과 마찬가지로 리턴 픽이니 제외.
[33]
정확히 말하자면 1차 4년 38억, 2차 3년 19억.
그리고 이 마약범은 7년 중 6년을 모조리 공치며 장렬하게 산화해버렸다.
[34]
그나마 FA 이전인 2015년에 팀이 우승하는 데 큰 공헌을 했고, 계약이 만료된 이후인 2020~2021년에 연봉 5천~1억 받고 반등에 성공해서 두산 팬들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35]
정확히 말하자면 4+3년 85억이나
돈을 더 받고 싶어 본인 손으로 옵션인 3년 20억 계약을 깨고
타 팀으로 이적했다. 물론 4년 계약 기간동안 저 셋에 비하면 좋은 성적을 내긴 했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돈값을 잘 했다곤 보기 어렵다.
[36]
7회 볼넷으로 출루한 후, 득점까지 성공하는 장면은 있었다.
[37]
5대3 승리.
[38]
참고로 이 대회는 이듬해
시드니 올림픽 출전티켓이 걸린 대회이기도 했다. 아시아티켓은 2장이었고, 한국과 일본이 동반 진출에 성공한다.
[39]
대표팀이 치른 총9경기 중 8경기에 출전했다.
[40]
예선 마지막경기였던 남아공전에서 홈런 포함 4타수 3안타 3타점의 맹타를 휘두른다.
[41]
본인은 선수 시절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롯데 자이언츠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롯데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러준 것에 진심으로 감격했다고 한다.
[42]
2001년과 2015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있었다.
[43]
사실 두산 복귀 후 롯데 시절 응원가를 가지고 온거라 롯데 ←→ 두산 단어만 바꾸면 나머지 가사는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