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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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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나우두의 국가대표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
호나우두가 월드컵에서 넣은 15골 모음[1]
국가대표 커리어 끝판왕

전세계를 통틀어서 FIFA 월드컵에 4번 이상 출전했던 축구선수는 절대로 흔하지 않다. 특히, 재능이 넘치는 인재들이 마르지 않는 브라질 출신의 축구선수라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브라질 축구 선수 중에서 4번이나 FIFA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는 호나우두를 포함해 펠레, 자우마 산투스, 니우통 산투스, 에메르송 레앙, 카푸, 카스티뉴, 티아고 실바로 단 8명 뿐이다.

심지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해서 다른 국가로 귀화를 한 뒤 국가대표로 뽑히는 브라질 출신 축구선수들이 많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페페, 데쿠. 그리고, 스페인 디에고 코스타 마르코스 세나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잘 보여주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2. 1994 미국 월드컵

파일:호나우두 1994 월드컵 트로피.jpg
1993년 12월에 국가대표 데뷔를 한 호나우두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카나리아 군단의 엔트리에 들었으나 베베투, 호마리우처럼 기라성같은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서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호나우두는 브라질이 토너먼트를 끝까지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2][3] 하지만, 그는 이 월드컵에서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어찌됐든 호나우두는 생애 첫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의 그는 잠시 호나우지뉴(Ronaldinho), 즉 '작은 호나우두'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동명의 수비수 호나우당(Ronaldão, '큰 호나우두')이 대표팀에 있었기 때문이다.[4]

더불어, 당시 국내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영어 발음인 로날도라고 불렀다.

이때 월드컵 우승을 하고도 어쩔 수 없이 사임해야 했던[5]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최고의 유망주인 호나우두 선수를 왜 한번도 월드컵에 출전시키지 않은 거죠?
그러자 파헤이라 감독은 대답했다.
저 선수는 앞으로 4년 후에 열릴 월드컵에서 최고의 선수로 주목받을 겁니다. 이 어린 선수의 불꽃이 너무 빨리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파헤이라 감독의 예상이 적중한 것일까? 호나우두는 이후 대표팀에서 그 찬란했던 불꽃을 활활 태워버린다.

3. 1995 코파 아메리카

호나우두의 코파 아메리카 첫 대회.

당시 그룹 B조 2차전에서 에콰도르를 만나 10분 교체 출전으로 나온다. 이 대회에서 유일한 출전 경기이며 브라질은 이번 대회 결승전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1:1로 종료된 채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1경기

4.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파일:external/images.askmen.com/ronaldo-interview_1335519896.jpg
이 당시까지 호나우두는 호나우지뉴로 불렸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주전 스트라이커로 출전, 브라질, 헝가리, 나이지리아, 일본으로 구성된 D조에 소속되어 꿀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카타 히데토시가 이끌던 황금세대 일본과의 첫 경기, 브라질은 파상공세를 퍼붓고 이에 경기 내내 브라질 아나운서가 매우 찰진 음성으로 골키퍼 까와~구치를 연호할 정도로 일본은 힘든 경기를 펼치나 실점만은 기어코 막아낸다. 끝내 포백에 더블 볼란치로 단단하게 정비한 일본의 골문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브라질의 골문이 열리며 1:0로 아시아팀에 최초 패배. 이후 경기에서 호나우두는[6] 헝가리 상대로 선취골을, 나이지리아 상대로도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넣는다. D조는 승점셔틀이었던 헝가리를 제외한 일본, 나이지리아, 브라질은 서로 6점을 기록하게 되고 브라질은 득실차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올라간다.[7]

가나와의 8강전에서 호나우두는 2골을 넣으며 승리를 이끌었고, 검은 돌풍 나이지리아와 4강에서 다시 한 번 맞붙으며 희대의 명경기를 연출한다. 브라질은 시작하자마자 콘세이상의 수비벽 맞은 행운의 프리킥이 터지며 경기를 리드한다. 허나 나이지리아의 공세 앞에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자책골이 터지며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동점이 되기가 무섭게 골키퍼가 펀칭한 호나우두의 슈팅을 베테랑 베베투가 주워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닝요의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콘세이상이 득점으로 연결하며 승부는 기운 듯 보였다. 허나 경기 내내 공격적이고 소울 넘치는 아프리카 축구로 일관한 나이지리아는 역습의 역습으로 멋진 추격골을 터트리고, 기세를 이어 브라질을 몰아붙이며 90분에 롱 스로인에 이은 문전 혼전 상황에서 은완코 카누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는 연장까지 간다. 이후 길게 갈 것도 없이 연장전 4분 만에 환상적인 등짝 패스를 받아 은완코 카누가 역전 골든 골을 터트린다.[8]

3·4위전에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을 맞아 5:0으로 분풀이를 한다. 호나우두는 선취골을 기록하며 동메달을 차지한다.
6경기 5골

5. 1997 코파 아메리카

파일:hqdefault (7).jpg
주요 성인 대회에서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1997년도 볼리비아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였다. 조별 리그 첫 경기였던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5:0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건 그저 몸풀이에 불과했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개인기로 상대 수비를 농락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팀은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을 거두고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만난 파라과이를 상대로 전반 9분 선제골, 34분 추가골을 혼자 몰아넣었고 팀도 2:0으로 승리해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에서는 브라질이 페루를 호나우두의 득점 없이도 7:0으로 짓밟았고 결승에서는 개최국 볼리비아를 상대로 호나우두가 결승골을 넣으며 3:1로 승리, 5번째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은 6경기에 3골만 먹히고 22골을 몰아넣으며 가볍게 전승우승을 거뒀고, 호나우두는 볼리비아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고 파라과이와의 8강에서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에게 페널티킥을 막히며 아쉽게 해트트릭을 실패하는 등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5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그리고 대회 MVP 및 결승전 MOM도 차지했다.[9] 또한 호나우두는 이 대회에서의 활약상과 클럽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1997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하였다.
6경기 5골 1어시스트

6. 1997 투르누아 드 프랑스[10]

1998 프랑스 월드컵의 전초전 형식으로 치러진 4개국 초청대회에 호나우두도 다시 브라질 대표팀으로 참가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컨페드컵의 성격을 띄었으나 당시 컨페드컵이 대륙간컵이라는 이름으로 사우디에서 열렸던 관계로 친선경기로 분류된다. 참가팀은 브라질, 이탈리아, 잉글랜드, 프랑스였는데 원래는 이탈리아 대신 독일이 출전하기로 되었으나 갑작스런 불참의사 통보로 이탈리아가 대신 참가한다.
파일:호나우두 양옆 태클.jpg
이탈리아전때 찍힌 사진이며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가 양쪽에서 태클이 들어오는 게 인상적이다.

대회에 참가한 4개국 모두 우승후보로 분류되는 팀들이라 매경기 매경기가 흥미진진의 연속이었다. 대회는 잉글랜드가 2승 1패로 우승. 잉글랜드에 저 1패를 안긴 팀이 바로 브라질이다. 브라질은 첫경기와 두번째 경기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잉글랜드를 잡아내면서 유일한 무패팀으로 대회를 마감한다. 데뷔 후 A매치 전승 (1997년 4월 노르웨이전 패배 제외)을 이끌고있던 호나우두- 호마리우 콤비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팬들은 기대했었지만 정작 이 대회의 최고 브라질 스타는 데니우손이었고, 호나우두는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 전에서만 1득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3경기 1골

7. 1997 컨페더레이션스컵

12월에 열린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브라질은 5경기 4승 1무, 12골을 넣고 난적 멕시코에게만 2점을 내주며 당연한 듯 우승한다. 특히 호주와의 결승전은 결승전인지 양학의 현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브라질이 시종일관 호주를 썰어대며 6:0의 참극을 만들어냈다.

23분경 호주의 스트라이커 마크 비두카 카푸에게 장절한 로우킥을 날리며 퇴장당한 이후 호주는 아무것도 못했고, 이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와 사이 좋게 3골씩 해트트릭을 기록한다. 호나우두는 대회 총 4골을 넣었지만 조별리그에서는 무득점에 그쳤던데다가 동료 스트라이커였던 호마리우가 득점왕과 실버볼을 차지한 것에 비해 4골로 브론즈슈를 차지하며 살짝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11]
5경기 4골 2어시스트

8. 1998 프랑스 월드컵

파일:1998 호나우두 네덜란드전.jpg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호나우두는 고속 성장을 하면서 세계 축구계 최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때 동안 호나우두는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까지 석권하며 남은건 월드컵 뿐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만 21세의 호나우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월드컵 직전에 지난 월드컵의 영웅이자 호나우두와 환상적인 신/구조합을 보여줄거라 기대되던 호마리우의 다리에서 꽤 큰 부종이 발견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투톱을 이룰 예정이었으나 호마리우가 엔트리에서 탈락되었고, 호마리우가 나간 자리에는 베베투가 들어왔다. 그러나 베베투 역시 지난 월드컵에서 호마리우와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명선수였고 또한 파트너가 바뀌었다 해도 호나우두의 괴물같은 기량이 바뀌는건 아닌지라 이 시절의 호나우두는 정통 9번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라인 브레이킹과 골사냥에만 집중한게 아니라 넓은 활동범위에서 단독 드리블 돌파로 수비벽 균열내기, 공간창출 등 교과서적인 크랙(crack)의 모습을 보여줬고 거기에 상당히 이타적인 연계 플레이까지 선보이며 대회 기간동안 4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시절 호나우두의 플레이 스타일은 현대의 스트라이커 중에선 전성기의 수아레스가 가장 닮은 모습을 보인다. 수아레스 역시 스트라이커임에도 넓은 활동폭과 강력한 단독 드리블 파괴력, 인간이 아니라 짐승을 풀어놓은 것 같은 운동능력으로 명실상부 201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대다수 전문가가 인정하고 있는데, 이 시절 호나우두의 플레이는 이 수아레스의 각 능력치들을 더욱 버프먹인 수준이었다.[12] 실제로도 역대 축구선수 순위에서 호나우두는 10위권 정도에 위치하지만,[13] 전성기의 임팩트와 고점 기량으로 따질때 만큼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뛰어나고[14] 거의 메펠마 삼대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자주 보일 정도다.[15]
파일:호나우두 달리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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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호나우두 모로코전 골.gif|width=100%]]
그는 조별리그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고, 칠레에 4:1로 승리한 16강 경기에서 3, 4번째 골을 넣었다. 그리고 덴마크와의 8강 경기에서는 득점은 없었지만 2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파일:호나우두 내덜란드전 골 1.jpg
특히 1:1로 비겨 승부차기로 브라질이 진출한 네덜란드와의 4강 경기에서 나온 황금 같은 선제골은 호나우두이기에 가능했던 골이었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최전방 공격수를 제외하고 1:8~9 정도의 경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홀로 고군분투했다. 게다가 승부차기에서도 첫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키면서 브라질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파일:멘붕에 빠진 호나우두.jpg
하지만 결승전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브라질의 에이스였던 호나우두가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 알려지고, 전 세계는 이에 충격에 빠지게 된다. 마침내 호나우두가 다시 명단에 들어온 것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해 사람들은 행정상의 실수이었다는 둥 아니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둥 여러 말이 나오게 되고 마침내 결승전이 시작하지만 별 활약을 못 보여준 것은 물론 도중에 파비앵 바르테즈와 박아버리며 아예 페이스가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지단의 프랑스에 3:0으로 패배하며 우승컵을 넘겨준다. 호나우두는 결승전 내내 최악의 컨디션 때문이었는지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하며 패배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결승전이 시작하기 전 골든볼을 선정하였고 또 결승전의 부진을 감안하더라도 결승까지 이끈 공로가 사라지진 않기에 호나우두는 골든볼을 수상한다.[16][17]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허무한 패배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가장 유행하던 찌라시는 호나우두가 진통제를 맞아가며 모든 힘을 쏟아 승리한 네덜란드 전의 피로와 만 21세의 나이에 전 세계 이목의 집중을 받는 심리적 스트레스 때문에 심한 간질 증세를 보였고, 뛰어서는 안 되는 상태였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승전 하루 전, 호나우두는 여느 때처럼 숙소의 TV 앞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파라소니아[18] 증상으로 인해 나타난 수면 중 몸을 떠는 현상[19]이 룸메이트였던 호베르투 카를루스에게 발견되었고, 이 장면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대표팀이 머물던 호텔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열 명 정도 되는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그 중 세자르 삼파이우는 호나우두에게 간단한 응급처치를 해 주기도 했다. 이런 것은 팀 닥터였던 리디우 톨레두조차 처음 보는 증상이었기 때문에, 그는 호나우두가 수면 중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라 진료 카드에 '수면 중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를 일으킴'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사실 평상시와 다름없는 괜찮은 상태였고 오히려 호나우두가 침대 위에서 거품을 몰던 모습을 봤던 선수들이 정신이 산만해졌다.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과장된 설명과 의사의 진단 때문에 선수들은 호나우두를 매우 걱정했고, 잠에서 깬 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오히려 신기해했다. 선수들이나 코치진 중 아무도 잠에서 깨어난 호나우두에게 낮잠 자는 동안 일어났던 일을 말하지 않았고 호나우두 자신만 모른 채 경기가 진행되었다. 호나우두는 이 날의 일에 대해 회고하였는데, 점심 식사 후 오후의 회의에서 호나우두가 갑자기 3~4분간 의식을 잃었고 의사는 호나우두를 따로 불러 호나우두가 경련을 일으켰다고 설명하며 결승전 경기에 뛰면 안된다고 말했다 한다. 이 의문의 경련 혹은 발작의 원인은 아무도 모르지만, 호나우두 본인은 압박감이나 긴장이 원인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데이비드 옐롭의 저서인 '누가 월드컵을 훔쳤나'와 조르제 칼데이라의 '호나우두, 한 축구영웅의 시련과 영광의 드라마'같은 책들을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심정을 결승전이 끝난 며칠 후 호나우두는 "브라질 국민 전체가 나에게 기대 오는 것만 같았다" 라고 부담감을 토로한다. 이후 호나우두는 수많은 테스트를 했지만 결론을 얻지 못했고, 모든 팀원들이 호나우두의 발작으로 인해 충격에 빠지며 그들을 결승전으로 이끌던 자신감을 잃고 만다.

일반적으로 경기를 위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호텔을 나설 경우 흥 많은 선수들이 사방에 음악을 가득 틀어놓곤 하지만, 그 날 팀버스에 음악은 없었으며 모든 팀원들이 호나우두에 대해 물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후 호나우두가 결승전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도 숱한 음모론이 나왔는데, 가장 힘을 얻는 것이 당시 스폰서였던 나이키의 출전 압박으로 경기 시작 직전에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출전조항은 있었다고 하나, 나이키는 선발 명단에 압박을 넣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부인하고 있다. 단, 당시 감독이었던 마리오자갈로는 호나우두를 제외하고 대신 백업멤버 에드문드를 내보내려 했으나 호나우두 본인이 경기에 뛸 것을 고집했기에 나이키가 나가기 싫어하는 호나우두를 협박해서 억지로 나가게 했다는 주장은 그 어떤 기사나 칼럼에서도 구체적인 증거와 사실확인을 찾아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호나우두 출전조항이 있었다는걸 근거로 삼기에는 출전조항은 원래 스폰서들 대부분이 스폰 해주는 조건으로 넣는거고 오히려 호날두의 경우에는 출전조항이 있는데도 계약 어기고 노쇼해서 아직까지도 욕먹는다. 고로 출전조항을 나이키가 호나우두 협박해서 억지로 뛰게 한 근거로 쓰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상술했듯 오히려 호나우두 본인이 결승전에서 뛰고 싶어서 감독이 말리는데도 출전을 고집했다 라는 거야말로 현재까지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이다. 굳이 음모론을 믿고 싶다면 차라리 프랑스가 호나우두 팀닥터 매수해서 컨디션 망가뜨리는 약을 넣었다는게 차라리 더 신빙성 있다. 실제로도 출전여부 자체는 호나우두 본인이 뛰고 싶어서 나간걸로 명확하게 사실이 밝혀졌지만 왜 컨디션이 박살난지는 본인도 그땐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아직도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폼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던 선수가 갑자기 다음 경기에서 확 꼴아박거나 리그 옮기고 먹튀로 전락하는 등의 현상은 딱히 드문 일도 아니다.

당사자인 호나우두가 밝힌 결승전 명단에 포함된 정황은, 호나우두의 발작으로 인해 호나우두 대신 에드문두가 결승전 명단에 포함되고 이에 뒤늦게 경기장에 도착한 호나우두는 당시 감독이었던 마리우 자갈루에게 "제발요. 저는 뛰어야 해요. 아무 문제도 없대요. 병원에 갔었는데 모든게 괜찮대요. 이건 결승전이잖아요. 나는 괜찮아요. 문제 없다구요"라고 말했고 이에 자갈로는 의사의 전화를 기다렸으나 그 포함 어느 누구도 아무 얘기가 없었고, 호나우두에게 괜찮겠더고 묻자 그는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구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즉 나이키가 몸이 아픈데도 억지로 출전했느니 뭐니 하는 소리 역시 호나우두 본인의 회고에 의해 반박되는 찌라시에 불과하다.

아무튼 호나우두가 출전하게 되면서 브라질 선수들은 에드문두와 함께 코너킥, 코너킥 수비, 수비, 맨마킹을 함께 준비했지만 이를 바꾸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고, 이로 인해 지네딘 지단이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딩으로 두 골을 넣으며 호나우두 대신 최후의 승자가 되고 만다.

호나우두에게는 이 결승전이 두고두고 안타까울 것이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브라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이어지는 2002년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로 우승했다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전무후무한 월드컵 3연속 우승(1994-1998-2002)을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호나우두는 이 세 번의 우승에 모두 개근한 주역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월드컵에서 3회 우승한 선수는 오직 '축구 황제' 펠레 뿐이다. 하지만, 그 펠레마저도 3연속 우승은 하지 못하였다.[20]

Castrol Index에서 1998년 전 포지션 통틀어 11위, 포워드론 1위를 했다. 점수는 9.20을 받았다.
7경기 4골 3어시스트

9. 1999 코파 아메리카

파일:external/stirile.rol.ro/ronaldobrazil.jpg
1997년 대회에 이어 1999년에 열린 파라과이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브라질은 6경기 전승, 17골 2실점을 기록하며 최종 보스로 군림했다. 첫 경기부터 베네수엘라에게 7:0으로 악몽을 선사했고 결승전도 3:0 스코어로 우루과이를 요리하며 손쉽게 우승했다.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호나우두 히바우두는 사이 좋게 5골씩을 넣고 득점왕도 나눠 먹었다. 다만 대회 MVP는 히바우두가 가져갔다.
6경기 5골 1어시스트

10. 2002 한일 월드컵

파일:2002 호나우두 독일전.jpg
멈추지 않는 상승세였지만, 상술했듯 호나우두는 1999년 말부터 시작해 2년이 넘는 기간을 부상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정말 불사조처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딱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점에서 부상에서 회복한다. 호나우두에게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브라질이 월드컵 역사상 최악으로 꼽혔던 남미 예선을 힘겹게 통과하고 맞이한 월드컵에서 호나우두는 기자들 앞에서 호기롭게 '전 경기 득점'을 공약으로 내세웠고[21][22], 조별리그 첫 경기 터키 전부터 시작하여, 중국, 코스타리카, 16강전 벨기에, 4강전 (다시) 터키, 결승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잉글랜드와 치른 8강전에서만 득점 실패), 총 8골로 득점왕과 함께 실버볼, 그리고 이 활약에 힘입어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23] 특히 그리고 결승전에서 상대편인 독일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 넘어져있을때 일으켜 세워준 행동으로 인해 스포츠맨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파일:호나우두 2002 결승 1.gif
파일:호나우두 2002 결승 2.gif

사실 2002년 월드컵의 호나우두는 이미 두번의 슬개건 부상으로 인해 역동적인 운동능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고, 지금 와서는 황금 스쿼드라 찬양하지만 사실 당시에는 예선에서 브라질 국대의 경기력이 그다지 좋지않아 최후의 승자가 브라질과 호나우두가 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96~98 시절의 날뛰는 야생마 같은 퍼포먼스는 감소 했을지라도 대신 정확한 연계의 팀 플레이와 저격수 같은 결정력은 여전했다. 또한 개인기 역시 옛날처럼 서너명씩 마구 제칠 정도는 아니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여전히 박스 안에서 달라붙는 수비수 한둘쯤은 충분히 제칠 수 있었다.[24] 특히 슈팅의 정교함은 절정에 달해서 7경기 동안 겨우 28회의 슈팅을 시도해 8골이나 기록하는 탁월한 결정력으로 20년 동안 이어지던 마의 6골 득점왕 징크스를 24년 만에 깨트렸다.[25][26] 평균적으로 월드컵 득점왕들이 5~6골을 넣던 것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치. 국가대표 호나우두의 최전성기였다.
파일:호나우두 월드컵.jpg
7경기 8골

11. 2006 독일 월드컵

파일:2006 호나우두 세레머니.jpg
파일:FIFA 월드컵 워드마크 화이트.svg
FIFA 월드컵 역대 득점 순위
골 수 선수명 (국적)
16 미로슬라프 클로제 (독일)
15 호나우두 (브라질)
14 게르트 뮐러 (독일)
13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쥐스트 퐁텐 (프랑스)
12 킬리안 음바페 (프랑스)
펠레 (브라질)
11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산도르 코츠시스 (헝가리)
10 토마스 뮐러 (독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아르헨티나)
게리 리네커 (잉글랜드)
헬무트 란 (독일)
테오필로 쿠비야스 (페루)
그제고시 라토 (폴란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예선서 10골을 넣으며 남미 예선 최다 득점자가 되었으며, 본선에서는 일본 가나와의 경기에서 3골을 터뜨리며 브론즈슈를 수상, 월드컵 통산 15호골을 기록하여 쥐스트 퐁텐 게르트 뮐러 기록을 차례로 넘기며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을 세웠다. 19경기 15득점, 경기당 0.78골. 그렇지만 그후 8강전에서 지네딘 지단의 크로스를 받은 티에리 앙리의 골로 프랑스에게 0:1로 패배하며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에는 실패했다. 뱃살을 출렁거리면서도 그 와중에 골감각은 살아 있어서 어떻게든 3골 우겨넣는 모습이 웃겨서 호돈신이라는 별명이 생기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당장 아래 움짤에서도 뱃살이 출렁출렁 대는데 그 와중에 헛다리는 기막히게 쓰고 있다.
파일:2006 호나우두 가나전 골.gif
이 때 브라질 국민들 반응도 웃겼는데 월드컵 통산 최다 골을 기록했을 때 찬양 일색이던 사람들이 8강전에서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탈락하자 귀국하던 대표팀에게 한 아줌마가 "호나우두 당신은 살부터 좀 빼라"(...)고 독설을 날렸던 것.

이후 둥가 감독 체제로 바뀌고 나서는 국가대표팀과 멀어지게 되었다. 클럽에서도 하향세였다.
5경기 3골 1어시스트

12. 2011 국가대표 은퇴

2011년 6월 8일에 열린 브라질과 루마니아의 친선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전반 30분 프레드와 교체되며 세인의 경악을 자아낼 정도로 뚱뚱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35세의 전설적인 축구선수는 후배들의 아낌없는 패스를 몰아받으며 은퇴 경기를 골로 장식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골을 넣진 못했다. 후반 시작과 함께 호나우두는 마치 차세대 에이스인 네이마르에게 왕관을 물려주듯 교체되며 마지막 국대 경기를 끝냈고 그에겐 국가대표로서 통산 98경기 62골이라는 기록이 남겨졌다. 그리고 이 경기를 끝으로 그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은퇴하게 된다.

이처럼 호나우두는 클럽에서도 잘해왔었지만 국가대표로서는 자신이 출전한 거의 모든 메이저급 국가대표간 대회에서 득점왕을 하거나 MVP로 선정되는 매우 빼어난 활약을 해왔다. 짧은 전성기라서 아쉬운 클럽 커리어에 비해 국대에서의 그는 소위 GOAT를 논하는 삼대장이라 불리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에 필적하는 대활약을 하며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 게르트 뮐러의 월드컵 통산 14골 기록을 갱신한 것이며 2014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16골로 갱신했다. [2] 대회에서 1경기 1분이라도 출전한 선수에 한하여 팀 성적을 부여한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며, 출전 여부와는 관계 없이 팀 성적은 말 그대로 팀 선수단 전원에게 부여한다. 엔트리에 이름만 올리고 출전은 거의 못 하는 백업 골키퍼들(대표적으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페페 레이나 빅토르 발데스)도 결승전 이후 시상식에서 똑같이 우승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트로피 행사에도 똑같이 참가했다. 호나우두도 당연히 이 대회의 우승 멤버로 인정받았다. 벤제마 같은 경우는 아예 월드컵 열리는 나라에 가지도 않았는데 서류에 이름 있어서 준우승 멤버가 되었다. [3] 이듬해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명단에는 포함되었으나 준우승을 하는 동안 단 몇분만 출전하는 데 그친다. [4] 호나우두와 마찬가지로 월드컵 엔트리에만 이름을 올리고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우승의 영광은 함께 누렸다. 본명은 호나우두 호드리기스 지 제주스(Ronaldo Rodrigues de Jesus). 그리고 약 10년 후, '외계인'이라고 불리는 또다른 호나우두는 비슷한 이유로 평생 호나우지뉴라고 불리게 된다. [5]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긴 했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여지껏 열광해왔던 브라질 특유의 삼바 리듬이 살아있는 창의적인 공격축구가 아닌 수비 후 역습 위주의 단순한 패턴으로 우승했던 것에 큰 불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6] 상술한 1994년 월드컵 당시의 수비수 호나우두와는 또다른 두 살 위의 수비수 호나우두가 올림픽팀에서 같이 뛰어서 당시 호나우두는 호나우딩요라고 불렸다. 참고로 이 또다른 호나우두는 벤피카와 베식타쉬에서 물경 10년을 뛰지만 국제대회 기록은 올림픽이 유일하다. [7] 반대로 일본은 2승 1패를 거두고도 9위로 탈락하여 8강 진출 실패했다. 그리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허정무가 이끌던 한국 올림픽 대표팀이 모로코와 칠레를 1:0으로 이겼으나 스페인에게 패한 0:3 실점으로 골득실로 밀려 일본과 똑같이 9위로 탈락하여 8강 진출 실패했다. [8]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도 극적인 90분 역전골로 우승하며 검은 돌풍을 과시한다. 참고로 이 때 나이지리아의 감독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조 본프레레. [9] 그리고 더이상 호나우지뉴가 아니라 본명 호나우두도 되찾은 대회였다. [10] 그 유명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UFO슛"이 나왔던 대회다. [11] 이때의 브라질 공격진은 몹시 화려했는데, 그 면면이 호나우두, 호마리우, 히바우두, 베베투, 데니우손 등이었다. [12] 그리고 둘 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정확히는 그 덩치에 해서는 안되는 90도 직각 드리블을 남발한 결과 미친 퍼포먼스를 얻은 대신 무릎이 박살나고 전성기 기량이 일찍 끝났다. 둘 다 키가 크고 어깨 넓은 역삼각 체형이라 무게중심이 높아 수비수와 퉁 부딪히거나 직각으로 드리블을 꺾으면 물리법칙을 바꾸지 않는한 필연적으로 하체가 크게 흔들리는데, 이걸 방지하기 위해선 뛰어난 균형감각으로도 모자라고 무릎에 힘을 빡세게 줘야 한다. 이러면 큰 키와 넓은 어깨에서 오는 높은 무게중심의 하중이 무릎관절에 확 쏠리게 되고 이짓을 경기마다 몇번씩 반복하니 무릎 건강과 일찍 작별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호나우두 정도의 키와 체형의 선수들은 대부분 라인 브레이킹이나 헤딩으로 승부보는 유형이 많고 드리블 돌파를 즐겨하더라도 비교적 직선으로 쭉 달리는 호날두, 카카, 베일같은 치달형 선수가 대부분이지 호나우두처럼 볼을 몸 가까이에 딱 붙이고 이리저리 휙휙 꺾어대는 드리블을 구사하는 유형은 정말 드물다. 섬세하고 세밀한 장신 드리블러는 없다. 있더라도 연습장에서나 그렇지 실전에선 무쓸모이며 차라리 단신의 헤딩 스페셜리스트가 훨씬 찾기 쉽다. 이게 거의 상식처럼 통용되는 와중에 호나우두가 나타나 당대 축구판을 평정했으니 그 임팩트를 알만하다. 수아레스 역시 "저 놈한테서 옛날 호나우두의 향기가 난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13] 너무 전성기가 짧아서 역대급 선수중에서는 누적 커리어가 많이 딸리는 편이다. [14] 스탯상으로는 호나우두의 고점이 호날두 고점에 밀린다. 그러나, 많은 레전드 선수들이 호나우두가 호날두보다 전성기의 고점 기량이 더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꼽히는 말디니의 경우 호날두는 물론 대단하지만 마라도나, 호나우두, 메시 이 셋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마법을 부린다는 느낌인데 호날두는 솔직히 그런 느낌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15] 메시는 전무후무한 발롱도르 4연패와 한해 91골 신기록 작성, 펠레는 17살 한참 급식먹을 나이에 해트트릭까지 박으며 월드컵 우승을 캐리, 그리고 86마라도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축구계 하드캐리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리고 축구 역사상 이 셋의 최고점 임팩트와 맞먹는 수준의 임팩트를 지녔다고 평가받는건 토탈 풋볼로 축구의 기원전/기원후를 나눈 74크루이프와 96-98에 '스포츠카처럼 움직이는 탱크'라 찬사 받았던 호나우두 이렇게 단 둘 뿐이다. 물론 너무 과장된거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찮고 그래서 늘 국내고 해외고 호나우두 관련해서 댓글창이 활활 불타오르지만, 어쨌거나 메펠마를 상대로 임팩트 관련해서 논쟁이 자주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호나우두의 엄청난 고점을 증명한다. [16] 이 때문인지 02년 월드컵부터는 골든볼 선정을 결승전 하프타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때는 올리버 칸이 골든볼 수상자로 뽑힌 후에 후반전에 실책성 플레이로 실점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06년 월드컵부터는 아예 결승전 후반전 경기 종료 후 골든볼을 뽑는 현행 규칙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때는 골든볼 주인공이었던 지네딘 지단이 연장전에서 마르코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퇴장당했다. 즉 98년 월드컵 골든볼은 투표 시점이 달랐다면 지단, 슈케르, 튀랑 중 한명에게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결승전 종료 이후 골든볼 후보 1순위로 지목된건 다름 아닌 지단이었다. #, #, # [17] 간혹 98년 지단이 결승전 원툴이라고 폄하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왜냐하면 지단은 출전한 5경기에서 모두 키커 평점 2.5점 이상, 가제타 평점 6.5점 이상을 받으며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평균 평점으로도 튀랑 다음으로 2위(키커 2.00, 가제타 7.00)였으니 98년 지단은 결승전 이전까지 버스를 탔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우디전 퇴장 및 2경기 결장으로 흠결은 있어도 MVP급 활약을 펼쳤다고 보는게 더 타당한 시각일 것이다. [18] 몽유병과 같은 수면 중 나타나는 비정상 증세 [19] '야밤의 공포'라는 증상이라고 한다. 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자다가 갑자기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숨도 불규칙적으로 쉬며 몸을 부르르 떨거나 입에 거품을 몰기도 한다. 당사자는 잠에서 일어나고 나면 이러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오히려 당사자의 옆에서 이 증상을 목격한 사람이 공포감을 느끼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여 야밤의 공포라고 한다.(출처:호나우두, 한 축구영웅의 시련과 영광의 드라마) [20] 그러나 호나우두는 1994년 월드컵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했으므로 펠레하고는 차이가 있다. 펠레도 1962년 월드컵에서 2경기 출전해 1골 1도움을 기록하고 조별리그 2차전에서 부상당해 남은 대회기간 동안 아마리우두가 대신 뛰었으므로 1962년 월드컵에는 사실 크게 기여하진 않았지만 펠레는 부상으로 못뛴 것이고 호나우두는 실력적으로 국대 선배들을 밀어내지 못한 것이기에 차이가 분명하다. 물론 펠레 역시 1962년 우승은 펠레가 아니라 가린샤가 주인공이었던 대회인건 맞다. [21]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공약 달성에 실패했다. [22] 월드컵 전 경기 득점 선수는 헝가리 대표팀(준우승)의 샤로시 죄르지(4경기 5골), 우루과이 대표팀(우승)의 알시데스 기지아(4경기 4골), 프랑스 대표팀(3위)의 쥐스트 퐁텐(6경기 13골), 브라질 대표팀(우승)의 자이르지뉴(6경기 7골)로 총 4명이다. [23] 다만 이 해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호나우두가 월드컵이 치러지기 전이었던 본 시즌에서 통합 16경기 정도 밖에 뛰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뿐 아니라 챔스 우승까지 차지했던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더 적절한 수상자였다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호나우두가 결승전에서 두 골을 넣은 상대가 2002년 월드컵 골든볼 수상자, 그런 타이틀을 따지지 않더라도 전성기의 그 올리버 칸이었기 때문에 임팩트가 워낙에 커서 인정받기엔 충분했다. [24] 터키전에서는 마치 전성기처럼 수비 3명을 달고 드리블하며 반박자 빠른 슈팅으로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25] 1978년 월드컵부터 월드컵 득점왕은 6골을 넘기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생긴 이후 2010년대까지 징크스를 깬 유일한 사례이다. 이후 2022년 월드컵에서 킬리안 음바페 8골 2도움, 리오넬 메시 7골 3도움으로 완전히 깨지게 된다. [26] 스탯상으로는 8골로 4골 3도움의 98년 월드컵을 뛰어넘었다. 단, 운동능력과 퍼포먼스 그리고 경기 영향력 자체는 당연히 98년이 최전성기였다. 98년 호나우두는 02년에 비해 골이 부족한 대신 골과 어시스트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경기장에서 활동폭과 영향력이 훨씬 넓었다. 물론 퍼포먼스나 플레이 스타일 등을 고려했을 경우의 이야기고 성과로 따지면 결승전에서 워스트급 경기력으로 참패한 98년 월드컵보다는 득점왕 및 결승전 멀티골로 방점을 찍고 우승컵까지 거머쥔 02년 월드컵이 호나우두의 커리어 하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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