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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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67~84위 |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
87위 | 라인하르트 자일러 | 독일 | 109대 | ||
88위 | 에밀 비치 | 독일 | 108대 | ||
한스 한 | 독일 | ||||
베른하르트 베히텔 | 독일 | ||||
91위 | 빅토르 바우어 | 독일 | 106대 | ||
베르너 루카스 | 독일 | ||||
93위 | 귄터 뤼초 | 독일 | 105대 | ||
94위 | 아돌프 갈란트 | 독일 | 104대 | ||
에버하르트 폰 보렘스키 | 독일 | ||||
하인츠 작센베르크 | 독일 | ||||
97위 | 하르트만 그라서 | 독일 | 103대 | ||
98위 | 지크프리트 프라이타크 | 독일 | 102대 | ||
프리드리히 가이스하르트 | 독일 | ||||
에곤 마이어 | 독일 | ||||
막스-헬무트 오스터만 | 독일 | ||||
요제프 부름헬러 | 독일 | ||||
헤르베르트 롤바게 | 독일 | 4발 중폭격기 격추 1위 | |||
104위 | 베르너 묄더스 | 독일 | 101대 |
인류 최초 적기 100기 격추 스페인 내전에서 14기 격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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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미팅 | 독일 | ||||
요셉 프릴러 | 독일 | 스핏파이어 격추대수 1위 (68대 격추) | |||
울리히 베르니츠 | 독일 | ||||
108위 | 파울-하인리히 데네 | 독일 | 99대 | ||
레오폴트 슈타인바츠 | 독일 | ||||
볼프강 슈페테 | 독일 | ||||
하인리히 바르텔스 | 독일 | ||||
한스 슐레프 | 독일 | ||||
113위 | 호르스트 하닝 | 독일 | 98대 | ||
구스타프 뢰델 | 독일 | ||||
헬무트 뤼플러 | 독일 | ||||
▼116~139위 |
하르트만 그라서(Hartmann Grasser : 1914. 8. 23~1986. 6. 2)
1. 소개
출생 | 1914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
출격횟수 | ? |
격추수 | 103기 |
소속 | JGr 152, ZG 52, ZG 2, JG 51, JG 11, JG 110 |
최종 계급 | 소령 |
사망 | 1986년 서독 쾰른 |
2. 생애
2.1. 독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청년
의사 지망생이었지만 나치즘과 총통을 흠모한 그는 20살이 되던 1934년에 독일로 망명을 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36년에 공군에 자원 입대한 청년 하르트만은 사관생도(Fahnenjunker) 자격으로 루프트바페에 합류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점에서, 하르트만 그라서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제152전투비행단(JGr 152)에서 전투조종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구축전투기인 Bf 110와 단좌 전투기인 Bf 109가 함께 편성된 일종의 혼성부대였는데, 하르트만 소위는 이 부대에서 제3비행중대(3./JGr 152)의 편대원 자격으로 Bf 110을 몰게 되었다.그라서 소위가 처음 실전에 참가한 것은 이른바 가짜 전쟁(Sitzkrieg)으로 불리던 기간인 1939년 9월 16일로, 프랑스군의 관측용 기구를 격추시키는 임무였다. 적기를 맹렬히 추격해 화려한 공중전을 벌여 지면에 격돌시키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하르트만 소위로서는 다소 맥빠지는 임무였지만, 어쨌든 이렇게 첫 교전을 경험했다. 그가 적기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는 9월 24일에 프랑스와 접경 지역인 호른바흐(Hornbach) 상공에서 마주친 프랑스 공군의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였지만, 자신도 냉각기에 피탄되어 기지 근처의 빙겐(Bingen)에 비상착륙해야만 했다.
2.2. 쌍발 전투기를 몰다
해가 바뀐 1940년 1월에 제52구축전투항공단(Zerstörergeschwader 52)으로 재편성되면서 그가 속한 중대는 I./ZG 52이 되었다. 칼 하인츠 레스만(Karl-Heinz Lessmann : 1915~1943 / 37대 격추) 대위가 사령관을 맡게 된 이 부대는 일종의 쌍발 중전투기 실험부대 역할을 했는데, 6월에는 제2구축전투항공단 제2비행단(II./ZG 2)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하르트만 소위는 도버 해협에서 영국 공군과 전투를 하면서 2대를 더 격추시켜 격추수를 6대로 늘려놓고 있었다. 베테랑 에이스이자 항공단 사령관이자 당시 독일 공군에서 최고의 격추수를 자랑하고 있던 베르너 묄더스 소령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조종사를 유심히 살펴보고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부대인 제51전투항공단( JG 51)에 부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라서는 10월에 JG 51로 배속되면서 단발 전투기를 몰게 되었다.12월 1일에 하르트만 소위는 켄트주의 애쉬포드(Ashford) 근처에서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하며 전입 첫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바다사자 작전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휴식을 취한 그는 이듬해인 1941년 6월부터 러시아 침공에 참가하게 된다. 새로운 전선에 도착한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첫날에 소련 공군의 투폴레프 SB 폭격기를 격추하며 독소전에서 첫 무공을 기록했다. 6월 29일에 2대를 더 해치운 하르트만 그라서는 마침내 독일 공군에서 에이스(Ass)로 불리게 되는 기준인 10회의 승리를 기록했다. 그후로도 꾸준히 전공을 세우던 그라서가 7월 29일에 DB-3를 격추하자, 그는 이제 20기 격추를 헤아리게 되었다. 전투력을 인정받은 그는 8월 1일에 제5비행중대(5./JG 51)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9월 7일까지 그는 자신의 30번째 격추가 되는 I-16 전투기를 카를베츠(Karlewez) 부근에서 잡아냈다.
2.3. 독소전에서 임명된 지휘관
하르트만 그라서는 9월 4일자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으며 중위로 진급하는 동시에, 제2비행단(II./JG 51)을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전쟁이 터지고 2년만에 29대를 떨군 그에게 비행단장(Gruppenkommandeur)이라는 막중한 책무가 맡겨진 것이다. 4개 비행중대를 지휘하게 되는 비행단장쯤 되면 전투 출격할 기회는 자연히 줄어들고 서류와 씨름할 일이 많아지게 마련이었지만, 다른 수퍼 에이스들과 마찬가지로 하르트만 그라서는 그러지 않았다. 계속 솔선수범해 실전 출격을 거듭하던 그는 12월 14일에 페틀랴코프 Pe-2 전폭기를 자신의 40번째 제물로 삼았다.프랑스에서 서로 맞찌르고 불시착하는 뼈아픈 경험을 한 이래 하르트만 그라서는 자신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으나, 1942년 1월 24일에 45번째 격추를 거둔 직후 소련 공군기에게 격추되었다. 피탄된 그는 Bf 109F-2(W.Nr. 9204)에서 간신히 낙하산 탈출을 했지만,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부상을 입었고 공교롭게도 그가 내려선 곳은 소련군 점령지역이었다. 애꾸눈 신세로 독일군 지역까지 필사적으로 돌아간 그는 다행히 소련 병사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가 몇 달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간 것은 6월이었다. 6월 23일에 잡은 I-153 복엽 전투기는 그의 50번째 전공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다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 고마운 제물이었다.
인간 공대공 병기로 거듭난 하르트만 그라서의 격추 행진에 다시 불이 붙었다. 7월 5일에는 3대의 슈투르모빅을 포함해 하루만에 6대를 격추시키는가 하면, 8월 13일까지 70대 격추를 헤아리게 되었고 8월 29일에는 80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이제 대위가 된 하르트만 그라서는 그의 격추수가 91대가 되었을 때 동부전선에서 떠나게 된다.
2.4. 북아프리카에서
1942년 11월, 그라서 대위는 자신의 비행단을 이끌고 열사의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이동했다. 곧바로 다시 과거의 숙적 영국 공군과 맞붙게 된 그는 튀니지 상공에서 12대를 격추시켜 마침내 100대를 넘겨 103대라는 초인적인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로서 그는 루프트바페에서 31번째 100대 격추 달성자가 되었다. 1943년 6월 7일에는 그간의 혁혁한 전공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동안 파리에서 후방 근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이곳에서 그가 맡은 보직은 제4비행사단(4. Jagddivision) 본부의 참모 장교였다.8월 31일에는 그의 훈장에 떡갈나무잎이 덧붙여졌고, 이것은 전군에서 288번째로 주어진 곡엽 훈장이었다. 또한 소령 진급도 이루어졌다. 몇 달간 후방에서 서류와 전투를 벌이던 그는 해가 바뀐 1944년 4월 28일에 제국 방어전(Reichsverteidigung)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제1전투항공단( JG 1) 예하의 제3비행단(III./JG 1) 지휘관 책무가 떠맡겨진다. 사실 소령인 그에게 항공단장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 폭격기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물러난 프리드리히 에베를(Friedrich Eberle : 33대 격추) 대위의 공석을 메꾸는 조치가 시급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라서 소령은 잠시 부대를 이끌다가 5월에 새로 부임한 에리히 보이트케(Erich Woitke : 1912~1944 / 30대 격추) 대위에게 다시 비행단장직을 물려주었다.
2.5. 패전
루프트바페는 전황이 점차 구석으로 몰리자, 하르트만 그라서 같은 뛰어난 조종사이자 우수한 지휘관을 더 이상 후방에서 서류나 만지게 할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12월부로 하르트만 소령은 독일 중부의 베젠도르프(Wesendorf)에 긴급 편성한 제110전투항공단(JG 110)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부대는 사용 기체 조차 통합되는 건 고사하고 다수는 Ar 96이나 Bf 108, Go 145 같은 정찰기나 연락기가 전투기를 대신하고 Si 204 같은 수송기가 폭격기를 대신하고 있어 전혀 전투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고, 그라서 또한 더 이상의 격추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기지만 옮겨다니다가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 지휘와 연락계통마저 망가진 공군은 JG 110의 지휘관이 서류상으로는 2명이 등재되기도 했을 정도니, 그 혼란상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2.6. 종전 후의 행적
항복 명령이 떨어지자 헤르만 그라프, 에리히 하르트만과 함께 미군에게 투항한 하르트만 그라서였지만 이들은 미소 협정에 의해 러시아군에게 건네졌고, 그대로 소련의 형무소로 끌려간 하르트만 그라서는 1949년까지 수감되었다.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인도로 건너가 현지에서 파일럿으로 취직해 알라하바드와 뉴델리를 오가는 민항기를 몰았다. 이렇게 대략 1년 정도 민간기를 몰던 그에게 시리아로부터 공군 고문역을 제의받았고, 이렇게 중동으로 가게 된 하르트만 그라서는 시리아 공군 조종사들을 지도했다. 그렇게 재산을 모은 그는 서독으로 돌아와 쾰른에서 프레스 부품 공장을 차리고 운영하며 살다가 1986년 6월 2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 그라츠에 묻혀있다.하르트만 그라서 소령의 전공을 종합해보면 700회 출격 / 103대 격추로 압축되지만, 후방에서 지상근무한 기간이 길었던 탓에 더 많은 격추 기회를 놓친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아직 실전 경험이 별로 없던 시절에 공중전에는 잼병이라는 둔중한 쌍발 전투기인 Bf 110으로 200회 출격한 마이너스 요인도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구축전투기로는 고작 5대만 격추시켰을 따름이다. 서부전선에서는 4발 중폭격기 1대를 포함해 20회의 승리를 기록했다. 동부전선에서 거둔 83회의 승리에서 가장 많이 격추시킨 기종은 슈투르모빅으로 13대를 헤아린다.
3.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39. 9. 17)1급 철십자 훈장 (1940. 7. 7)
기사철십자 훈장 (1941. 9. 4)
독일 황금십자장 (1942. 9. 19)
곡엽기사철십자 훈장 제288호 (1944.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