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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0 15:29:54

프루덴치 지 모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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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d37><colcolor=#fee000>
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3대 대통령
프루덴치 조제 지모라이스 이 바후스[1]
Prudente José de Morais e Barros
파일:Prudentedemorais.jpg
출생 1841년 10월 4일
브라질 제국 상파울루주 이투
사망 1902년 12월 3일 (향년 61세)
브라질 제1공화국 상파울루주 피라시카바
재임기간 제3대 대통령
1894년 11월 15일 ~ 1898년 11월 14일
서명
파일:프루덴치 지 모라이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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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d37><colcolor=#fee000> 학력 상파울루 대학교 로스쿨 ( 법학 / 학사)
종교 미상
소속 정당 연방공화당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대통령 임기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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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제3대 대통령.

2. 생애

2.1. 초기

1841년 10월 4일 상파울루주의 이투 근교에서 태어났다. 5 살 때, 아버지가 한 노예에게 살해당했다. 1863년 상파울루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피라시카바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고 1865년에 정치에 입문했다. 초기엔 모라이스는 군주제 옹호자로서 자유당에 입당했다. 1865년 피라시카바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873년, 상파울루 공화당에 입당하여 주 의회의 의장로서 자신을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주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노예제 폐지, 공화정 정부, 연방주의 지지, 미나스제라이스와의 영토 분쟁 등을 다뤘다.

1889년 브라질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상파울루 공화당은 정계를 이끌기 시작했고 모라이스는 상파울루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제헌의회에 선출되었다. 1891년 브라질 최초의 공화정 헌법을 공포한 제헌국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모라이스는 제1대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임시정부 대표인 데오도루 다 폰세카에게 패하였다. 대통령 취임 이후 제헌의회의 역할은 마무리되며 제헌의회 의장으로서의 모라이스의 역할도 끝났다. 이후 연방 상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91년 11월, 데오도루 다 폰세카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자로써 통치를 시도했으나 갈등 끝에 실패하고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1891년 11월 23일, 부통령이자 연방 상원의장인 플로리아누 페이쇼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모라이스는 연방 상원의장이 되었다.

2.2. 대통령 임기

1894년 3월 1일에 시행된 제3대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그해 11월 15일에 취임했다. 그의 당선은 상파울루의 커피귀족이 주도하는 과두정이 군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임기 내내 대통령제 옹호와 군주제 옹호로 붕당이 나눠져 이를 중재해야 했다. 특히 아직 군에는 페이쇼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이 남아있었고 부통령 역시 그랬기에 점진적으로 접근했다.

1895년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중재로 포르투갈과 외교관계를 회복했으며 같은해 11월엔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어 일본인의 이민을 장려하였다. 본인의 수술로 인해 1896년 11월 10일부터 1897년 3월 4일까지 대통령직을 부통령에게 임시로 넘겨주었다.

1895년 바이아 카누두스에서 안토니우 콘셀레이루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 반군은 정부군을 무찌르며 세를 확장해갔지만 전쟁 장관인 카를루스 비텐코트 장군이 진압했다.[2] 하지만 정부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고 1897년 11월 5일엔 대통령 암살 미수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미 외채 문제가 심각했던 브라질은 반란 진압 과정에서 불어난 군비로 인해 영국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기도 했다.

또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아르헨티나와의 국경 분쟁을 해결했다.

3. 여담

브라질 연방 공화국 수립 후 초대 상파울루 주지사를 역임했다. 또한 제2대 브라질 연방 상원의장을 맡기도 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이(e, i, y)'는 띄어 쓰도록 하고 있다. [2] 반군 25,000여명과 정부군 5,000여명이 사망했으며 브라질 내전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