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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26:50

프랜시스 가브레스키

<colbgcolor=#003458><colcolor=#fff> 프랜시스 스탠리 가브레스키
Francis Stanley Gabreski
파일:Francis_Gabreski.jpg
출생 1919년 1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오일 시티
사망 2002년 1월 31일 (향년 83세)
미국 뉴욕주 헌팅턴
학력 노터데임 대학교
복무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1940년 ~ 1947년
미합중국 공군
1947년 ~ 1967년
최종 계급 대령 (미합중국 공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1. 개요2. 생애
2.1. 가난한 어린 시절2.2. 소위 임관2.3. 뒤늦은 고속 승진2.4. 추락과 포로 생활2.5. 한반도의 미그 킬러2.6. 노년의 활동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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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2.1. 가난한 어린 시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오일 시티로 이민 온 폴란드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시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만큼은 반드시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어 교육열이 높았던 탓에, 개비 소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으며 장성한 후에는 인디애나주에 있는 노터데임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에서 취미삼아 비행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항공기와 비행에 빠져들게 된 가브레스키는 하루라도 빨리 비행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된다. 결국 미 육군의 조종사 모집 공고에 홀려 2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중퇴한 그는 미 육군에 장교 후보생으로 지원했는데, 이 때가 1940년 이었다.

2.2. 소위 임관

이렇게 비행 훈련을 받게 된 가브레스키였으나, 막상 교육에서는 조종이 너무 서툴러서 교관이 그를 조종사 부적격자로 분류해서 훈련 코스에서 내보내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어찌저찌 시원찮은 비행 소질을 가진 생도로 평가받으며 고등 비행 훈련까지 마친 그는 1941년에 소위로 임관하여 하와이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하여 미국이 참전하자 유럽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로부터 배워 폴란드어를 할줄 알았던 그는 영국 공군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망명해온 폴란드 조종사들과 함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몰면서 약 20여회의 전투 출격을 기록한다. 그는 1943년 2월에 미 육군항공대 제56전투비행단 예하 제61전투비행대대로 전출되어 편대장이 되었으며 6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이된다.

2.3. 뒤늦은 고속 승진

그의 전투 비행단은 P-47 썬더볼트를 장비하고 있었다. 단발 전투기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P-47이었던만큼 내구성이 엄청나서 어지간히 피격 당해도 거뜬히 귀환하곤 해서 평가가 높았다. 조종에 관한 재능이 늦게 열린 가브레스키는 대기만성형 조종사였는지 이 비행단에서 차츰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교전에서는 Fw 190을 한꺼번에 3대나 격추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실력있는 폴란드 조종사들을 여럿 불러 들여 미군에 편입하게 주선하는 등, 동족애도 발휘하였다. 이런 공적으로 인해 개브레스키는 1944년 4월 중령으로 진급했다.

5월까지 가브레스키는 300시간의 전투 출격 시간을 기록하였다. 원래 미 8공군의 방침에 의하면 이렇게 장기간 근무한 조종사들은 본국으로 불러 들여 한 동안 육상 근무나 교관 같은 비전투 보직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5월 20일에 그가 탑승할 수송기가 뜨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동안 그는 ‘딱 한번 만! ” 더 출격하겠다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P-47에 올라타 이륙했다.

그날 그의 편대 임무는 독일 러셀하임을 공습하기 위해 출격하는 폭격기 편대를 엄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 도중 그는 바센하임 상공에서 눈 아래 비행장에 마치 앉아있는 오리떼처럼 주기된 여러 대의 He 111 폭격기를 발견했다. 당연히 편대장이었던 그는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하강하여 이 무기력한 목표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하지만 진입각이 너무 깊어 저공으로 가한 첫 번째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다시 기수를 돌려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2.4. 추락과 포로 생활

비행장이란 곳은 항상 대공화기로 겹겹이 방어되기 때문에 공격기가 비행장을 공격할 때는 쏟아지는 대공 사격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저공으로 빠르게 비행해야만 한다. 가브레스키도 이날 공격에서 이런 초저공 공격 전술을 구사했었다. 그는 바센하임 비행장에 뻗어있는 활주로와 유도로를 따라 최대한 바짝 붙어서 기수를 올렸다 내리며 기총 세례를 퍼부었다. 몇 대의 폭격기가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다시 조준점 조정을 위해서 약간 기수를 내렸다. 이때, 그가 탄 썬더볼트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요란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3.7미터 직경의 거대한 프로펠러 블레이드 하나가 심하게 구부러지자 회전 중심이 흔들려 기체가 격렬하게 요동을 쳤고, 그는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당기며 기체를 통제해보려 했지만 더 이상의 비행이 불가능했다.

가브레스키의 실수였지만 그의 대담한 비행 솜씨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P-47은 더 날지 못해 불시착시킨 가브레스키는 탈출했다. 그는 무려 닷새 동안이나 독일군의 추격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포로가 되어서 거의 1년여를 포로 생활을 했다.

독일 북부 바르트(Barth)에 위치한 공군 제1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그는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1일, 이곳까지 진격해온 소련군에 의해서 구출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2.5. 한반도의 미그 킬러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전투조종사로 참전한 가브레스키는 제51전투요격비행단(51FIW)의 비행단장이라는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격하며 공산군의 MiG-15 전투기 6.5기를 격추해서 자신의 격추 기록을 34.5대로 늘렸다. 김포 비행장에서의 출격이 그의 마지막 실전 출격이었으나, 가브레스키는 그후로도 초음속 전투기인 F-100 수퍼 세이버와 F-101 부두 전투기를 몰다가 1967년에 퇴역했다. 그는 복무하는 동안 5,000비행 시간을 달성했고, 그중에서 4,000시간은 제트기로 세운 기록이다.
"공중전에서 윙맨은 절대적으로 불수불가결한 존재이다. 난 윙맨의 뒤를 봐주고, 윙맨은 나를 돌본다. 윙맨은 너를 보호하는 또다른 눈이다. 또한 윙맨은 적기를 공격할 때 더 많은 화력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함께 싸운다. 전투는 결코 혼자하는 것이 아니고, 팀웍에 의지해야만 이길 수 있다."

2.6. 노년의 활동

가브레스키 대령은 2차 대전의 무공과 합쳐 모두 공중 격추 34.5대 + 지상 격파 3대를 기록했는데, 서방측 조종사 중에서 2차 대전과 6.25 전쟁에서 격추기록을 둘 다 5대 이상 세운 더블 에이스는 가브레스키를 포함해 단 7명 뿐이다. 또한 가브레스키가 공중전에서는 단 한번도 격추당하지 않고 거둔 그 모든 전과는 전투기를 상대로 따낸 것이며, 그처럼 격추시킨 상대가 모조리 전투기인 경우는 더더욱 극히 드물다.

대령 계급으로 군에서 물러난 그는 그루먼 사에 고문으로 들어갔다. 슬하에 자식 9명을 두고 천수를 누린 가브레스키는 전미 에이스 협회를 이끌어 오다가 2002년 83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가브레스키의 며느리 중 한 명인 테리 가브레스키는 중장까지 진급해 공군물자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내고 퇴역했다.

3. 매체에서



[1] 등장한 것이 41번째이고 작중 시점으로는 40번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