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1970년 |
폴 새뮤얼슨 |
<colbgcolor=#fff><colcolor=#000> Paul Anthony Samuelson 폴 앤서니 새뮤얼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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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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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년 5월 15일 |
인디애나주 게리 | |
사망 | 2009년 12월 13일 (향년 94세) |
매사추세츠주 벨몬트 | |
학력 |
시카고 대학교 (
B.A.) (1935년) 하버드 대학교 ( M.A.) (1936년) 하버드 대학교 ( Ph.D.) (1941년) |
지도교수 |
조지프 슘페터 바실리 레온티예프 |
지도학생 |
로런스 클라인 로버트 머튼 |
소속 | MIT (경제학과 / 명예교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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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경제학자. 인디애나 주 출신이며 1931년에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석사학위를, 1941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도 MIT 조교수로 일하다가 1947년에 정식 교수가 되었다. 현시 선호 이론(revealed preference theory)을 개발했고 신고전학파 종합(neoclassical synthesis)을 제시했다. 또한 효율적 시장 가설(efficient market hypothesis)의 개발에도 일조했고 후생경제학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또한 국제경제학의 헥셔-올린 모델에서나, 재정학 쪽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심지어는 인구가 정상상태(steady state)일 때 공적연금의 재정방식은 완전부과방식(PAYG)가 최적이라는 논문을 남겨 보험계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현대 경제학의 각 분야가 어느 정도 정립된 이후에도, 세부전공을 가리지 않고 큰 연구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흔히 경제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불린다. 새뮤얼슨 이후의 경제학자들은 모두 특정 세부 전공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며, 새뮤얼슨처럼 소비자 이론부터 거시 경제 정책론까지 전방위적으로 활약한 학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2]
현대적 의미의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정립한 인물로도 꼽힌다. 맨큐의 경제학을 비롯한 오늘날의 경제학원론 교과서들은 그의 저서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2. 생애
유대인이다. 근친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4촌관계. 시카고를 떠나 인디애나에서 태어난것도 시카고 일리노이는 4촌혼인을 금지해서 이다. 가계도를 봐도 조카로 로렌스 서머스,[4] 처남으로 케네스 애로우[5]를 두는 등, 나름 명망 있는 가문.신자유주의와 자유 시장론의 상징이라고 볼 수있는 시카고 대학 출신이지만, 케인지언 이론에도 상당히 정통했다. 따라서 시카고학파의 자유 시장 이론과 케인지언의 혼합 경제 이론을 절충한 신고전학파 종합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보다는 합리적인 규제가 동반된 시장이 훨씬 이롭다고 하였다.
밀턴 프리드먼과 사적으로는 친구였지만,[6] 프리드먼과 학문적 갈등이 있었다. 시장주의적인 프리드먼과 케인지언 성향의 새뮤얼슨은, 둘 모두 신고전학파 종합으로 분류가 된다고는 해도, 사상적으로는 꽤 다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학문적 경쟁 관계는 선배격인 케인즈-하이에크의 것과 동급으로 인식되었고, 2021년에는 이를 다룬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이라는 책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2022년 번역 출간되어 있다.
소련이 존속 가능한 체제임을 보였다고 1989년에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소련의 경제가 이르면 1984년, 늦어도 1997년 미국을 제칠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예측을 바꾸지는 않았다. 이 처럼 아무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라도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다.
'사실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이론'으로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 우위론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하버드 대학교 박사 과정 당시 지도 교수가 조지프 슘페터였다. 박사 논문 심사 때 슘페터가 "Did we pass?"라고 물었다고 하는데, 즉 "우리가 잘 이해했는가?"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 저 박사 논문은 이후 책으로 출판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경제학의 고전 중 하나인 <경제 분석의 기초>이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교인 하버드에서는 교수가 되지 못하고 MIT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1]
연구소 명예교수
[2]
본인 또한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경제학에 전문가(specialist)들은 많지만 전반적인 전문가(general specialist)는 나 뿐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3]
정작 본인은 10년 넘게 원론 집필 요청을 거부했으나, 자식으로 샴쌍둥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돈이 급해져 원론 교과서를 집필했다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이 교과서는 현재 50쇄를 넘어 계속 인쇄 중이다.
[4]
빌 클린턴 재임 시절에 미국 재무 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하버드대 총장으로도 재직했던 경제 관료 출신의 저명 학자다. 영화 <
소셜 네트워크>에서
윙클보스 형제가 면담을 요청했던 당시 하버드대 총장으로 등장(물론 본인은 아니고)했다.
이창용 총재의 박사 시절 은사로도 알려져 있다.
[5]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이며, 1972년 52세의 나이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에스테르 뒤플로의 47살 기록의 뒤를 이은 두 번째로 어린 경제학상 수상 기록.
[6]
두 사람 모두 시카고 대학교 출신 경제학자이기 때문이다. 새뮤얼슨은 시카고에서 학사 학위를, 프리드먼은 석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