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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23:42:12

팽배수

1. 개요2. 설명3. 쇠퇴 이유4. 방어구5. 무기6. 팽배수와 여진족7. 진법8. 기타9.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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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까지 군대에 존재했던 병과. 검방전사처럼 방패 갑주로 무장한 백병전 전문의 보병대였다. 주로 산악전, 보병전, 대여진족 전투를 치렀다. 조선 초기를 지나 중기에 접어들자 병과가 점점 축소되었고, 이후에 등패수로서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이내 사라졌다.

2. 설명

팽배수는 조선 초기 조선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보병이다. 태종 15년(1415)에 방패수라는 명칭으로 대장(隊長)·대부(隊副)로 구성된 잡직 계통의 중심으로 시행되었고, 세조 13년(1467)에 팽배로 개칭되었다. 팽배(작은 원방패, 서양의 라운드 실드와 유사하다)와 도검을 주력으로 근접전 무기[1]로 무장한 방패검병이자 백병전 전문 병종이었다. 기본적인 전술은 방진을 짜서 싸우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팽배수의 전성기였던 초중기에는 중앙의 시위대에만 5천여 명이 있었지만, 5교대 4개월을 복무하게 하니 실제 복무자는 항상 1천여 명이었으며, 전원 8품 이하 잡직체아직(雜職遞兒職)이 주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팽배수들의 전투력과 숙련도가 상당히 높았다고 기록되었다. 장창 5기와 팽배 1기가 붙으면 팽배 1기가 이긴다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방패와 한손검은 둘 다 매우 실용적인 무장이고, 아래처럼 빡센 훈련을 받았음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강병이라고 할 만했다.

팽배수는 능동적인 대처력을 기르기 위해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잽싸게 들어올려 공격을 막는 훈련부터, 실제 전쟁터에서 쓰는 병기보다도 무거운 갑옷과 방패, 한손검을 착용하고 훈련을 받았다. 팽배수는 최전방에 서서 싸우는 병과이며, 일차적으로 모든 방진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팽배수의 전성기였던 초중기를 마지막으로 핸드캐논 천자총통이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었다. 중기부터는 조총이 주력으로 바뀌었다. 두 차례 전쟁이 끝나고부터는 명나라에서 도입한 등패를 이용하는 등패수가 이러한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총을 널리 보급했기에 주력에서는 밀려난 듯하다.

3. 쇠퇴 이유

고려 공양왕시기 과전법을 실시 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단위에서 경기로만 한정하였다.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중심경제체제이다. 그러므로 권력 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 편법으로 상속하다. 이로 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졌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 수취가 가능했던 규정도 안 지키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했다.

문제는 그저 토지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야 할 땅이 모자르니 점점 그 대상이 확대되었고,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다.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해야 할 땅을 조정이 관료들에게 지급하니, 정작 군호인 사람들이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 말기와 문종 시기에 가까울수록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짐은 당연한 일이다.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었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전조 말기부터 추진하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어디서 어떻게 다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나오는 판이니 계유정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4군 6진 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사변 같은 북방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들을 달래고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 보니 병력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시기 군호지정 같은 것이 아닌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3만 정도로 불렸다. 인사고과에서 활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도 덤. 이렇게 하면 숙련도는 개나 주는 꼴이 되어버리지만,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의 숙련된 무사집단이 아니라 성능은 낮지만 원할 때 원할 만큼 움직여줄 대규모 전쟁기계들이었다. 그래서 숙련도가 중요한 팽배수와 중기병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즉 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나 3세기 이후의 로마처럼 재원은 부족해지고 반란 등으로 병력수요는 이전 시기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임시방편으로 돌려막기를 추구한 것이 세조의 정책이다.

게다가 계유정난에 가담한 공신들에 의해 훈구파가 형성되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사림파들이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어 이로 인해 양인이 감소하여 군인층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팽배수들이 각종 역사에 동원되면서 점차 양인들 사이에서 기피되고 천인들이 들어와 신량역천으로 변질되면서 팽배수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경제적-군사적 수요 외에도, 여말선초의 혼란기가 끝나고 조선이 안정기에 들어가며 백병전 자원이 감소하기도 했다. 혼란기에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데려와 보면 칼질 몇 번쯤은 해본 경력 있는 신입이었는데, 치안 안정기에는 인구는 늘었어도 창칼을 다뤄본 사람은 줄어들기 때문이다[2] 즉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민들이야 창칼을 다뤄볼 일도 적고, 군역을 지더라도 어렵고 위험한 근접보병을 선호할 리가 없었다. 급료를 더 준다고 해도 자원자가 없어서 강제로 채워넣어야 했다.

4. 방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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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팽배수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쇄자갑(체인메일)을 입고, 팽배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원방패(팽배)를 착용한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갑옷 양식이기도 했다. 두 번째 사진의 팽배수는 첨주형 투구를 쓰고 경번갑을 입었다. 야전군은 위의 복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사진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수한 갑옷에 목/어깨 보호대를 착용했을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화포를 주력으로 쓰더라도 여전히 육박전을 중요시해서 중무장이 기본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검은 전포를 걸친 조선군은 총포류 무기가 보급된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갑옷으로 유명한 두정갑, 두석린갑도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갑옷이다.

5.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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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배수는 위의 갑옷, 원방패와 함께, 검[3][4]을 주력으로 한 근접전 무기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의 그림에서 잘못된 점은 수군이 아닌 팽배수가 함선에 올라탔다는 상황이다.[5]

팽배수와 유사한 병종으로는 조선 후기의 등패수가 있다. 등패수는 방패 뒤에 꽂아둔 투창(원래 표기는 표창)을 자주 썼는데, 적이 접근하면 투창을 던져서 견제하고, 적이 완전히 근접하면 검과 방패를 들고 방진을 형성했다.

6. 팽배수와 여진족

조선초기에는 주로 북방의 여진족과 대치했으며, 최전방 지역에는 주요 거점마다 목책으로 이루어진 요새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일정 규모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주로 이들 요새들을 공격하거나 주요 이동로에서 이동하는 조선군을 기습공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경지역에서 자주 소요를 일으켰다. 팽배수는 바로 이들을 상대로 싸웠던 병력이었다.

흔히 여진족이라고 하면 기병을 연상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여진족은 완전한 유목민으로 볼 수 없었고, 특히 함경도 지역은 산세가 험준해서 산악전투가 많았다. 조선으로 침입한 여진족들은 숲이 우거진 지역이나 바위가 많은 이동로에서 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 방패로 신속히 방진이나 귀갑진을 형성해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보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팽배수는 기병전에서도 중요한 병종이었다.

하지만 전쟁터가 영토 바깥이나 해안까지 넓어지고, 전반적으로 국토가 안정되자 팽배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넓은 영역을 수비해야 하는 전략 상황에서, 양성이 어려운 팽배수는 조선의 상황에서 비효율적인 병종으로 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팽배수들이 건재하던 시점의 여진족들은 히트 앤 런의 전술을 구사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갑옷으로 무장한 자들이 열에 한두 명 정도로 경무장한 자들이 많았고, 여진족들의 숫자 또한 부락마다 차이가 있어 수백에서 천 명 정도였다. 실제로 4군 6진과 함께 진행된 파저강 정벌 중 생포한 자가 남녀노소 합쳐 236명, 사살자 183명이며, 조선군의 경우 보병과 기병을 합해 총 1만 5천 명 중 전사자가 4명, 부상자는 도합 25명으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요인이 사격전이라는 보고 내용이 실록에 있다. 원방패로 여진족들의 사격전을 방어하는 것 외엔 대규모 백병전이 사실상 없었던 만큼 팽배수들이 도태됨은 필연이었다.

7. 진법

이들이 활동했던 조선 초중기 팽배수와 총통은 보병전에서 반드시 투입되는 병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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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은 상황에따라 병종이 유기적으로 투입되는데, 위의 유형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원거리에서 적을 총통으로 무력화 시키고, 팽배수는 적이 돌진해오면 저지선의 역할을 하거나 전진해서 적을 제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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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창수가 뒤를 받치는 형태이다. 총통이 원거리 공격을 하고, 뒤이어 팽배수가 선두에 서며, 창수가 뒤를 받치면서 적의 돌격에 대비하거나 전진해서 제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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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쏘는 사수가 추가된 형태이다. 원거리의 적은 총통을 발사해서 1차로 무력화 시키고, 사수가 활로 2차로 무력화 시킨다음, 팽배수와 창수가 맞서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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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보병의 오위병종이 모두 포진된 유형으로 총통이 원거리의 적을 무력화 시키고 사수가 지근거리에서 2차로 무력화 시키면, 팽배수가 근접하는 적을 맡게 되고 창보병이 뒤를 받치며 장검을 든 도수가 마지막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전형이다.

8. 기타

다른 매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팽배수의 초기 조선군 갑옷, 환도와 근접무기들을 이용하는 방진을 구현하기가 비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 사극에서는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복장은 물론이고, 고려시대 병사들의 복장조차 고증이 안 되는 편인데, 시기적으로 애매한 조선초중기의 팽배수는 더욱 홀대를 받는다.

그나마 등장한 사례를 보면 대왕 세종이 있다. 대마도 정벌전이 벌어졌을 때 팽배수들이 상륙해서 왜구들과 싸운다. [6] 참가했는지 확실치 않은 팽배수의 고증도 엉망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처럼 싸워서 더욱 소소한 웃음을 준다.[7] (...). 그래도 위에서는 방패 던지기가 안 나왔는데, 웃기게도 왕의 얼굴에서는 진짜 방패 던지기가 나왔다. # (...).

토탈 워: 쇼군2 임진왜란 모드 2.8에서 조선 검병으로 나온다.

팽배수의 후신인 등패수가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9. 관련 문서



[1] 환도, 박도, 유엽도 등의 도검류부터 도끼나 철퇴도 흔히 쓰였다. [2] 일본에서도 전국시대엔 일개 농민도 수 틀리면 칼부터 뽑아들었지만, 에도막부 성립 후 평화기가 되자 사무라이가 칼 보고 놀라서 도망치는 일이 생기곤 했다. [3] 나무위키 일부의 생각과 달리 원래 검 안에는 검도 있고 도도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서 월도나 협도, 참마검, 피 같은 긴 손잡이를 가진 검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범죄를 다루는 법전에 도검류라고 표기하였기 때문에 이쪽이 더 친숙해졌으므로 도검류라고 해도 무방하다. 언어는 계속해서 변하는 법이다. [4] 검의 한자도 칼 검이고 도의 한자도 칼 도이다. [5] 다른 부분에도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있지만, 명백하게 팽배수로 보이는 장비를 지닌 병사가 함선에 타고 있다는 점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팽배수는 수군과는 근본적인 편제부터가 다르다. 현대로 치면, 육군이 육군 장비를 지니고 해군 함정에서 전투를 맡는다는 이야기랑 비슷하다. 허나 임란 당시 조선군의 보급체계가 무너지고, 초반 조선군의 패배로 군사편제가 와해되면서 육군이 수군에 편제되거나 수군이 육군 장비를 지급 받거나 또는 노획후 전투에 임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6] 드라마 이름에서 헷갈릴 수 있지만, 대마도 원정은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던 태종이 진행했다. 또한, 팽배수는 북쪽에서 산악전과 기동전을 치르는 병종이었으므로, 대마도 원정에 참가했는지는 알기 어렵다고 한다. 대마도 원정은 남부의 수군부대가 주력이었는데, 위의 주석에도 나오듯이, 육군과 수군처럼 소속이 전혀 다르면 훈련방법이 다른 병종이 된다. 여진족을 밀어내고 있었겠지 [7] 다만 드라마에서의 정벌군은 도성의 군사, 즉 금군들이였기에 여기에 속한 팽배수들인 것으로 보인다. 금군들이 정벌군에 다수 차출되자 도성의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묘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