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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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3년 | |
이름 | 패티김 | |
분야 | 가수 |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1996년 | |
이름 | 패티김 | |
분야 | 가수 | |
화관문화훈장(5등급) |
<colbgcolor=#4B0082><colcolor=#fff> 패티 김 Patti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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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혜자 (金惠子) |
출생 | 1938년 2월 28일 ([age(1938-02-28)]세) |
경기도
경성부 인사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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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주 김씨 |
최종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1] |
배우자 |
길옥윤(1966 ~ 1973) 아르만도 게디니(1976 ~ ) |
자녀 |
장녀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1968년 11월 13일생)[2] 차녀 카밀라 게디니(1978년 12월 30일생)[3] |
학력 | 중앙여자고등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 ( 침례회)[4] |
신체 | 168cm[5], B형 |
데뷔 | 1958년 미 8군 무대 |
활동 시기 | 1958년 ~ 2013년 |
소속사 | PK 프로덕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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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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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여성 팝 보컬의 시작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의 前
가수.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평가 및 위상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영원한 라이벌인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함께 여성 가수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선 대가수이자 자타공인 전설적인 디바이다. 한국형 팝보컬의 선구자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숱한 '최초'의 타이틀을 기록한 인물이다. 뛰어난 무대매너와 트렌디한 스타일링, 팝을 기반한 보이스 색깔과 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으로 가장 격조 높은 보컬리스트로 꼽힌다.3. 활동
1956년에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2년 후 1958년 미 제8군 무대에서 가수 이해연과 듀엣으로 가수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었는데 1959년 1월 초에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으로 바꾸었다.[6]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해방 후 1960년,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7] 한국가수 2번째 미국시장 진출[8],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9][10],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13년,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여러 곡의 히트곡을 냈고 누가 뭐래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형 여성 가수였다.〈 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11], 〈 서울의 찬가〉,〈그대 없이는 못 살아〉[12]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2022년 11월 26일, 12월 3일, 12월 10일 3부에 걸친 불후의 명곡 패티김 편을 통해 거의 만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했다. 영상1 영상2 영상3 영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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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가요무대 스페셜 |
그리고 2023년 11월 18일에 불후의 명곡 in 뉴욕 방송에 재출연했다.
2024년 2월, IU의 미니 6집 ' The Winning'의 수록곡 'Shh..'에 스페셜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3.1. 이미자와의 라이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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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과 이미자 |
실제로도 서로 신경전이 치열했던 걸로 유명했다. 작곡가 임석호가 방송에서 밝히기를 패티김을 영입하고 싶어했던 이미자의 소속 음반사 회장이 "우리와 계약하면 이미자와 같은 급으로 대우 해주겠다"고 직접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티김 측에서 "최고의 대우도 아니고 이미자와 동급 대우가 말이 되냐" 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계약이 불발되었다. 그 외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방송국 측에서 패티김과 이미자를 동시에 섭외하려고 했었는데, 어느 한 쪽의 출연 순서가 뒤로 밀리면 캐스팅을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1순위로 써진 큐시트를 두 가수에게 보냄으로서 겨우 캐스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가수가 리허설을 빨리 끝내고 무대에 먼저 올라가자 '나 일 있어서 무대 안 올라간다' 며 그냥 노래를 안 부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든 뒤엔 함께 토크쇼에도 나오고 덕담도 해주는 등 디바기질이 많이 가라 앉기는 했다. 2010년에는 고인이 된 박춘석 작곡가의 추모 특집으로 방영된 방송에 같이 나온 적이 있는데 "나는 대중가수지만 이미자는 국민가수다. 나랑 비교하기 힘들다." 라고 세간의 불화를 일축시킨 바 있다. 또 패티김 본인의 은퇴 당시 인터뷰에서는 "우리는 같은 가요계를 걸어온 동반자일 뿐, 라이벌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며 일축한 바 있다.
4. 가족
원래 길옥윤과 1966년에 결혼했으나 1973년에 이혼했고, 1976년 이탈리아 사람인 아르만도 게디니(Armando Ghedini, 1938년 9월 10일~)와 재혼했다. 아르만도 게디니와는 백년해로 중이다.길옥윤과는 진짜로 성격 차이로 이혼했는데, 술이나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자고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을 정도로 칼같은 패티김의 성격과는 달리 길옥윤은 술을 마음대로 마시고 그래서 자주 만취된 상태를 보여줬던 데다가 도박을 즐기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이었던지라 금슬이 좋기 힘들었다.
슬하에 2녀가 있지만 큰딸 최정아(1968년 11월 13일~)[13]는 전남편 길옥윤의 딸이고 둘째딸 카밀라 게디니(Camila Ghedini, 1978년 12월 30일~)는 패티김이 이탈리아인인 현재의 남편인 아르만도 게디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패티김 이탈리아'라는 자동 검색어까지 있다.
그런데 장녀 최정아도 영국 백인 사위 윌리엄스와 결혼하는 바람에, 패티김의 후손은 장녀 최정아를 제외하고 전원 백인 혼혈이 되었다. 다만 장녀 최정아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부모양계주의 국적법으로 전환되어서 1998년 6월 14일생부터 부모 중 한명이 한국인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한국 국적이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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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부부[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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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카밀라 게디니 |
차녀 카밀라 게디니는 이탈리아 혼혈로 빼어난 미인에 키까지 커서(171cm) 모델을 연상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2003년에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수 패티김의 딸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으며, 데뷔하기 전에 팬클럽이 형성되는 등 반응이 좋았다. 데뷔앨범 역시 당시 유명했던 유정연[15], 업타운의 정연준, 러브홀릭의 강현민 등 유명 프로듀서진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서와 맞지 않는 한국 연예계의 시스템과 문화를 많이 어려워 했고, 자신의 음악 지향점과 맞지 않는 장르를 강요받는 등 한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1집을 이후로 가수활동을 접어 버린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웨딩플래너로 전직한 후 정착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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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아와 카밀라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친자매 이상으로 좋은 우애를 과시하고 있으며, 최정아는 새아버지 아르만도에게 새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효도를 다하고 있다.
5. 대표곡
- 1958년 Padre
- 1958년 Summer Time
- 1958년 사랑의 맹세(Till)
- 1962년 초우
- 1966년 4월이 가면
- 1966년 사랑의 세레나데
- 1967년 그대 없이는 못 살아
- 1967년 무정한 밤배
- 1967년 살짜기 옵서예
- 1967년 빛과 그림자
- 1967년 연인의 길
- 1967년 하와이 연정
- 1968년 9월의 노래
- 1969년 사랑하는 마리아
- 1969년 서울의 찬가
- 1970년 태양이 뜨거울 때
- 1970년 1990년
- 1970년 사랑하는 당신이
- 1970년 사랑이란 두 글자
- 1971년 능금꽃 피는 고향
- 1971년 장미와 빤따롱
- 1972년 바람따라 별따라
- 1972년 서울의 모정
- 1972년 이별
- 1972년 사랑이여 다시한번
- 1974년 다시 한 번 안녕
- 1974년 사랑은 영원히
- 1975년 나는 가야지
- 1978년 초겨울
- 1978년 못 잊어
- 1978년 추억속에 혼자 걸었네
- 1978년 친구여 안녕
- 1978년 멀리 있어도
- 1982년 가을의 연인
- 1982년 당신이면 좋아요
- 1982년 행복한 여자
- 1983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 1983년 사랑이여 그날까지
- 1984년 사랑은 생명의 꽃
- 1984년 가시나무새
- 1984년 밤에 쓰는 편지
- 1987년 사랑은
- 1987년 슬픈 사모
- 1990년 누가
- 1990년 사랑은 멀어지고 이별은 가까이
- 1990년 인생은 작은 배
- 1995년 인형의 눈물 - 길옥윤 사후에 발표된 곡이며, 길옥윤의 유작이다.
- 1998년 우리사랑 - 조영남과 함께 듀엣으로 함께 부른 곡이다.
- 1999년 인연
- 2008년 그대 내 친구여
- 2008년 나의 노래 - 김희갑& 양인자 부부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노래다.
6.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연도 | 출장 횟수 | 곡명 | 출연 순서 | 상대 |
1989년 / 제40회 | 初 | 이별 | 16 / 20 | 이츠키 히로시 |
7. 기타
20대 시절의 패티김 |
-
이국적인 외모와 큰 키,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누드집을 찍고 왔다'는 루머를 비롯해서[16] 성형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 말에 따르면 "미8군 공연 시절 쌍꺼풀 수술과 코 수술은 받은 적은 있지만 이전의 개성을 잃어버리는 듯해 코에 넣었던 보형물을 오히려 제거했고 그 외에는 얼굴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었다" 며 성형루머를 정면으로 부인한 바 있다.[17] 실제로 젊은 시절과 현재 모습을 보면 쌍꺼풀과 젖살이 빠진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18] 밑에 있는 1974년 영상으로 비교해 보자.
* 노래하는 패티김의 발음을 들어보면 서울 출신인데도 요즘 서울 말씨와 억양과 발음이 좀 달라서 북한 사람들 말투와 거의 비슷한데, 이것이 당시의 서울 사투리이다.
-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광팬이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다고 한다.[19] 한 번은 자신의 딸에게 "내가 마이클 잭슨이 너무 보고 싶은데 그 분 집 앞에 가서 꽃이라도 놓고 가면 안 될까?" 라고 말하자 "엄마. 마이클 잭슨이 무슨 옆집 이웃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팬이 만나고 싶다고 무작정 만나주는 게 어딨냐." 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 휘트니 휴스턴도 역시 가장 좋아했던 아티스트로 내한 당시 콘서트를 직접 찾아갈 정도로 팬이라고 한다. 원래 자신에게 초대권이 왔었는데 일부러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직접 제일 앞자리를 예매해서 봤다. 당시 휘트니 휴스턴이 웬 백발의 여성이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면서 따라부르는 게 신기해서 직접 객석으로 다가가 인사도 나눴는데, 객석에서 패티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들 놀래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굉장히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미 칠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운동과 목관리로 전성기때 컨디션을 유지해 왔다. 매일매일 5km씩 걷기 운동과 요가를 비롯해 수영 1500m를 한다.[20] 식이요법도 철저해서 데뷔 후 배불리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21] 그 때문인지 은퇴 기자회견 때는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몸매와 멋진 패션감각으로 화제가 되었다.
- 절친으로 잘 알려진 연예인은 조영남. 사석에선 아예 누이, 동생이라고 일컬는 사이이다. 패티김이 은퇴 당시 자서전을 쓸 때 직접 내용을 다듬고 책을 써줬을 정도였다.[22] 자서전에서는 '누나는 왜 그리 띨띨하냐' 라고 농담섞인 디스를 할 만큼 친하다. 애초에 미8군 시절부터 같이 공연을 뛰던 사이였고, 연예계에 진출한 뒤로도 쭉 죽마고우 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안 친한 게 이상할 사이이기는 하다. 자니 윤과도 함께 친했다. 조영남이 같이 자니 윤 쇼를 할 때, 자니윤이 튀김이-(패)튀김, (조)영남이, 자신을 (쟈)니윤이, 앞글자만 해서 조.패.자(존나게 패자) 삼인조 라고 말장난 삼아 부른 적이 있다.
- 무대욕심이 엄청나서 원래 방송국 측에서 배정된 예산에 직접 사비를 들여서 무대를 꾸미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방송인 이상벽이 밝히기를 일반적인 가수에게 배정된 출연료가 200만원이면 '난 500만원 주세요. 난 패티김이니까' 라며 출연료를 협상했고, 요구가 거두어지면 자신의 사비를 더 보태서 무대 연주 세션도 훨씬 고급으로 채우고 연출도 훨씬 신경써서 꾸몄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연장에서는 화장실에서 팬과 만날까봐 대기실에서 요강을 쓰고, 무대 위에서는 배에서 소리가 날까봐 아예 가슴 아래로는 마이크도 안 댈 정도로 철저히 무대에 임하는 걸로 유명하다.
- 히든싱어 시즌1 기준으로 섭외 공고가 있었던 가수였지만 고령의 나이라 출연이 어려운데다 이미 은퇴를 해서 출연 가능성은 제로인 상황이다. 생전 출연의 일말의 가능성은 목소리는 사망한 가수들과 같이 녹음으로 나오고 본인이 그것을 관전하는 것이다.
- 1980년대 초반에 잠깐 서초동에서 '맘마미아'라는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한 바가 있다. 가격은 4인 가족에 1만 5천~2만 원. 당시 이탈리아 레스토랑 중에서는 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 당시 노조 가입자의 월평균 임금이 25만 원이었으니 서민들이 특별한 날에 가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는 가격이었다. #
[1]
무릎팍도사 패티김 편에 출연하여 '외국에 살면서 용돈 떨어지면 국내 공연을 하러 온다'는 얘기가 돌았다는 얘기를 꺼내며 본인은 단 한 번도 외국 국적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계속 한국의 이태원에 살고 있었다고 오해를 풀고 싶다고 밝혔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태어난 인물이므로 어릴 때 일본 제국(일제강점기 조선)과 조선 국적(미군정)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Joung-ah Ghedini-Williams. 한국명 최정아. 유엔난민기구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길옥윤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링크드인 프로필
[3]
아르만도 게디니 사이에서 낳은 딸로, 2003년 가수활동을 했었다.
[4]
패티김 본인이 발매한 가스펠 앨범 수록곡 중 '살아계신주' 가사에서 '주 하나님'을
한국 가톨릭 식으로 '주 하느님'으로 불러서 천주교가 아닐까 할 수 있는데 개신교가 맞다.
[5]
현재 기준으로도 장신이지만, 그 당시 여성의 평균키는 151cm였고, 그래서 별명이 대형 가수였다. 당시엔 남성 평균키도 170cm를 밑돌던 때였다. 여성 평균키가 161cm인 요즘으로 치면 179cm쯤 되는 연예계에서 손 꼽히는 수준의 장신이다.
[6]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정부가 주도하는 외래어 순화바람 (당시 명칭 국어순화운동)이 불면서 연예인 예명 짓는 거까지 태클이 걸려오는 바람에 잠깐 동안 본명인 김혜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패티김 본인은 언짢아했지만 방송 심의가 심했던 시절인지라 거부하면 출연에 제재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후문이 있다.
[7]
일본 정부에 의해 직접 초청받았다고 한다.
[8]
첫째는
김시스터즈다.
[9]
최초는
조용필이 81년도에 공연한 것이 최초이고, 패티김은 여가수 중에서는 최초로 공연한 케이스.
[10]
다만 이는 대단한 커리어라고 보기는 힘든 게 실제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했다는 아티스트들의 대관장소는 대부분 본 공연장이 아닌 300~600석 규모의 카네기 홀 내 다른 공연장에서 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공연장은 일반인에게도 그냥 사비만 내면 개관을 허락해 줄 정도로 허들이 높은 공연장은 아니다. 애초에 카네기 홀 자체가
클래식 음악 공연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것이지
대중음악적으로 의의가 깊은 장소가 아니다. 당장 1999년도에 이런 기사가 뜰 정도로 카네기 홀을 이용한 네임밸류 부풀리기를 지적하는 기사가 뜬 적도 있다.
# 실제로 과거
인순이가
예술의 전당 대관을 거부당한 일을 두고 '카네기 홀은 대중가수에게도 공연장을 잘 빌려주는데 왜 한국은 이렇게 차별이 심한가' 라는 논조로 반박하다가 이러한 전말이 드러난 뒤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11]
김보연 원곡
[12]
K리그
대구 FC,
KBO 리그
LG 트윈스와
KIA 타이거즈가 응원곡으로 사용중이다.
[13]
길옥윤의 본명은 최치정이라 성이 최씨다.
이탈리아식 이름은 폴라 게디니(Pola Ghedini). 이로 미루어 보면 패티김은 이혼 후 딸을 자기가 데려가서 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하고 있다.
[14]
패티김과 아르만도 게디니다.
[15]
90년대와 2000년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로 당시 유명한 발라드 히트곡드을 여럿 만들었다. 현재는 바이올리니스트로만 활동하고 있다.
#
[16]
실상
수영복 사진이 일본 주간지에 실린 것 뿐이었는데, 이게 와전이 되어 누드집 루머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17]
본인은 이와 관련하여 "연예인의 루머가 퍼지는 데는 10분이면 되는데, 해명에는 10년이 걸린다" 며 답답함을 토로한 바 있다.
[18]
한국인에게는 드문 아이홀이 있는 눈이다. 이런 눈은 어릴 때 홑꺼풀이라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쌍꺼풀이 생긴다. 수술하면 오하려 부자연스러워지는데, 패티 김은 젊은 날 기술도 좋지 않던 시절 수술해서 그런지 눈매가 부자연스럽게 됐다. 그래서 70년대 활동 당시엔 눈화장을 지나치게 세게 하고 다녔고, 아이덴티티(?)로도 여겨졌다. 90년대 이후엔 괜찮은데, 나이 들며 눈매가 저절로 자리가 잡혔거나 교정 수술을 한 것 같다. 이런 아이홀 때문에 조금만 화장을 잘못해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눈은 여자친구
은하도 가지고 있다.
[19]
패티김 曰 "마이 히어로, 마이클 잭슨!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찡하다. 그는 전무후무한 아티스트다. 절대로,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올 수 없다."
[20]
일반적인 수영장 레일 길이가 25m이다. 1500m면 약 30번을 왕복하는 셈인데 대단한 체력이 아닐 수 없다.
[21]
현미가 방송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지방 공연을 앞두고 팬들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현미가 설렁탕을 먹고 오는 모습을 보고 '언니는 무대가 바로 코앞인데
설렁탕을 다 먹냐' 고 기겁을 했다고. 그러면서 말하기를 "걔는 진짜 고기 이만한거 (손가락 마주모으며) 한 덩이야" 라며 놀라워했다. 어찌보면 소식좌 연예인의 시조격이다.
[22]
사실 조영남이 인간성은 개차반이었어도 본업인 가수로서는 최고의 실력자였고, 친한 사람에게는 잘 했으며 글 솜씨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