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11><colcolor=#fff> 김시스터즈 The Kim Sist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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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민자, 김숙자, 김애자 | |
장르 | 스윙재즈, 발라드, 팝 |
리더 | 김숙자 |
데뷔 | 1953년 |
해체 | 1975년 |
레이블 |
Epic Records (1959년) Mercury Records (1961년) Monument Records (1963년 ~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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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2. 활동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 이난영이 그의 딸들인 김숙자와 김애자, 조카 이민자[1]를 모아 김시스터즈로 데뷔시켰다. 1953년에 미8군 부대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당시 멤버들의 나이는 리더이자 맏언니인 김숙자가 겨우 13세, 막내인 이민자는 11세였다. 김숙자, 김애자의 부친인 김해송은 태어날 때부터 월북 후 실종 상태였다.음악적 성향은 재즈, 특히 당시 유행했던 스윙재즈가 메인이었고 로큰롤, 일반 팝송, 컨트리 뮤직, 국악 등 다양했다. 세대 구분을 하자면 대한민국 재즈 0세대, 대한민국 걸그룹 0세대이다.
1959년에 대한민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했는데, 당시 미국의 최고 TV쇼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했다.[2] 1970년 5월 한국으로 귀국해 공연을 펼쳤고 한국과 미국을 돌아다니다가 1975년에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2.1. 해체 이후
- 김숙자는 현재 라스베가스에서 거주 중이다.
- 김애자는 1987년 폐암으로 라스베가스 메모리얼 병원에서 사망했다.
3. 무대 영상
김시스터즈의 무대는 4분 40초부터 나온다.[4]
에드 설리번 쇼 출연 모습. 1분부터 가수이자 김시스터즈의 어머니[5] 이난영이 같이 나와 흑인영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부른다.
4. 루머
4.1. 빌보드 Hot100 7위에 올랐다?
김시스터즈의 곡 "Charlie Brown"이 빌보드 싱글 차트 7위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일부 언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도는데 현재 존재하는 자료와 정보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없다.Charlie Brown은 더 코스터즈라는 그룹이 1959년 발표한 곡인데 김시스터즈가 이 곡을 커버해서 음반을 취입한 것까지는 확인이 된다. 또한 빌보드 핫100 7위 이야기는 한국어 웹사이트 또는 한국 언론의 영문판에서나 찾을 수 있는데, 만약 김시스터즈가 핫100 7위에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1962년 당시의 빌보드 싱글 차트가 발굴되든지, 아니면 미국측 웹사이트에서도 한 번은 거론될 만한데도 아무런 출처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시스터즈는 빌보드지에 몇 번 실린 적 # #은 있으나 정작 김시스터즈가 7위에 올랐다는 그 싱글 차트만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규성이라는 평론가가 자신의 저서 <대중가요 LP가이드북>에서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핫100 7위에 올랐다는 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후일 발표한 <걸그룹의 조상들>이라는 저서에서는 " 차트를 확인해본 결과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오른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정정한 바 있다. 한편 김시스터즈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을 감독한 김대현 감독 역시 영화 제작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올랐다는 것이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밝힌 바 있다. 이를 볼 때 김시스터즈의 빌보드 핫100 7위설은 거짓임이 확실하고 싱글 차트 진입 자체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동아일보, 문화일보, KBS 등 온갖 제도권 언론에서 이 설을 그대로 보도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를 확대 재생산할 기미가 보이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5. 여담
- 멤버들의 영어 이름이 우리의 예상과는 약간 다르게 표기되었다.
- 숙자는 Sukja나 Sookja일 것 같지만 Sue(수)라고 표기되었다.
- 애자는 Aeja일 것 같지만 Aija(아이자, 에이자)라고 표기되었다.[6]
- 민자는 Minja일 것 같지만 Mia(미아)라고 표기되었다.
- 이렇게 표기한 것은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멤버들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약간 고친 것으로 보인다.
- 20여 개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머니의 충고를 충실히 따른 덕이었다. 어머니는 김시스터즈에 남자를 사귀지 말며, 모든 악기를 배울 것이며, 성공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 음악적 재능은 그들의 아버지 김해송, 이봉룡과 이난영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난영 여사는 자식들과 조카들을 엄격히 연습시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로 데뷔시켰으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이트도 거절하는 등 김시스터즈 멤버들이 음악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 데뷔를 준비 할 때 어머니 이난영 여사가 장터에서 해적판 미국 레코드들을 구해왔는데 'Ole Buttermilk sky'( 링크), 'Candy and Cake'( 링크) 등 스윙재즈 재즈스탠다드로 주로 연습했다고 한다. 그들의 음반을 들어보면 상당수가 음악 성향이 스윙재즈고 락앤롤, 팝송 성향의 곡들 위주의 음반과 영상들이 남아 있다.
-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성공한 후 이난영 여사와 김보이스가 미국에 가서 협연까지 했으며 윤복희, 김치캣츠, 패티김 등의 수많은 후배 여가수들이 미국에 진출했지만, 1970년대에 한미관계가 나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끊겼고 한참 뒤인 2009년에야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 시도로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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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김대현 감독의 관련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꿈, Try to Remember'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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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TVN에서 김시스터즈를 다룬 드라마 '위대한 이야기. 1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위대한 이야기'를 방영했다.
- 창작뮤지컬 시스터즈에도 등장한다.
[1]
가수 겸 작곡가인 이봉룡의 딸.
[2]
참고로
비틀즈보다도 더 많이 출연했다.
[3]
이쪽도
로드 스튜어트 등 협업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2006년에 부인과 함께 헝가리로 귀국한 상태라고 한다.
[4]
참고로 썸네일 가운데의 여인은 가수
송민도.
[5]
이민자에게는 고모(부친이 이난영의 오빠).
[6]
스틸리 댄의 명곡 Aja도 실제 지인의 한국계 와이프 이름인 애자에서 유래했는데 마찬가지로 에이자로 발음한다.
[7]
이 수치는 21세기에도 B-급 연예인이 매일 행사 1개씩은 뛰어야 채울 수 있는 금액이며 1960년대 미국 평균 임금이 5,600달러(2020년의 딱 1/10)였음을 비교하면 당시 한국을 아득히 넘어 당시 미국에서도 스타급 대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진출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