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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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31대 국무총리 | ||
한문 | 潘復 | |
한국식 독음 | 반복 | |
영문 | Pan Fu | |
자 | 형항(馨航) | |
출생 | 1883년 11월 22일 청나라 산동성 제녕 | |
사망 | 1936년 9월 12일 중화민국 베이핑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청나라 거인 | |
직업 | 사업가, 정치가 | |
국무총리 재임 기간 |
31대 1927년 6월 20일 ~ 1928년 6월 3일 |
1. 개요
중화민국의 31대이자 마지막 국무총리.2. 생애
1883년 산동성 제녕에서 태어났다. 과거시험을 보아 거인이 되었으며 강소성 포정사 육종기의 막료로 들어갔다. 1911년 육종기가 산서성 순무로 승진하여 산서성에 부임했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진윈펑과 함께 노풍 제분회사를 경영하며 사업을 했다. 이 인연으로 1919년 진윈펑이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재정차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 하도 독판이 되었다가 1926년 10월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톈진에 거주하면서 장쭝창 등 봉천군벌의 여러 정객과 두루 친했는데 하도 독판 임명도 장쭝창이 힘을 써준 것이었다.1927년 1월 구웨이쥔 내각이 출범하면서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7년 6월 16일 장쭤린이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추대되면서 그와 친했던 장쭝창과 쑨촨팡이 판푸를 추천하여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 6월 16일 구웨이쥔은 즉각 국무총리에서 하야했고 6월 18일에 대원수로 취임한 장쭤린은 6월 20일 판푸를 국무총리에 정식으로 임명했다. 판푸는 외교총장에 음태, 군사총장에 허펑린, 내무총장에 심서린, 재정총장에 염택부, 사법총장에 요진, 실업총장에 장징후이, 농공총장에 유상청, 교육총장에 유철을 임명했는데 이들 모두가 봉천군벌의 인물로 명실상부한 봉계 내각이었다.
당시 국민당의 1차 북벌과 계속된 군벌내전으로 많은 군비를 썼던 북양정부는 재정난이 심각했다. 군사들의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병사들이 난군으로 돌변해 약탈을 일삼는 처지였고 이에 장쭤린은 판푸에게 군비 조달을 명령했다. 판푸는 친구인 염택부를 재정총장에 임명해 어떻게든 자본을 조달해보려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28년 장제스가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북양정부는 계속 위기에 몰렸고 1928년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야다 시치타로가 5.18 각서를 발표하여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겠다고 통보하는 등 외부적인 압력도 심했다. 5월 30일 판푸는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개최한 군정부 수뇌회의에 참석하여 만주로 총퇴각하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새벽 1시, 판푸는 장쭤린과 같이 전용열차에 탑승하여 봉천으로 향했지만 아침 6시 30분에 톈진에 도착했을 때 덕주에 있는 장쭝창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로 진윈펑과 같이 하차했다. 이후 장쭤린이 탄 열차는 6월 4일 고모토 다이사쿠 등 관동군 고급장교들이 꾸민 황고둔 사건으로 폭발하여 장쭤린은 사망했다. 이로 인하여 북양정부는 사실상 소멸되었고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선언함으로 완전히 종식되었다. 판푸의 임기는 대원수에 오른 장쭤린이 죽은 6월 4일이나, 봉천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6월 3일 정도로 간주된다.
1928년 12월 동북역치가 발표된 이후 다롄과 톈진을 오가며 거주했다. 1936년 병환 치료를 위해 베이핑을 찾았다가 결국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