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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2:27:43

퇴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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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퇴촌면
退村面 | Toechon-myeon
<colbgcolor=#00aa51><colcolor=#fff>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기초자치단체 광주시
행정표준코드 5540034
관할 법정리 10리
하위 행정구역 19행정리 56반
면적 60.70㎢
인구 15,824명[1]
인구밀도 260.69명/㎢
정치 {{{#!wiki style="margin: -0px -11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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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탑골길 6 (광동리 327-1)
퇴촌면 행정복지센터
1. 개요2. 연혁3. 정치4. 대중교통5. 교육6. 특산물7. 관할 리
7.1. 관음리7.2. 광동리7.3. 도마리7.4. 도수리7.5. 무수리7.6. 오리7.7. 우산리7.8. 원당리7.9. 영동리7.10. 정지리
8. 여담9.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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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ichon.gif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탑골길 6에 위치한 퇴촌면사무소 전경.

1. 개요

경기도 광주시 북부에 있는 . 이름의 유래는 태종 이방원의 공신인 조영무가 말년에 사직하여 남은 삶을 보낸 곳이라 하여 그의 호인 퇴촌에서 따와 퇴촌면이라 부른다. 지금은 은퇴자들이 많이 와 살고 있어 은퇴자들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퇴촌이라 해도 무방하다.

2. 연혁

3. 정치

1952년 초대 면의회 의장은 자유당 소속으로 이장과 국민회지부장 등을 지낸 이철규(49)가 지냈다. 퇴촌면은 전원이 자유당 소속이었다.[5] 이후 1956년 선거에서는 구연목(71)이 의장을 지냈다. 그후 면 단위 지방자치가 폐지되었다.

4. 대중교통

크게 하남시 방면, 천진암 방면, 영동리 방면, 수청리 및 양평군 방면으로 나뉜다. 공영버스 노선의 자세한 내용은 광주시의 공영버스/퇴촌, 남종면 참고. 그냥 퇴촌으로 표기한 곳은 퇴촌농협 정류소를 의미한다.

5. 교육

6. 특산물

7. 관할 리

이름의 유래는 광주시청 페이지를 인용하였다.

7.1. 관음리

1923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에 관음동(觀音洞), 도장동(都長洞)[7], 절골을[8] 통합하여 '관음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출처

피서철이 되면 휴양지로 종종 퇴촌 계곡부터 천진암이 거론되는데, 대부분 관음리에 속해있는 곳들이다.

7.2. 광동리

광동리(光東里)
1923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광복동'(光復洞)과[9] '동지벌촌(東地筏村)을[10] 합하여 '광동리'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

2017년 7월 기준, 도수리와 더불어 퇴촌면에서 그나마 다운타운 수준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어느 정도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CU GS25 같은 편의점 정도. 그렇다고 해서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이디야 커피숍과 인형뽑기 가게와 롯데리아, 맘스터치, 배스킨라빈스가 들어왔다.

7.3. 도마리

이곳에 사람을 괴롭히는 여우를 한 도공(陶工)이 죽이자, 그 죽은 여우의 혼이 다시 사람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혼을 누르기 위하여 질(陶)로 말(馬)을 만들어 여러 개를 이 고개에 세웠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을 '도마리'(陶馬里)라 하였는데 그 후데 '道馬里'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지리적으로 서울 부근에서 만약 퇴촌면에 들어오게 된다면 맨 처음 발을 들이밀 수밖에 없는 곳이다.

7.4. 도수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도지동(陶池洞)과[11] 수동(水洞)을[12] 합하여 '도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학교와 주택 몇 개만 있던 시골풍경이지만, 최근에는 신축 빌라들이 제법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논밭이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의 동네다.

7.5. 무수리

예전에 이 마을에는 광산 김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었는데, 경치가 좋고 인심이 후한 곳으로 마을 주민들이 모두 '근심없이 모두 산다'고 하여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광주시에서 유일하게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이 접근하지 않는 오지 지역이다. 제일 가까운 버스정류장인 무수리입구 정류소에서 약 2.7km 를 걸어가야 하는데, 그나마도 운행 횟수가 매우 적은 서하리 방면 버스를 타야 갈 수 있는 정류소이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버스정류장은 도마삼거리 정류소인데, 정류소에서 내려서 약 3km 를 걸어가야 하는데 중간에 산을 하나 넘어가야 한다.

7.6. 오리

이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오동나무가 1그루 있어 그 나무의 상태를 보아 1년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여 '오동나무골'이라 하다가 한자로 '梧里'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팔당댐이 생긴 이래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출처

7.7. 우산리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세가 마치 가 누워있는 와우형(瓦牛形)이라고 해서 '우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처

7.8. 원당리

예전에 이 마을에는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원지'(元地)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원댕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다고 해서 '으뜸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원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7.9. 영동리

조선초기에 광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면서 동쪽에 있는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영동리'라고 불러왔음. 거먹골, 구룡동, 석둔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음.

7.10. 정지리

파일:jeongjiri toechon.jpg
정지리에 자리한 경안천습지생태공원
1923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정자동'과[16] 지위동(支渭洞)을[17] 통합하여 '정지리'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

토마토 농사 지역이 많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경안천을 따라 경안천습지생태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8. 여담

2018년 8월 1일, 이곳에서 AWS(자동기상관측장비)42.1℃가 관측되었다. 이는 한반도 역대 공식 최고 기온인 강원도 홍천의 41.0℃보다 높은 기록이다.

이곳은 경기도 광주시 소속이지만 남종면, 남한산성면과 함께 광주 북부에 위치한 3면으로, 광주시 생활권이 아닌 하남시 생활권에 가깝다. 광주시내와 신현동, 능평동, 초월읍 등은 성남시 생활권, 곤지암읍 도척면 이천, 용인 생활권이다.

9. 출신 인물


[1] 2023년 3월 주민등록인구 [2] 현 선린신협 자리로, 광동사거리 버스정류장이 바로 앞에 있다. [3] 2010년대 중반까지 개인주택이 있었으나, 철거되고 신축건물이 올라가다가 공사가 중지된 상태다. [4] 여기가 현재의 면사무소 자리다. [5] 당시 광주군에선 도의회는 야권이, 면의회는 여당 소속이 강세를 이뤘다. [6] 척보면 알겠지만 광동리와 도수리를 합쳐 만들어진 교명이다. [7] 옛날부터 '도장동'이라 불러왔는데, 지금은 '도장동'(都張洞)이라 쓰지만 도압동(道壓洞), 도장동(道張洞)이라고도 쓰이지만, 이 말은 필경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도장'이 변하여 이루어진 지명이라 생각된다. [8] 이 마을에는 마을사람 모두 따르는 고승이 사는 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절골'(寺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 이 마을은 풍광(風光)이 아름답고 항상 햇볕이 가득한 마을이라고 해서 '光復洞'이라 하는데 속명으로는 '광백이'라 부른다. [10] 조선 인조대에 병자호란을 맞아 군량미를 전국 각처에서 거두어들일 때, 이곳 넓은 벌판 마을에서 군량미를 가장 많이 내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지벌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11] 이 마을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는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해서 '도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2]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김 생원의 집 앞마당에서 맑고 찬 샘물이 솟아 나와서 마을 이름을 찬, 샘(泉)이라 뜻으로 '참새미'라 부르고, 한자로는 '水洞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3] 위안부 발언 사건으로 유명했던 김구라가 사과하기 위해 방문하였던 나눔의 집과 같은 건물이다. [14] 현재 임시 휴장 중이지만 계속 깜깜 무소식이다. [15]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온 베트남 쌀국수 가게이다. [16]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 이 마을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정자동'이라하게 되었다. [17] 조선시대에 한양에 사는 고관대작댁 자제들이 이곳에서 한가롭게 낚시질하던 곳이 기산위수(奇山渭水)라 하여 애초에는 '기위동(奇渭洞)이라 하였으나 후에 '지위동'이라 부르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