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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FF>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2대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 Θεόδωρο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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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데스포티스 테살로니키 황제 |
출생 | 1180년/ 1185년 |
사망 | 1253년 (향년 68/73세) |
재위 | 1224년 ~ 1230년 |
제호/휘 |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Θεόδωρο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성 | 콤니노스 두카스 |
아버지 | 요안니스 두카스 |
어머니 | 조이 두케나 |
배우자 | 마리아 두케나 콤니니 페트랄리페나 |
형제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두카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 |
자녀 |
안나 앙겔리나 콤니니 두케나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 이리니 콤니니 두케나 디미트리오스 앙겔로스 두카스 |
종교 | 정교회 |
참전 | 클로코트니차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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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잔존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2대 데스포티스.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최전성기를 견인해 니케아 제국보다 먼저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킬 뻔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앞두고 불가리아 제2제국과의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사로잡히면서 몰락했다.
2. 생애
1180년 또는 1185년, 앙겔로스 왕조 치세에 세바스토크라토르 직책을 역임한 요안니스 두카스와 조이 두케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이복형으로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있었으며, 조부는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조모는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 콤니니였다. 삼촌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는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3세의 부친이기도 했다. 즉, 그는 두카스, 콤니노스, 앙겔로스 세 왕조의 피가 모두 흘렀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앙겔로스보다 훨씬 명망 높은 콤니노스와 두카스를 성으로 사용했다.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직후, 테오도로스 1세를 따라 아나톨리아로 피신한 뒤 니케아 제국을 창건하는 데 기여했다. 코르푸 수도회의 게오르기오스 바르다네스가 보낸 서한에 따르면, 그는 테오도로스 1세를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하여 적으로부터 많은 요새를 빼앗았다고 한다. 테오도로스 1세는 그런 그를 총애해 중요한 직위에 앉혔다. 또한 마리아 페트랄리페나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던 1214년 후반 또는 1215년, 이복형이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였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암살당했다. 미하일 1세는 죽기 직전에 후계를 이복동생에게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 테오도로스 1세는 그가 이피로스로 떠나는 걸 허락했지만,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피로스에 도착한 그는 자기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테오도로스는 먼저 세르비아의 제타를 공략하려던 선임 군주 미하일 1세의 계획을 취소하고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어 북쪽 경계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했다.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가 1216년에 스테판 네마니치의 자매 중 한 명과 결혼했고, 1219년에서 1220년 겨울 그의 맏딸 안나가 세르비아 왕자 스테판 라도슬라프와 결혼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리하여 북쪽 국경 지대가 안전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영역 확장을 개시했다. 1217년까지 오흐리드, 프릴레프, 그리고 스트리몬 강 연안의 펠라고니아 평원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한 디미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를 오흐리드 대주교로 선출했다. 코마티아노스는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니케아 제국이 아닌 이피로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다만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2세가 오흐리드 대주교가 전통적으로 관할하던 세르비아 교회를 독립시키는 걸 허용해서 그와 대주교간의 마찰이 빛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여 마케도니아 북부까지 이르자, 멜니크의 통치자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자기까지 공격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내의 조카와 결혼하기로 했다.
1217년 초, 라틴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된 피에르가 프랑스에서 기사 160명과 기병 5500명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도착한 뒤 베네치아가 미하일 1세에게 빼았겼던 디라히온을 탈환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4월, 브린디시에서 출항한 피에르는 디라히온에 상륙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그는 디라히온을 함락한 뒤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테살로니키로 진격하여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탈취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디라히온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포위망을 풀고 테살로니키로 진군했다. 그러나 지형이 무척 험난하고 지역 주민들이 적대해서 피에의 군대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테오도로스는 피에르와 맞서기 전, 교황 특사인 조반니 콜론나와 협의해 가톨릭 교회의 우월성과 라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제5차 십자군 원정에 피에르가 참여하는 걸 돕는 대가로 지지를 약속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피에르에게 알리며 음식을 제공하고 안내인을 보내주었다. 피에르는 이 뜻밖의 도움에 크게 기뻐했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라틴군이 경계를 풀고 있던 날 밤, 그는 피에르의 진영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피에르, 특사 조반니 콜론나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귀족이 포로로 잡혔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에 격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테오도로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으며, 그에게 별도로 서신을 보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217년 말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선발대가 안코나에 집결했고, 베네치아 역시 이에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이에 그는 1218년 3월 교황에게 사과하고 콜론나를 석방했다. 그러나 피에르와 여러 귀족은 감옥에 계속 갇혀 있다가 옥사했다.
그 후 테오도로스는 동생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아이톨리아와 아카르나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해 남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테네 공국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네오파트라스와 라미아를 탈환했다. 이리하여 안전을 완전히 확보한 뒤, 그는 본격적으로 테살로니키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1218년에 플라타몬 요새를 공략하여 해상 보급을 차단한 것을 시작으로 테살로니키 주변의 요새를 하나씩 공략했다.
1221년 말, 세레스를 공략한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보급로를 끊었다.
테살로니키 함락이 임박하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를 파문하여 아드리아 해 항구에서 말, 군대, 물자에 대한 금수조치를 명했으며, 십자군을 조직하여 이피로스 원정을 단행하려 했다. 비안드라테의 오베르토 2세가 이끄는 십자군 첫 번째 부대는 1222년 여름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이에 그는 서두르기로 마음먹고, 1223년 초에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교황은 베네치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독촉하여 테살로니키에 대한 원조를 약속받았다.
호노리오 3세는 그리스 남부 지역의 라틴 영주들에게도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고,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의 협조를 약조받았다. 1224년 3월, 브린디시를 출발한 십자군은 그해 4월 세레스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가 2년 전 요안니스 3세와 포이마네논에서 맞붙었으나 참패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자, 포위망을 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물러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이끄는 이피로스군에게 급습당해 대부분의 병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십자군의 잠재적 지도자인 몬페라토의 굴리에모 6세가 병에 걸리자 교황은 십자군의 정식 출정을 내년 봄으로 미뤄야 했다.
십자군이 좀처럼 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테살로니키 수비대는 1224년 12월, 테오도로스에게 항복했다. 뒤늦게 1225년 3월 출발한 십자군이 테살리아의 할미로스에 상륙했지만, 이질이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굴리에모 6세 역시 이질로 사망했고, 나머지는 이탈리아로 철수했다. 이로서 동로마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손꼽히는 테살로니키를 탈환한 그는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를 칭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동로마 제국의 관습에서 황제의 대관식은 오로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행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주관해야 했지만, 라틴 제국이 그 도시를 지배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1208년 이래 니케아 제국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테살로니키 수도원장 콘스탄티노스 메소포타미티스에게 테살로니키에서 대관식을 주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티스는 니케아에 있는 총대주교만이 그럴 수 있다면서, 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관식 수행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그는 1225년 3월 아르타에서 주교 회의를 소집한 뒤, 자신의 업적을 낱낱이 밝히면서 제국의 부활, 가톨릭 사제 추방과 정교회 주교 복직 등을 약속했다. 주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그는 오흐리드의 충실한 대주교인 데메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로 하여금 대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테오도로스는 아르타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하고 형제 마누일과 콘스탄티노스를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또한 이피로스로 피난한 옛 동로마 귀족 가문 후손들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니케아 제국의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의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황제 즉위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황제를 칭했다. 이후 양자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니케아의 총대주교 예르마노스 2세는 오흐리드 대주교가 제멋대로 대관식을 주관했다고 비난했지만, 오흐리드 대주교 코마티아노스는 자신은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1227년 아르타에서 열린 공의회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니케아 총대주교의 전반적인 권위를 인정하지만, 그가 그의 영역에 주교들을 임명할 권리를 요구했다. 만약 게르마노스 2세가 3개월 안에 회답을 주지 않는다면, 교황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게르마노스 2세는 테오도로스의 황제 즉위를 참칭으로 규탄함으로써 대응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주교를 디라히온의 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즉각 그 주교를 추방한 테오도로스는 코마티아노스의 친구인 콘스탄티노스 카바실라스를 디라히온 주교로 선출했다. 결국 니케아와 이피로스는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분열되었다.
1225년 봄, 그는 크리스토폴리스, 크산티, 그라티아노폴리스, 모시노폴리스, 그리고 디디모티콘 등을 공략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부와 트라키아 서부 일대를 확보했다. 니케아 제국은 이에 맞서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민들의 구원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견하여 라틴 제국군을 축출하고 도시를 공략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고 주민들은 결국 테살로니키 제국에게 투항했다. 니케아군은 그가 제공한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철수할 수 있었다.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수 있게 된 테오도로스는 북쪽의 불가리아 제2제국과 타협하기로 하고,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딸 마리아와 자신의 동생 마누일을 결혼시켰다.
1225년 여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로 진군하여 라틴 제국군의 역습을 물리쳤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몬페라토의 굴리에모가 테살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철수했다.
1228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고자 코르푸 섬에 머무를 때, 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힘을 썼다. 심지어 1229년에 병력 일부를 십자군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반면 1228년 8월 19일 베네치아 상인들이 그의 제국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걸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코르푸의 총독에게 난파된 베네치아 배의 화물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라틴 제국에게 동맹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불가리아를 의심했다. 비록 라틴 제국은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차지하려는 야욕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동맹 제의를 거부했지만, 테오도로스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1228년 9월, 그는 라틴 제국과 1년간의 휴전을 합의하고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했다.
1229년 말, 그는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승리를 확신한 테오도로스는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그러나 이반 아센 2세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반격을 개시했다. [1]
1230년 4월,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했다( 클로코트니차 전투). 기습을 예상치 못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테오도로스는 포로로 붙잡혔다. 동생 마누일만이 소규모 호위군을 이끌고 간신히 탈출했다. 그 후 마누일은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를 칭했지만, 그의 영역은 테살로니키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디라히온과 코르푸, 이피로스와 테살리아 등지는 콘스탄티노스가 옹립한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서자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넘어갔다. 이리하여 허수아비 신세가 된 테살로니키 제국은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종속되었다.
한편, 불가리아군에게 사로잡힌 뒤 실명한 채 7년간 터르노보에 수감되어 있던 테오도로스는 1237년 이반 아센 2세가 자신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거지로 위장하여 테살로니키로 들어온 그는 옛 지지자들과 접촉하여 마누일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그는 실명된 상태였기에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황제로 앉히기로 했다. 음모는 성공했고, 마누일은 퇴위된 뒤 소아시아의 아탈리아로 유배되었다. 아들 요안니스는 예정대로 테살로니키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테오도로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마누일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탈리아에서 탈출하여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한 마누일은 1239년 초, 6척의 니케아 함대를 이끌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인근에 상륙했다. 이리하여 내전의 위기가 임박했지만, 양자는 곧 테살로니키 일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누일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테살리아를 받았고,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를 지켰다.
1241년 마누일이 죽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는 테살리아를 공략하려 했다. 이에 테오도로스는 1241년 니케아를 방문해 구원을 청했다.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삼촌으로서 후한 대접을 해줬다. 그러나 니케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그 사이에 테살로니키를 향한 원정군을 준비했다.
1242년 봄,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를 대동한 채 원정군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로 진격했다. 니케아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소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요안니스 황제는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비밀로 하고, 협상을 위해 테오도로스를 도시로 보냈다. 40일간의 협상 끝에,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지만,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에서 아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그 후 보데나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244년 아들 요안니스가 죽자 작은 아들 디미트리오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테살로니키 제국의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그러나 디미트리오스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걸 즐기는 방탕한 청년이었고, 시민들은 니케아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원하기 시작했다.
1246년 가을,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트라키아의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동부 및 북부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멜니크에 주둔한 요안니스 3세는 테살로니키 주민들로부터 디미트리오스를 축출하고 도시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황제는 디미트리오스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디미트리오스는 낌새를 눈치채고 거부했다. 황제는 소환령에 불응한 신하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테살로니키로 진군했고, 며칠 후 음모자들이 성문 중 하나를 열면서 도시가 손쉽게 공략되었다. 디미트리오스는 체포되어 비티니아의 렌티아나로 유배되었다. 이때 테오도로스는 보데나에 은거하는 조건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테오도로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요안니스 3세에 대항하라고 촉구했다. 미하일 2세는 삼촌의 권유를 받아들여 1251년 봄 테살로니키를 급습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2세와 합류한 뒤 1252년 봄 프릴레프와 벨레스를 공략했지만, 요안니스 3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피로스로 철수했다.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의 거점이던 보데나를 공략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이피로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피로스군의 요안니스 글라바스와 테오도로스 페트랄리파스가 니케아 제국에 귀순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미하일 2세는 요안니스 3세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이피로스군이 장악한 요새와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영토를 양도하였고, 미하일 2세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이 이뤄졌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 2세에게 테오도로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미하일 2세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압력에 굴복하여 테오도로스를 넘겨줬다. 그렇게 소아시아로 끌려간 테오도로스는 1253년 무렵, 그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1]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테오도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