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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6:08:32

퀘벡 독립운동



1. 개요2. 역사
2.1. 자유 퀘벡 만세!2.2. 10월 위기2.3. 두 번의 국민투표2.4. 연방정부의 대응
3. 퀘벡이 실제로 독립하게 된다면?
3.1. 퀘벡 주 내의 분리?


Souverainisme au Québec / indépendantisme au Québec

1. 개요

캐나다 퀘벡주가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퀘벡 주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프랑스계가 많아 영국/아일랜드계 위주인 다른 캐나다 주들과 갈등이 많았다.

2021년 2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찬성 32%, 반대 56%, 무응답 12%로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

2. 역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nri_julien_1904.jpg
"1837년의 애국당 당원" 퀘벡 화가 앙리 쥘리앵, 1887년 작품. 이 그림은 훗날 퀘벡 주권 운동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다.
캐나다 백과사전 - 캐나다의 분리주의, 퀘벡 독립 지지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프랑스어)

위 그림은 19세기 민주주의 정당 애국당(Parti Patriote) 투사를 그린 그림이다. 1837년 캐나다 반란은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에 고무된 캐나다 사상 최대 규모의 정치적 정변이었다. 식민지 시대 각각 상캐나다(Upper Canada/Haut-Canada)로 불리던 온타리오와 하캐나다(Lower Canada/Bas-Canada)라 불리던 퀘벡은 연대했다. 영국 식민 정부에서 분리된 민주 공화국 건설을 추구했던 이 운동은 퀘벡 측에선 루이-조세프 파피노, 온타리오 측에선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윌리엄 라이언 맥켄지가 주도해 성공적으로 불붙었으나, 곧 진압돼 지도자들이 대부분 망명간다. 그리고 약 10년 쯤 후 식민 정부가 이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사면하면서, 이 때 귀국한 지도자들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캐나다 헌정 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이 됐다.

그런데 퀘벡 분리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이 사건은 알고보면, 역설적이게도 분리가 아니라 다른 민족성의 두 주가 통합된 사건이었다. 애국당 혁명파의 지역 기반이 프랑스계 주민 다수였던 퀘벡이었을 뿐 당시 이 지역에 독립적인 정체성이나 분리 의식이 심하진 않았고, 혁명 지도 세력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이 다수였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계 주민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영향이 강해[1] 보수색이 강하고 오히려 독립에 미온적이었다.

2.1. 자유 퀘벡 만세!

파일:attachment/VQL.jpg

1967년 몬트리올 세계박람회 당시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발코니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군중들을 향해 그는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다는 짧은 연설을 했고, 마지막으로 강렬한 선언을 남겼다.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2]
몽레알 만세! 퀘벡 만세! (환호)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길고 열광적인 환호)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환호)

이 돌발선언에 군중들은 열광했지만 퀘벡의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총리 레스터 피어슨 극대노했고, 이후 프랑스와 캐나다의 외교관계는 한동안 매우 싸늘해졌다. 그리고 자유 퀘벡 만세는 퀘벡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구호 중 하나가 되었다.

2.2. 10월 위기

1970년 캐나다의 퀘벡 해방전선(FLQ)[3]은 몬트리올에서 퀘벡 부총리인 피에르 라포르테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를 납치했다. 10월 5일 크로스를 먼저 납치한 FLQ는 8일 방송 인터뷰를 요구하였으며, 이어 10일 라포르테까지 납치한 뒤 11일 대대적으로 자신들의 납치 사실을 알렸다.

이에 12일 몬트리올에 있는 캐나다 연방정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으며, 14일에는 인질들과 정치범들을 바꾸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협상은 15일 결렬되었다. 이에 퀘벡 주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청했고, 반대로 퀘벡 분리주의자들은 몬트리올 대학에 모여 FLQ를 지지한다며, 과격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3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일단 지켜보시라(Just watch me)'라고 대답하여 흔들림 없는 사태 해결을 공언한 피에르 트뤼도 총리는 결국 16일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전시조치법을 발동하고 계엄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Just watch me'는 전 캐나다인이 기억하는 유명한 말이 된다.[4]

결국 17일 FLQ는 라포르테를 살해하였으며, 남은 크로스를 인질삼아 FLQ 헌장의 선언, 23명의 정치범 석방, 자신들의 쿠바 및 알제리로의 망명 허용 등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라포르테의 시체는 생 위베르 공항 근처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로 인해 FLQ에 대한 퀘벡 일반 시민들의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시조치법에 대한 일부 비판이 일었지만 정부는 결국 11월 6일 FLQ의 중요조직인 셰니어 셀을 발견하고 이를 급습해 3명은 놓쳤지만 1명을 검거에 성공했다. 이후 길어지는 협상과 좁혀오는 수사망에 지친 납치범들은 12월 4일 쿠바로의 망명만을 대가로 크로스를 석방했으며, 납치범 중 5명이 쿠바로 망명했다.

12월 23일 트뤼도 총리는 1월 5일까지 군대가 퀘벡에 머물 것을 선포했으며, 12월 28일 도망친 셰니어 셀의 3명의 멤버를 체포함으로서 납치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FLQ의 폭력적인 분리 운동이 오히려 퀘벡 주민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반작용을 일으켜 전시조치법에 대한 지지가 올라갔고, 압박을 받은 FLQ는 결국 자신들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FLQ는 해체되었으며,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퀘벡 분리 운동은 주류에서 멀어져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퀘벡 독립운동은 무력투쟁 대신 투표를 통한 합법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 때 발동된 전시조치법은 캐나다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인 평시 전시조치법이 발동된 사례이다.

2.3. 두 번의 국민투표

20세기 들어서도 퀘벡의 독립 열기가 꺼지지 않자 결국 두 차례, 퀘벡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퀘벡 독립 여부에 대한 총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표가 과반수를 넘으면 주에서 나라로 격상될 수 있고, 시민들의 국가 이름이 바뀌고, 여권이 바뀌고, 법이 바뀌고 관세가 바뀌고 아주 온 세상이 다 바뀔 수도 있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이 시기 전국민의 최대 관심사였다.

1980년 5월 20일, 퀘벡의 캐나다 연방 탈퇴 및 입법권, 징세권, 외교권 등 국가로서의 주권 획득을 골자로 하는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같은 날 저녁, 퀘벡당의 창시자이자 당시 퀘벡 주총리였던 르네 레베크(René Lévesque)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Si je vous ai bien compris, vous êtes en train de nous dire à la prochaine fois!
'제가 여러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여러분은 지금 저희에게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군요.

그리고 이 예언(?)은 실현되어, 1995년 다시 한번 주민투표가 실행되었다. 프랑스 영국은 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당시 캐나다의 총리이던 자유당 소속 장 크레티앵은 퀘벡 주 몬트리올 지역구 출신이기 때문에, 퀘벡이 독립하게 되더라도 크레티앵이 캐나다의 총리로 남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도 오갔다. 약 67%가 독립을 반대하리라는 초기 설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불과 약 1%이라는 놀랄만큼 근소한 차이로 무산되었다.

두 번째 투표에서 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첫번째 투표에서는 분리를 지지하는 퀘벡인들도 분리 독립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리고 1982년의 새로운 헌법 제정 당시 퀘벡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이 안 되었다는 분노감, 이후 개헌을 위한 미치 호수 협정(1987)이나 샬럿타운 협정(1992)이 둘 다 무산되었다는 점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1982년 당시 자유당에 대한 퀘벡인들의 분노는 대단해서 1980년 연방선거 당시 75석 중 1석만을 차지하고 있던 진보보수당이 1984년 선거에서는 무려 58석, 1988년 선거에서는 6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퀘벡에서 진보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진보보수당의 1917년 강제징용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진보보수당도 개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1993년 선거 땐 다시 1석으로 대패하게 되었다. 퀘벡 블록이 54석을 차지하게 되어 일개 주의 정당이, 캐나다 연방 전체 내 제1야당으로 등극하게 된 분위기 아래서 두번째 분리 독립 투표가 행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대표적인 주권파 일간지인 르 드부아르(Le Devoir)는 퀘벡 주경일마다 독립이나 세 번째 독립 투표 가능성을 공론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선진국 사회의 민족주의 열기가 많이 잦아들었고, 전국 차원에서 캐나다에 다른 지역 이주민들이 늘면서 퀘벡인이 받는 차별도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현재 세번째 투표가 실시될 확률은 적다고 볼 수 있다. 현재 30대 이하의 청년세대 퀘벡인들은 지난 20세기의 아버지, 조부 세대처럼 영어주들과 연방으로부터 노골적인 차별을 받던 시대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캐나다내 다른 영어권 지역에 대한 적대감이 옅어졌다. 두번의 독립투표를 거치면서 연방 정부로부터 복지 및 공공일자리 재정 지원금과 자치권한 전반이 확대되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연방정부의 주(Province)로써 잔류해도 퀘벡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불어문명 퀘벡의 언어적 자주성을 법적으로 지킬 수 있는데 굳이 경제적인 리스크까지 각오하고 독립할 필요성이 없다고 보는 여론이 강하다. 2014년 퀘벡 주의회 선거에서도 독립주의 성격이 강한 퀘벡당(Parti Quebecois)이 독립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다가 의석을 24석이나 더 잃었고, 반독립 성향의 퀘벡 자유당에게 대패하였다. 현재 주 집권정당인 퀘벡미래연합도 퀘벡 독립에 부정적이다.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퀘벡인들은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을 영어권 캐나다인들만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경제/정치 등의 실리적인 이유로 다른 영어권 주와 연방 내에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캐나다인들도 퀘벡 주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거의 '다른 사회' 정도로 여기고 있다.

2.4. 연방정부의 대응

연방정부는 퀘벡의 분리독립 열기를 사그러트려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인구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국회 의석, 문화/언어적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제도 등 여러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하였다.

1969년 7월 7일에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프랑스어가 모든 연방정부의 영역에서 영어와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였다. 캐나다 총리는 영어와 프랑스어 두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실제로 기자가 영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프랑스어로 질문하면 프랑스어로 답하는 영문영답 불문불답의 진풍경을 볼 수가 있다. 공식 대담을 할 때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기도 한다. 방송사들의 동시 통역은 덤이다.

3. 퀘벡이 실제로 독립하게 된다면?

캐나다의 입장에서 퀘벡 독립이 야기하는 문제는 퀘벡 독립과 함께 캐나다의 일부 영토가 월경지가 된다는 점이다. 즉, 퀘벡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의 영어권 주(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들이 캐나다 중서부 지역과 멀리 떨어진 고립 영토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알래스카 주처럼 말이다. 그나마 알래스카는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 연안의 미국 본토 지역 주들(캘리포니아 ,오리건, 위싱턴 등)과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 수운이나 항로를 통해서 미국 연방 정부의 통제가 가능하지만 퀘벡은 분리 독립할 시 퀘벡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주들이 아제르바이잔 나흐츠반처럼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형국이기에 독립 국가 퀘벡에 가로막힌 고립형 월경지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의 알래스카보다 캐나다 정부가 통제하기 굉장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 퀘벡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영어권 주들도 퀘벡과는 별도로 소수지만 연방에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5]

때문에 지금 퀘벡의 영토가 캐나다에서 떨어져나가 캐나다 중서부 지역과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 동부 주들이 독립된 퀘벡의 영토에 가로막혀 고립된 월경지가 된다면 연방 내에 잔류할 확률은 매우 낮다.

게다가 퀘벡과 캐나다 동부 지역의 영어권 주들만큼은 아니지만 앨버타나 서스캐처원, 브리티시 컬럼비아, 메니토바, 유콘, 노스웨스트, 누나부트 등 캐나다 서북부 지역의 영어권 주와 준주들에서도(특히 앨버타) 두 차례씩이나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분리독립, 연방 이탈을 시도했던 퀘벡처럼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분리 독립을 하거나, 또는 다른 신생 연방 국가로 따로 분리독립해 결성하거나 미국의 연방 주로 가입, 합병하자는 분리주의 의견이 소수이지만 존재하고 있다. 사실 캐나다는 미국이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대국들보다 매우 약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나라인 것이다. 만약에 그리된다면 캐나다는 과거 중남미에 존재했던 대콜롬비아 공화국[6]이나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7], 페루-볼리비아 연합[8]처럼 여러 개의 북미 소국들로 분열되거나 아예 캐나다라는 국가 자체가 해체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3.1. 퀘벡 주 내의 분리?

실제 퀘벡이 독립할 경우, 또다른 차원의 분리운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퀘벡 북부에 살고 있는 수만 명 규모의 원주민들은 독립된 퀘벡에 자신들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퀘벡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퀘벡 대부분의 영토가 북부의 소수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는 땅인데, 때문에 만약 독립 시 원주민들의 분가를 인정한다면 퀘벡의 실제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퀘벡의 인구에서 원주민 비중은 공기에 가깝지만 원주민 비중이 70% 정도인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 지역[9]만 빼도 퀘벡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린다.

또한 몬트리올과 퀘벡-온타리오 주경지대에는 어느 정도의 영어권 인구도 살고 있다 보니, 이들은 '퀘벡이 캐나다와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면, 퀘벡 그 자체도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한다. 이들에 따르면 영어권이 많은 일부 몬트리올 지역이나 퀘벡의 마을은 원한다면 캐나다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권 주민들은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과 코트노르(Côte-Nord) 북서부 지역은 1898년부터 1912년 사이에 순차적으로 퀘벡에 편입된 지역들로 오리지널 퀘벡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된 퀘벡이 갖고 가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퀘벡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국제법을 근거로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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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퀘벡의 가톨릭 사제들 중 고령층은 적지 않은 수가 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 정부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 갔다 캐나다 까지 오게 된 프랑스 출신 반혁명 망명객들 출신이었다. [2] 위의 영상 7분 35초부터 보면 된다. [3] 1963년부터 활동을 해 온 조직으로 PLA로부터 훈련을 받아왔다. 다만 소련에서 자신들이 훈련시킨 PLA가 연관되어 캐나다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 것을 우려해 CIA가 FLQ를 훈련시킨 것처럼 위장했다. [4] 이후 피에르 트뤼도의 아들이자 정치인 쥐스탱 트뤼도가 공항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이 " 스티븐 하퍼를 이길 수 있나요?"라고 쪽지를 보내자 이 말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유당 당수 선거 캠페인에서도 활용했는데, 당시에는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후 자유당 당수로 당선되고 2015년 연방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단독과반을 달성하며 실제로 하퍼를 이기고 총리로 취임했다. [5]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의 경우 캐나다 독립 초기 본래 캐나다령이었던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와 달리 캐나다와 분리되어 있던 영국의 해외 식민지였다가 1949년에 가서야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는 등 현재 캐나다 영토가 된 시기가 70년도 채 되지 않는다. [6] 시몬 볼리바르 실권 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로 분열. [7]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로 분열되어 해체. [8] 볼리비아 페루가 1836년부터 통합 연방 국가를 구성하려 했으나 주변국인 아르헨티나 칠레의 견제와 방해, 볼리비아와의 통합에 반대하던 페루내 보수주의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을 받아 1839년에 해체되었다. [9] 인구 42,579명에 면적 747,161km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