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자왕 가오가이가의 카펜터즈에 대한 내용은 하이퍼 툴 문서 참고하십시오.
카펜터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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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펜터즈 The Carpent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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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카렌 카펜터, 리처드 카펜터 | ||||
국적 | 미국 | |||
결성 | ||||
1966년 |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다우니 | ||||
데뷔 | 1969년 | |||
데뷔 싱글 Looking for Love | ||||
데뷔 앨범 | ||||
활동 기간 | 1969년 – 1983년 | |||
멤버 | ||||
카렌 카펜터 ( 보컬, 드럼) | ||||
리처드 카펜터 ( 피아노) | ||||
장르 | 팝, 소프트 록 | |||
레이블 | A&M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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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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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력
1970년대를 장악한 세 개의 가족 그룹 중 하나이다.[1] 1969년에 Ticket to Ride #[2]로 데뷔했다. 오빠 리처드가 피아노, 백업 보컬, 작곡, 편곡을 맡았고[3] 여동생 캐런이 보컬과 드럼을 맡았다. 이후 캐런은 솔로로 정규 앨범을 내려고 했으나 생전에는 발매가 거절당했고, 결국 사후에야 발매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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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카펜터의 솔로 앨범 컨셉샷 |
이지리스닝 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ABBA[5]와 함께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그룹 중 하나. 쉽게 귀에 들어오는[6] 편안하고 서정적인 컨트리 선율이 특징적이다. 서정적이고 호소력이 강한 캐런 카펜터의 보컬이 매력적인 그룹이다. 맑고 청량한 캐런 카펜터의 알토 보이스는 카펜터즈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캐런 카펜터가 소프라노 음역을 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역시 자타공인 매력적인 알토 보이스.
캐런은 드러머로도 활동했으며 때문에 방송 영상을 보면 콘서트 등에서 종종 드럼을 치는 경우가 가끔 있고, TV 쇼에서 솔로 드럼 연주도 한 적이 있다. 보컬의 이미지에 묻혀 많이 간과되지만 카렌 카펜터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 명이었으며, 역대 최고의 여성 드러머를 뽑을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엄청난 드럼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재즈에 기반한 탄탄한 기본기와 복잡한 변박에 강점이 있는 연주자였다. 캐런 본인도 자신을 "노래하는 드러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다만 카펜터즈의 음악 자체가 재즈적인 즉흥 연주나 난해한 박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캐런 본인의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본격적인 연주에는 한계가 있었다.[7] 그래서 일부는 "캐런 카펜터의 진정한 재능은 드럼에 있다"고 할 정도의 실력자였음에도 그녀의 연주자로서의 실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캐런의 실력과 연주를 즐기는 모습이 담긴 1976년 콘서트 클립 1968년 18세 때의 드럼 연주
밝고 편안한 노래로 잘 알려진 그룹이지만, 보컬인 캐런 카펜터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도 유명하다. 십대 때 비만을 극복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진행하기 시작하며 결국 남은 평생을 거식증으로 고생하게 되었으며 결국 사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8] 전성기 때(1969~1974)에도 살이 찌고 빠지는 게 반복되었고 1977~1978년 사이 거식증이 심해지며 전체적으로 건강이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80년에 결혼을 했다가 1년도 안돼 남편과 사이가 악화되고[9], 증세는 더 심해졌다. 1981년 마지막 공개활동 때의 모습을 보면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2022년 10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기사
리처드 역시 약물중독을 겪었고, 이 때문에 카펜터즈가 약 1년 동안 활동 중지를 선언한 적도 있다. 1983년 캐런의 죽음으로 카펜터즈의 공식적인 활동은 종료된다.[10]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난 뒤 같은 보컬을 들으면 편하지만 그만큼 우울함이 배어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카펜터즈의 대표곡 중 하나인 Top Of The World의 밝은 가사에 착각하기 쉽지만 이들의 노래 중에서는 우울한 가사의 노래도 한두개가 아니다. 특히 4집의 수록곡 Goodbye To Love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끝도 한도 없이 우울한 노래.
스탠더드 팝/어덜트 컨템퍼러리 계열에서 이들의 위상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뽑아낸 리처드 카펜터의 작곡 실력과 캐런 카펜터의 뛰어난 보컬은 아직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캐런을 "세계 최고의 여성 보컬"이라고 평했으며, 존 레논은 캐런 카펜터를 마주쳤을 때 정말 예쁜 목소리를 가졌다고 칭찬했고[11], 엘튼 존은 "우리 시대 최고의 목소리"라 평했다. 배철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카펜터즈의 음악을 띄울 때마다 그 누구도 캐런 카펜터처럼 편안하게 노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칭송한다.
활동 당시, 차트 장악력은 상당했지만 너무 말랑말랑하고 듣기 편한 음악만을 지향한다고 하여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수많은 록 그룹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소속 레코드사에서 폭 넓은 계층을 공략하기 위해 건전하고 건실한 보수적 젊은이 이미지를 강조했었고, 카펜터스는 인터뷰도 마음대로 못 했다.[12] 이런 이미지 때문에 젊은 층에서는 카펜터즈 노래를 좋아한다고 밝히는 것이 늙은이들이 바라는 이상향 같은 이미지로 비춰져서 좋아한다고 밝히길 꺼렸고, 각종 언론과 평론지에서도 이미지와 스탠스 때문에 공격당하기도 했다.[13] 훗날 리처드 카펜터가 음악과는 별개로 회사에서 강요한 이미지 때문에 평가절하됐던 일들, 방송이나 언론에 자기 의견도 소신껏 말하지 못했던 일들이 화나고 힘들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카펜터스는 이러한 이미지를 바꿔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며, 앞서 언급되었던 캐런의 솔로 앨범과 공연에서 영화 그리스의 OST를 불렀던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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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위해 분장한 캐런 카펜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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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1월 2일의 관련 신문 기사 |
90년대 초중반에 접어들며 많은 록밴드들이 "사실 겉으로는 욕했지만, 우리는 카펜터즈의 열성팬이었다."라고 커밍아웃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실제로 1994년에 발표된 트리뷰트 앨범에 크랜베리스와 소닉 유스 등 여러 유명 록밴드가 참여했다. 소닉 유스는 자타공인 카펜터즈 빠. 1990년 캐런 카펜터의 추모곡으로 Tunic이란 곡을 작곡한 적이 있다. 소닉 유스의 노이즈 / 익스페리멘탈 / 펑크 성향의 음악과 카펜터즈의 음악은 정반대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독특한 경우. Kim Gordon's open letter to Karen Carpenter[14] 이후 트리뷰트 앨범에서는 Superstar를 불렀는데, 정반대 성향의 음악이 묘하게 절충된 스타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작 리처드 카펜터는 이 커버를 싫어했다고 한다.
참고로 Goodbye To Love의 기타 솔로는 수많은 카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Goodbye to love
황당하게도 할로윈 시리즈 1편 한국 비디오 표지는 당당하게 70년대를 풍미했던 카펜터즈의 존 카펜터가 감독이라고 엉터리로 적어놨다. 증거인 비디오 표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부당한 사례로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카펜터즈의 음악이 록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이유로 꼽히곤 하지만,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사실상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과 마찬가지이고 록 뮤지션이 아닌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 로네츠, ABBA 등도 이름을 올린 것을 보면 카펜터즈가 제외된 것이 석연치 않다.[15]
2021년에 작가 길스 페일리 필립스가 트위터에 17살인 캐런 카펜터의 드럼 영상을 올렸는데, 보컬과 함께한 드럼임에도 여유로운데다 연주 실력이 엄청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3. 앨범
연도 | 제목 |
1969 | Ticket to Ride |
1970 | Close to You |
1971 | Carpenters |
1972 | A Song for You |
1973 | Now & Then |
1975 | Horizon |
1976 | A Kind of Hush |
1977 | Passage |
1978 | Christmas Portrait |
1981 | Made in America |
1983 | Voice of the Heart |
1985 | An Old-Fashioned Christmas |
1989 | Lovelines |
2001 | As Time Goes By |
4. 싱글
4.1. 빌보드 핫 100 1위
- (They Long to Be) Close to You[16] (1970)
- Top of the World[17] (1973)
- Please Mr. Postman[18] (1974)
4.2. 빌보드 핫 100 2위
- We've Only Just Begun[19] (1970)
- Rainy Days and Mondays[20] (1971)
- Superstar (1971)
- Hurting Each Other (1972)
- Yesterday Once More[21][22](1973)
4.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For All We Know (1971)
- Goodbye to Love[23] (1972)
- Sing[24] (1973)
- Only Yesterday (1975)
4.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It's Going to Take Some Time (1972)
- I Won't Last a Day Without You (1974)
- Solitaire (1975)
- There's a Kind of Hush (All Over the World) (1976)
- Touch Me When We're Dancing (1981)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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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런 카펜터는 올리비아 뉴튼 존과 절친이었다. 훗날 올리비아 뉴튼 존도 2022년 8월 8일에 암으로 운명했다.
- 1975년 플레이보이 잡지에서 '최고의 드러머'를 선정하는 투표를 진행했는데, 당시에 쟁쟁한 드러머들이 많았음에도 캐런 카펜터가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플레이보이 잡지의 남성 구독자가 많은 것을 감안해도 상당히 대단한 성과인데, 이를 두고 언짢아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이었다. 존 본햄은 소위 록 드럼의 신으로 종종 불리고, 본인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결과를 두고 불평하는 투로 "캐런은 레드 제플린 노래 10분도 연주 못 할 것 같다.(She couldn’t last ten minutes with a Zeppelin number)"라고 평했다. 당시에는 존의 불평이 큰 관심을 얻지는 못했고, 현재는 존의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반응이 많다. 참조 이에 대해 캐런 카펜터는 "너무나도 감사한 결과이다. 존 본햄 씨가 언짢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길 바란다. 난 그 투표와 일절 관계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참조
- 대한민국의 ' 현이와 덕이'가 당대 기준으로는 널리 알려졌던 카펜터즈와 엮이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현이와 덕이'와 '카펜터즈'가 남매 듀엣이었던 데다가 장덕과 카렌 카펜터 둘 다 여동생에 오빠보다 먼저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했던 것도 연관되는 듯하다.
[1]
다른 두 그룹은
비 지스,
잭슨 5.
[2]
비틀즈의 1965년 곡으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었다.
[3]
다만 곡을 받아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비틀즈 외에도 버트 바카락, 로저 니콜스 같은 유명 작곡자들이 참여해서 퀄리티는 발군.
[4]
캐런의 솔로 앨범은 카펜터즈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디스코 + 섹시 컨셉 + 고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듯. 이러한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에 제작을 모두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발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발매 거절은 본인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가 됐다고. 그의 오빠인 리차드 카펜터가 디스코 음악을 굉장히 싫어했던 것도 발매 거절의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5]
물론 ABBA 의 노래들은 이지리스닝이라고 하기에는 좀 파워풀하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6]
사실 이건 캐런 카펜터가 그만큼 훌륭한 보컬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가수들이 카펜터스의 노래를 부른 것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수가 노래의 감정 표현에 너무 치중하면 할수록 듣기 편한 노래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 부분의 균형을 조절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캐런 카펜터는 그 방면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
그래서 라이브 공연 등에선 커비 오 브라이언(Cubby O brien, 1946~) 이라는 드러머가 캐런의 보조 드러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드러머도 9살 때부터 TV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여 뛰어난 드럼 실력을 선보였을 만큼 두각을 보였으나 딱히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8]
정확히는
거식증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영양실조로 인해 쇠약해진 심장이 견디지 못하면서
심부전을 일으키는 영양재개증후군이 원인이었다.
[9]
사실 결혼하기 바로 전날에 사이가 안 좋아졌다. 카렌은 언제나 아이를 가지길 원했는데 약혼자가
정관수술을 한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 큰 실망을 하고 파혼을 하려 했으나 카렌의 어머니가 결혼식이 코앞이니 숨기고 나중에 해결하자는 식으로 밀어붙였고 안타깝게도 몇년 후 최종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될 날 아침에 사망하여 기혼자로 남게 되었다.
[10]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1983년 1월 그래미 25주년 시상식이다. 그리고 딱 19일이 지난 뒤 캐런은 사망한다.
[11]
그러나 실제로 캐런은 대학교 합창단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본인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의 칭찬은 모두 빈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수 활동을 시작하고 존 레논을 만난 이후에도 캐런은 친구들에게 존 레논이 한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12]
실제 카펜터스는 마리화나가 합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던 등 굉장히 좌파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13]
많은 인터뷰에서 카펜터스의 goody-goody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직접 물어보기도 하였다.
[14]
사실 카펜터즈를 비롯한 6-70년대 스탠더드 팝/이지 리스닝 뮤지션들은 알게 모르게 8-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세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당시엔 LP를 사지 않는 이상
라디오에 음악 수용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연히 라디오에서 자주 틀어주던 AOR 뮤지션들에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들이 음악계에 뛰어들면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영향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미국에서도 깡촌 출신 뮤지션들로 갈수록 강해지는데,
너바나 같은 경우 대놓고 베이 시티 롤러즈를 언급하기도 했다.
[15]
로큰롤 명전은 원래 상업적인 뮤지션들이나, 컨트리 뮤지션들에 대한 헌액이 상당히 늦는 편이다. 예시로 든
ABBA가 헌액된 것도 입성 자격이 주어지고 10년이 지나서고, 22년에 와서야
돌리 파튼이 헌액된 것을 생각하면 카펜터즈가 입성되는 것을 보려면 아직 조금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물론 헌액은 될 것이다.
[16]
버트 배커랙 작곡.
스페이스 카우보이라는 뮤지션이 이 음악을 리메이크 한 적도 있다.
[17]
한국에서도 사랑받아
임형주, 박인희, 이성애,
조형기 등이 리메이크하였다.
[18]
1961년 여성 그룹 마블레츠(The Marvelettes)의 데뷔곡으로, 마블레츠 원곡 역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었다. 그 후 1963년 비틀즈도 이 곡을 리메이크하여
With the Beatles 앨범에 수록하기도 하였다.
[19]
미국에선 결혼식 축가로 많이 불리는 곡
존 쿠삭 주연의
1408 영화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본격 악몽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20]
국내에선
이소라가 리메이크 했다.
[21]
해피투게더 프렌즈의
BGM으로 쓰였으며 딱 들으면 대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 '에브리 샬랄랄라 에브리 워우워어~' 이게 이 노래다.
[22]
크레용 신짱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의 적 측 조직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
[23]
전반부를 거의 1분 가량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조곤조곤 노래한다.
[24]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 4장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