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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0:05:19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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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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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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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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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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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우노 퀴그나에우스 야리 리트마넨 카트리 헬레나 칼라오야 파니 루코넨 안넬리 예텐메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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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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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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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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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아르미 쿠셀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아키 카우리스매키 칼레 패탈로 파보 리포넨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아우로라 카람친 사카리 토펠리우스 알리 바이티넨쿠이카 시모 해위해 야코 일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아르토 야바나이넨 레나 팔로티에 카리타 마틸라 베이코 하쿨리넨 헬레 카닐라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올라비 비르타 하누 살라마 어윈 굿맨 라일라 키누넨 아르비 린드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키르스티 파카넨 라린 파라스케 마틸다 브레데 에르노 파실리나 안티 투이스쿠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아니키 태흐티 엘리사베트 레흔 에사 사리넨 마이유 게브하르드 칼레비 소르사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악셀 아이로 라우리 윌뢰넨 라이모 헬미넨 아르미 라티아 베이코 시니살로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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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핀란드 초대 대통령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Kaarlo Juho Ståhlberg
파일:service-pnp-ggbain-18900-18941v.jpg
출생 1865년 1월 28일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수오무살미[1]
사망 1952년 9월 22일 (향년 87세)
핀란드 우시마 헬싱키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19년 7월 26일 ~ 1925년 3월 2일
서명
파일: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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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배우자 헤드비그 스톨베리 ( 사망)[2]
에스테르 스톨베리[3]
자녀 6명
학력 알렉산드르 제국대학 ( 법학 / 박사)
종교 개신교 ( 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
최종 당적 국민진보당 }}}}}}}}}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독립 전후2.3. 대통령 임기2.4. 말년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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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초대 대통령.

2. 생애

2.1. 초기 경력

1865년 1월 28일, 신부였던 요한 가브리엘 스톨베리와 아만다 구스타프바 카스트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칼 요한(Carl Johan) 이였지만, 이후 핀란드 민족자각운동인 페노마니아에 참여하면서 핀란드어식인 카를로 유하나(Kaarlo Juhana)로 개명했다. 이후 정치 생활때는 학창 시절에 불렸던 이름인 카를로 유호(Kaarlo Juho)로 활동했다.

오울루에 있는 사립고에 다녔으며, 반 1등을 놓친적이 없다고 한다. 학교 교장이 스톨베리를 우리 민족의 희망과 진리라 평가하기도 했다고.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헬싱키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페노마니아는 정치적으로 분화했는데, 보수주의적이고 러시아 제국 총독부에 협조해 자치를 얻고자 하는 타협파(myöntyväisyyslinjan), 그리고 리버럴적이고 과거 스웨덴의 시절 입헌된 헌법을 수호하자는 호헌파(Perustuslailliset)로 나뉘었다.[4] 스톨베리는 이 호헌파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축에 들었다.

스톨베리는 핀란드 대공국의 내각인 원로원에 일반직 공무원으로 취직해 한동안 법률관료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02년 핀란드인에게까지 강제 병역을 법제화하는 것에 반대하다 해임되었다. 1905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 민중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 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호헌파만을 대화 상대로 선택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다. 호헌파의 영수인 레오 메켈린이 새 원로원장이 되었고, 스톨베리는 메켈린 원로원의 상공국장이 되었다. 호헌파 원로원은 신분제 의회였던 핀란드 국회를 단원제 의회로 개혁하고 미성년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하는[5] 파격적인 의회개혁을 진행했는데 스톨베리가 그 초안을 정초했다.

의회개혁이 완수되자 스톨베리는 학계로 돌아가 헬싱키 대학교 교수가 되어 행정법을 강의했다. 동시에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핀란드 내전이 일어나는 1918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당적은 호헌파 정당인 청년 핀란드당에 두었다.

2.2. 독립 전후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우파에서는 스톨베리를 차기 원로원장으로 밀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단독 과반을 달성하여[6] 사회민주당의 오스카리 토코이가 원로원장이 되었다. 토코이는 대신 스톨베리에게 헌법재판소장 격인 의회 헌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주었다. 이 때 토코이가 주도하여 사회민주당 내각의 명의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하려 하자 핀란드 우파들이 케렌스키에게 사주하여 토코이 원로원을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분노해 봉기하면서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에서 우파가 승리한 이후 우파가 분열되었다. 하나는 옛 협조파들의 정당인 그냥 핀란드당과 청년 핀란드당 당내 우파 제비파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이들은 독일 제국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매제를 핀란드 왕국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다른 하나는 청년 핀란드당 당내 좌파 참새파와 소농민 대변정당 농민당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공화제를 지지했다. 스톨베리는 이 때 참새파의 수장이었다. 여론은 공화제가 우세했으나 독일의 압력으로 군주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패망하면서 핀란드는 공화국이 되었다.

국체 결정 과정에서 골이 깊어진 청년 핀란드당의 양 계파는 결국 분당, 제비파는 핀란드당과 합당해 국민연합당이 되고, 참새파는 국민진보당이 된다. 스톨베리는 국민진보당 창당에 참여하고, 핀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는 전쟁영웅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 투표 결과 143대 50으로 스톨베리가 만네르헤임을 꺾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스톨베리의 정당인 진보당 뿐 아니라 농민당과 사민당이 우파 중 가장 진보적인 스톨베리에게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다.[7] 농민당과 사민당도 후보를 냈지만, 본인들 표로 생각되는 1표씩만 받았다.

2.3. 대통령 임기

초대 대통령이 된 스톨베리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후임 대통령들의 전범이 될 것이라는 생각 하에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내각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총리의 내각 운영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1924년 공산주의 성향의 의원들이 체포당하자 재선거를 통해 의원수를 회복할 것을 총리 퀴외스티 칼리오에게 주문했는데 칼리오가 불복하자 내각을 실각시킨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내전 이후 첫 대통령으로서 스톨베리에게 주어진 가장 당면한 과제는 전후 복구였다. 그리고 내전기에 적군에 가담한 사람들도 스톨베리에게는 그 복구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는 좌익들도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고 싶었고, 군부와 보수파의 격렬한 항의를 무시하고 1920년 내전기에 체포되어 수감된 좌익경력자들에 대한 대사면을 발표했다.

외교적으로는 재임 초기에 스웨덴이 올란드 제도를 노린 위기가 있었다. 페노마니아 출신답게 그는 스웨덴이나 바이마르 공화국 같은 게르만계 국가들에게 조심스러웠다. 그렇다고 극렬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련을 쳐서 오랜 기간동안 러시아령이었던 동카리알라까지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스톨베리는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같은 서방 진영 국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스톨베리의 이런 용공적 정책을은 보수주의자들의 불만을 가중시켰고, 1922년에는 스톨베리의 측근이었던 내무장관 헤이키 리타부오리가 자택 앞에서 군부 내 스웨덴계 사조직의 지령을 받은 백색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리타부오리는 좌익 대사면의 실무책임자였고, 내무장관으로서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의용병을 꾸려 카렐인, 이조라인 등 핀우그르계 주민 지역의 봉기를 지원하려는 것을 막았기에 우익에게 극심한 증오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스톨베리는 대통령으로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1925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좌익들에게 대사면으로써 신뢰를 얻었듯이, 재선을 포기하면 우익들에게도 공화국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좌익과 중도와 우익이 모두 화해의 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2.4. 말년

하지만 스톨베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핀란드의 자생적 파시즘은 날로 극심해졌다. 심지어 1930년에는 쿠르트 발레니우스 소장이 이끄는 파시스트들이 스톨베리 부부를 납치해서 소련 국경으로 끌고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전직 대통령 같은 요인이 이런 대접을 당할 정도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책임감을 느낀 스톨베리는 이듬해 1931년 대선에 다시 나섰지만, 3차 투표까지 간 끝에 국민연합당의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에게 2표 차이로 패했다. 이후 스톨베리는 정치적으로는 재기하지 못하고 현직 정치인들에게 자문이나 해 주는 원로의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까지 오래오래 살아 1946년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대통령의 법률고문까지 되었다. 1952년 사망.

3. 평가

핀란드의 또다른 국부. 만네르헤임이 핀란드 공화국이라는 하드웨어를 보존했다면, 스톨베리는 핀란드 헌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설계, 설치하고 유지하려 힘쓴 사람이다.

전간기라는 미친 시대에 이 소프트웨어를 지켜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만네르헤임은 외유나 다니며 방관하고, 스빈후부드는 파시스트들과 손잡고 흔들어대고, 강대한 가상적국인 소련이 눈을 희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기에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까지 민주헌법의 불씨를 보존해낸 스톨베리의 공은 만네르헤임의 공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핀란드하면 알려져 있는 이념을 초월한 국민단합, 대화와 존중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핀란드 내전은 시체의 산을 쌓았지만, 3만 구의 시체는 그런 교훈을 얻기에는 너무 싼 값이었다.[8] 핀란드의 근대 공화국으로서의 정신적 가치는 내전이라는 참사와 전간기의 파시스트 준동, 냉전기의 소련의 간섭을 이겨내며 단련되어 온 것이고, 그 시작점에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있었다.

2004년 YLE에서 선정한 위대한 핀란드인 47위에 랭크되었다.

4. 여담


[1] 핀란드 카이누 수오무살미. [2] 혼전성은 볼베리(Wåhlberg). [3] 혼전성은 엘브빙(Elfving). [4] 타협파의 주장은 세계적으로 별 새로울 것이 없는 자치론이지만, 핀란드 호헌파는 상당히 특이한 존재였다. 호헌파는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구스타브 3세 치세에 제정된 1772년 스웨덴 헌법이 입헌되어 입헌군주국이 되었으니 러시아 황제가 러시아 제국에서는 어떠한 권력을 누릴지 몰라도, 입헌군주국인 핀란드 대공국에서는 입헌군주인 핀란드 대공으로서 헌법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씽크빅한 주장을 하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러시아 황제는 이를 무시했고, 그래서 호헌파는 1905년 혁명 이전까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탄압당했다. [5]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이 뉴질랜드라고 알려져 있는데, 피선거권까지 포함하면 핀란드가 최초다. 이듬해 첫 총선에서 핀란드는 정원의 10%인 19명의 여성 의원을 세계 최초로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6] 이것도 특이한 것이, 계급혁명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단독 과반(103/200)을 달성한 것은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당시 핀란드 사회가 그 정도로 진보적인 담론이 오가던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내전 패배 이후 사회민주당이 금세 부활한 원동력이었다. [7] 핀란드 대선은 초기에는 간선제였다. [8] 섬뜩한 이야기지만,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비슷하게 이데올로기적 내전에서 파시즘과 손잡은 우익이 승리했던 스페인 내전에선 전후 뒷처리에서도 스톨베리 같은 온건유화파가 아니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강경일변도 독재정권이 들어선 결과 좀처럼 타협이 어렵고 집단학살과 국민절반의 공민권 상실의 상처가 걸려있는 국체문제로 인해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적으로 잠잠할 날이 없다. 핀란드 내전의 충격으로 핀란드가 덜컥 중도정치를 걷게 되었다는 흔히 알려진 통념 역시 역사적 실제와는 거리가 먼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