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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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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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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말기의 군영.

2. 역사

1881년 통리기무아문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중앙군을 별기군[1]과 같은 신식 군대로 개편하면서 구식군대인 5군영은 무위영(武衛營)[2], 장어영(壯禦營)[3] 2군영으로 감축되었다.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임오군란 청군에게 사흘 만에 진압당하고 흥선대원군 역시 청나라로 끌려간 후 철폐된다.

이후 1882년부터 청나라의 군제를 모방하여 친군영(親軍營)을 창설해 수도방위를 맡겼다. 친군영은 전영(前營), 후영(後營), 좌영(左營), 우영(右營), 별영(別營) 다섯 개의 병영으로 나누어졌으며 영사(營使)를 최고지휘관으로 하였다. 중앙군의 편제 개혁이 끝나자 지방군도 이를 본떠 평양에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에 친군남영(親軍南營), 경성에 친군북영(親軍北營), 강화도에 친군심영(親軍沁營), 부평에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演海防營)[4] 등을 설치하여 해당 지역 군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1888년 기존 친군영의 경비가 많이 들고 편제도 중복되는 등 모순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5영이 3영으로 축소 개편되었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 장위영, 우영과 후영, 기연해방영을 통폐합한 (친군) 통위영, 그리고 별영이 개편된 총어영[5]이 그것이다. 이후 1891년 통위영 소속 병력 중 구 총융청 병력이 경리청으로 분리되어 최종적으로 4영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식 군제를 따르기로 함에 따라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은 모두 해체된다.
명칭 주둔지 임무 특이사항
친군 장위영(壯衛營) 한양 국왕 호위 궁궐 경비 우금치 전투, 경복궁 전투 당시 투입
친군 통위영(統衛營) 한양 한양 및 수도권 경비 우금치 전투 투입
친군 총어영(摠禦營) 한양
친군 경리청(經理廳) 한양 북한산성 방위 우금치 전투 투입
친군심영(親軍沁營) 강화도 장성 황룡촌 전투 당시 투입
친군서영(親軍西營) 평양
친군남영(親軍南營 대구
친군북영(親軍北營) 경성
친군무남영(親軍武南營) 전주
친군진남영(親軍鎭南營) 청주
친군진어영(親軍鎭禦營) 춘천
위의 표는 감영(監營), 병영(兵營) 소속 병력은 제외하고 친군영만 기재해놓은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설치된 군국기무처는 친군영을 해체하고 일본인 장교의 지휘를 맡는 훈련대와 미군 퇴역 장교의 지휘를 받는 시위대에게 한성의 경비와 치안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 친군영들이 폐지된 이후 별도의 지방군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사회 질서가 혼란해지고 치안 공백이 발생한다. 수군 역시 통제영과 통어영, 통위영이 해체되자 조직 자체가 해산되고 만다. 이에 1895년 김홍집 내각은 을미개혁을 통해 훈련대 시위대를 통폐합시켜 친위대를 창설 후[6] 수도를 맡게 하고 각 지방에는 진위대를 창설한다. 진위대가 가장 먼저 설치된 두 곳은 북방의 요충지인 평양과 남부의 요충지인 전주였다.

아관파천 이후 재편성되어 지방대로 변경되었다.


[1] 별기군은 무위영 소속이었다. [2] 종전의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폐합해 만든 군영이며, 궁궐 숙위와 왕의 호위를 맡았다. [3] 종전의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이 통폐합해 만든 군영으로 한성의 경비를 맡았다. [4]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강화도 수군과 연안 육군을 통제하는 병영. 이전에는 해방아문(海防衙門)이라 불렸다. [5] 1892년 어명에 따라 친군총어영으로 개칭. [6] 이는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와 시위대가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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