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룡의 감독 경력 | |||||||||||||||||||||||||||||||||||||||||||||||||||||||||||||||||||||||||
|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
|
이름 | 최명룡 (崔明龍) |
생년월일 | 1952년 6월 11일 ([age(1952-06-11)]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덕수중학교 - 성동공업고등학교 - 한양대학교 |
포지션 | 슈팅 가드 |
신체사이즈 | 184cm |
실업입단 | 한국산업은행 (1976) |
실업소속팀 | 한국산업은행 (1976~1984) |
코치 | 한국산업은행 (1984~1993) |
감독 |
한국산업은행 (1993~1996) 원주 나래 블루버드 감독 (1997~1999) 대구 동양 오리온스 감독 (2000~2001.01) 한양대학교 감독 (2009~2013) |
행정 |
KBL 기술위원장 (2005~2009) 대학농구협회 회장 (2013~2016)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1]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으로 별명은 농구 코트의 신사였다.2. 아마추어 시절
덕수중학교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코치의 권유를 받고 농구부에 들어왔지만, 팀이 3개월 만에 해체되는 일을 겪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농구 명문 용산고등학교를 지망했으나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성동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 슈팅 가드로서의 빼어난 실력으로 명성을 날렸다.이후 합숙 훈련에 참가한 고려대학교에서 같이 뛰었던 동료 2명을 받아주지 않는 이유로 합숙소를 뛰쳐나왔지만, 한양대학교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에 허락을 받고 진학해 에이스로 거듭났다. 특히 1974년 추계전국대학농구연맹전에서 매경기 40득점을 선보인 덕분에 모교를 우승에 이끌었다. 본인 인터뷰
3. 선수 시절
대학 졸업 후 실업팀 한국산업은행에 입단했는데 은행원과 선수를 병행하며 1984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다.4. 지도자 생활
팀의 코치로 있던 최인선이 기아산업 농구단의 코치로 자리를 옮기면서 코치를 맡았고 이후 서상철 감독이 은퇴하면서 감독으로 승격했다.KBL 프로농구 원년 시절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해 사랑의 3점 슈터 정인교와 파이터 수비수였던 강병수 선수 그리고 기술형 외국인이었던 제이슨 윌리포드를 앞세워 정규리그 2위와 챔피언결정전 진출, 2년차에는 주희정의 잠재력을 찾은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3년차 때는 신기성이 입단했고 다른 팀에서 허재와
이후 KBS 농구 해설위원을 맡다가 박광호 초대 감독의 후임으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감독이 되었으나 포인트 가드의 열세와 함께 성적부진으로 자진사퇴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창단 멤버로 김진 코치에게 감독으로서의 내부승진을 유도하면서 배려한 것이었으며 이후 KBL 감독으로는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참고로, 박광호 감독도 김진 코치의 감독승진을 1995 상무 감독 시절의 영상을 보면 김진 코치가 감독 역할을 하고 자신은 총감독 역할을 했다.
2009년에는 폭력 논란으로 갑자기 경질된 김춘수(2012년 작고)의 후임으로 모교인 한양대학교 감독에도 취임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2012 시즌 뒤 사실상 지휘봉을 이상영 코치에게 넘겼다. 당시 제자 중 정효근과 이재도 외에 성공한 케이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결과론으로 감독으로서 제자농사를 지은 스타일이었다. 또한 한양대 농구부원들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라고 한다.
한양대학교 감독 시절에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어머니를 잃었던 차바위에게 “농구를 잘 하는게 효도하는 길”이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면서 운동을 그만두는걸 만류했었다.
5. 행정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대학농구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6. 여담
딸은 최윤영으로 2003년 미스코리아 출신이다.7. 관련 문서
[1]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용두동교회에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