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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0:23:39

천정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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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계 입문 전3. 변호사 활동4. 정치 활동
4.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4.2. 열린우리당 시절4.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4.4. 성남시 변호사 활동 및 호남정치의 복원작업4.5. 국민의당 시절4.6. 민주평화당 ~ 민생당4.7. 제21대 총선 낙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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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7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정계 입문 전

1954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1] 신석리 구석마을에서 아버지 천득린(千得麟, 1931. 10. 9 ~ 2019. 7. 8)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경화(金敬花, 1934. 3. 9 ~ 2022. 1. 17)[2]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포시의 공무원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전남 신안의 조부모[3]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포시에서 부모와 살게 됐다. 목포중학교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4] 중학교 졸업 후 명문 목포고등학교(21회)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하였다.[5] 그리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수석을[6] 차지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7] 이때부터 '목포 3대 천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8]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사법연수원 제8기를 3등으로 수료하였으며, 1978년 12월 23일 공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제10전투비행단에서 복무한 뒤 1981년 8월 31일 대위로 만기전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판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군 복무 중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전두환 정부 하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3. 변호사 활동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중 1인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를 설립했고[9], 거기에 노무현 전해철 등을 참여시켰다. 그 후 법조계에서 인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관해 두각을 나타냈다. 김귀정 열사의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활동하여 국가배상청구를 받아내었다.

또한 음반 사전심의제를 위헌이라 규정한 94헌가6 재판의 담당변호사로 활약한 전적이 있다.

전 법무부장관인 조국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조국의 변호인을 맡은 바 있다. #

4. 정치 활동

4.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정계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안산시 을 지역구로 당선되었고 이래 같은 지역구(안산시 을, 안산시 단원구 갑)로 4선을 기록하였다.[10] 정동영, 신기남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당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16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정균환 당시 원내총무 밑에서 원내수석부총무를 맡았고, 정균환 후임으로 차기 원내총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39표를 얻어 68표를 얻었던 서울 중랑구 갑 3선 중진인 이상수에게 밀려 원내총무는 되지는 못했다.

당시 국민의 정부와 핵심 지지층이 갖고 있던 고민 중 하나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 출신 대권 주자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는데,[11] 정동영, 신기남 등과 더불어 지금 당장의 중량감은 떨어지더라도 잘 성장하면 호남권 대권 주자, 즉 뉴 DJ가 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 지지층에 천정배가 갖고 있던 스마트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2001년 7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깜짝 지지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의원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노무현이 급격히 세를 불려가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대선 승리까지 이루어내자, 그의 혜안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 2002년 중반에는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고 후단협에 의해 흔들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노무현을 계속 도와줘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는 기존의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12] 민주당 내에서 지역구도에 기생하며 점차 보수화, 기득권화하고 있는 동교동계에 맞서서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깨끗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진보층의 지지를 얻었다.

4.2. 열린우리당 시절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탄핵열풍을 타고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천정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지역구인 안산시 단원구 갑에서 3선에 성공했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78표를 얻어 72표에 그친 서울 관악구 을 지역 5선의 이해찬 의원을 꺾고 승리하며 17대 국회 첫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되었다. 단독 과반을 차지한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된 이 시절이 천정배 정치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천정배는 이 시점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며 급격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17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청산법 제정, 언론개혁법 제정을 밀어붙인 것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당시 한나라당 4대 개혁 입법을 가리켜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도 비난을 퍼부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군 출신, 관료 출신의 보수성향 인사들이 4대 개혁입법에 협조해주지 않는 등 자중지란 콩가루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4대 개혁 입법은 실패했다. 예를 들어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문법은 1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이 30% 이상이거나 3개 일간지의 점유율이 60%를 초과할 경우 규제한다는 규정[13], 신문지면에서 광고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규정이 삭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언론개혁은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 국가보안법은 독소조항만 제거하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았을 텐데, 강성 의원들[14]이 "완전 폐지가 안 될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존치해버리고 말았다. #[15] 이와 함께 과거사청산법의 통과도 무산되었다.

4대 개혁입법 실패로 당내 리더십을 상실하자, 2005년 1월 1일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층에서 비판을 받는 것 이외에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도 지지를 상실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쯤부터였다.[16]

2005년 6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2005년 10월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를 두고 검찰과 대립한다. 강정구가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해 검찰이 구속수사를 시도하자 천정배는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청법 8조에 근거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여 불구속수사 지시를 내렸다.[17] 김종빈 검찰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에 항의하여 총장직을 사퇴했다. 보수층을 중심으로 민심 또한 급격하게 악화됐다.

과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법무부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 되자 소신이 바뀌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다만 천정배는 법리상 구속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김종빈과 합의 하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돌연 검찰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염증이 가속화되고, 열린우리당 역시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며 호남에서조차 비토되는 상황에 이르자, 2007년 1월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탈당 후에는 몇 개월간 무소속으로 당적을 갖지 않았고, 김근태와 더불어 한미 FTA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무장관 시절에는 FTA 비준 합동담화문에 서명한 적이 있어, 이후 2011년 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4.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이후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해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컷오프 되었다. 대선 과정에서는 문국현과의 정책 연대를 구상하는 등, 반한나라당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안산시 단원구 갑 선거구에 출마, 한나라당의 허숭 후보를 꺾고 4선에 성공, 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9년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강행 처리되자, 장외 활동에 앞장 섰다. 이 기간에 쌓인 1억 2천만 원의 세비 수령을 미련 없이 거절하여,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5위를 차지,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의 결과로 사퇴,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자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며 후보가 되진 못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존에 지켜오던 안산시 단원구 갑 지역구 대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이 지역 현역 의원이었던 새누리당 유일호 후보에게 단 3.92%p 차이[18]로 낙선하며 정치 커리어 최초로 낙선을 기록하게 되었다. 사실 천정배는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면서 차기 총선은 안산에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였으며, 그래서 서울시장 경선에서 탈락한 이후 당시 정몽준이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있었던 동작구 을에 출마하려 했었다. 하지만 동작구 을에서 개인적으로 가까운 이계안 전 의원이 출마를 하려 하자 출마를 포기하고 지도부에 거취를 일임한 끝에 새누리당이 강세인 송파구 을 지역구에 전략공천된 것이다. #, ## 민주당 지도부에서도 박근혜 후보에게 70%를 준 문정2동이 송파구 을 지역구에 속해있는 만큼 중량감 있는 의원을 전략공천해 열세를 뒤집으려 한 것.[19] 다만 보수정당 지지세가 강함에도 생각보다 새누리당 후보와 격차가 적었던 이유는 박계동 국민생각 후보로 출마해서 여권 표가 어느 정도 분산되었기 때문도 있었다.

4.4. 성남시 변호사 활동 및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19대 총선 낙선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냈고, 그러면서 이재명 시정 하 성남시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2011년에서 2015년까지 18건을 수임해 2억여 원을 수임료로 받았다. #

이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광산구 을 지역구에 출마를 희망했으나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서 권은희를 전략공천하는 바람에 출마의 뜻을 접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려 했으나, 당시 문재인 대표 체제 지도부의 공천 결과에 불복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3년 만에 원내로 복귀했다.

탈당 후 천정배가 내세우는 것을 요약한다면 야권 내 '영남패권주의' 타파를 통한 '호남정치의 복원'인데, 이 '호남정치'의 파괴 원인으로 지목 받는 게 천정배가 주도한 바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이를 두고 호남 지역주의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기도 한 상태.[20] 현실론적 시각에서 이전에 비해 호남권의 인구가 충청권보다 적어진 현실에서 호남으로 영남을 견제한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가 하는 비판도 있다.

이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손을 잡았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안철수와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4.5. 국민의당 시절

2016년 2월 1일 국민의당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야권 표 분산으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얻어 20대 총선에서 압승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철수 상임대표가 야권 통합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잠시 안 대표의 뜻에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3월 10일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을 내리겠다며 국민의당 탈당을 불사할 뜻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뜻을 접고 안철수와 손을 잡았다. 이에 천정배 의원이 창당했었던 국민회의의 탄생에 적극 일조했었던 천 의원의 외곽 조직인 '새로운 길'은 천정배 의원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양향자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광주 서구 을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6월 29일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수민· 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20대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21] 그의 대표직 사퇴는 사실 대단히 큰 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련 기사

특히 국민의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천정배 의원이 장관까지 지낸 중진급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안철수 대표에게 눌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 두고 ' 국민의당 대표는 안철수 한 명 아니냐', ' 안철수 옆에 앉아 있는 건 천정배가 아니라 천정배 모양으로 깎은 나무 토막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 27일 19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내 경선이 안철수 전 대표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2017년 3월 14일 불출마로 결정했다. #

국민의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대선 공작 사건으로 심각한 치명상을 입은 가운데, 7월 12일 국민의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그리고 8월 1일 대전광역시 충무체육관에서 정식으로 당대표 경선 출마 선언을 했다. # 그러나 8월 27일 전당대회에서 16.60%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4.6. 민주평화당 ~ 민생당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 원내대표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고사했다. # 결국 원내대표는 유성엽 의원으로 결정.

2019년 8월 12일, 대안정치연대 구성을 명분으로 민주평화당을 탈당하였다.

2019년 9월 18일, 외교관 딸에게 "국정감사 때,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겠다" 라고 문자를 보낸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

2019년 연말, 4+1 회담에 대안신당 협상 대표로 참여하였는데, 검사 사위의 로비 때문에 검찰 개혁 법안을 반대한다는 음모론이 돌았다. 본인은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 도입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당내에서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으나,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발의한 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던졌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 민생당 후보로 출마하여 7선을 노렸으나, 19.49% 라는 저조한 득표율에 그치며 75.83%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후보에게 거의 쿼드러플 스코어로(...) 대패하며 낙선했다. 함께 낙선한 박지원, 정동영, 유성엽, 윤영일, 황주홍 의원과 옛 국민의당 시절 정치인들까지 넓혀보면 김경진, 이용주, 김관영, 임정엽이 30%대 득표율을 올린 것과 비교해도 참담한 결과인데, 원래 경기도 안산시에서만 4선을 한 정치인이고 학연도 없는 편이라[22] 지역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20년 6월 20일, 국회 마지막 급여 850만원을 서구에 기탁했다.

4.7. 제21대 총선 낙선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이란 관계가 다시 화해 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출범한 한국-이란 협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

2021년 11월 26일 이재명 후보로부터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제안받았다. 2021년 12월 29일 유성엽 전 의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복당이 확정되면서 6년 만에 복당하게 되었다. # 광주 정가에서는 사촌동생의 성범죄 및 금품살포 묵인 의혹으로 당을 떠난 양향자 의원 대신 민주당 서구 을 지역위원장에 임명될 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2022년 8월 17일 현재 공석인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을 지역위원장에 공모하였다. # 만약 지역위원장에 임명된다면 2024년에 있을 22대 총선에서 서구 을 지역구에 출마해 국회 복귀 및 7선을 노릴 것으로 보였다.[23]

허나 예상과는 달리 2023년 12월 22일 입장문을 내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 이로써 7선 도전의 여정을 조기에 마무리하게 되었다. 불출마를 선언한 추측으로는 광주 서구 을 선거구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지지율이 높지 않게 나온 점[24],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올드보이'들의 귀환에 비판이 제기된 점 등에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같은 국민의당- 민생당 출신이자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당적으로 함께 낙선했던 박지원, 정동영은 천정배와 다르게 그대로 출마를 강행했고 경선을 거쳐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1] 일제강점기 때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한 곳이다. 천정배의 7촌 재종증조부(再從曾祖父)인 천후빈(千后彬, 족보명 천두학(千斗學), 1870. 5. 9 ~ ?. 5. 15) 또한 신석리 지역의 대지주 중 한 사람이었지만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이쪽은 소작쟁의의 원인과는 거리가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 조선인민군이 자행한 집단 처형 여파는 피하지 못해, 당시 지주집안이었던 천씨 집안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고. [2] 김남기(金南基)의 딸이다. [3] 조부 천익성(千翼誠, ? ~ 1967. 11. 2), 조모 단양 우씨(? ~ 1972. 11. 1). [4] 다만 공부를 잘 한 것에 비해 리더십은 별로 없는 편이어서, 학창시절 12년 동안 반장은 한 번도 못 했다고 한다. [5] 유선호 전 국회의원과 고교 동기 - 대학 과 동기이다. 박홍률 목포시장도 고교 동기다. [6] 이외에도 천정배가 재학 당시에는 광주서중- 광주일고 학생들이 시험, 경시대회에서 목포고에 밀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7] 서울대학교 법학사 및 상법학 전공 법학 석사이다. 석사학위논문 : 租稅法上의 法人格 否認의 法理 (1988) [8] 그런데 김어준으로부터 '그러면 나머지 두 천재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자기도 '목포 3대 천재'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바 있다. # 보통은 김지하 시인, 조훈현 9단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신승남 전 검찰총장을 같이 거론하는데... 아예 이 사람들을 통째로 묶어 목포 5대 천재라고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사에도 어느 정도 나오듯 천정배 본인은 천재라는 표현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9] 전현직 국회 의원 4명을 배출했고, 이 중 1명의 대통령이 나왔다. [10] 상술한 법무법인 해마루가 안산시에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천정배가 공동 창립자이자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안산시를 지역구로 선택한 것도 이 때문. 법무법인 해마루의 공동 창립자 임종인이나 나중에 들어온 전해철 또한 안산시에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또다른 공동 창립자인 노무현 또한 자서전 <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자신이 안산시에 출마할 것으로 거론되었지만, 부산 출마를 택했다고 살짝 언급한다. [11] 입지가 굳건했던 이인제는 당시 시점에서는 지역색이 짙지 않은 경기-충청권 인사였고, 결국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PK 인사에, 동교동계 소속이자 호남 출신인 한화갑은 김대중의 측근 이미지가 강해서 유권자들 사이에선 대권주자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외에 정동영, 김근태, 김중권, 정대철 등이 후보로 거론되거나 스스로 나섰지만, 여러가지 측면에서 많이 아쉽거나 고만고만하다는 평가들이 많았다. [12] 사실 이 분당 국면도 구도로 본다면 호남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구 주류와 호남에서 안주하지 말고 PK 등과도 연합해야 한다는 탈당파 간 대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총선에서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호남 지역구까지 상당 부분 잠식한 것은 제법 많은 유권자들이 천신정을 믿고 따라간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3] 누가봐도 조선일보를 포함한 조중동을 겨냥한 규정이다. [14] 대표적으로 유시민 [15]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대표)였던 이부영의 회고로는 한나라당과 대폭 개정에 거의 합의했는데, 천정배 원내대표가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폐지를 밀여붙여서 모든게 꼬였다고 한다. 당시 보수진영은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을 완전폐지해 버릴까봐 두려워했고, 이것을 이용해서 국가보안법은 살려두지만 각종 독소조항은 제거해서 사실상 식물법안으로 만드는 형태로 개정하자는게 이부영과 온건파들의 전략이었다. [16] 강경진보층에서 볼때는 원내과반수를 만들어 줬는데도 아무 것도 못하니까 불만이 폭발한 것이고, 중도층 입장에서 볼때는 집권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정체상황이 길어지니까 짜증이 난 것이다. [17] 참고로 2020년 7월 기준, 지금까지 검찰청법 8조에 의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헌정사상 2번밖에 없다. 첫 번째가 천 장관의 사례이고, 두 번째 사례는 2020년 7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채널A 사건과 관련해 전문수사자문단 소집을 중지하고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의 독립성을 보장할 것을 지휘한 것이다. 적어도 천정배 장관의 사례는 논란이 많아도 구속/불구속 여부가 개인의 신체적 자유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법무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지시로 볼 여지가 있지만, 추미애 장관의 사례는 검찰청법 12조 2항에 의거한 검찰총장의 지휘감독권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정배 장관의 사례보다 더한 논란을 일으켰다. [18] 새누리당 유일호 49.94%, 민주통합당 천정배 46.02%, 다만 출구조사는 천정배:48.6%, 유일호 47.7% 0.9%,p차로 근소하게 앞서는걸로 발표되었다. [19] 2012년 19대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은 보수 정당의 아성이었던 강남3구 지역에서도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가 서서히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자, 서울 지역 승리를 목표로 할 겸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부각하면서 당 내 거물들인 천정배( 송파구 을), 정동영( 강남구 을), 정세균( 종로구) 등 다선 의원들을 서울 지역구에 전략공천했다. 다만 막판에 극적인 보수층의 결집으로 종로구에 출마한 정세균을 제외하면 천정배, 정동영은 모두 낙선해버리면서 기대와 달리 별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20] 주로 친노계 정치인 혹은 지역주의 정치에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있거나 비판적인 영남출신 친노 젊은 층에서. [21] 굳이 책임여부를 따지자면 국민의당 리베이트 사건은 안철수 공동대표의 핵심 측근들이 연루되었던 사건임으로 천정배 전 공동대표의 경우 책임이 덜하다. [22] 광주 소재 고교가 아닌 목포고등학교 졸업 [23] 천정배가 만약 지역위원장 임명 및 차기 총선 공천까지 성공해 서구 을에서 당선될 경우 7선 국회의원이 되며, 이정도면 국회의장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다. [24] 그래도 지역평판은 나쁘지는 않았는지, 양부남 다음으로 후보군 적합도 2위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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