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6대 외교부장 | ||
본명 | 진우금(陳尤金) | |
정체 | 陳友仁 | |
간체 | 陈友仁 | |
한국식 독음 | 진우인 | |
영문 | Chen Youren | |
자 | 우인(友仁) | |
영문 이름 | Eugene Chen | |
출생 | 1878년 7월 2일 대영제국 트리니다드 토바고 샌퍼낸도 | |
사망 | 1944년 5월 20일 왕징웨이 정권 상하이 특별시 | |
국적 |
대영제국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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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트리니다드 토바고 성 마리아 학교 | |
직업 | 외교관, 정치가 | |
외교부장 재임 기간 |
6대 1931년 12월 20일 ~ 1932년 1월 29일 |
1. 개요
중화민국의 혁명가, 외교관. 국민혁명 시기 강경한 혁명외교를 이끌었으나 국공결렬 이후 몰락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78년, 영국령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평천국 운동의 가담자였던 진계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계신은 동왕 양수청의 부하가 되어 청군과 싸웠으나 양수청은 홍수전과의 갈등 끝에 살해되었고 진계신은 영국령 홍콩을 거쳐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 정착했다. 마르티니크에서 화교의 딸과 결혼한 진계신은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이주하여 1878년 봄, 천유런을 낳게 되었다. 진계신은 트리니다드에서 농장을 경영하여 먹고 살았는데 천유런에게 태평천국 운동에 대해 가르치면서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천유런이 12세 되던 해, 진계신이 사망했으며 천유런은 20세가 되던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이때 트리니다드의 프랑스계 지주인 강툼의 딸, 아가사와 결혼하여 8명의 자식을 두었고 이중에서 4명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내가 프랑스계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의 가족들은 결혼에 크게 반대했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한다. 1901년, 퍼시, 1905년, 실비아, 1908년, 잭, 1914년 욜란다를 낳았다.
천유런의 변호사 사업은 성황을 이루었으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천유런은 변호사 사업을 그만두고 1911년,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원서를 넣은 천유런은 무창봉기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을 방문한 쑨원으로부터 혁명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천유런은 가족들까지 팽개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파리에서 만난 인물이 청방의 거물이자 아나키스트인 장런제였다. 천유런은 과학자 오련덕과[1] 동행했는데 이때 오련덕으로부터 기존의 이름인 진우금[2] 대신에 우인이라는 자를 받아 이를 이름으로 쓰게 된다.
2.2. 북양군벌에 맞서다
귀국 후 천유런은 탕사오이 내각 하의 교통부장 스자오지의 밑에서 대외관계 비서로 채용되었지만 전망이 보이지 않자 언론계로 발길을 돌렸다. 스자오지는 영국 공사로 부임하면서 천유런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천유런은 이를 거절하고 중국 정치에 대해 신랄한 논평을 남기며 이름을 얻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쑨원과 오랜만에 다시 만나 그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당시 중국에선 위안스카이 사망 후 안휘군벌의 수장인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는데 천유런은 돤치루이가 매국 외교를 한다고 맹렬하게 비판했고 이 때문에 돤치루이의 분노를 샀다. 돤치루이는 천유런을 투옥했는데 돤치루이의 심복 쉬수정은 천뉴런이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를 탄압했다간 영국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천유런에게 유감 성명서를 받아내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하자고 했다. 돤치루이도 이에 동의했으나 천유런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천유런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송전을 하라는 주변의 제의나 영국 국적을 행사하라는 조언도 모두 뿌리치고 자신이 중국 국민이며 영국 국적을 포기하였다고 못을 박았다.
천유런의 체포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를 놓고 중국 정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국과 미국이 개입하면서 천유런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은 호법전쟁이 한창이었는데 1917년, 호남 전선에서 패배한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하야한 틈을 타 천유런은 석방되었다. 천유런은 북양정부에 환멸을 드러내며 남방의 호법정부에 가담했다.
2.3. 국민혁명 시기
쑨원은 천유런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의 호법정부 대표단에 포함시켜 파리로 파견했다. 이때 천유런을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내자고 제안했는데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계속 외면을 받고 있던 쑨원은 차차 독일과 소련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천유런의 제의를 그럴듯하다고 여겨 소련에 서신을 전달했으나 소련 측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랴오중카이 등의 후원을 받으며 국민당의 좌파 정치가로 성장했다.1921년, 소련이 카라한 선언을 발표하자 천유런은 이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소련과의 합작을 주장했다.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이 발생하자 쑨원으로부터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대처를 맡았다. 북경정변 발발 이후 핍궁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옹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3] 1925년 2월, 쑨원의 임종이 다가오자 리스쩡 등과 함께 중앙정치위원에 충원되었다. 3.20 사건과 홍콩 파업 때 영국 측과 교섭을 맡았다. 1926년, 중산함 사건 이후 탄옌카이, 장런제,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 정치위원회회를 정지시키고 중앙정치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를 합병하여 정치회의로 개조하고 21명을 정치위원에 선출했는데 이때 천유런도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으로 강제외유를 떠난 후한민을 대신하여 외교부장 대행을 맡았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된 후 7월, 영국령 홍콩의 파업문제를 놓고 구멍위와 함께 영국 측과 담판을 가졌다. 천도논쟁에서 우한 천도를 지지했으며 11월, 쑹칭링, 보로딘 등과 함께 천도주비위원에 임명되어 우한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난창에서 장제스를 만나 회담을 가졌으나 소득은 없었다. 12월, 사법부장 쉬첸을 필두로 임시연석회의를 조직하면서 우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1927년, 한커우 사건이 발생하자 강경하게 아편전쟁 이후 없었던 험악한 사태라고 표현하며 영국측의 한커우 총영사관에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여 한커우의 영국 조계를 무력으로 회수하는 등 혁명외교를 실시했다. 장제스가 난징, 상하이로 접근하자 3월 23일, 미하일 보로딘으로부터 상하이의 전투가 끝나는대로 열강의 군대가 상하이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난징사건 이후 장제스로부터 이를 처리하기 위해 열강과 교섭해줄 것을 부탁받았으며 당이 민중을 지도하여 외국 군대의 철수를 촉구한다는 방침 하에 영미로부터 상하이 조계 회수를 논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해 상하이 방면 외교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상하이에 갈 일은 없어졌다.
2.4. 반장운동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고 우한 국민정부를 계속 지지하였으나 급진적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폭동과 과격한 기업 파괴 운동에 불만을 품고 정부로부터 이를 단속할 것을 요구했다. 7월에 이르러 왕징웨이가 국공합작을 종식하려 하자 이에 대해 쑹칭링, 허샹닝 등과 함께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난창 폭동이 발생했을 때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국민당 좌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쑹칭링, 장파쿠이와 함께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에 추대되었다.이후 국민당의 청당 조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쑹칭링, 덩옌다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났는데 이 때문에 쑹칭링과의 염문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11월 1일 <중국과 세계 혁명 민중에 대한 선언>으로 불리는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한동안 소련에서 거주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의 혁명 역량을 폄하하면서 장제스와 다시 합작할 것만을 요구했다. 스탈린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한 천유런은 1930년, 프랑스로 떠나버렸는데 이때 장런제의 넷째 딸 장여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렸다. 둘의 나이는 무려 31세(!)가 차이 났고 이 때문에 장런제가 크게 반대했지만 왕징웨이의 중재로 장런제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발하자 쑨커, 쉬충즈와 함께 장제스와 광동파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으나 장제스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포기하고 영국령 홍콩으로 외류를 떠났다. 이들은 왕징웨이와 회담을 가지고 5월 27일 개최된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 비상회의에 참여함으로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정부위원 겸 외교부장에 취임하여 일본 제국의 원조를 얻어내고자 했다. 난징 측의 감찰위원 우징헝은 5월 29일, 비상회의에 참석한 반장파 22명을 분석하면서 천유런을 제3당으로 분류하고 쓰레기 더미로 비난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난징과 광저우의 통합을 조건으로 12월 15일, 장제스가 퇴진하고 영월합작이 이루어지자 구웨이쥔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외교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대일 교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리한 대일항전론, 대일절교론을 내세우다가 전국적인 비판을 받았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함에 따라 쑨커 내각이 붕괴되었고 쑨커와 함께 동반사퇴하여 뤄원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시는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후 천지탕, 리쭝런의 서남정무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서남지역의 외교사무를 담당하였으며 1933년 박의일 체포사건이 발생하자 강경하게 박의일 석방을 주장했다.
2.5. 말년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하자 중화공화국 외교부장에 취임하였고 복건사변 진압 후 중국국민당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파리로 망명했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했다. 1941년 환남사변이 발생하자 허샹닝, 쑹칭링과 연명하여 공산당 무력 탄압을 반대하고 반장활동을 벌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군이 홍콩으로 진주했는데 1942년 봄, 천유런은 그의 명망을 눈독들인 일본군에 의해 상하이로 압송되었다. 일본 측은 천유런에게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천유런은 이를 거부하고 왕징웨이 정권을 크게 비판하였다.1944년, 상하이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여 일본에 의한 암살설이 돌았다.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한 후 팔보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3. 가족
아들 천이판은 만화가로서 신화통신사에서 근무했다.손자이자 천이판의 아들 천이원은 영국인과의 혼혈이다.
4. 주요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 |||||||
1대 | → | 대행 | → | 2대 | |||
후한민 | → |
천유런 ( 1926년 6월 1일 ~ 1927년 8월 13일) |
→ | 우차오수 | |||
대행 | → | 6대 | → | 7대 | |||
구웨이쥔 | → |
천유런 ( 1931년 12월 30일 ~ 1932년 1월 29일) |
→ | 뤄원간 |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中國國民黨의 民族主義 理念과 '革命外交', 박제균, 중국근현대사연구 31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國民革命時期 汪精衛와 反帝問題, 배경한, 중국근현대사연구 47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무한 국민정부 성립기 '천도논쟁', 황동연, 학림 13권, 연세사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