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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성)/통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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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왕조 진(晉)의 통일 과정에 대한 내용은 오멸망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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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의 사항3. 조(趙)나라 침공
3.1. 1차 침공3.2. 2차, 3차 침공3.3. 4차 침공
4. 한(韓)나라 멸망(기원전 230년)5. 조(趙)나라 멸망(기원전 228년)6. 위(魏)나라 멸망(기원전 225년)7. 초(楚)나라 멸망(기원전 223년)8. 연(燕)나라 멸망(기원전 222년)9. 제(齊)나라 멸망(기원전 221년)

1. 개요

파일:e35d3e33jw1ew13uxw8a9j23342d0e83.jpg
전국시대가 점점 무르익음에 따라 7국 전쟁의 양상은 점차 총력전에 가까워졌다. 이것은 국가 간의 전쟁이 결코 군사력뿐만이 아닌 정치력, 외교력, 경제력까지 밑바탕이 돼야만이 상대방을 찍어 누를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여 진(秦)나라의 정치, 군사 정책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의 3분의 1, 인구는 천하의 10분의 3, 부는 천하의 10분의 6을 차지했다.[1][2] 하지만 진나라는 그럼에도 개혁을 거듭하여 진시황의 즉위 이후 내정적으로 6국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6국의 인민을 빼앗는 정책을 펼치고 종래의 수급제를 수정하여 무분별한 살육을 막으며,[3] 그 포로들을 진나라의 노동 자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대규모 토목사업을 일으켜 국력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중 정국거라는 수로는 서쪽의 경수(涇水)를 끌어들여 동쪽의 낙수(洛水)[4]의 물을 댈 수 있는 관개수로로 정국거를 건설함으로 인하여 관중 지방에는 2억 2천만 평의 농경지가 새로 생겨나고 그로인해 4천만 섬의 곡식이 생산되었다고 한다.[5] 이것은 진시황의 통일전쟁 기간 진나라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울료, 이사, 요가를 중용하고 외교적으로는 6국의 대신들을 매수해 왕과 호신들을 이간질하며 각종 첩보전을 펼쳐서 6국의 합종을 막고, 6국 조정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다.[6]

여담으로 이 시기(BC 236~BC 221년) 6국의 군주들은 연왕 희(연나라), 위경민왕 위왕 가(위나라), 조도양왕, 조유목왕, 조가(조나라), 제왕건(제나라), 초유왕, 초애왕, 웅부추, 창평군(초나라), 한왕 안(한나라)이었는데 대부분 시원찮은 군주들이었다.[7]

2. 주의 사항

사마천(BCE 145 – BCE 86?)이《 사기》를 집필할 시기 이미 분서갱유 초한쟁패를 거치며 소실된 기록이 굉장히 많았다. 그로 인해 사마천도 《사기》를 쓸 때 사료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그 결과 진나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는 그 중요도에 비해 자세한 내용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아래에 있는 내용들은 《 전국책》이나 《 자치통감[8]과 같이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었으나 과장이 매우 심한 사료와 《 열국지》 같은 소설이 섞인 서술임을 감안하고 읽자. 또한 아래 " 번오기 = 환의" 설과 같은 것은 중국 역사학자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 정설이 아니므로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고 읽어야 한다.

3. 조(趙)나라 침공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진나라는 6국 겸병의 가장 큰 걸림돌인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3.1. 1차 침공

기원전 236년[9] 진나라는 조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이사의 계략을 써, 간첩으로 하여금 조나라와 연나라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양국이 상대방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 계책이 먹혀들어 조나라는 연나라와 전쟁을 개시했고 진나라가 침공할 당시 조나라의 주력군은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10][11]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일으키자 연나라를 돕는다는 구실로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남과 북 양로의 길을 빌려 조나라로 진격했다. 번오기와 양단화의 남로군은 안양으로 진격하고, 왕전의 북로군은 요양과 언여로 진격하여 점령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주력군이 빠진 조군을 격파하며 9개의 성읍을 점령하고, 조나라의 영내를 파죽지세로 장악해 가며 남로군과 북로군으로 하여금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해 일거에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진나라의 침공으로 국내 형세가 매우 위급해진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조 도양왕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조 유목왕 천(遷)이 뒤를 이었다. 유목왕은 연나라 정벌에 나가있던 조나라의 주력군에 귀환을 명령하고, 한단 북쪽 태항산의 험함과 한단 남쪽 장수(漳水)와 그 연안을 따라 축조된 장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킴으로써 진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진나라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여불위에 관한 문제로, 노애의 반란사건과 연루되어 승상직을 박탈당하고 하남의 봉지에 들어가 지내던 여불위에게 관동의 여러 제후들이 사람을 빈번히 보내 왕래를 한다는 것을 진왕 조정이 알게 되었고, 이는 여불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게하는 원인이 되어 결국 여불위 일가를 귀양보내듯 사천으로의 이주 명령을 내렸다. 다음해 여불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한 가지는 조나라를 수월하게 공략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하기 전 진나라와 위나라가 우호 조약을 체결했는데, 위나라는 진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기도했다. 또한 진나라에서도 위나라와 협력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져 결국 진나라는 공격목표를 조나라에서 초나라로 전환했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제1차 조나라 정벌이 흐지부지 끝나고 두 나라는 1년간의 휴전기간을 갖게 되었다.

3.2. 2차, 3차 침공

진왕 정(政) 13년, 기원전 234년 (조 유목왕 2년) 진나라의 수뇌부는 조나라와의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략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다시 조나라를 침공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려 번오기를 대장으로 하여 10만 명의 진군을 동원해 조나라 남부로부터의 공격을 개시했다. 번오기가 이끄는 진군은 조군의 방어망을 피해 장하(漳河)의 하류를 우회하여 한단의 남동쪽 평양(平阳)[12]과 무성(武城)[13]을 공격했다. 조나라에서는 대장 호첩이 대군을 이끌고 두 성을 구원하러 갔다. 6월 번오기가 이끄는 진군은 대장 호첩이 이끄는 조군과 회전을 벌여 조군을 대파하고, 10만 명의 조군의 목을 베며 호첩을 참살했다. 평양과 무성은 진군에 점령당했다.

진왕 정 14년, 기원전 233년 (조 유목왕 3년) 일전에 대승리를 거둔 번오기는 다시금 출격했다. 상당에서 출발하여 태행산을 넘은 진군은 조나라 중부로부터 진격을 개시했다. 번오기는 조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적려(赤麗)와 의안(宜安)을 공격하여 점령한 다음 한단의 배후로 진격했다. 조나라의 주력군을 섬멸하고 한단을 향해오는 진군에 위기감을 느낀 조 유목왕은 흉노군을 방어하고 있었던 이목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북방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영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목은 유목왕의 명령을 받아 대군의 5만 정병 가운데 1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며 신속하게 남하했다.

한단의 조군과 합세한 이목의 북방군은 지금의 하북성 고성현 서남쪽에 있는 의안(宜安)과 인근의 비하(肥下)에 도착하여 보루를 높게 쌓고, 잇단 승리로 사기가 충만한 진군을 막아내며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목이 의안의 성문을 걸어잠그고 매일 소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며 활쏘기 연습이나 시키자 군사들이 오히려 진군과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목은 듣지 않았다. 번오기는 의안(宜安)까지 내려온 조군이 싸움에 응해주지 않자 조바심을 냈다. 왜냐하면 진군은 먼길을 돌아서 온 마당에 지구전을 펼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군은 어떻게 해서든 거점안의 조군을 밖으로 끌어내 단기결전을 유도해야만 했고, 이에 번오기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비하 땅을 맹공했다. 이를 통하여 조군의 구원군이 나오도록 한 뒤 조군의 영채를 급습하려고 했지만 번오기의 속셈을 꿰뚫고 있었던 이목은 '위위구조'(圍魏救趙)의 전략을 써 조군을 3로로 나누어 진군의 진지를 기습공격하여 점령했다. 진군의 주력부대가 나가있어 수비군이 적어진 데다가 조군이 굳게 수비만 한 까닭에 갑작스런 공격을 예상치 못했던 진군은 방비가 소홀했고, 그로인해 조군에 쉽게 본채를 함락당하게 되었다.

비하(肥下)를 공략 중이던 번오기는 본채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이목에 의해 보급이 끊겨버린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번오기는 다급하게 군사들을 되돌렸다. 하지만 이것은 이목이 기다리던 바였고 이를 미리 예상하여 매복하여 진을 친 후, 황급히 되돌아오는 진군을 정면에서 막게 하고 주력부대로 하여금 양쪽에서 치게 하여 수차례의 접전 끝에 진군을 대패시키고 진군 10만 명을 섬멸했다. 이를 비 전투(肥之戰)라 한다. 이목이 번오기의 진군을 전멸시키자 본국의 처벌이 두려웠던 번오기는 연나라로 도주하게 되었다.[14]

3.3. 4차 침공

진왕 정 15년, 기원전 232년 (조 유목왕 4년) 진나라는 다시금 대군를 일으켜 군사를 양로로 나누어 남로군은 업성(鄴城)에 집결시키고, 북로군은 태원(太原)에 집결시켜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해 일거에 멸망시키고자 했다. 태원에서 출발한 북로군은 지금의 산서성 양곡현(陽曲縣) 부근인 낭맹(狼孟)을 점령한 다음 태항산을 넘어 계속 진격하여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남쪽의 번오(番吾)를 공격했다. 진나라가 침공하자 조 유목왕 천(遷)은 이목을 불러들여 대장으로 삼았다. 당시 유목왕에게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조나라에는 그해 가뭄이 와 농지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농작물이 아예 죽어버려 곡물을 수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진나라의 잦은 침공으로 국내는 혼란스러웠다. 기근이 덮친 데다 전쟁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된다면 조나라의 통치체계에도 균열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유목왕은 이목에게 첫번째 전투에서 되도록 빠른 결전을 내 승리하여 전쟁을 오래 끌지 않도록 요청했다.

이목은 남수북공의 계획을 세우고, 북로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승리한 후에 남로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마상에게 업을 지켜 남로군을 막게 하고 이목은 주력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내달아 진군을 공격했다. 잇다른 회전에서 북로군을 번오(番吾)에서 격퇴[15]하고 진군이 후퇴하게 한 다음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로군과 조우하였다. 북로군이 이목이 이끄는 조군에 의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남로군도 잇달아 퇴각하게 되어 진나라의 제4차 조나라 침공전이 끝나게 되었다. 이목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조나라의 손실도 막대했으며 인력,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추격전을 펼칠 수 없어 진군을 섬멸하지는 못했다.

거의 매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온 진나라로 인해 물적, 인적 자원의 소모가 막심하여 조나라는 도저히 홀로 진나라의 침공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초나라와 위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고, 연나라와 조나라는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에, 제나라의 인적, 물적 지원을 뒷받침해야만 비로소 진나라에 맞설 수 있었다. 조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제나라와의 동맹을 도모했지만 이런 조나라의 로비 행위를 알아챈 진나라는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 즉시 사람을 보내 제나라 조정에 수만에 달하는 황금을 뿌렸고, 성사될 뻔한 제나라와 조나라의 동맹을 무산시켜 조나라를 고립시켰다.

4. 한(韓)나라 멸망(기원전 230년)

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십만 명을 동원한 수차례의 원정이 조나라의 명장 이목의 저항에 막혀버리자 진왕 조정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때 울료가 대규모 군사작전을 통하여 6국을 직접 타격하는 방식을 바꾸어 6국의 호신(豪臣)들을 매수해 6국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하자고 진왕 조정에게 건의했다.
"진(秦)은 강하고 제후(諸侯)는 비유하자면 군현(郡縣)의 군주와 같으나, 신(臣)은 다만 제후(諸侯)의 합종(合從)이 두렵고, 한꺼번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곧 지백(智伯)ㆍ 부차(夫差)ㆍ 민왕(湣王)이 망한 이유입니다. 원컨대 대왕(大王)께서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그 호신(豪臣)에게 뇌물을 주며 그 지모를 어지럽힌다면, 불과 30만 금(金)을 잃고 제후(諸侯)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30만 금은 진나라 국고의 거의 전부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울료의 계략이 30만 금보다 훨씬 큰 이익을 가져올 것임을 안 진왕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국고를 울료에게 넘겨주어 마음껏 쓰게 하며, 어디에 쓰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울료는 본격적으로 사람을 보내 6국의 관리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울료의 첫 번째 목표는 한(韓)나라였다. 한(韓)나라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 상당군과 삼천군을 점거해 강한 국력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소후의 짧은 번영이 끝나고 곧바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나라는 6국 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였다. 오랜 기간 진나라의 동진을 막아내며 분전했지만 한나라는 크게 쇠락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남은 영토는 수도인 신정과 옛 도성이었던 양적뿐이었다. 양적이 위치한 지역을 한나라 사람들은 남양라고 불렀다. 당시 한나라 남양의 가수(假守·임시 군수)였던 (騰)은 출신이 불분명했다. 이름은 있지만 성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명문 거족 출신도 세습 귀족도 아니어서 충성도가 낮았고, 매수 가능성이 높았다. 울료가 매수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진왕 정 16년, 기원전 231년 한(韓)나라의 남양태수 등이 남양땅[16]을 통째로 들어다 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이 통째로 투항해오자 본래의 조나라를 멸망시키려던 계획을 바꿔 한나라를 먼저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진나라는 남양을 접수한 뒤 등을 태수로 임명하고, 실제로는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언제든 한나라를 공격해 멸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이 진왕 정의 명령을 받아 10만 명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척 하다가 기습적으로 남하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신정[17]을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진군의 공격을 저지할 무력조차 없었던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군은 빠르게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에 다다랐다.

한나라의 조야는 경악했다. 등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관리로 있었고 한나라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나라 정벌의 사령관으로 온 이상 한나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낮았다. 또한 내사(内史)라는 관직은 관중의 전체 방어업무를 관장하는 진나라의 고위층이었다. 투항자인 등이 진나라에서 받는 대우를 보고, 한나라의 대신들과 한왕 안(韓王安)은 자신들도 투항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때, 울료는 한왕 안(韓王安)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후작 지위의 보전을 약속했다. 진나라의 철저한 준비하에 계획된 침공이었다. 한나라는 강력한 진군에 의해 막다른 곳에 몰렸고, 타국의 지원은 요원해보였다. 저항이 무의미해 멸망이 단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 조정에서의 짧은 담론이 있은 후, 한왕 안(韓王安)은 진나라에 항복했고 한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멸망 이후 한왕 안(韓王安)은 남군 영도(郢都)의 황산(荒山)에 유배되었고, 진나라는 새로운 관리를 대거 파견해 신정을 접수했다. 한군의 대다수는 진군으로 편입되었고, 한나라의 관리와 귀족들은 쫓겨났으며, 영지도 대부분 몰수당했다. 진나라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한나라의 군민을 얻었지만 조야에서 철저히 배제된 한나라 귀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세력도 온전했다. 후에 신정에서 한나라의 구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5. 조(趙)나라 멸망(기원전 228년)

제4차 대조 침공 이후 진나라 군대는 3년의 휴식기간을 가졌다. 그동안 진나라가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습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멸망시킴으로써 근 10만 명에 달하는 한군 병력을 고스란히 얻었으며, 잦은 전쟁으로 줄어든 병력을 회복하고 호적제도를 정비해 국가 통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동원력을 높여 다시금 정벌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한편 조나라는 몇 년 동안 천재지변에 시달렸다. 기원전 231년에는 대군에 대지진이 일어나 낙서(洛西)[18] 서쪽부터 북쪽으로는 평음(平陰)[19]까지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져 큰 피해를 입었고, 이듬해 나라 전체에 가뭄이 들어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연속된 재해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마침 한나라를 정벌하던 해, 진나라의 관중 지방에도 기근이 들어 고통받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진왕 정은 조나라 정벌을 미루려고 했다. 그러나 조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울료와 이사를 위시한 강경파는 조나라를 6국 겸병의 가장 큰 적으로 봤다. 장평대전에서 대패해 쇠락했어도 삼진(조, 위, 한) 중 가장 강한 나라가 조나라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망명한 염파가 초나라의 장수로 지낼 때, 그는 초나라의 군사가 조나라의 군사만 못하다고 탄식했다. 그만큼 조나라의 군대는 질적으로 강했다. 진나라 조정의 강경파는 지금이 아니면 조나라를 정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나라에 기근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왕에게 조나라 정벌을 강력히 건의했다. 진왕은 그것을 타당하다 여겨, 조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진격했다.

진왕 정 18년, 기원전 229년(조 유목왕 7년) 진왕의 명령하에 진나라는 3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소집한 후, 3로로 방향을 정해 한단으로 진격했다. 제1군은 왕전이 이끄는 주력군으로 20만 명에 달했다. 태항산에서 출발해 정형을 점령하고, 조나라의 중부를 공격해 들어갔다. 제2군은 양단화와 강외가 지휘했는데, 하내의 진군 8만 명을 이끌고 임장(臨漳)[20]을 지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향해 북상하여 포위하려고 했다. 이신이 이끄는 제3군은 태항산에서 출발해 운중을 건너 대군을 공략했다.

이번 전쟁에 국력을 총동원한 진•조 양국의 총병력은 45만 명 이상이었고, 병력의 수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상회했다. 진나라의 전략적 목표는 왕전이 이끄는 주력군이 조나라의 중부를 공략하여 조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아 조나라 북부로부터 한단으로 가는 지원을 차단하면서 한단을 향해 남하하고, 양단화의 남로군은 왕전의 주력군이 조나라의 중부를 유린하며 한단을 향해 남진하는 사이 북상하여 병력이 열세에 놓인 조나라 남부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한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진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조나라의 여러 성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준비했다. 조나라의 대장 이목 사마상으로 하여금 업을 지키게하여 양단화의 남로군을 막게 하고, 자신은 10만 명이 넘는 조나라 주력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왕전의 20만 진군이 한단을 향해 진격했지만 이목은 수십 리에 걸쳐 해자 보루를 쌓아놨고, 진군은 수차례의 공세를 펼쳤지만 이목에게 격퇴당하며 양군은 교착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전과 이목의 대결에서 모든 조건이 왕전에게 유리했고, 특히 군사의 수에서 왕전이 유리한 만큼 군을 나누어 조나라의 요충지들을 협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전은 노련한 장수였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목이 오랫동안 경영해온 북방의 병사들은 오랜기간 흉노와 싸워와 용맹하며 기동전에 능했고 기병이 많았다. 왕전이 군을 나눈다면 각개격파될 위험성이 존재하는 데다가 늘어진 보급로를 이목이 기병 전력으로 차단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왕전은 대군을 이끌고 이목의 조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간 후, 장병들에게 굳건히 지키라는 명령을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진나라 조정에 이목의 제거를 요청하는 파발을 보낼 뿐이었다.

한편, 이 시기 장수 사공마와 조 유목왕 천의 대화가 전해진다.
사공마가 말했다.
「그렇다면 대왕의 국가는 백을 들어도 진(秦)에 미치지 않으니 대왕의 국가는 망할 것입니다.」
조왕이 말했다.
「경은 조(趙)와 멀지 않으며 국사를 모두 가르쳐주셨으니, 부디 계략을 따르겠소.」
사공마가 말했다.
「대왕께서 조(趙)의 반을 찢어서 진(秦)에 선물한다면 진(秦)은 칼날을 맞대지 않고도 조(趙)의 반을 얻으니, 진(秦)은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안으로는 조(趙)의 수비가 싫고 밖으로는 제후의 구원이 두렵기에 진(秦)은 반드시 이를 받을 것입니다. 진(秦)이 땅을 받고 병사가 퇴각하면 조(趙)는 절반의 국가를 지키며 스스로 보존하면 됩니다. 진(秦)이 선물을 받고 스스로 강해지면 산동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조(趙)가 망하면 스스로 위험하기에 제후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두려움에 서로 구원하며 곧 합종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이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합종을 맺으시지요. 합종의 일을 이룬다면 이는 대왕께서 명목으로는 조(趙)의 반을 잃어도 실제로는 산동을 얻고 진(秦)에 대적하는 것이기에 진(秦)은 망할 것입니다.」[21][22][23]
조왕이 말했다.
「전날에 진(秦)이 병사를 보내서 조(趙)를 공격하자 조(趙)는 하간에 12개의 현을 선물해서 땅이 깎이고 병사는 약해졌는데도 끝내 진(秦)의 근심을 면하지 못했소. 지금 다시 조(趙)의 반을 나누고 강한 진(秦)에 준다면 힘써도 능히 스스로 보존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망할 것이오. 부디 경은 계략을 고쳐주시오.」
사공마가 말했다.
「신은 어릴 적에 진(秦)의 도필(刀筆)이 되었으며 관장(官長)의 도움으로 작은 벼슬을 얻었기에 일찍이 병사의 수장이 되어보지 못했는데, 대왕을 위해 조(趙)의 모든 병사를 얻기를 요청합니다.」
조왕이 장수로 삼지 않았다.
사공마가 말했다.
「신이 어리석은 계략을 바쳐도 대왕께서 쓰지 않으니, 신은 대왕을 섬길 수 없기에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사공마가 조(趙)를 떠나서 평원(平原)을 건넜다.
평원진령(平原津令) 곽유(郭遺)가 위로하며 물었다.
「진(秦)의 병사가 조(趙)를 공격한다던데 상객께서 조(趙)에서 오셨으니, 조(趙)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공마는 그의 조왕을 위한 계략을 쓰지 않았던 것과 조(趙)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말했다.
평원령(平原令)이 말했다.
「상객의 생각으로는 조(趙)가 어떤 때에 망하겠습니까?」
사공마가 말했다.
「조(趙)의 장수가 무안군(이목)이면 1년 만에 망할 것인데, 만약 무안군을 죽이면 반년도 지날 수 없소. 조왕의 신하에 한창(韓倉)이 있는데 아첨으로 조왕과 투합하여 그 교분이 매우 친하며, 그 사람됨이 현명함을 미워하고 공신을 시기하고 있소. 지금 국가가 위태롭고 망하는데 왕이 반드시 그 말을 쓸 것이기에 무안군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이미 제3차 대조 침공전부터 진나라의 공격은 이목 개인의 능력으로 멈춰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비하 전투와 번오 전투에서 진군을 격퇴했다고 하지만 진나라에게 있어 그것은 일종에 소모전에 가까웠다. 전략적으로 보더라도 진나라가 4차례의 침공 중에 2번의 패배를 했지만 거의 매해 되풀이된 대규모 전쟁에 조나라는 수십만 명의 장정을 잃으면서 빈사 상태에 빠져버렸고, 한나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진나라는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목이 또다시 수많은 진군을 죽여 없앤다고 해도 상앙의 개혁으로 탄생한 병영국가인 진나라는 그것으로 인해 무너질 성격의 국가가 아니었다. 한시적으로 진군을 격퇴한다 해도, 진군은 다음번에 더 강한 병사들과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나라를 침공해 올 것이었다. 소모전을 반복하면서 더 열세의 국력을 가진 조나라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주력군이 장기간의 대치상태에 들어가고 양단화의 남로군마저 사마상이 이끄는 조군의 수비를 뚫지 못해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조나라의 민심은 흉흉했다. 거듭된 전쟁과 재해로 민간에는 조나라가 망한다는 요언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조나라 조정 내부의 상황도 바깥의 민심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조나라 조정의 대신중에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런 상황해서 진나라는 반간계를 획책했다. 목표는 조나라의 대장 이목과 사마상이었다. 진나라는 반간계를 펼치기에 앞서 조나라의 재상 곽개를 매수하기로 했다. 상인 출신의 재상 곽개는 아첨에 능해 조 유목왕 천이 태자 시절부터 총애해오던 대신이었다. 소인배에 탐욕스러웠고, 앙숙이었던 염파마저 모함하여 망명시킨 바 있었던 곽개는 진나라의 훌륭한 내통자가 될 수 있었다. 조나라 조정에는 진나라의 첩자가 많았다. 진나라는 곽개 주변에 있는 첩자들을 통해 수많은 황금을 곽개에게 바치고 감언이설 상국 곽개를 진나라로 끌어들였다. 곽개는 중상모략으로 이목을 몰아낼 계획을 짰다.

곽개의 모략이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존재가 있었으니, 조나라의 태후 창후 였다. 도양왕이 살아있었을 때, 당시 후궁이었던 기녀 출신의 태후는 계략을 세워 태자인 조가와 그의 모후인 왕후를 빈번히 모함했다. 도양왕은 이 기녀 출신의 여자를 총애해 결국 조가를 폐하여 조천을 태자로 세우고 기녀를 왕후로 세웠다. 이때 도양왕이 태자 가를 폐하고 천을 태자로 세우는 것에 대해 이목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이목은 천의 어머니를 창기라 칭하며 반대해 모욕을 준 적이 있었다. 창기 출신의 태후는 사치스러웠고 큰 돈과 미남에 약했다. 그리고 과거의 모욕때문에 이목을 증오했다. 이런 역학관계를 이용한 진나라의 공작은 성공했고, 곽개와 태후를 비롯한 조나라 조정안의 반역자들은 계속해서 이목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곽개는 이목의 필체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서신을 가지고 이목이 함양의 사람들과 내통하고 반역을 모의함을 주장했다. 유목왕 천에게는 충직함과 간사함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를 본 유목왕은 크게 분노하여 일의 시비를 따짐없이 이목을 파면하고 병마지권의 회수를 명령한 다음 왕족인 조총에게 통솔을 대신하게 했다. 하지만 이목은 전장의 장수는 왕의 명령조차 거부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병권을 반납하지 않았다. 이에 유목왕은 은밀히 계략을 세웠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목을 참살했다.[24] 장군 사마상은 당황하여 급히 입조해 유목왕에게 간언을 올렸지만, 사마상의 감정이 격동하여 과격한 언행을 함에 따라 사마상마저 파면당하게 되었다.

조나라의 역대 국군들은 모두 11회에 달하는 쿠데타에 노출되어 왔었다. 그래서 조나라의 군주들은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들에게 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중요한 상황에서 장병들은 국왕보다 장군의 명령을 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무령왕이 호복기사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군 개혁을 시도했으나, 사구에서의 내부 정변으로 비참하게 굶어 죽음에 따라 개혁은 좌초되었다. 이로 인해 조나라는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는 제도가 전무했다. 조나라를 수차례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이목은 조나라의 구국영웅이었다. 하지만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진나라의 반간계로 인한 것이긴 하나, 조나라의 군주에게 있어서 쿠데타의 의혹이 있고 통제할 수 없는 장군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선택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은 조나라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했다.[반론]
사마상은 이목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그는 조나라의 간신들이 자신마저 죽이지 않을까 근심했다. 하여 사마상은 일가를 추스려 조나라를 떠나 발해만으로 도주했다. 조나라의 많은 장병들은 그들이 존경하던 육군 원수의 비참한 죽음을 애통해했다. 이목의 죽음으로 인하여 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목과 사마상을 대신해 조총과 안취가 새로운 대장으로 부임했으나, 본디 그들은 용렬한 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대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 진왕 정 19년, 기원전 228년 (조 유목왕 8년) 봄, 왕전의 지휘하에 진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조군을 대파했다. 조군은 대파당해 대장 조총은 참살되었고, 장군 안취는 패잔병을 이끌고 한단으로 달아나 서둘러 방어에 나섰지만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조나라 영토를 점령하고 진군하여 한단에 도착했다.
"진나라군의 세력은 강대하고, 조나라의 병사는 적으며 장수도 진나라에 못합니다. 더이상 항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조 유목왕은 조군이 대파되고 조총이 죽었음을 알고는 경악하며 급히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응책을 논의했다. 곽개는 강대한 진군에 더이상 맞서도 소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는 유목왕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결국 유목왕은 항복을 결정했고 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유목왕은 상용(上庸)의 방릉(房陵)에 유배되었다.[26]

이때 공자 조가는 조왕의 사신이 진나라에 항복을 청함에 따라 대세가 기움을 알고 장군 안취와 씨족 수백 가구를 이끌어 북쪽의 대군(代郡)으로 도망쳤다. 북쪽으로 도망쳐 잔병을 수습하고, 상곡군(上谷郡)과 대군(代郡)을 점거한 조가는 왕으로 옹립되어 조왕을 칭하여 저항했으나[27] 진왕 정 25년, 기원전 222년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온 왕분의 진군에 의해 멸망했다.

6. 위(魏)나라 멸망(기원전 225년)

진왕 정 21년, 기원전 226년 진군은 연나라의 수도 계(薊)를 점령하고 북방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취함과 동시에 주공을 남쪽으로 틀었다. 진나라 명장 왕전의 아들 왕분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북부 지역[28]을 공략하여 열 개의 성을 점령해 초군을 위협하며 전선을 형성했다. 갑작스럽게 불의의 타격을 받은 초나라는 진군의 위세에 압도되어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초나라와 위나라에 대한 양면전선을 형성하며 위나라에 대한 초나라의 지원을 차단했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왕분이 이끄는 10만 진군은 북상하여 위나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위나라의 경내로 들어서 빠르게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29]에 다다른 다음 성을 포위했다.

갑작스럽게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포위되었지만, 위왕 가(魏王 假)와 대량의 군민들은 요새화된 도시의 방어력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택했다. 대량성은 왕분에 의해 이미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지만, 이 성은 유구한 항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위 무후 시기에 건설되어 위 혜왕(魏 惠王) 때 수도가 된 대량성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되어 완성된 도시였다. 대량성은 크기 자체도 거대한 데다 성벽도 높았다. 주위에 종횡으로 그물 같은 수운망마저 가지고 있어 물자 공급이 원활한 데다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도 유용했다. 이와 같이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방어 체계의 대량성은 침략군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진나라의 군사가 용맹하다 하나 대량성의 견고한 방어시설은 아무리 진군이라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분이 이끄는 진군은 여러 날에 걸쳐 대량성에 수차례의 맹공을 가했지만 요새화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해 사상자만 늘어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량성의 군사는 10만에 달했고, 성내의 군량과 양초는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아마 몇 년이 걸려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수 차례의 공세가 대량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전황이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지는 것은 진나라였다. 진군이 착실히 관동 제후들의 영토를 잠식할수록 그에 상응하여 전선이 늘어나 신경쓸 것이 많아졌다. 북방에서는 조나라와 연나라의 잔여세력이 버티고 있고, 언제 터질지 모를 점령지의 반란을 대비해야 했다. 한 해 전에는 한나라의 구귀족들이 구도 신정에서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교근공 정책과 진나라의 내부 공작에 힘입어 그동안 제나라는 진나라의 충실한 우방국을 자처하며 타국의 멸망을 방관해왔지만, 6국의 멸망이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온 이상 언제까지 방관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진나라의 대군이 계속해 위나라에 묶인 채로 있는다면 분명히 새로운 위협이 진나라의 야욕을 좌절시킬 것이었다.
"무릇 한(韓)이 망한 뒤에 출병하는 날이면 위(魏)가 아니면 공격할 상대가 없습니다. 진(秦)은 본디 회(懷)ㆍ모(茅)ㆍ경구(邢丘)를 소유했는데, 궤진(垝津)에 성을 쌓고 하내(河內)에 임한다면 하내(河內)의 공(共)ㆍ급(汲)은 반드시 위태롭게 되며, 정(鄭) 지역을 소유하고 원옹(垣雍)을 얻어서 형택(熒澤)의 물을 사용해 대량(大梁)에 붓는다면 대량(大梁)은 반드시 망합니다."
일찍이 신릉군이 한나라를 구원하자며 위왕에게 유세할 때 수공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었다. 대량은 오늘날의 허난성 개봉으로 황하의 거센 물줄기가 인접한 곳이다. 또한 대량성은 그 지세가 낮아 고도가 황하를 밑돌았다. 정공법으로 대량성을 함락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한 왕분은 방법을 바꾸어 대량을 수몰시키기로 했다. 대량의 지세를 파악한 왕분은 군사들로 하여금 대량성 주위의 수운로를 장악하여 개조하게 하고 대량성을 둘러싸는 제방과 대량성 서북쪽에 물길을 틀게해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그 하류를 막는 제방을 쌓도록했다. 때는 초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진군이 제방을 쌓자 10일에 걸쳐 쉬지않고 비가 내려 둑에서 진동하는 물살이 거대했다. 충분한 물이 쌓이자, 왕분의 명령하에 둑은 파괴되고 대량성은 물에 잠겼다.

대량성이 물에 잠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한번 대량성을 덮친 물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내가 물에 잠기자 물에 닿은 곡식은 썩어들어갔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군민들의 피부마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물마저 오염되어 오염된 물을 먹고 죽는 자가 속출했다. 대량성이 물에 잠긴 지 3개월이 되어 물에 잠긴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점차 대량성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해 성의 곳곳이 뚫리게 되었다. 대량성의 성벽이 무너지자 왕분은 총공세를 명령했다. 수차례의 공방전 후, 위왕 가는 더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 판단해 성문을 열고 진나라에 항복했고 위나라는 멸망했다. 위왕 가는 머지않아 살해당했고[30], 대량의 격렬한 저항에 분노한 진왕 정은 대량을 철저히 파괴해버렸다.[31]

7. 초(楚)나라 멸망(기원전 223년)

진왕 정 21년, 기원전 226년 진왕 정은 신정에서 일어난 한나라 구귀족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영진(郢陳)에 있었던 한왕 안을 사사했다. 예상치 못하게 한나라의 구도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진왕 정으로 하여금 점령지의 군민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비록 당장은 진나라의 세력이 강해 점령지의 군민들을 힘으로 누르고 있어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하지만, 만일 진나라의 형세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지하의 역도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왕은 초나라의 공자 창평군[32]을 초나라의 옛 도읍지였던 영진(郢陳)으로 보내어 초나라 군민들을 위무하게 했다.[33] 연나라를 멸한 후 진군은 초나라를 겨냥하였는데, 초나라는 비록 회왕 이후 쇠락해져있어도 여전히 남방의 대국이라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진나라 장수 이신(李信)은 젊고 용감해 일찍이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연나라 태자 연단(燕丹)을 연수(衍水)까지 뒤쫓아 적군을 무찌르고 연단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는데, 진왕 정은 그를 현명하고 용감하다고 여겼다. "내가 초나라를 공격해 빼앗으려고 하는데, 장군이 생각하기에 병사가 어느 정도면 되겠소?" 이신이 답했다. "20만이면 충분합니다." 진왕 정은 거듭하여 왕전에게 물었다. 왕전이 답했다. "반드시 6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왕 정은 말했다. "왕 장군도 늙었구려, 무엇을 그리 겁을 내시오! 이 장군이 과연 기세가 용맹하다더니, 그 말이 옳소." 드디어 이신과 몽염(蒙恬)을 장수로 삼아 병사 20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왕전은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자 병을 핑계대며 빈양 땅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왕분이 이끄는 10만 진군이 위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진왕 정은 초나라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 용맹함과 과단성을 증명한 바 있는 이신을 대장에 임명하고 몽염을 부장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초나라를 대대적으로 공략하게 했다. 진군은 초군이 유리할 늪지와 물을 피해 기병이 활동하기 편한 평원 지형을 주공으로 하여 공격로를 잡았다. 이신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평여(平舆)를 공격하고, 부장 몽염은 침구(寝丘)를 공격하게 해 함락시켜 초군을 대파했다. 이신은 재차 언영(鄢郢)을 깨뜨리고 성부(城父)[34]에서 몽염과 회합하기로 했다. 이신과 몽염이 지휘하는 진군은 영진과 동남부에서 초군을 대파했다. 초나라 정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이신은 원정군을 합세하여 초나라의 수도인 수춘으로 남하해 일거에 초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초나라는 회왕 이후 몇 대에 걸쳐 용렬한 군주의 지배하에 있어와 국력은 취약해졌고, 국내에는 쓸 만한 장수가 항연 뿐이었다. 초군은 진군에 연이어 패배하였고, 다급해진 초나라 조정은 계속해서 진나라에 땅을 떼어줄 것을 약속하며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전황은 초나라가 불리해 진나라의 초전 기세를 막지 못했지만, 초나라의 최정예 군단은 보존된 상태였다. 항연군이 인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창평군이 거병하여 영진 일대를 장악하고 이신의 퇴로와 보급을 끊었다.

진군이 점령한 많은 지역에서 반란 모의가 존재했다. 초나라의 옛 수도인 영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진왕 정은 초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초나라의 공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창평군이 초나라의 군민들을 위무하여 영진의 시국을 안정시키길 원했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초나라 정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진나라의 재상을 지냈으나 초나라의 왕족이기도 했던 창평군은 조국 초나라의 멸망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35] 창평군은 초나라의 공자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반진세력을 결집한 후 진군의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킨\켰다. 본래 초나라의 땅이었던 영진 일대의 초나라 인민들과 가까운 한나라 인민들도 그에 호응하여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영진을 장악하며 진군의 후방 보급을 차단하고 진군의 퇴각로를 막아 이신 군에 대한 포위 섬멸을 도모하게 되었다.

초나라 정벌을 진행하던 이신 군은 예상치 못한 창평군의 반란으로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했다. 일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성부에서 물러나 일단 후방의 위협이 되는 창평군을 진압하기로 했고, 퇴각하여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20만명의 진군은 초나라를 정벌하기에 부족한 숫자였다. 진군에 균열이 생기자 곧바로 초나라가 반격할 여지를 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20만 대군을 이끈 초나라의 총사령관 항연은 성부에서 남하할 이신군을 대비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진군이 사라졌고, 이에 항연은 진군에 모종의 균열이 일어난 것을 짐작하여 진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항연은 진군을 3일 밤낮 동안 추격한 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퇴각했던 진군을 후방에서 기습했다. 이신은 이에 침착하게 지휘하여 초군을 막아냈으나 진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적국의 포위망은 완성되어 본군은 전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빠르게 퇴각하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항연은 계속되는 추격전 끝에 진군을 무찔러 일곱 명의 도위와 무수한 군사를 죽였다. 이신은 패잔병을 이끌고 퇴각했다. 항연은 조나라 국경까지 추격해왔으나 보루에 막혀 할 수 없이 선회해 남군을 공략했다. 항연은 초나라의 옛 실지를 되찾고 계속해 서진하여 한나라의 경내로 들어섰다.[36]
진왕 정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빈양 땅으로 달려가서 왕전을 만나 사죄하며 말했다.
"과인이 장군의 계략을 쓰지 않아 이신이 과연 진나라 군대를 욕보였소. 지금 들으니 초나라 병사가 날마다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라고 해도 과인을 버리지 말아 주시오!"
왕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노신은 지치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대왕께서는 부디 현명한 장수를 택해주십시오."
진왕 정이 사죄하며 말했다.
"그만둬주시오, 장군께서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께서 어쩔 수 없이 신을 쓰고자 하신다면, 60만 명의 병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진왕이 말했다.
"장군의 계략을 따르도록 하겠소."
이에 왕전이 장수가 되어 병사 60만 명을 이끄니, 진왕이 몸소 파수(灞水)까지 나와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이 가면서 훌륭한 논밭과 저택, 정원과 연못을 달라고 심할 정도로 거듭 요청했다.
진왕이 말했다.
"장군은 가면서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의 장수가 되어 공을 이루었음에도 끝내 후에 봉해지지 못했으니, 대왕의 관심이 신에게 쏠려 있을 때를 이용하여 정원과 연못을 청해 자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진왕은 크게 웃었다. 왕전이 관에 이르러 5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좋은 논밭을 요청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장군께서 대가를 구걸하는 게 너무 지나치십니다."
왕전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무릇 진왕은 교만하며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일세.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텅 빌 정도로 나라의 병사를 모두 나에게 맡기고 있으니, 내가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논밭과 저택을 요청해 다른 뜻이 없음을 알리지 않으면 진왕께서는 가만히 앉아 생각하며 나를 의심하지 않겠는가?"

진왕 정은 초나라가 비록 쇠약해졌으나, 땅이 넓고 인구가 풍부해 여전히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어 쉽게 멸망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진왕 정은 친히 왕전의 집이 있는 빈양으로 가 그에게 60만 대군을 지휘해줄 것을 간청하여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로 출정하기로 했다. 노장군이 60만 대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능히 군주의 신임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60만 명의 병사는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만약 왕전이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여 초군이 북상한다면 삼진(한•위•조)의 귀족들이 호응하여 진군을 몰아낼 것이었다.

진왕 정 23년, 기원전 224년 왕전과 몽무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재차 공격하여 평여로 진출했다. 이에 초왕 부추는 전국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항연에게 진군을 물리칠 것을 명령했다. 초나라의 대장 항연은 본래 이끌던 20만 명의 군사와 초왕 부추에게서 증원받은 20만 명을 합친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평여에서 진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왕전은 10여 리에 걸친 진을 펼치고 견벽거수(見辟擧守)하며 지킬 뿐 전투를 하지 않았다. 초나라 조정에서는 진군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왕전은 나라를 통째로 끌고 나온 거나 다름없는 대군을 이끌고 왔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어쨌든 진군이 견고한 요새를 쌓고 굳게 지키자 항연도 일단 대치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후 초군이 진군을 도발하며 전투를 유도했을 때도 진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진군은 60만 명에 달하여 수는 초군을 능가하지만 잘 조련되지 않은 신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왕전이 사람을 시켜 군사들을 보게한 다음 물었다. "군중에서 무엇을 하며 놀더냐?" "투석과 멀리뛰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전이 말했다. "이제야 쓸 만하겠구나!"
왕전이 초나라 정벌에 대하여 진왕 정에게 간언한 것은 국가 전체의 역량으로 총력전을 펼쳐 초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이었다. 진•초 양국 군대만의 대결이 아닌 양국 국력의 대결로 몰고 가서 국력이 강하고 상앙 변법으로 동원력마저 더 강한 진나라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37] 그렇게 평여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군사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삼진을 멸망시킨 진나라는 후방의 걱정 없이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며 장기전을 벌였다. 왕전은 매일 양과 소를 잡아 병사들과 식사를 하고 훈련시켜 점차 병사들의 투지와 사기가 높아졌다. 진•초 양국의 병력이 총동원된 후 한 해를 넘기자 초나라는 농업 수확에 차질이 생겨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원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초나라는 영토와 인구가 많다고는 하나 정치적/군사적으로 낙후돼 있어, 군세를 진나라만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대치가 1년을 넘기자 항연은 초군에 동쪽으로 철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8] 조용히 기회를 봐왔던 왕전은 즉시 출병해 암암리에 초군을 추격하여 용맹한 용사들을 선봉으로 앞세워 초군을 강타했다. 초군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다급히 응전했지만 예봉이 꺾인 초군은 사기 충천한 진군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교활한 왕전은 항연이 이신을 무찌른 계책과 똑같은 것으로 항연을 무찌른 것이었다. 초군은 기(蕲)의 남쪽에서 대파되었고, 왕전은 이를 추격하여 연달아 초군을 격파해 결국 대장 항연마저 죽였다.[39] 왕전은 수도 수춘을 공격하여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았다.

초왕이 사로잡힌 이후 창평군은 강남으로 패퇴하여 회남에서 초왕으로 옹립되었다.[40] 오월을 점거하고 장강의 지세를 경계로 삼아 진나라에 저항했으나, 진왕 정 24년, 기원전 223년 왕전은 회남을 공격해 격파하여 창평군을 죽이고 끝내 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8. 연(燕)나라 멸망(기원전 222년)

연(燕)의 태자 단은 진이 통일전쟁을 본격화한 형세에 큰 위협을 느껴 스승인 국무(鞠武)에게 의견을 물었다. 국무(鞠武)가 말했다. "진나라 땅은 천하에 두루 퍼져서 한나라ㆍ위나라ㆍ조나라를 위협하며, 북쪽으로 감천산(甘泉山)ㆍ곡구(谷口) 같은 요새가 있고 남쪽으로 경수(涇水)ㆍ위수(渭水)의 기름진 땅이 있으며, 파(巴) 땅ㆍ한중(漢中) 땅의 풍요로움을 차지하고 오른쪽으로 농서(隴西) 땅ㆍ촉(蜀) 땅의 산지에 왼쪽으로 동관(潼關)ㆍ효산(殽山)의 험난함이 있으며, 백성은 많고 병사는 사나우며 병기도 남아돕니다. 출병할 뜻만 있다면 장성(長城)의 남쪽과 역수(易水)의 북쪽은 안정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업신여겨졌다는 원한[41]으로 역린(逆鱗)을 건드리고자 하십니까!"
태자 단이 물었다.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소?"
국무(鞠武)가 답했다. "청하건대 제가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형가가 태자 단에게 말했다. "태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신이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떠나봐야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진나라에 가까이할 수가 없습니다. 연에 망명 온 번오기 장군은 진왕이 1,000근의 황금과 10,000호의 식읍을 내걸고 찾고 있습니다. 만약 번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독항(督亢) 땅의 지도를 얻어 진왕에게 받들어 바친다면 진왕은 반드시 기뻐하며 신을 만날 것이니, 이때 진왕을 죽이고 신은 비로소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태자 단이 말했다. "번 장군은 곤궁에 처해 나에게 와서 몸을 맡겼는데 내 사사로운 욕심으로 덕망 있는 자의 뜻을 해치는 건 차마 할 수 없으니, 부디 그대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형가는 태자가 차마 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마침내 사사로이 번오기를 만나 말했다. "진나라가 장군을 대우하는 것이 심하여 부모와 종족은 모두 도륙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듣기에 장군의 머리에 1,000근의 금과 10,000호의 식읍을 내걸고 구한다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번오기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골수에 사무치도록 괴로운데 어찌할 것인가, 그 계략을 모르겠습니다!"
형가가 말했다. "지금 단 한마디로 연나라의 걱정을 해결하고 장군의 원한을 갚을 방법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번오기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어찌해야 합니까?"
형가가 말했다. "부디 장군의 머리를 얻어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은 분명 기뻐해 신을 만날 테니, 신이 왼손으로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찌르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의 치욕도 씻길 겁니다. 장군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번오기는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팔을 움켜잡고 나아가 말했다. "이는 신이 밤낮으로 이를 갈고 마음을 썩히던 일이니, 지금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렀다. 태자가 이를 듣고 달려와서 시체에 엎드려 통곡하며 매우 슬퍼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마침내 번오기의 머리를 상자에 담고 봉했다.

한단이 함락되고 공자 조가가 대군으로 쫓겨들어온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군은 역수(易水)에 이르렀다. 한나라와 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 군대의 위용에 연왕 희(燕王 喜)와 군신들은 놀라 전전긍긍하며 진나라의 대군이 머지않아 연나라로 닥쳐올 것임을, 그리고 막을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태자 단의 태부(太傅) 직책에 있었던 국무(鞠武)는 태자에게 서쪽으로는 대[42], 남쪽으로는 제나라와 연합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다음 북쪽으로는 흉노와 우호관계를 형성해 진나라의 야욕에 공동으로 저항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태자 단은 관동 제후의 많은 관리들이 진나라에 복종함을 알고 있었다. 재차 합종군을 결성하는 것은 불가능[43]했다. 하여 진왕 정(政) 20년(연왕 희 28년), 기원전 227년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의 모략을 꾀하나 실패하고 말았다.

형가에 의한 진왕 정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분노한 진왕 정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왕전(王翦)과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는 대왕 가가 이끄는 조나라의 잔여 세력과 연합하여 진군에 저항했지만 진군은 역수(易水)의 서쪽에서 이를 물리쳤다. 진왕 정(政) 21년(연왕 희 29년), 기원전 226년 진왕은 왕전의 원정군에 수많은 병사를 증원하였고, 이에 왕전은 연군을 대파하여 수도인 계성(薊城)[44]을 점령했다. 하지만 연왕 희와 태자 단은 동군의 주도인 양평(襄平)[45]으로 도주했다.

연왕 희가 동쪽으로 도망칠 때, 왕전의 본대는 조가(趙嘉)의 후방 공격을 염려하여 연왕 희를 무리해서 추격하지 않았지만, 조나라 멸망때 3군을 이끌고 소수의 병력으로 운중을 공략하여 능력을 입증한 진장 이신(李信)과 그를 비롯한 강경파는 연군을 추격해야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왕전은 군 내의 정치적인, 전략적인 입장에서 이신에게 수천 기의 병마를 주어 연군을 추격하도록 했다. 이신이 이끄는 진군의 별동대는 수천의 병마를 이끌며 연군을 추격했다. 이때 태자 단과 그의 책사들은 진군의 추격을 예상하고 후방에서의 공격을 대비하여 군을 나누어 후방에 대한 여러 겹의 방어선을 유지한 진형으로 군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신은 연군의 후방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연군의 척후병에 발각되면 몰살될 가능성이 농후한 채로 야음을 틈타 몇날 며칠에 걸쳐 행군하여, 양평의 앞에 있는 연수(衍水)를 건너서 태자 단이 이끄는 연군을 기다렸다. 연군은 추격대의 공격을 받지 않은 채로 긴장을 풀고, 본래 목표였던 양평의 바로 앞에 있는 연수(衍水)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신이 도하를 완전히 마치지 못한 연군을 총공격하여 연나라의 주력군을 소멸시켰다. 패퇴한 태자 단은 연수(衍水) 부근에 숨었다.
진나라 장수 이신이 연왕을 급히 추격하자 대왕(代王) 조가(趙嘉)는 연왕 연희에게 글을 전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다급하게 추격하는 이유는 태자 단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로 단을 죽여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은 반드시 마음을 풀고 다행히도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대왕 가는 대군에 돌아가 있었다. 본래 대왕 가는 2년 동안의 준비로 능히 진군과 일전을 치를 능력이 있었으나, 동맹을 맺은 연군이 진군의 맹렬한 공세에 너무나 맥없이 무너진 것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연나라는 진군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46] 동맹국인 연나라의 멸망은 어떻게든 막고 훗날을 도모해야만 했다. 대왕 가는 연왕 희에게 서신을 보내 전쟁 발발의 원인이자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의 배후인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치도록 종용했다. 그 외에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연왕 희는 대왕 가의 말을 따라, 태자 단이 몸을 숨긴 곳으로 사람을 보내 태자를 죽이고 그 목을 진나라에 바쳤다. 연왕 희가 태자 단의 목을 바침으로써 평화를 구걸하여 진나라의 공세는 멈추었지만, 진나라는 위•초 두 나라에 병력을 집중했기에 연•조 양국의 잔존세력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춘 것에 불과했다. 진왕 정(政) 25년(연왕 희 33년), 기원전 222년 멸초, 멸위 후에 진왕 정 왕분(王賁)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게 했다. 이후 연왕 희는 포로로 잡히고 연나라는 멸망했다.

9. 제(齊)나라 멸망(기원전 221년)

제왕 건(建)이 진(秦)에 입조하고자 했는데 옹문 사마(雍門 司馬)가 앞에서 말했다.
「왕을 세우는 것은 사직을 위한 것입니까? 왕을 위해 왕을 세우는 것입니까?」
왕이 말했다.
「사직을 위해서다.」
옹문 사마가 말했다.
「사직을 위해 왕을 세우면 왕께서는 어째서 사직을 떠나서 진(秦)에 들어갑니까?」
제왕이 수레를 돌려서 돌아갔다.
즉묵 대부(即墨 大夫)가 옹문 사마(雍門 司馬)의 간언을 듣고 모책을 세울 만하다고 여기고 곧 입궁하여 제왕을 만나 말했다.
「제(齊)의 땅은 사방 몇천 리이며 대갑(帶甲)이 몇 백만입니다. 무릇 삼진(三晉)의 대부(大夫)는 모두 진(秦)을 불편하게 여기며 아(阿)ㆍ견(鄄)의 사이에 몇 백 명이 있는데, 왕께서 거두신다면 백만의 무리와 함께 삼진(三晉)의 옛 땅을 거두고 곧 임진관(臨晉關)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언(鄢)ㆍ영(郢)의 대부(大夫)도 진(秦)을 위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성남(城南) 아래에 몇백 명이 있는데, 왕께서 거두신다면 백만의 병사와 함께 초(楚)의 옛 땅을 거두고 곧 무관(武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齊)는 위엄을 세울 수 있고 진국(秦國)은 망하게 됩니다. 무릇 남쪽을 향하여 천자를 칭하는 것을 버리고 서쪽을 향하여 진(秦)을 섬기는 것은 대왕을 위해 취할 것이 아닙니다.」[47]
제왕은 듣지 않았다.
진(秦)이 진치(陳馳)를 시켜서 제왕을 국내로 유인하며 500리의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
제왕은 즉묵 대부의 말을 듣지 않고 진치의 말을 들어 마침내 진(秦)에 들어갔다.
공(共)의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살게 하며 굶겨 죽였다.
일찍이 제(齊)에 노래가 있었다.
「소나무냐! 잣나무냐! 건(建)을 공(共)에 살게 한 것이 손님이냐!」
기원전 284년에 일어난 제서 전투(齊西之戰)[48] 이후 제나라는 급격히 쇠락해 전성기 때의 강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는 제나라의 국책 방향이 멸망의 위기 이후, 철저한 보신주의로 나아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왕 건이 즉위한 이후 제나라는 40년 동안 출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방 국가들과 진나라가 종횡으로 전개하는 정치 군사적 투쟁에 힘을 싣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대규모 전투를 경험하지 못하여 병졸과 장수가 실전 경험을 쌓지 못했고 기강이 해이해졌다. 제나라 사람들은 제왕 건이 6국의 합종에 참여하지 않음을 불평했다. 제왕 건 16년, 후승이 재상이 된 후, 진나라는 그가 재물을 탐내는 것을 알고 신속하게 내응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대량의 황금과 옥기를 후승에게 선물했다. 그 후 후승의 빈객들마저 진나라로부터 자주 뇌물을 받았다. 그들은 제왕 건에게 진나라를 섬기고 다른 국가를 돕기 위해 출병하지 말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제나라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진나라에 좋은 정책을 펴고 진나라의 공격을 받는 제후국을 지원하지 않았으며[49] 이로써 진나라는 다른 국가들을 이길 수 있었다.

제나라 승상 후승은 진나라로부터 수많은 황금을 받아 매수되었다.[50] 후승은 제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와 연맹하며, 합종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시 대비를 하지도 않았다. 제왕 건은 전적으로 후승의 주장에 의존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진나라가 다섯 나라를 집어삼킨 뒤 제왕 건은 진나라에 위협을 느끼고 다급하게 서부에 군사를 집결시켜 진군의 공세를 막아낼 준비를 했다. 진왕 정은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제왕 건은 이를 거부하고 진나라에 저항할 것을 결정했다.

진왕 정(政) 26년, 기원전 221년(제왕 건 44년) 진왕 정은 제나라가 진나라의 사신을 거부한 연유로 대군을 동원하고 몽염을 사령관으로 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몽염은 제나라 서부의 제수(济水)를 공격해 들어갔다. 몽염의 진군이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했지만 제나라의 방어선은 견고하여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 제나라의 서부는 제수(济水)를 경계로 삼고, 장성이 서부와 남부를 둘러싸 그 길이가 350km에 달했다. 하지만 북부에는 이렇다할 장애물이 없었다. 이를 이용해 진나라는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측익을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하여 진왕 정은 연나라에 주둔 중이던 왕분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제나라 북부로 남하하게 했다. 연왕 희를 아직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연나라 멸망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제나라는 북쪽 방향의 적에 대해 상대적으로 대비에 소홀했는데 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제나라 주력군이 서부에 묶인 사이, 왕분과 부장 이신은 연나라의 남부에서 출정하여 제나라의 북부를 무인지경으로 진군하며 수도인 임치까지 진격했다. 곳곳에 제군이 주둔해 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던 제군은 진군에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기 바빴다.

갑작스럽게 북부에서 나타난 진군의 신속한 남하로 인해 제군은 무력화되었고, 진군은 순식간에 임치성에 다다라 포위했다. 임치가 포위되자 제나라의 지휘 통제는 마비되어 사실상 제나라는 진나라에 각개격파될 일만 남아있었다. 임치의 군세가 수만 명에 달하고 수년 동안 버틸 군량이 있었지만 이미 6국이 모조리 멸망하여 제나라만이 홀로 남은 상태였고, 버틴다 한들 멸망의 시기만 늦출 뿐이었다.

왕분은 임치를 포위하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왕분의 군세로 임치를 함락시키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왕분은 진군이 임치를 포위한 것 만으로도 제나라가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왕분은 임치에 사신을 보내 제왕 건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진나라는 제왕 건에게 500리의 봉토를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제왕 건에게 있어,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진나라가 약속한 500리의 봉토는 믿을 만한 게 못 되었으나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았다. 재상 후승마저 제왕 건에게 항복을 권했다. 그리하여 제왕 건은 항복하고 제나라는 멸망했다.

항복 후, 제왕 건은 압송되었고,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후승은 처형되었다. 조나라를 멸망시키며 당장 곽개를 죽이지 않고 후대한 것은 아직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지 못했기에 남은 6국의 반역자들을 더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제왕 건은 500리의 봉지가 아닌 공성(共城)의 송백나무 숲에 연금되어 음식을 거의 받지 못해 결국 굶어죽었다.


[1] 단 땅덩어리가 저렇게 큰데 인구가 고작 3할이라는 점에서 보듯 진나라는 영토에 비해 인구는 적은 나라였다. 현재 인구가 많은 파촉 지방은 당시에는 개발이 덜 된 촌동네였고,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오르도스 지방은 그냥 사막이고, 산서 지역은 산이 많아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었다. 즉 진나라의 실질적 국력은 관중 지방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2] 중국발로 추정되는거 외엔 출처불명이지만 당시의 전국칠웅의 국력비는 이정도라는 지도도 있다. 지도로 보면 진나라의 국력은 국경을 맞댄 국가들 중에서 한나라 빼고는 그런대로 비슷비슷하기에 진나라가 압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3] 수급제는 보통 적을 죽여 그 목을 베어 오면 인정해준다. 당연히 반드시 적을 죽여야 상을 받으니 무차별적인 살육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장평대전 이후 조나라의 40만 군사들이 학살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의견이 있다. [4] 낙양 인근의 낙수가 아니라 관중분지를 흐르는 낙수이다. [5] 본디 정국거는 진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하려는 한나라의 계략으로(피진계, 진나라을 피로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뜻이다) 정국이라는 간첩의 주도로 건설되었는데 중도에 정국은 간첩임이 발각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정국은 이것이 완성된다면 한나라는 잠시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결국은 진나라에게 더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진나라에서도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정국을 살려주고 수로 건설도 그대로 유지했다. 이후 결과는 당연히 앞에서 본 것과 같다. [6] 특히 조나라와 제나라는 왕의 측근이 진나라에 매수당해서 조나라는 이목을 숙청했고 제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공략당하는 동안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7] 그나마 이중에서 제대로 싸워보기라도 한 왕은 조가와 창평군 정도다. 심지어 창평군은 진나라에서 승상까지하다가 배반해서 왕을 자처했으니 진나라군을 막지 못하면 무조건 죽는건지라 죽기살기로 싸운것 뿐이다. 물론 이들도 나라가 거진 다 망한 뒤에야 옹립되어 별 힘을 쓰지 못했다. [8] 《자치통감》은 전국시대 이후 수백 년이 지나고 작성된 책이라, 이 시기를 다룬 기록에선 과장이 매우 심하다. 연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할 때 무려 2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적은 것이 좋은 예다. 사실 자치통감의 저자 탓을 하기는 힘든 게 역사상 간극이 그나마 적은 사기조차 사마천도 자료부족에 시달린지라 호왈백만이라고 해도 쓰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9] 진왕(秦王) 정(政) 11년, 조도양왕(趙悼襄王) 9년 [10] 황당하게도 조나라의 수뇌부는 연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거북의 등껍질로 친 점에서 매우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바로 앞에서 언제든 자신들을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진나라를 놔두고 연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1] 더욱 어이없는 것은 연나라의 수뇌부도 거북점으로 조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한 전적이 있다. [12] 현 하북성 임장현 [13] 지금의 산동성 무성현 [14] 진나라 입장에서는 원정군 10만이 전멸하고 그 총사령관마저 도주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번오기의 일가가 멸족되는 원인이 되었다. [15] 이를 '번오 전투'(番吾之戰)라 한다. [16] 오늘날의 하남성 태항산 산맥 남쪽, 황하 이북 지역 [17] 현 허난성 신정현 [18] 지금의 허베이성 만청현. [19] 지금의 산시성 양원현. [20] 지금의 허베이성 임장현. [21] 사공마는 진나라와 조나라의 고위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두 나라의 내부 사정과 그 강약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옳은 말이었다. [22] 다만 이에 대한 조유목왕의 반응도 나름 정당한데 일단 조나라 땅을 반이나 줘버리면 조나라 자체의 힘은 매우 약화된다. 때문에 다시 진나라가 침공해오면 자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공마가 제나라와의 합종을 내세운 것이고 그래서 '조나라 반을 잃는 대신 산동(제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고 실제로도 제나라가 제민왕 말엽에 거하게 털리긴 했어도 실시간으로 진나라에게 털려가며 망국의 길을 걷던 위, 한(이미 멸망), 조, 초보다는 사정이 낫고 연나라는 제나라보다 국력이 좀 그래서 조나라 반을 주고 제나라와 합종을 이룬다는 전략은 현명하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유목왕이나 사공마가 알지는 못했기에 그들에게 변호거리는 되지만 이 당시 제왕 건은 간신 후승에게 놀아나던 왕이었고 진나라는 육국 전부에 뇌물뿌리며 단합하지 못하게 했으며 실제로도 합종은 깨지기 쉬웠고 또 그러했다. 전국시대 말기를 보면 거의 진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신릉군, 춘신군, 소진 같은 인물들이 합종을 이루건말건 정작 왕이 진나라에게 속아넘어가는 등의 이유로 쓸데없이 의심하는 바람에 결국은 실패했다. [23] 엄밀히 장평대전 이후 연나라가 수 차례 조나라에 진화타겁에 들어갔던 것을 수차례 격퇴한 역사를 겪은 조나라라 연나라를 믿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기면 모를까 저러고 오히려 수도인 계가 포위당할 정도로 몰린 연나라에게 힘을 빌려달라느니 차라리 제나라가 더 믿음직했을 것이다. [24] 이목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반론] 다만 11회에 달하는 쿠데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군부가 아니라 전부 조나라의 왕족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조나라의 구국영웅인 염파마저 장평대전 당시 혜문왕의 뜻에 따라 경질되어 손님이 모두 떠나는 수모를 겪었고, 혜문왕의 아들인 도양왕은 약간의 마찰이 있긴 했으나 집권하고 난 뒤 염파를 성공적으로 숙청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조나라 군부가 왕과 파워게임을 했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해석은 조금 무리가 있다. [26] 이후 유목왕은 병으로 죽었는데 이유는 어린시절 조나라에서 안 좋은 추억이 있던 진시황이 일부러 냉방에 감금했고 이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목왕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 조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대부들이 망국의 책임을 물어 그녀와 함께 일족 전체를 죽였다고 한다. [27] 통상적으로 사가들은 조가를 대왕(代王)이라 칭한다. [28] 지금의 허난성 남부 [29] 지금의 허난성 개봉 [30] 《열녀전》(烈女傳)에서는 살해당했다고 적혀 있지만 《사기》(史記)에서는 위왕이 진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는지의 여부가 기록되지 않았다. [31] 이후 대량은 일개 현으로 완전히 몰락해, 수나라 시대에 대운하가 건설될 때까지, 즉 진나라 이후 한나라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년 역사 동안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32] 초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의 이복동생이다. [33] 혹은 신정의 난 이전에 갔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초나라 정벌에 반대하여 좌천되었다고도 한다. [34] 지금의 안후이성 박주(亳州) 동남 [35] 창평군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경위와 경과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거나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현재 중국에서도 연구 중에 있다. 본 문서는 창평군에 관한 여러 정보를 취합한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니다. [36] 혹은 창평군이 공략했다고도 한다. [37] 장평대전에서 조나라가 조급히 군사를 움직여 대패한 것은 대군이 여러 해를 대치함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피폐해져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38] 혹은 초왕 부추가 항연을 의심해 철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도 한다. [39] 항연은 왕전과의 전투 때 죽었다고도 하고, 창평군과 함께 저항하다 죽었다고도 한다. [40] 창평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옹립되었거나, 아예 왕을 칭한 적이 없거나, 사마천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41] 태자 단은 볼모 시절 진왕 정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다. [42] 폐위된 태자 조가가 이끄는 조나라의 잔존세력 [43] 6국의 국력이 비교적 온전했을 때도 합종군은 제대로 된 시도도 못 해보고 와해되었다. 사실 연나라 자체도 장평대전 직후 조나라에 진화타겁을 시도하는 등 6국간의 신뢰관계는 원래 좋지 못했다. [44] 지금의 베이징 [45] 지금의 요양 [46] 삼진(三晉)과 진나라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벌여 투쟁한 결과, 그 군사력이 타국과 비교할 수 없었다. [47] 분명히 즉묵 대부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점이 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진 제국의 조기 붕괴는 미처 해결되지 못한 반역세력의 잔재로 인한 것이었다. 진나라는 강했으나 그들은 일제히 진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진나라는 무너졌다. [48] 악의가 이끄는 진•연•삼진의 5국 연합군이 제나라 민왕의 주력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49] 일례로 조나라 대군이 장평에서 진군과 대치할 당시 조나라는 제나라에 곡물 지원을 요청했으나 제나라는 진나라의 유세에 설득되어 곡물 지원을 하지 않았다. [50] 혹은 진나라의 기만책에 속아넘어갔다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