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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09:52:43

지미 카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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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외교
2.1. '도덕주의 외교' - 반론과 재반론2.2. 카터와 한국, 그리고 DJ2.3. 국방
3. 내정
3.1. 의회와의 불화

1. 개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평가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카터는 외교, 환경, 인권, 인종 문제에서는 진보적이었지만 그 외 분야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20세기 중반 이래, 보수주의 민주당원들 중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정서가 인종주의 철폐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어 환경, 교육, 인종 등에서는 어느정도 진보적인 색채를 띄지만 그 외 분야에 있어서는 여전히 기독교 보수주의적 성향을 유지하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지미 카터 역시 그런 케이스였던 것.

밑의 평가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카터에 관한 내용이다. 퇴임 이후 많은 선행과 평화적인 활동을 하고 독실한 개신교 신앙도 보여주면서 '인간 지미 카터'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유능한 대통령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 사람 자체는 좋은데 대통령 직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1]이란 평가도 상당하며, 민주당 대통령의 재선 도전마다 반면교사로(...) 유명한 사례다.[2] 특히, 외교나 경제 문제에 있어서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으며, 하술하듯 정치적 능력도 낮게 평가받는다. 이상주의로 인하여 크게 말아먹은 외교는 물론, 그나마 나았다는 내치에 있어서도 공보다는 과가 더 두드러진다는 평이다. 미국 역사상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의 하나라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대변한다.

미국 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크게 인기있는 대통령이다. 아직도 그의 집권 4년 간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 퇴임 후 업적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편이다. 퇴임 후 업적 때문에 집권 당시의 문제가 미화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레이건 이후로는 아들 부시 같은 총체적 난국의 대통령들도 정치 안정(4년만에 바뀌면 혼란이 올 것이니)을 이유로 대체로 재선에 성공했던 지라, 카터 집권 당시의 내용도 의외로 후대의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보다 나쁘지 않다. 반쯤 농담삼아 21세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3][4][5] 현재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딱 중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2. 외교

카터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 외교정책은 현실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으며 특히 인권외교라는 멋들어진 표어와는 정반대되는 전두환, 차우세스쿠 같은 독재자 가운데에서도 막장 독재자들과 어울리는 위선적인 행태는 카터와 미국의 외교에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거기에 비록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이긴 하지만 여러 친중적인 행보들은 21세기 신냉전 체제에 들어서 미중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다시 비판받고 있다.

거기에 특히 그와,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쳐 소련 봉쇄에만 올인한 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의 이러한 외교정책이 현재의 대만의 안보위기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나아가서 탈레반의 발흥을 통한 이슬람 극단주의의 부흥을 촉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그의 인권 외교는 우방국들과의 동맹에 균열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미국 내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연속된 외교적 실패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결국 강한 미국을 내세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6] 일부 카터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카터의 업적으로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등을 들지만 두드러지지 않는 데다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주로 닉슨 정권의 핑퐁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카터의 인권 외교는 일관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방국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지만 몇몇 공산권 독재국가들에게는 오히려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카터는 1978년 4월 워싱턴을 방문한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에게 "우리(카터와 차우셰스쿠)는 신념과 목표를 공유한다. 정치와 경제의 공정한(just) 체제를 갖고, 개인적 자유를 누리고 …"는 내용의 환영사를 안겨준 적이 있다. 훗날 카터가 북한의 인권문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봐도 그의 인권 외교가 이중 잣대라는 평가를 부정하기 힘들게 된다.

다만 당시의 차우세스쿠 건은 인권 외교의 이중성보다는 소련 견제 전략이 인권 외교 정책에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차우세스쿠는 내치에서는 분명한 독재자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보면 중국의 마오쩌둥, 유고의 티토와 함께 동구권에서 소련의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구권 내의 반소 국가들과 관계 증진을 시도했던 것은 닉슨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당시의 인권정책은 사회들의 민주화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카터의 인권정책들은 남한보다 인권이 훨씬 열악했던 남아메리카 독재정권들을 제재하는 데서 출발했고, 임기말까지 그 틀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기초부터 미국이 가진 힘의 제한을 정확히 판단했고, 목표가 "사회 변화"가 아님을 명확히 명시했다.

한편, 임기 중인 1979년에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했다. 이때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상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반발,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걸었으나, 연방대법원은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미 의회가 직접 반대한다는 서한을 보내는 등 공식적인 반대 의견 표명이 없었기 때문에 법원이 판단할 수 없다. 상고를 기각한다."고 판시, 그대로 파기로 이어졌다.

2.1. '도덕주의 외교' - 반론과 재반론

카터가 낙선한 원인으로는 흔히 뜬구름 잡는 도덕주의 외교의 실패를 꼽는다. 그러나 카터의 도덕주의가 뜬구름 잡는다는 비판은 정확하게 그의 도덕주의 정책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온다.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명확히 미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에서부터 시작한다.[7]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6~70년대 미국 내의 반인종차별운동, 반전운동과 페미니스트 시민권운동 등 여러 인권운동들에서 힘을 받고, 비아프라 전쟁[8]이나 방글라데시 기근 등 당시 발생한 국제적인 인권위기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유명한 인권단체들 ( 국경없는의사회, 옥스팜, 국제 엠네스티 등)의 탄생에 힘입어 탄생했다. 인권을 앞세웠던 카터가 당선된 것 자체가 그 당시의 인권에 대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해주는 현실이었다. 타겟 또한 주로 남아메리카로서,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일어난 폴란드나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련된 사태들은 그의 외교 정책의 주된 타겟이 아니었으며 카터의 외교 정책 설계 한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이다.

이렇게나 상당히 자신들의 목적과 한계를 잘 파악한, 매우 정교한 외교안을 뜬구름 잡는다고 느낀다면, 인권 개념 자체를 추상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이다. 다르게는, 무작정 모든 인류의 인권을 지켜주고 상향시키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식의 비판이 된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심지어 유신체제 아래 한국보다도 인권이 열악한, 정부에 의한 납치와 살해가 아주 공공연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런 현실에 맞게 카터는 외교정책을 설계했고, 실제로 남아메리카에선 카터의 정책들이 빛을 본 경우가 많고 그의 인권정책 참모였던 패트리샤 데리언(Patricia Derian) #은 여전히 남아메리카에서 칭송받고 있다.[9]

현실주의가 아닌 도덕주의를 내세웠으면서도 미국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자체가 정책으로서는 실패라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중미와 남미를 "내 앞마당"취급해왔기에, 타이밍 나쁘게 들이대는 인권문제 제기는 그저 상대를 길들이기 위해 트집잡는 몽둥이로 인식되기 좋았다. 현실주의라면 모를까 도덕주의에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기준을 세웠다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게 한국의 경우처럼 아무도 이해하기 힘든 기준으로 인권외교를 멋대로 휘두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결과 남미나 한국 등에서 지미카터의 인권외교는 반미세력의 확대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터의 인권외교는 어찌되었는 " 의도는 좋았다"는 중지는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항목이 인권외교 자체의 성패를 말하고 있지만, 카터가 인권외교로 비난받는 다른 이유는 인권외교 그 자체의 성과보다는 인권외교를 하며 트레이드 오프로 내준 것에 있다.

2.2. 카터와 한국, 그리고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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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유진곤 씨의 아들 유동민 씨[10]가 지미 카터에게 보낸 편지. 카터가 박정희 정부에게 압박해서 유진곤 씨는 풀려났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도 박물관에 편지 전부가 남아 있다.
[편지 전문(펼치기/접기)]
>카터 대통령님께 보냅니다.
카터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의 어린이지만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셔서 아주 기뻐요.
카터 대통령님은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잘 아시고, 힘없고 약한 국민들을 사랑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위반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유진곤의 아들 유동민입니다.
우리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며 절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아빠는, 비밀군사 재판에서 말한마디도 못 한채, 중형을 받았어요.
그 동안, 저는 박 대통령께 호소문도 보내었고, 엄마랑 같이 중앙정보부 6국에 붙잡혀가서, 33시간 동안 의자에 꼬박 앉아서, 밤을 새우며 중앙정보부 아저씨들에게 무서운 말을 많이 듣기도 했으며, 3년동안 주님께 날마다 기도도 하였읍니다만, 우리 아빠는 아직도 석방되지 못하고, 어둡고 추운 독방에서 운동도 치료도 못 받고, 고통받고 계십니다.
지금은, 한달에 단한번 5분동안 면회를 시켜주지만, 어둡고 두꺼운 유리벽이 막혀 아빠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인사외에는 다른 아무 말도 못하게 교도소 아저씨가, 3사람 씩이나 지키고 있으면서, 호통을 쳐서 면회하기도 무서워요.
아빠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고, 몽둥이로 어깨를 몹시 두들겨서, 온몸에 신경통이 생겨서, 밤잠도 못 주무시지만 치료도 못 받고 있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학교에서 배웠읍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아빠는 비밀군사재판을 받아야 했고, 저렇게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지, 저는, 알수가 없읍니다.
그런데, 대통령 긴급 조치가 너무나 무서워서, 제가 잘 아는 변호사 님은, 아빠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말을 못하신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하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중앙정보부에 잡혀 간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도 신부님도 다 붙들려갔고 다른 어른들은 무서워만 하니까, 저는 정말 슬퍼요.
박대통령은 무서워서 편지도 못 보내겠고,
그래서, 한국이 아닌 미국이지만, 민주주의를 가장 잘아시고, 우리아빠처럼 힘 없고 약한 사람을 동정하시는, 카터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빠가 석방되게 도와주십시오.
아빠를 기다리다가, 할머니는 병이나서, 곧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가 석방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제가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카터 대통령님 은혜에 꼭 보답하기로 약속드리겠읍니다.
카터 대통령님, 안녕히 계십시오.

1976.11.24
국민학교 6학년, 유동민

카터의 '인권 외교'는 대한민국에도 적용되었다. 카터는 임기 내내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을 문제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 당시 박정희 정부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한편 박정희 사후 신군부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논란적이다. 당시 미국 대사가 12.12 군사반란을 하루 만에 쿠데타가 아니라고 결론지어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못 막았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11] 5.18 민주화운동도 임기 말이었기에 거의 방조하는 상황이었고, 한반도 정세의 안정성을 고려한 면이 컸다. 게다가 당시 미국 본토 정가는 이란 왕정 몰락과 이란 대사 피랍사건이라는 초특급의 외교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전두환의 군사반란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자 카터는 김대중의 신변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것이 전두환이 김대중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이유다. 후임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에게 인수인계를 한 사항 중 "김대중 문제는 꼭 챙겨달라."도 있었고, 전두환은 보수 성향인 레이건이 당선되자 잘 됐다며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 측에서 극구 반대하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 정부에 대해 회유책과 경제제재 두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제제재를 하면 진짜로 전두환이 김대중을 사형시킬 것 같다는 우려로 인해 회유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김대중을 석방하는 대신 전두환을 방미시키는 방법으로 사형을 막았고, 이후 김대중을 미국에 망명시킨다.[12] 그래서 김대중에겐 카터가 생명의 은인이다.[13] 실제로 김대중의 목숨은 당시 카터에게 직접 보고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김대중은 당시의 인권정책에 정확히 부합하는 정치적 수감수였다.

김대중의 목숨을 살린 것과는 별도로, 카터는 쿠데타 반년만에 신군부 세력을 용인해버린다. 광주 민주항쟁 1년 전까지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안보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한미군을 가지고 박정희를 통제하려 하고, 인권을 명분으로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던 카터는 전두환 정권에게 묵인을 넘어 일부 외교문서를 보면 되려 암묵적으로 지원까지 하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준다. 때문에 민주화 세력에게는 표리부동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미국은 오늘날과는 달리 우방국과 적대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독재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단속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카터 행정부의 외교 방침은 '도덕주의&인권'으로 대표되는 모럴의 색채가 강한 외교였기에 신군부에 대해서는 개입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방향이었다. 이런 행보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 세력 내에는 ' 카터가 5.18을 막지 않았으며 되려 용인까지 해줬다!'라는 강렬한 명제가 다시는 잊어선 안될 상처이자 치욕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한국의 민주화 세력 중 NLPDR과 같은 민족주의 성향 세력은 이때부터 반미적 성향의 계파가 뿌리깊게 자리 잡았고, 미문화원 점거와 방화는 물론이고 그 중 일부는 더 나아가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 강성 반미 활동으로 전개되는 스노우볼이 되었다.[14]

카터의 업적은 박정희를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걸린 새장에 간신히 가둬 놓은 것에 그쳤다. 그의 인권외교는 신군부에 대한 묵인으로 두 군사정권의 압제를 종식시키는데엔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결과적으론 남한에 주체사상파를 낳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술하였듯 군부의 탄압으로 죽음에 처해진 김대중이라는 개인을 살리는 행위가 바로 카터식 외교의 전형으로, 그의 인권 외교는 국소적이고 부담도 적고 비교적 쉬운 개인 보호에 치중한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보론하자면 미국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핵무장을 통해 역내 균형을 깨려는 골아픈 반항아 박정희와, 핵을 쿠데타 직후부터 일찌감치 포기의사를 밝히고 충실한 사냥개를 자처한 전두환이 동격일 수는 없었다. 또한 임기 말 일어났던 이란 대사 피랍사건과 독수리 발톱 작전[15]의 실패의 영향도 카터의 대외 개입을 망설이게 했을 것이다.

2.3. 국방

이미지메이킹을 통해 어필한 레이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실질적으로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 했던 핵심인물이었다. M1 에이브람스, F-117, M270 MLRS 등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주요 무기체계들이 카터 정권 때 집중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국방비도 오히려 증가되었다. ALCM, LGM-118A 피스키퍼[16], B-2, UGM-96 트라이던트 I 등 전략무기체계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었다. 카터 정권 때 추진된 대규모 군사력 프로젝트는 후에 레이건 행정부의 큰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안 그래도 미국 경제력의 반도 안되는 소련은 질적으로 우월해진 미국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재래식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군비경쟁을 감당 못 하고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3. 내정

카터는 확실히 레이건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확실한 규제 완화자였다. 카터는 자신의 대의에 열정을 보였으며, 그 중 하나는 규제 완화였다. 그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산업인 항공과 트럭 운송을 연방 규제에서 해방시켰고, 꼭 필요한 산업 규제 완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중략)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경제 호황은 카터의 규제 해제가 없었다면 불완전했을 것이다.
- 포브스, 위대한 규제 해제자 카터 #

내정에 있어서는 심각한 경제 불황에 직면했다. 특히 임기 후기에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인해 미국이 경제적으로 받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10%대의 가파른 인플레이션[17]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실업자가 급증한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 시기였으며, 1980년에는 -0.3%의 마이너스 성장도 기록했다. 다만 제2차 오일쇼크가 대외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카터 정부의 실정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옹호론도 있다.[18] 경제문제에서의 실패는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시기에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다음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이르러서야 안정화되었다. 다만 레이건 정부에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한 폴 볼커 FRB의장이 카터 정부 임기 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를 카터 정부의 경제정책의 업적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특히 카터가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내정이 성공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 불황은 오일쇼크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밖의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는 것. 카터의 업적으로는 항공산업과[19] 철도운송[20], 화물운송의 규제를 풀고[21] 국립공원 체계를 정비하며 최초로 히스패닉계도 등용했다는 것. 또한 홈브루 법에 서명하여 개개인의 맥주 양조를 허용하여 금주법 이후 50년만에 홈브루잉이 가능해진 것도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

다만 임기 초에는 75%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여줬지만[22] 후반에 경제 불황과 이란 대사관 사건 등이 터지면서 급격하게 하락, 임기 말에는 29% 지지율[23] 레임덕을 맞이했다. 웬만하면 재선되는 미국 치고는 끝이 좋지 못했던 대통령. 미국 역사상 8명의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는데[24], 정권 교체를 이룩한 뒤 재선에 패배, 그것도 참패한 대통령은 오직 카터뿐이다.[25][26] 하지만 달리 보면 닉슨 이후 아버지 부시까지 이어지는 24년간의 공화당 초강세 기간(1969-1992년) 중 한번이라도 집권에 성공한 카터가 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27][28]

3.1. 의회와의 불화

카터 시대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민주당이 개헌선(하원의 2/3)을 뛰어넘는 의석을 기록했고[29] 상원에서도 슈퍼 60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후의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30]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에서 대통령을 했을 수밖에 없었지만, 막상 카터는 의회 내 자당 의원들과의 불화로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앞서서 말했듯이 외교, 환경, 인권, 인종 문제에서는 자유주의적이었지만 그 외의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재정보수주의 성향으로 복지 확대 등에 미온적이어서 워터게이트 이후 의회를 빼곡하게 채운 민주당 내 리버럴과 격렬한 갈등을 일으켰다. 반대편의 남부 인종주의자들에게도 인권, 인종 관련 스탠스로 인해 지지받지 못해 철저한 워싱턴 아웃사이더로 남고 말았다.

카터의 정치력이 미숙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되기엔 부족했던 정치적 경험을 드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카터의 정치 경험은 조지아 주의회[31] 상원의원 4년, 조지아 주지사 4년이 전부였다.[32]


[1] 이런 면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감안하지 않으면 유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우세한 리처드 닉슨 안티테제라 봐도 무방하다. [2] 물론 역대 최악까지는 아니며, 최하급 라인을 깔아주는 후임자인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보다는 평가가 높은 편에 속한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대통령들에 비하면 낮은 편이긴 하지만. [3] 사실상 보수 정치계의 영웅 중의 영웅인 레이건이 급상승해서 하필 카터와 맞붙었는데, 카터의 경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평균에 못 미치는 내치 수준을 보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레이건에 투표한 것이 컸다. [4] 또한 최근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와 도널드 트럼프가 전문가들과 대중들에게 매우 낮은 평가를 받기에 최근 중도 유권자들에게 있어서 공화당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진 것도 있다. [5] 물론 농담삼아 하는 말로써, 지미 카터 시기 인플레이션은 살인적이었다. [6] 이란의 호메이니는 인질을 레이건 취임식 직후에야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끝까지 카터를 엿먹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레이건이 아닌 카터가 풀었다. 그리고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더 큰 엿을 먹고 말았다. [7] PRM-28 참고 # pdf 파일 특히 "사회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8]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 [9] 폴란드에 왜 개입하지 않았냐는 시각이 있지만 근거가 없다. 당시 폴란드에 카터가 브레즈네프와 싸워가며 간섭했다면 그것은 민주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냉전시작 이래의 친소정권을 뒤엎는 시도가 됐을 것이다. 물론, 80년대에 폴란드 자유노조는 서방측 단골 토픽이었지만, 소련 몰락 전에는 가능성없는 이야기. [10] 2023년 기준 60세(환갑) [11] 미국 외교력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힘은 마치 큰 몽둥이 같아서, 12.12사태 같은 현상을 고치기에 필요한, 의료용 메스처럼 작고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절대 아니다. 조금이라도 심기 불편하다는 뉘앙스조차도 가히 절대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게 미국의 힘이지만, 메스처럼 국지적 상황에서 정밀하게 작동하기는 또 어렵단 것. 미국은 당시 보복성 외교절차를 생각했지만, 결국 대북 억지력을 위해 별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12] 2016년 미국 기밀문서 해금에서 밝혀졌다.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16년 기사 [13] 나이도 같고, 둘 다 젊은 민주당/ 신민당 소속의 개혁파에 속하는 대통령이며, 인권운동을 하고 평화주의자였던 것 등에서 겹치는 측면이 많았다. [14] 물론 NL 계열 자체와 NL의 형성 및 성장 과정에 북한측 공작이 개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남파공작이든 강철서신 같은 행동은 이미 불 붙은 집에 장작을 올린 것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의 롤모델을 넘어 우상 그 자체였던 수호자 미국에게 버림받아 피눈물을 흘린 국내 민주화 인사들에게, 5.18 사태는 미국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끔찍한 괴물'로 인식이 변화하는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15] 피랍된 인질들을 구출하려던 군사작전. [16] 카터 정권 당시의 이름은 MX 미사일. [17] 1979~1981년 인플레이션률은 10%대였고, 1980년에는 무려 13.6%를 찍으며 194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8] 사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사회불안도 오일쇼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내건 정당성과 국민이 인정한 정당성은 어쨌든 먹고사니즘이었는데, 설사 외적 요인 때문이라 해도 그 목표가 불투명해지면서 불만이 커지게 되었고 당장 내려오라는 말이 힘이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 경제불황은 부마민주항쟁, 종국에는 10.26 사태로 이어진다. [19] 1978년, 이 규제 완화가 훗날 항공산업 대세를 크게 뒤바꿨다. 팬암이나 유나이티드 항공 등 기존의 대형 항공사들이 몰락한 대신, 사우스웨스트 항공으로 대표되는 저가 항공사들이 크게 성장했다. [20] Staggers Rail Act of 1980. 그 동안 정해진 운임요율에 따라 움직이던 철도운송의 운임요율을 폐지하고 철도회사가 자율적으로 운임을 설정할 수 있게 만들어 운임이 크게 인하되었으면서도 수요 증가로 철도 회사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었다. [21] Motor Carrier Act of 1980. 관련 법인수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전국단위 운임을 내렸으며 화물운송노조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80년 대선에서 미국 화물운송노조는 로널드 레이건을 공개 지지했다. [22] 사실 미국 대통령들 대다수가 국정 운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임기 초반 70%를 넘는 지지율을 보이곤 한다. [23] 대선 득표율이 50.1%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레임덕이다. [24] 징검다리로 집권한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더하면 9명. [25] 그나마 존 애덤스가 카터의 2배를 뛰어넘는 득표율 격차(21.2%p)를 기록하며 낙선하긴 했지만 당시는 미국의 정치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으니 논외. 애덤스vs제퍼슨, 퀸시 애덤스vs존슨, 밴 뷰런vs해리슨, 클리블랜드vs해리슨 대결의 경우는 2번 맞부딪쳐 각각 1승 1패를 한 케이스이며, 이 중 해리슨은 득표에서는 졌지만 선거인단에서 이겨서 대통령이 되었다. 2016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트럼프도 2020년 선거에서는 카터처럼 재선엔 실패했지만 득표율 약 47%로 선거인단을 25개 주에서 232명은 확보했으며, 심지어 유일하게 득표율 • 득표수에서 당선 당시보다 더 받았는데도 낙선한 최초의 사람이고, 이를 넘어 클리블랜드처럼 202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반면에 카터는 정권 연장에 실패한 대통령 중 존 애덤스를 제외하면 가장 심한 득표율 격차인 9.7%p를 기록한 것은 기본에 선거인단 역시 불과 6개 주에서 49명 밖에 확보하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패했다. [26] 사실 이조차 리처드 닉슨 탄핵표결 직전 사임하면서 그나마 덜 비참해진 것으로, 만약 닉슨의 탄핵이 가결된 역사에서 카터가 재선에 실패했더라면 카터는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당한 국가원수라는 어마어마하게 치욕적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사실 1945년 이후 국가원수 탄핵이 가결된 사례 자체가 15건 안팎 수준이다) 그것도 문재인, 자이르 보우소나루보다도 무려 42년이나 앞선 채로. [27]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것은 쇼맨쉽 뛰어나고 정치를 잘하는 클린턴이 나오기까지 한 번도 없었다. [28] 물론 워터게이트 사건 + 스피로 애그뉴의 비리가 유발한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민주당의 개헌선 돌파와 카터의 당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카터는 이런 절호의 환경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며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당했다.(...) [29] 사실 1932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당은 거의 항상(2차 대전 직후 치러진 1946년과 반공주의 + 아이젠하워 버프를 업은 1952년 제외) 원내 1당이었고, 선거 때마다 의석의 60% 안팎을 밥먹듯이 차지했다. [30] 클린턴과 오바마, 바이든 모두 집권 2년차 중간선거 하원에서 여소야대였다. [31] 연방의회가 아니다. [3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도널드 트럼프보다는 길긴 하지만 이들은 각각 전쟁영웅/셀럽이라는 전국적인 인지도라도 컸기에 사실상 조지아 주 사람들만 아는 수준이던 카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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