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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리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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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O 리그에서는 '패전 처리 투수' 대신 '추격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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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간 계투+ 마무리 투수를 합쳐서 부르는 말.

감독이 마무리 투수로 불러주기는 하지만 어찌선지 6회부터, 심지어는 5회부터 나오는 투수를 일컫는 말이다. 현대 야구의 정규 시즌에선 살려조를 제외하면 불펜 투수의 분업화로 잘 사용되지 않는 운용 방식이다.

2. 사례

2.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수호신의 역할을 맡은 최초의 전문 구원투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너클볼러 호이트 윌헬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 이후에도 과거의 불펜 투수 선발 투수가 던지지 못하는 이닝을 다 책임지는 투수라는 인식이 팽배했던지라 선발투수가 조기강판되면 남은 이닝이 얼마가 됐건 닥치는 대로 던졌다. 마무리 투수라고 다를게 없어서 일단 이기고 있다면 7, 8회에 올라오는 일은 당연시되었고 심지어 5, 6회부터 던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1974년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탄 마이크 마셜 같은 투수는 팀 162경기 중 106(…)경기에 출전해 208.1이닝을 던지고 15승 12패 21세이브를 올렸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투구. 게다가 마셜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스크류볼을 던지는 투수였다. 마셜 이외에도 60~80년대의 유명 구원투수이던 롤리 핑거스, 브루스 수터, 리치 고시지, 댄 퀴즌베리나 일본의 에나츠 유타카 등이 이렇게 운용되었다. 지금과 같은 1이닝 마무리가 등장한 것은 1988년으로 당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감독이었던 토니 라 루사 데니스 에커슬리에게 1이닝 마무리를 맡긴 것이 시초였다.

지속적인 중무리 운용은 없지만, 단발성으로라면 현대야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류현진도 2017 시즌, 4이닝 세이브(6회부터 등판하여 경기 마무리)를 기록한 적이 있다. 이쪽은 중무리 보다는 선발 1+1 스케줄을 고려한 것에 가깝지만, 앤드류 밀러, 조시 헤이더등 언제든지 2+이닝에 마무리로 나서는 S급 불펜투수의 기용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중무리 투수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 것이 바로 2017년 월드 시리즈에서 패권을 거머쥔 휴스턴 애스트로스 A.J. 힌치 감독. 이쪽은 기존의 불펜진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점으로 인해 포스트시즌 로테이션에서 탈락한 투수들 중, 특히 랜스 맥컬러스 주니어, 콜린 맥휴등 건강에 문제가 없는 선수를 주로 써먹은 케이스이지만, 그 투수들이 모두 기대치만큼의 활약을 하면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전문 불펜 투수가 아닌 대체 선발 자원을 이용한 유사 중무리 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2018년 우승팀 보스턴의 네이선 이볼디, 2019년 우승팀 워싱턴의 패트릭 코빈, 2020년 우승팀 다저스의 훌리오 유리아스 등 포스트시즌 한정으로 선발로테이션에서 탈락한 선발투수 한명을 유사시 선발-불펜-마무리까지 다 투입시키는 운영이 정석으로 자리잡는 흐름.

2.2. KBO 리그

1980~1990년대에 좀 던진다 싶은 투수들은 대부분 중무리 경험이 있다. 1980년대는 말 할 것도 없고 1990년대 초반까지도 보직이 완전히 선발 투수로 정해진 투수가 이따금 구원으로 나와 세이브를 기록하는 경우가 아주 흔해 빠졌던 만큼[1] 구원 위주로 등판했던 가끔 송진우 임창용, 구대성, 윤석민처럼 선발+ 중간+ 마무리까지 다 합친 완전체 투수가 나오기도 하지만, 선발로 주로 뛰는 투수의 경우는 보직 변경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서 중무리라는 이름을 붙이진 않는다.

1990년대 들어서야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이 조금씩 정착되어 갔지만, 이때는 홀드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정도로 중간계투라는 보직 자체가 그저 추격조 내지는 패전처리로나 취급받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선발이 가능한 길게 7이닝 언저리까지 끌어주면 바로 마무리투수를 투입하여 몇 이닝이 되었건 경기를 매조지하는 방식이 대세였고,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마무리투수들은 죄다 중무리 속성을 갖고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마무리 투수의 시조로 불리는 권영호부터가 1985년 마무리 첫 해 174.2이닝으로 규정이닝을 넘겼고, 그 다음 구원왕인 MBC-LG의 김용수도 구원부문 2연패를 하던 86~87년 각 178이닝-141이닝으로 규정이닝을 넘겼다. 이 때문에 김용수는 평균자책점이 집계되어 86년 4위, 87년 2위를 기록한다.[2]

선동열 또한 본격적으로 마무리 투수로 뛰기 시작한 1993년에 126과 1/3이닝으로 규정이닝을 돌파하며 10승 3패 31세이브 0.78의 평균자책점으로 구원왕 타이틀을 차지[3]했다. 일본 진출 직전인 1995년 또한 109와 1/3이닝을 소화하며 5승 3패 33세이브 0.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데뷔시즌인 93년이 커리어 하이였던 OB의 김경원 또한 규정이닝(126)을 넘는 129와 1/3이닝을 소화하며 9승 3패 23세이브 1.1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4]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40세이브 투수였던 정명원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94~97년까지 소화 이닝이 400이닝을 넘어갔다. 쌍방울의 조규제 역시 마찬가지로 커리어 하이였던 데뷔시즌을 포함해서 꾸준히 중무리 생활을 이어갔다.
여러 중무리 투수 중에서도 구대성이 가히 대표격이라 할 만 했다. 95년에 비록 선발 등판이 10경기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47경기에 등판해 155이닝을 소화하며 4승 14패 18세이브 3.54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어찌보면 황당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96년엔 2경기 선발등판을 제외한 나머지 53경기를 모조리 구원으로 등판하여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승왕, 구원왕, 승률왕, 평균자책점 1위의 4관왕에 등극하며 시즌 MVP를 차지했다.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또 그다음해도 계속 중무리 생활을 이어갔다. MVP를 차지한 이듬해인 97년부터 일본 진출 전해인 2000년까지 구대성이 정규시즌에서 소화한 이닝은 무려 479이닝[5](!)이다.

임창용 또한 구대성과 더불어 중무리의 양대산맥이라 칭할 만 했다. KBO 리그 역사상 중간 계투의 승리조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다시피한 선수가 96년의 임창용이었는데 이 해 114와 2/3이닝을 던지며 7승 7패 3.2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풀타임 마무리 투수로서의 첫 해였던 97년은 135이닝을 던져 14승 8패 26세이브 2.33의 평균자책점, 이듬해인 98년엔 133과 2/3이닝을 던져 8승 7패 34세이브 1.89의 평균자책점으로 최다 세이브왕에 등극했다. 삼성 이적 후 첫 해였던 99년 또한 138과 2/3이닝을 던져 13승 4패 38세이브 2.14의 평균자책점[6]으로, 세이브왕과 평균자책점 1위[7]를 기록해 2관왕[8] 에 올랐다. 위기 상황일 때 명색이 마무리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6회에도 나와서 던져야 했기 때문에 이 시기 삼성 휴대전화의 브랜드였던 '애니콜'의 이름에 빗대 임창용의 별명 또한 애니콜이었다.[9]

이 외에도 두산의 진필중 역시 전성기 때는 전형적인 중무리였다. 16승 6패 36세이브를 기록했던 1999시즌[10] 진필중이 소화한 이닝은 "114이닝"에 이른다.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시즌이었던 2002시즌의 노장진도 전형적 중무리였다. 11승 5패 23세이브를 거뒀고 소화이닝은 "127과 1/3이닝"이다.[11]

노장진과 같은 해 현대의 신인 조용준도 중무리 역할을 맡았다. 원래는 베라스라는 용병과 더블 스토퍼 체제여서 7회부터 8회 2이닝만 던지고 9회에 마운드를 인계하는 역할[12] 이었지만 베라스가 박살난 이후 자연스럽게 9회까지 던졌다. 다른 사례들에 비해 5~10이닝 정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109이닝을 던지고 만다. 결국 대학시절부터 가해져오던 혹사의 여파에 2002년의 영향까지 받아 인해 다음 시즌에 완전히 퍼져버렸다.

2000년 신인왕 수상자인 이승호 역시 신인 시절 중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데뷔 첫 해 42경기에서 139와 ⅔이닝을 던지면서 10승 12패 9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마무리로는 물론 중간에서 나와서 경기를 혼자 끝내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때로는 선발로 등판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당시 소속팀이던 SK 와이번스의 사정과도 맞닿아 있는데 누더기 상태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단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그나마 있던 투수들도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에[13] 이승호 말고는 제대로 된 투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 SK의 감독은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어린 투수들을 무식하게 굴려대던 강병철 감독이었기에 걸핏하면 등판해서 팀의 마운드를 혼자 떠받쳐야 했다. 결국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불과 5시즌간 768이닝을 던지는 혹사를 당한 탓에 퍼져버리고 말았다.

2002년 노장진 이후로 풀시즌을 중무리로 굴린 사례는 없지만, 시즌 도중 중무리로 기용되는 투수들의 사례는 현재까지도 있다. 결국 중무리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포스트시즌같이 한점 한점이 중요한 경기에서 선발 중계가 불안하거나 위기가 되면 마무리 투수들이 9회 이전부터 올라와 꾸역꾸역 막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13년 포스트시즌의 손승락, 봉중근, 정재훈, 오승환이 그 예. 아래가 풀시즌은 아니지만 중무리로 굴려졌던 사례들[14]이다.

대표적으로 오승환이 2005년 데뷔시즌에 위 사례보다는 낫지만 비슷한 역할을 했다. 시즌 초에는 중간계투로 권오준의 앞에서 버텼지만 권오준의 부진으로 인해 시즌 중반 보직교환을 하는데, 시즌이 끝나고 보니 61경기 99이닝을 던졌다. 그나마 관리를 해서 이 정도를 던진 것이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 등판한 것만은 아니고 정규리그 1위가 확정된 후에 10승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경기에서 오프너 위장선발 라형진[15]이 3이닝을 던지자 4회 계투로 등판해 3이닝을 던지고 승리를 챙기기도 했다. 이 시즌 오승환은 10승 1패 16세이브 11홀드 1.1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는데, 한 시즌동안 승수-세이브-홀드 세 카테고리를 동시에 두 자릿수의 성적을 올린 건 KBO리그 역사상 오승환이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1990년 중반, LG의 감독이었던 이광환이 선진적으로 선발 투수- 중간 계투- 마무리 투수의 투수 분업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2000년대 중반 선동열, 김경문 등 불펜 야구를 중시하는 감독들이 많아지면서 이런 중무리 투수 같은 기용은 거의 없어지긴 했다. 대신 중간계투 중에서 노예들이 생겨났을 뿐(…).

2011년 4월 17일에 롯데 자이언츠가 연패를 끊기 위해서 마무리 투수 고원준을 6회 1사부터 등판시키는 파격을 부린탓에 오랜만에 다시 중무리 투수가 회자되었다(…). 사실 그 전에 임태훈[16]이 정말 오랜만에 7회에 올라오는 초강수 경기가 있었지만 고원준의 임팩트에 묻히고[17] 말았다.

2013년에는 한화 이글스 송창식이 중무리로 활약하였고,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점 지쳐가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한화 이글스/2013년 참조.

2014년 한화 이글스의 윤규진이 제대 후 돌아와 중무리로 활약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필승조 안영명. 박정진이 후반기 들어 활약했기에 동점이거나 이기는 상황에 등판하여, 구대성이나 송창식처럼 비인간적인 혹사는 당하지 않았지만, 이 친구도 혹사와 부상으로 신음했던 전력이 있음을 생각하면 분명히 문제가 많다.

2015년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불운의 사나이 슈퍼스타 SSC 심수창이 결국 넥센 히어로즈를 상대로 3이닝을 혼자 틀어막으며 세이브를 기록하는 상황이 나왔다. 답답해서 내가 막는다 그 외 kt wiz 장시환이나 한화 이글스 권혁도 중무리로 굴려졌다. 후반기에 들어서는 KIA 타이거즈 윤석민이 중무리로 굴려졌다.

2017 장필준도 대표적인 중무리인데 장필준은 체력이 약해서 블론을 자주 다. 그러나 7월 들어 다시 힘이 떨어지는 모습을 간간히 보였다.

[1] 100완투의 대기록에 빛나는 윤학길조차도 통산 70회 이상의 구원등판 기록을 갖고 있다. [2] 그나마 김용수의 경우 1990년대 LG가 투수분업화를 도입하며 중무리 이미지가 많이 옅어졌다. 그러나 정작 이후 본인은 선발로 몇 년간 전업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3] 최초의 40포인트 기록 [4] 김경원의 평균자책점 1.11은 역대 단일시즌 평균자책점 가운데 선동열의 0점대 평균자책점 3회(1986, 1987,1993년) 다음인 역대 4위의 기록이다. 1993년 평균자책점 1위(0.78)는 물론 선동열이었다. [5] 거기다가 2000 시드니 올림픽때는 "중간계투 1경기 / 선발 1경기"로 나가 14이닝을 던졌다. 대략 반올림을 하면 500이닝 가까운 수치... [6] 규정이닝이 133이닝 이였다. 경기수가 133경기이므로 [7] 2위는 선발로 230이닝 던진 정민태 였다. [8] 순수 세이브에서만 임창용이 1위였고 승리+세이브 포인트 제도로는 진필중이 1개 차이로 이겼다. [9] 심지어 해태 시절엔 마무리 투수임에도 3회부터 나온 적도 있었다. 이거 삼성으로 팔려가기 직전에 던진거라 한다. 개고생 [10] 임창용-구대성과 당시 한참 세이브 경쟁을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이 해의 구원왕은 진필중이 가져갔다. 다만, 다른 내역에서는 임창용이 1위라고 했는데 2003년까지 KBO의 구원왕은 승리 + 세이브 합산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팬덤에서 보는 시각이랑 조금 달랐다. [11] 2002시즌의 노장진이 현재까지 풀시즌을 통으로 중무리로 돌린 마지막 사례라고들 한다. 사실 이듬해인 2003년도 마무리 투수 역할을 소화하면서 53게임에 83이닝으로 현재 기준으론 충분히 혹사를 당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이닝이 40이닝이나 하락한 이유는 전년도의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많이 털려서(...) [12] 송신영/ 이상열/ 권준헌/ 신철인 이 사람들이 현대 시절 중간 계투로 뛰었지만 마무리 투수 보직 상성과는 딴판이였다. 특히 송신영은 현대왕조가 무너질때 던질만한 투수가 없어서 임시로 정착한거 이외에 2011년 넥센/LG시절에 뛴 이후에는 맡기지 않는듯 아무래도 마무리 보직에서 연투는 중간계투가 던질때랑 차원히 다른 느낌이다. 신철인도 전년도에 임시로 마무리를 봤으나 엄청난 혹사로 이해에 조용준에게 자리를 넘겨줬어야 했다. 거기다가 평균자책점이 좀 높은것도 문제, 권준헌도 이듬해 조용준의 부진으로 잠시 마무리를 뛴 적이 있었다. 다만 그동안 던진 누적으로 한화로 넘어가서는 임시 마무리로 갔다가 중간계투로 보직이 변경된다. [13] 이 시절 제대로 던질 줄 아는 투수라고는 좌완 유망주 오상민과 쌍방울 시절의 정통파 에이스였던 김원형 정도였다. 그러나 오상민은 중간계투로만 등장했던 투수였고 김원형은 1999년 장종훈의 타구에 얼굴을 맞은 이후 폼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성영재, 김기덕 등 옛 쌍방울의 주축 투수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성영재는 시즌 도중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14] 오승환을 제외한 나머지는 3인은 데뷔 후 선발투수로 뛴 경험이 있다. 2023년 오승환은 데뷔 최초로 선발투수 등판을 하였는데 5이닝 1실점 패전투수가 되었다. [15] 시즌이 끝나고 경찰 야구단으로 가서 복무하는 도중 구단에서 방출당한다. [16] 임태훈은 이해에 불미스러운 대형사고를 터트린다. [17] 오히려 감독인 양승호가 대차게 까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