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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1968년 6월)

김기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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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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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1999년
1991~1992 1993 1994 1995
조규제 김성길 김석기 박성기
1996 1997~1998 1999 파일:쌍방울 레이더스 워드마크.svg
김원형 김기덕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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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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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1993 KBO 퓨처스 남부리그 다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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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KBO 퓨처스 북부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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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곤
(1990)
김기덕
(1991~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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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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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1992~1993)
김기덕
(1994~1999)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30번
팀 창단 김기덕
(2000~2002)
조진호
(2003)
SK 와이번스 등번호 82번
한문연
(2002)
김기덕
(2003~2005)
이세
(200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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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295/2010/01/10/5.jpg
한양대학교 야구부 No.72
김기덕
金基德 | Kim Ki-Deog
출생 1968년 6월 4일 ([age(1968-06-04)]세)
경기도 연천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전곡초 - 청원중 - 동대문상고 -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 입단 1991년 2차 3라운드 (전체 23번,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1~1999)
SK 와이번스 (2000~2002)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재활코치 (2003~2004)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05)
한양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6~2016)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7~)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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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선수.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잠수함 투수다. 현재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서울전곡초, 청원중을, 동대문상고, 한양대 사범대 영어교육과(87학번)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절 선배로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을 했던 임칠수 씨가 "계약금 적게 받고 프로에 가느니 내가 있는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에서 같이 뛰어 보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선수지명회의(드래프트)를 지금보다 늦은 11월[1]에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 연봉 1,200만원에 입단계약. 참고로 이 당시 새로 창단한 쌍방울이 신생팀 전력 지원 조치의 일환으로 먼저 10명의 선수를 특별지명으로 뽑은 뒤[2] 1,2차 지명권을 행사했기에 나름대로 높은 지명순위로 갈 수 있었다.

2.2. 프로 경력

파일:Honeycam 2019-08-10 14-05-09.gif
상당히 크면서도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투수였지만 첫해도 2승. 둘째 해도 2승. 중간계투에서 패전조와 셋업을 오간 그저 그런 전천후 투수였으므로 성적이 부각될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3년차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당시 2군에서 완투에 완봉도 하고 8승을 기록했다. 그런데 본인 말로는 1군 콜업을 시즌에 두 세번밖에 못 받았다고....

그리고 1994년 스토브리그에서 일본 전지훈련 도중 갑자기 2군행을 통보받고 상심해 있다가 '돈 받고 운동하는데' 라면서 마음을 비우고 야구를 하니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대인배.

그러다가 쌍방울 1군이 인천 원정 중 태평양 돌핀스에게 18점이나 대량실점을 하면서 급하게 콜업 연락이 왔다.[3][4]콜업을 받고 어찌어찌 한 게임 호투했다고. 잘 던지니까 중간,또 잘던지니까 마무리, 그래도 잘 던지니까 선발 제의를 받았다고(…). 그 뒤로 말년을 제외하고는 2군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5년에는 기존 마무리였던 조규제가 팔꿈치 수술 등으로 전력에서 일찌감치 이탈하니까 가끔 선발 알바도 뛰어가면서 선발-중무리 등 쌍방울 노예 1호기(...)[5]로서 역할을 다한다.

1996년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 부임하고 12연승을 거두는 등 파죽지세였는데, 일구회와의 인터뷰에서 "그 전에 쌍방울 있을 때는 상대팀이 서로 우리한테 돌아가며 선발 나와서 승리투수 하려고 이기려고 했었죠." 라고 말했다. 팀이 정규리그 2위를 하면서 43경기 출전, 9승 4패 4세이브 ERA 2.40을 기록했는데 이는 선발, 중간, 마무리 등 전천후로 뛰면서 거둔 성적이었다. 본인은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이기는 맛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1997년에는 7승 6패 ERA 5.23으로 부진했지만, 1998년에는 12승 11패 3세이브 ERA 3.52를 기록하면서 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자릿수 승수를 달성하게 된다.

1999년에는 선발 투수로 나와 150이닝을 소화해 줬으나, 쌍방울 레이더스의 상황은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지원이 거의 끊겨버리며 주전 선수들이 죄다 타팀으로 팔려간 덕분에 팀 전력은 역대 최약체였던 상황이었고,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며 2승 12패 ERA 4.50에 그쳤다. [6]

2000년 1월, 쌍방울이 해체되어 선수단 전원이 신생구단 SK 와이번스로 넘어가 그도 SK 소속이 되었다.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은 해체 직전의 쌍방울 선수들을 이어받아 전 시즌과 다를 바 없었고, 주로 선발 투수로 나와 5승 10패 ERA 5.22를 기록하면서 팀 투수진을 책임졌다.[7]

2002년 시즌 후 SK에서 방출되어 쌍방울 시절 같이하였던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가려고 하였으나, 얼마 못 가 김성근이 경질당했고,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지자 은퇴를 선언하였다.[8]

3. 지도자 경력

은퇴 뒤 2003년부터 SK 2군 코치로 활동하다 2006년부터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7년부터 김한근 감독이 퇴임하면서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1 쌍방울 22 33⅓ 0 0 2 1 0 - 4.32 35 20 6
1992 13 44⅓ 0 0 2 2 0 - 3.45 39 28 16
1993 3 5⅔ 0 0 0 0 0 - 14.29 18 2 3
1994 33 114 1 1 5 5 2 - 4.34 116 35 55
1995 44
(6위)
116⅓ 1 0 9 7 12
(8위)
- 2.71 98 40 90
1996 43 112⅔ 2 1 9 4 4 - 2.40 95 43 66
1997 25 105 1 0 7 6 0 - 5.23 110 42 49
1998 44 138 1 0 12
(9위)
11 3 - 3.52 142 35 89
1999[9] 31 150 1 0 2 12 1 - 4.50 184 42 8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완투 완봉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SK 32 138 0 0 5 10 1 1 5.22 167 40 72
2001 19 67⅔ 0 0 3 10 0 0 5.19 77 22 41
2002 16 23 0 0 0 0 0 0 3.13 24 8 12
KBO 통산(12시즌) 325 1048 7 2 56 68 23 1 4.11 1105 357 583

6. 관련 문서



[1] 현재는 8월 하순에 실시 [2] 이같은 신인선수 특별지명은 훗날 추가로 창단되는 NC 다이노스 kt wiz의 창단 과정에서도 이뤄졌다. [3] 태평양 돌핀스 KBO 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첫 손에 꼽히는 레전드급 물빠따 팀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 태평양 타자중 그나마 잘하는 선수라고는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물빠따로 악명 높았다. 그런데 이런 타선에게 18실점했으니... [4] 하지만 기록을 보면 1994년 태평양 상대로 18실점을 한적은 없다. 단 4월 19일 20실점(....)기록은 있다. 아마 이날을 18실점으로 착각한듯. [5] 흔히 김현욱의 1997년 포스 때문에 김현욱을 원조노예라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 김현욱 역할은 이미 김기덕이 먼저 하고 있었다. [6] 전년보다 방어율은 1점대 가까이 뛰었지만 리그 방어율도 1점대가 뛴걸 감안하면 비슷한 성적이다. [7] 창단 첫 해였던 2000년 당시 SK 선수단은 아무리 신생팀이라고 해도 도무지 프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신생팀 혜택으로 외국인 선수를 3명이나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44승 3무 86패 승률 0.338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최하위를 달렸을 정도였다. 타선에서는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사실상 팀 타선을 홀로 먹여살리다시피 할 정도였고, 투수진의 경우 더욱 처참했는데, 팀 방어율은 무려 6점대였던 데다가 피홈런도 195개, 도합 847실점이나 기록하면서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하였다. 그나마 여기서 쓸만했던 투수는 2000년 신인왕이었던 고졸신인 이승호와 좌완투수 오상민 정도밖에 없었다. [8] 김성근 감독이 LG에서 경질당하지 않았다면 선수 생활을 2~3년정도 더 할 수 있었다. [9] 당시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주전 선수들이 대거 이적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또한 신생팀 SK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잘 던지고도 받쳐주는 선수가 없어 패한 경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