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퀴즌베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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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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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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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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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1983 | 1984 |
198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 ||||
짐 컨 ( 텍사스 레인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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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 캔자스시티 로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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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 핑거스 ( 밀워키 브루어스) |
1982년 ~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 ||||
롤리 핑거스 ( 밀워키 브루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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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 캔자스시티 로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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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리게티 ( 뉴욕 양키스) |
198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왕 | ||||
마이크 마셜 ( 미네소타 트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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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고시지 ( 뉴욕 양키스) 댄 퀴즌베리 ( 캔자스시티 로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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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 핑거스 ( 밀워키 브루어스) |
1982년 ~ 198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왕 | ||||
롤리 핑거스 ( 밀워키 브루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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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 캔자스시티 로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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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리게티 ( 뉴욕 양키스) |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29번 | ||||
더그 버드 (1973~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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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1979~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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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팔라시오스 (1988~1990)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28번 | ||||
톰 허 (1979~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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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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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게레로 (1988~1992)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40번 | ||||
팀 콘로이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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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1988~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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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서클리프 (1994)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번호 47번 | ||||
조 프라이스 (1987~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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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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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데커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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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퀴즌베리 Dan Quisenbe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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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대니얼 레이먼드 퀴즌베리 Daniel Raymond Quisenberry |
출생 | 1953년 2월 7일 |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 | |
사망 | 1998년 9월 30일 (향년 45세) |
캔자스 주 리우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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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오렌지 코스트 칼리지 - 라번 대학교 |
신체 | 188cm / 77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 입단 | 1975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KC) |
소속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9~1988)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88~198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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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투를 못하는 모든 투수와, 선발이 완투하도록 놔두지 않은
딕 하우저 감독에게 감사한다.
(I want to thank all the pitchers who couldn't go nine innings, and manager Dick Howser who wouldn't let them go.)
1982년 아메리칸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을 수상하면서.
미국의 前 야구 선수. 포지션은
마무리 투수였다.(I want to thank all the pitchers who couldn't go nine innings, and manager Dick Howser who wouldn't let them go.)
1982년 아메리칸 리그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을 수상하면서.
라이브볼 시대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이자[1],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평가[2]받고 있으며, 1980년대 로열스의 중흥기를 지탱했던 핵심 선수 중 하나다. 또한 올드스쿨형 마무리 투수의 마지막 세대로 꼽힌다.[3] 별명 겸 애칭은 이름에서 따온 Quiz 혹은 Q.
통산 성적은 12시즌 동안 56승 46패 244세이브, ERA 2.76, 1043⅓이닝, 379탈삼진, K/9 3.27, BB/9 1.40, K/BB 2.34, HR/9 0.51.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에서 태어난 퀴즌베리는 코스타 메사 고등학교-오렌지 코스트 컬리지-라베른 대학교를 거치며 착실히 실력을 키워나갔고, 이를 눈여겨본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1975년 아마추어 자유계약을 맺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2.2.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절
마이너리그에서 싱글 A 데뷔 시즌에 딱 한 번 선발로 등판했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등판을 구원 투수로 소화하며 담금질을 이어가던 퀴즌베리는 입단 4년 만인 1979년에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 마운드를 밟는다. 데뷔전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 타선을 2⅔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산뜻한 출발을 보여준 퀴즌베리는 첫 해에 32경기에 출장해 40이닝 동안 ERA 3.15, 3승 2패 5세이브라는 신인치고는 나름 준수한 성적을 내며 다음 시즌을 절치부심 준비하게 된다.2.2.1. 투구폼 전환이라는 신의 한 수, 찾아온 전성기
그렇게 1980년 스프링캠프를 준비하던 퀴즌베리에게, 당시 로열스의 감독이었던 짐 프레이는 '투구폼을 언더핸드로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된다. 퀴즌베리가 패스트볼로 타자를 압도하기 어렵다고 여겨[4] 당시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마무리 투수로서 인상적인 활약[5]을 보여주고 있던 켄트 테컬비의 투구폼을 배우게 해 경쟁력을 갖추도록 유도하고자 했던 것. 퀴즌베리는 이를 받아들여 투구폼을 테컬비와 유사하게 바꿨고, 포텐이 터졌다!
원래부터 좋았던 제구력[6]에 언더핸드로 투구폼을 바꾸며 배운 싱커를 앞세워 타자들을 돌려세우기 시작한 퀴즌베리는 1980년 자신의 이름을 팬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75경기에 나와 무려 128⅓이닝을 투구하며 ERA 3.09, 12승 7패 33세이브(리그 1위)를 기록하며 단숨에 로열스의 마무리로 우뚝 선 것. 물론 리그 최고의 구원 투수에게 주어지는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도 그의 몫이었고, 사이 영 상 투표 5위, 리그 MVP 투표 8위에도 오르며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1980년 월드 시리즈에서 퀴즌베리는 6경기에 모두 등판하며 역투했지만, 정규 시즌에 많이 던졌던 영향인지 2차전과 5차전에서 블론세이브를 저지르며 흔들렸고, 결국 팀도 마이크 슈미트의 맹타에 밀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아쉬웠던 1980년의 마지막을 뒤로 하고, 퀴즌베리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로열스의 철벽 마무리로 군림한다.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1981년을 제외하면 1982~1985년 총 4년 동안 모두 리그 세이브 1위를 기록했으며,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 수상 또한 4년 동안 이어가 총 5번을 수상했다.[7] 특히 가장 좋았던 1983년에는 69경기에 출장해 139이닝 동안 ERA 1.94, 5승 3패 45세이브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사이 영 상 투표 2위에까지 올랐는데, 당시 기록한 139이닝은 팀 내에서 4번째로 많이 소화한 이닝[8]이었고, 45세이브는 당시 기준으로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9] 거기에 139이닝 동안 허용한 볼넷은 단 11개. 가히 최강 클로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시즌이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로열스 구단은 1983년 시즌 후 사실상의 종신계약을 퀴즌베리와 체결하며 그에 대한 신뢰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참고로 그 전에 로열스 구단이 종신계약을 맺었던 선수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레전드 3루수 조지 브렛이니 퀴즌베리에 대한 로열스 구단의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이후 1984~1985년에도 각각 44, 37세이브를 거두며 계속해서 로열스의 뒷문을 지켰고,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삼진(54개)을 기록한 1985년에는 팀이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며 생애 첫 우승반지도 얻었다.[10] 이렇게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만이 펼쳐질 줄 알았으나...
2.2.2. 조금씩 다가오는 몰락, 그리고 방출
이미 1979~1985년까지 7년 간 구원으로만 764.2이닝을 던지며 무리한 그의 팔은 분명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승 후 맞이한 1986년 시즌은 그 전조였다. 데뷔 시즌이었던 1979년, 그리고 파업으로 인한 단축 시즌이었던 1981년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100이닝 미만의 투구(81⅓이닝)를 했고, 1980년 이후 6년 만에 20개가 넘는 볼넷(24볼넷)을 허용했다. 그나마 ERA는 2.77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세이브 개수도 전년도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37세이브→12세이브) 등 팬들이 알던 퀴즌베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듬해인 1987년 역시 ERA는 평년 수준을 유지(2.76)했지만, 이닝 소화는 100이닝의 절반도 안 되는 49이닝에 그쳤고, 세이브도 더 줄어들며(8세이브) 조금씩 설 자리를 잃어갔다.그렇게 불안하게 맞이한 1988년, 그의 보직은 더 이상 마무리가 아닌 중간 계투였고, 퀴즌베리 자신 또한 등판 때마다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구단의 신뢰를 잃어갔다. 결국 올스타전을 1주일 정도 앞둔 7월 4일, 5년 전 맺은 종신계약이 무색하게도 퀴즌베리는 로열스에서 방출된다.
2.3.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
로열스에서 방출된 그를 받아준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안겼던 상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새로운 팀에서 출발하게 된 퀴즌베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로열스에서 방출될 때 3.55였던 ERA는 시즌이 끝난 뒤 5.12로 상승[11]해 있었고, 이적 후 피안타율 0.344, 피OPS 0.892라는 충격적인 부진 속에 시즌을 그리 좋지 못한 모습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그나마 1989년에는 다시 전성기 때의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아 78⅓이닝 동안 ERA 2.64, 3승 1패 6세이브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부활을 알리는 듯 했지만, 이미 36세였던 그의 나이[12] 때문에 성적이 지속될 가능성을 낮게 본 카디널스 구단은 시즌 종료 후 그를 방출한다.
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카디널스에서 방출된 퀴즌베리가 정든 미주리 주를 떠나 향한 행선지는 바로 고향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하지만 37세인 그의 몸은 더 이상 공을 제대로 던지기 어려운 상황[13]이었고, 결국 5경기 등판해 6⅔이닝만을 던지며 ERA 13.50, 1패라는 초라한 기록만을 남기고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으며 야구계를 떠난다.
3. 은퇴 후
은퇴 후 그가 택한 진로는 놀랍게도 문학계였다. 현역 시절에도 언변이 나름 괜찮았던 편이라 여러 어록들을 남기곤 했는데, 아예 이를 살려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 퀴즌베리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1995년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한편, 1996년에는 메이저 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포함되었지만, 470표 중 고작 18표 득표(득표율 3.8%)에 그치며 첫 해부터 탈락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 투표가 퀴즌베리에게는 여러모로 아쉬웠던 것이, 비슷한 명예의 전당 통계 수치를 기록한 또 다른 마무리 투수 브루스 수터가 같은 해 투표에서 137표(득표율 29.1%)를 얻으며 생존한 뒤 무려 13수 끝에 2006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터가 퀴즌베리와 달리 사이 영 상 수상이 1회(1979년) 있었고, 통산 삼진도 2배 넘게 많은데다(861K) 스플리터를 대중화시킨 첫 투수라는 점 등 퀴즌베리보다 높게 평가받을 만한 점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비록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구단 명예의 전당에 퀴즌베리를 헌액했고, 퀴즌베리 자신도 1998년 시집 <On Days Like This>를 출판하며 나름대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듯 했다.
3.1. 사망
하지만 1998년 1월, 퀴즌베리는 뇌종양 중 가장 예후가 좋지 못한 교모세포종(Glioblastoma) 진단을 받는다. 이후 그는 수술을 받았고, 5월에 열린 로열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도 참석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지만, 안타깝게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며 9월 30일 사망하게 된다. 향년 45세.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무리 투수는 그렇게 병마에 쓰러지며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게 되었다.4. 피칭 스타일
자신이 모티브로 삼았던 켄트 테컬비처럼 싱커를 주무기로 사용하던 전형적인 언더핸드 구원 투수다. 다만 테컬비와는 다르게 슬라이더가 아닌 커브를 서브 구종으로 던졌다는 것이 차이점. 이외에도 체인지업도 자주 구사했고, 가끔 너클볼도 던졌다.
팀 동료였던 브렛 세이버하겐처럼 제구력이 굉장히 뛰어난 투수였다. 1920년대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메이저리그 통산 규정이닝(1,000이닝)을 채운 투수 중 가장 낮은 통산 BB/9(1.40)을 기록했으며, 범위를 1900년부터로 넓혀도 세 번째로 낮은 통산 BB/9을 자랑한다. 비록 언더핸드 투수였던 만큼 삼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통산 K/9 3.27) 이를 정교한 제구력으로 만회하며 전성기(1982~1985년)의 K/BB는 항상 3 이상을 유지했다.
또한 1980년대 마무리 투수답게 이닝 이팅 능력도 절륜했는데, 파업으로 인한 단축 시즌이었던 1981년을 제외하면 1980~1985년까지 매 해 130이닝 전후를 소화하며 중무리 투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다. 부상자 명단에 한 차례도 들지 않았을 정도로 내구성이 좋았던 건 덤.[14]
5. 이모저모
- 어린 시절은 다소 불우했는데, 퀴즌베리가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해 어머니를 따라갔지만, 어머니는 화장품 회사의 컨설턴트로 일하느라 바빴던지라 베이비시터에게 맡겨지는 일이 많았고, 이때 그 베이비시터들이 자주 괴롭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 시기 2살 터울의 형 마티(Marty Quisenberry)와 사이가 굉장히 돈독해졌다고.
- 학창 시절에는 위에 서술된 형 마티와 함께 야구를 했는데, 그때에는 오히려 자신보다 형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고 한다.
- 두뇌파 투수로 유명해서, 현역 시절 자신의 투구 결과를 정리한 노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 사석에서도 지적인 면은 여전했지만, 마운드에서의 냉철해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순박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팀 동료들 사이에서의 인망도 좋아서 함께 여행을 갔다거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는 일화들도 많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많은 팀 동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멘트를 이따금씩 남기곤 한다.
5.1. 어록
상술했듯 표현력이 꽤 뛰어난 편이어서, 현역 시절에도 문서 상단의 인용문에 적힌 구절을 포함해 야구의 본질과 자신의 보직(구원 투수)의 의의를 꿰뚫는 어록들을 나름 많이 남겼고, 시인이 된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와 닿는 시구들을 쓰는 데 능했다. 아래는 그 어록 및 시구들 중 일부.많은 투수들이 자신의
패스트볼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나에겐 그것(패스트볼)이 없기 때문에 오직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밖에 없다.
(Most pitchers fear losing their fastball and, since I don't have one, the only thing I have to fear is fear itself.)
(Most pitchers fear losing their fastball and, since I don't have one, the only thing I have to fear is fear itself.)
만약 당신이
구원 투수라면 바보가 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구원 투수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야 한다. 나는 내가 충분히 바보스러웠으면 좋겠다.[15]
(It helps to be stupid if you're a relief pitcher. Relievers had to get into a zone of their own. I just hope I'm stupid enough.)
(It helps to be stupid if you're a relief pitcher. Relievers had to get into a zone of their own. I just hope I'm stupid enough.)
8~9회에 등판한다는 것은 적진 뒤편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가끔 낙하산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감수해야 한다. 보직 상 어쩔 수 없는 위험이니까.
(Coming into a game in the eighth or ninth inning is like parachuting behind enemy lines. And sometimes the chute doesn't open. You have to live with that. It's an occupational hazard.)
(Coming into a game in the eighth or ninth inning is like parachuting behind enemy lines. And sometimes the chute doesn't open. You have to live with that. It's an occupational hazard.)
내 보직(
구원 투수)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건 충분히 좋은 보직임과 동시에 부담스러운 보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 투수가 리그에서
가장 가치있는 선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구원 투수)들은 경기의 절반 정도만을 뛴다. 구원 투수가 된다는 것은 시간제 일자리에 취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벤치 선수고, 그들은 MVP가 될 수 없다.
(I don't mean to diminish the job, it's a good job and a real pressure job. But I don't think a relief pitcher should ever be the most valuable player of a league. We only play in maybe half of the games. Being a relief pitcher means part-time employment. We're bench players, and bench players shouldn't be M.V.P.)
(I don't mean to diminish the job, it's a good job and a real pressure job. But I don't think a relief pitcher should ever be the most valuable player of a league. We only play in maybe half of the games. Being a relief pitcher means part-time employment. We're bench players, and bench players shouldn't be M.V.P.)
아주 오랫동안 해 왔지만,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고,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이젠 없는 것.
(It lasted so long, it went so fast, it seems like yesterday, it seems like never)
그의 시 'A Career' 중 일부.
(It lasted so long, it went so fast, it seems like yesterday, it seems like never)
그의 시 'A Career' 중 일부.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것(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단한 아내를 필요로 했고, 중견수
윌리 윌슨이 필요했으며,
프랭크 화이트라는 좋은 2루수를 필요로 했다.
1998년 5월 30일 열린 댄의 로열스 명예의 전당 헌액식 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선수 시절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 묻자.
1998년 5월 30일 열린 댄의 로열스 명예의 전당 헌액식 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선수 시절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 묻자.
5.2. 그에 대한 언사
댄은 내가 야구에서 만난 사람들 중 최고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상의 공을 자신에게만 돌리지 않고 모든 동료들에게 돌렸던 훌륭한 팀 동료이자 친구였다. 마운드에서는 불독보다는 교수에 가까운 점잖음을 보였지만, 그는 엄청난 경쟁자였다. 나는 아직도 그의 시집을 내 침대 옆에 두고 있다.
존 와선(John Wathan),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포수이자 감독.
존 와선(John Wathan),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포수이자 감독.
나는 그를 Mr. Wizard(마법사)라고 불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무사 만루 상황에서 그가 등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견제로 1루 주자를 잡아내더니, 타자가 우측에 직선타를 날린 것이 더블 플레이로 변해 이닝이 끝났다. 아직도 그때 그의 말이 기억난다. '나는 내가 막을 줄 알았어.' 그는 오늘날의 구원 투수들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했고, 만루 위기에 올라와서는 여러 이닝을 소화했다. 참으로 독특한 마인드의 소유자였지만, 동시에 멋진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윌리 윌슨(Willie Wilson),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외야수
윌리 윌슨(Willie Wilson),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외야수
그는 내가 함께 했던, 혹은 상대했던 이들 중 가장 착하고 겸손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모두가 댄을 사랑했다.
그렉 프라이어(Greg Pryor), 前 시카고 화이트삭스 - 캔자스시티 로열스 내야수
그렉 프라이어(Greg Pryor), 前 시카고 화이트삭스 - 캔자스시티 로열스 내야수
그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놀랍도록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길 원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완벽한 본보기였다. 마운드에서 멀티 이닝을 꼬박꼬박 던지고도 '하루 정도는 쉬자'고 하지 않는 독종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명예의 전당감이라고 생각한다.
마크 구비자(Mark Gubicza),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투수
마크 구비자(Mark Gubicza),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투수
내가 댄에 대해 기억하는 것 중 한 가지는, 그는 세이브에 기여한 공로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든 상관없이 항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던 사람이다. (중략)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그가 죽기 한 달 전 즈음에 점심을 함께 먹으려고 그의 집엘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그는 "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거지?(Why not me?) 이건 내 병이니까 내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잖아(I can handle it)."라고 답했다. 그 대화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조지 브렛(George Brett),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3루수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조지 브렛(George Brett), 前 캔자스시티 로열스 3루수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6. 연도별 기록
댄 퀴즌베리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79 | KC | 32 | 3 | 2 | 5 | 3 | 40 | 3.15 | 42 | 5 | 7 | 0 | 13 | 1.225 | 137 | 0.0 | 0.8 |
1980 | 75 | 12 | 7 | 33 | 2 | 128⅓ | 3.09 | 129 | 5 | 27 | 1 | 37 | 1.216 | 130 | 1.9 | 2.4 | |
1981 | 40 | 1 | 4 | 18 | 0 | 62⅓ | 1.73 | 59 | 1 | 15 | 1 | 20 | 1.187 | 209 | 1.1 | 2.1 | |
1982 | 72 | 9 | 7 | 35 | 0 | 136⅔ | 2.57 | 126 | 12 | 12 | 0 | 46 | 1.010 | 159 | 1.5 | 3.3 | |
1983 | 69 | 5 | 3 | 45 | 0 | 139 | 1.94 | 118 | 6 | 11 | 0 | 48 | 0.928 | 210 | 2.7 | 5.5 | |
1984 | 72 | 6 | 3 | 44 | 0 | 129⅓ | 2.64 | 121 | 10 | 12 | 0 | 41 | 1.028 | 152 | 1.5 | 3.3 | |
1985 | 84 | 8 | 9 | 37 | 0 | 129 | 2.37 | 142 | 8 | 16 | 1 | 54 | 1.225 | 174 | 2.7 | 4.2 | |
1986 | 62 | 3 | 7 | 12 | 1 | 81⅓ | 2.77 | 92 | 2 | 24 | 3 | 36 | 1.426 | 154 | 1.3 | 1.7 | |
1987 | 47 | 4 | 1 | 8 | 1 | 49 | 2.76 | 58 | 3 | 10 | 1 | 17 | 1.388 | 167 | 0.6 | 1.7 | |
<rowcolor=#ffef00>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88 | KC/ STL | 53 | 2 | 1 | 1 | 4 | 63⅓ | 5.12 | 86 | 4 | 11 | 0 | 28 | 1.532 | 73 | 0.4 | -0.4 |
1989 | STL | 63 | 3 | 1 | 6 | 2 | 78⅓ | 2.64 | 78 | 2 | 14 | 0 | 37 | 1.174 | 137 | 0.9 | 0.9 |
<rowcolor=#fd5a1e>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90 | SF | 5 | 0 | 1 | 0 | 0 | 6⅔ | 13.50 | 13 | 1 | 3 | 0 | 2 | 2.400 | 29 | -0.1 | -0.9 |
MLB 통산 (12시즌) |
674 | 56 | 46 | 244 | 13 | 1043⅓ | 2.76 | 1064 | 59 | 162 | 7 | 379 | 1.175 | 146 | 14.5 | 24.6 |
7. 관련 문서
[1]
데드볼 시대를 포함한 역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로는
칼 메이스가 꼽힌다.
[2]
비록 구단 최다 세이브 기록은 퀴즌베리의 후임자인
제프 몽고메리가 가지고 있고, 201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렉 홀랜드가 등장하며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퀴즌베리의 활약은 아직까지도 많은 로열스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3]
그가 부침을 겪기 시작한 이후 등장한 마무리 투수가 바로 현대 마무리 투수의 지평을 연
데니스 에커슬리다.
[4]
실제로 1979년 퀴즌베리가 잡은 삼진은 40이닝 동안 고작 13개에 그쳤다.
[5]
1979년 무려 94경기(!)에 나서 134⅓이닝 동안 ERA 2.75, 10승 8패 31세이브를 기록하며 피츠버그의 월드 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6]
40이닝 동안 볼넷을 7개만 허용했고, 그마저도 5개는 고의사구여서 실질적으로 허용한 볼넷은 2개였다.
[7]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을 5번 수상한 투수는
마리아노 리베라와 퀴즌베리 둘 뿐이다.
[8]
웬만한 선발 투수급 이닝을 소화했다는 이야기다.
[9]
이 기록은 2년 후
뉴욕 양키스의
데이브 리게티에 의해 깨진다.
[10]
다만 우승이 결정되던 7차전에서 팀 동료
브렛 세이버하겐이 무려 완봉승(...)을 거둔 관계로 우승 순간에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11]
카디널스에서의 ERA만 따져 보면 무려 6점대였다.
[12]
대학 재학 중 입단 계약을 맺은 데다 마이너에서만 4년을 굴렀다 보니 데뷔 자체도 26세라는 꽤 늦은 나이에 했다.
[13]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팔에 부상이 찾아왔다.
[14]
다만 부상만 안 당했을 뿐이지 누적된 피로로 인한 구위 하락은 피하지 못했다.
[15]
구원 투수는 쉽게 흔들리면 안 되는 보직인 만큼 각종 요소들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기의 공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우직하게 공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