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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15:15:22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재판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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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4년 9월 2일 대한민국 육군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의 충청북도 증평군 소재 제13공수특전여단에서 발생한 사고이다. 여단 소속의 육군 특전부사관 하사 5명이 포로 결박 훈련을 받던 중에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2. 상세

사고를 당한 인원들은 2014년 9월 2일에 부대 내 포로심문실에서 포로결박훈련을 받았다.

해당 훈련은 본래 미국이나 영연방의 특수부대에서 행하는 훈련으로, 전쟁 중 적진에서 포로로 붙잡혔을 때 고문 등에 대비하기 위한 생존/탈출 훈련의 일환이며 밀폐된 천주머니를 씌우고 양손을 뒤로 결박하고 무릎을 꿇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의 안전 규정이나 훈련 감독이 원조들만큼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것. 미 해군 네이비 씰 육군 그린베레 등은 전 세계에서 수십 년의 실전을 경험한 부대인 만큼 실제로 포로 경험이 있는 전, 현직 대원들이 존재한다. 훈련 과정에서 이들이 감독으로 참여함은 물론, 해당 과정에서 훈련생들이 실제 부상이나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군의관 등 의무 인원 및 장비가 대기하고 있다. 또한 참가자가 일정 단계에서 포기 의사를 천명하거나 군의관이나 의무 부사관 등이 닥터스톱을 시키면 그 시점에서 훈련은 바로 중지된다고 한다. (한국군 기준 대부분 군의무요원의 전문성보다 지휘관의 계급을 더 중시하는 풍토상 닥터스톱이 가능할까?)

사실 포로체험/고문저항훈련 자체는 한국 특전사에서 70년대~90년대 중반까지도 했었던 훈련이다. 이 역시 원조는 미군 항공기 조종사들의 고문 체험 훈련으로, 그런 고문저항 훈련을 벤치마킹하여 기존 특수전문유격 교육의 한 과정으로 도입했었다. 당시 참가자들에 의하면 당시 육체적 고문과 정신적 압박의 정도가 워낙 심해서[1]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고문저항훈련이 포함된 특전사의 특수전문유격 교육[2]엔 특전사 대원들뿐 아니라 정보사, 해군 유디티씰, 해병수색대 등 타군 간부들도 한두명씩 위탁교육으로 들어왔었는데, 복귀 후 이 훈련에서 죽도록 고생했다는 고생담을 워낙 많이 얘기해서 이 훈련을 안 받아본 그 시절 부대동료들도 그 악명을 익히 알았고 소문이 나있었을 정도였다. 해군 특수전전단의 전설적인 존재인 유병호 준위도 1980년대에 육군특전사에서 이 특전문교육(레인저교육)을 위탁교육 받았는데, 그 교육과정 중에 받은 고문저항훈련 등을 인터뷰에서 회고하기도 했다. 영상(6분 45초경부터)

그러다가 군대 인권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에 이 고문저항 훈련이 없어졌다.[3] 그리고 이 특수전문유격과정 중의 고문저항훈련 말고도, 모든 특전사 대원들이 특수전교육단에서 특수전교육 중에 기본으로 받는, 그리 심하지 않은 정도의 고문저항훈련도 죽 있었다. 교육단에서 받는 기본적인 이 고문저항훈련도 2004년에 없어졌다. #

그러다가 이 훈련 개념이 2014년에 다시 부활한 셈인데, 오랜 중단으로 과거의 훈련 노하우도 거의 없어진 데다가, 이번엔 미 특수부대의 고문저항훈련을 충분한 조사와 준비도 없이 성급히 따라하다가 이런 참변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인권활동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인범 특전사령관이 영화 브라보 투 제로를 특전사 사령부 참모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훈련과정이 왜 한국에는 없느냐” 라며 훈련 수행을 지시해서 졸속으로 시행된 훈련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언론보도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문제의 이번 훈련은 5인 1조를 기반으로 실시됐다. 사고 발생 30분 전에 훈련을 받던 하사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교관은 훈련의 일부로 여겨 중단하지 않았다. 질식증세가 나타나자 충청북도 청주시의 성모 병원으로 인원을 후송하였으나 이유성 하사(23), 조용준 하사(21)가 숨졌고 전 모 하사(23)가 부상을 당했다. 병원 측은 사인을 질식으로 추정했다. #

사실상 새롭게 도입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훈련이라서 도입 전의 시험 훈련이었음에도, 훈련의 대상이 된 인원들이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하사들이었고 훈련의 목적과 의도도 제대로 교육이 되었는지는 미지수. 현장에 의료지원도 대기 안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성급히 추진하기만 하고 안전사고 예방이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강인한 특수부대원을 만들기 위한 가혹한 훈련과 그로 인한 인명 사고와 인권 유린 문제는 서양 국가들에서도 자주 제기되는 문제다. 혹독하기로 유명한 영국 SAS나 미국 네이비 씰 등의 훈련 과정에서 사상자가 자주 나오고 있으며, 이때마다 의회나 인권단체에서 거센 비판을 제기하곤 한다. 하지만 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들인 만큼, 군대 내부의 훈련 등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는 실정.

이유성 하사는 9월 4일 중사로 추서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봉헌되었고, 조용준 하사는 유족들이 부검을 요청하여 영결식이 연기되었다가 부검 결과 별다른 특이점이 나타나지 않아 역시 중사로 추서되고 현충원에 봉헌되었다. 기사

12월 18일 채널A는 사건 당시, 고문 체험 군인들이 천주머니를 쓰고 있을 때, 이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야 할 책임교관 김모 원사는 그 군인들을 계속 살펴보긴커녕 상황실 밖에서 불륜의 내연관계에[4] 있던 여자친구와 장시간 전화통화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훈련인원들이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음에도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에야 훈련을 중단함이 밝혀졌다.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했던 육군 검찰은 이 사실을 알고도 은폐한 후 군사법원에서 구형할때 이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구형하였다. 기사

3. 재판과정

포로 체험 훈련 질식사 사고 징계처리 (1심 군사법원 판결 포함)
○ 특전사령관: 서면경고
○ 13공수특전 여단장: 감봉 1개월
○ 특전사 교훈처장: 정직 1개월 → 무혐의 → 무죄 확정
○ 13공수특전여단 참모장: 정직 2개월 → 무죄 확정
○ 교관 4명: 벌금형(확정)

KBS 단독 보도를 통해 언론이 무관심할 동안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 관련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걸로 드러났다. 1심 군사법원에서는 교관 4명에게 벌금형(벌금 2천만 원 선고)을, 특전사 교훈처장은 재심의를 통해 무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입장은 규정과 법에 의해서 재판과 징계가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고요라고 말해 가해자편만 들었다. 유족들은 육군이 사건을 흐지부지 덮고 넘어가며 유족들을 우롱한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KBS 단독보도 기사 솜방망이 처벌은 2심 고등군사법원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결국 3심 무죄 확정되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결과로 교관 4명만 벌금형에 그치고 특전사 교훈처장, 13여단 참모장은 무죄로 기록이 남게 되었다. 여러모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게 된 상황이다.

이 당시 13공수여단장이었던 정재학 준장(학군 24기)은 이후 소장 진급에는 성공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5]

2016년 7월 28일 이 사고의 최고책임자인 전인범 장군이 전역했는데, 이때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의 지휘책임이 전인범 장군에게 있는데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영원한 특전사령관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전역하는 것에 대해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허핑턴포스트에 게재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홍희범 플래툰 편집장은 동일 신문에 반박 사설을 게재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전인범 중장(육사 37기)의 군경력에 큰 흠집이 생겼다. 이후 전인범 장군의 대장 진급이 좌절된 것엔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6]


[1] 고문을 못 이기고 기밀을 누설해버렸을 경우 구타 후 모의 처형과 모의 암매장까지 이뤄졌을 정도로 살벌하게 진행됐다. [2] 줄여서 특전문 교육이라고도 하고, 영어론 레인저교육이라고도 했다. 다만 리더십 배양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레인저스쿨 교육과는 내용과 성격이 꽤 다르다. [3] 이런 고문훈련같은 가혹한 훈련은 없어졌지만, 특수전문유격교육을 구성하던 그 외의 기술적인 각 교육훈련들은 특전사 산악전문교육, 특수전 중급교육/고급교육 등으로 흩어져서 존속해 오고 있다. [4] 이 교관은 유부남이었다. [5] 사실, 이 사고 하나만이 아니라 제50보병사단장 시절 갑질 사건도 중장 진급을 막는 결정타를 날렸다. [6] 그런데 이 사건이 없었더라도 대장 진급이 되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대장 진급이란 건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다. 동기 중에는 박찬주, 엄기학, 김영식이 대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