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앨라배마 주 클래스 3) | ||||
제95~96대 도널드 스튜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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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99대 제레미아 덴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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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117대 리처드 셸비 |
미합중국 제97-99대 연방 상원의원 제레미아 앤드루 덴튼 주니어 Jeremiah Andrew Denton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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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 7월 15일 |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 | |
사망 | 2014년 3월 28일 (향년 89세) |
미국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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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
B.S.) 조지 워싱턴 대학교 ( M.A.) |
종교 | 천주교 |
신체 | 168cm,57kg |
가족 | 배우자 메리 벨 보돈 |
재임기간 | 연방상원의원(앨라배마 클래스 3) |
1981년 1월 2일 ~ 1987년 1월 3일 | |
서명 | |
{{{#ffffff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해군 |
1946년 ~ 1977년 | |
최종 계급 | 소장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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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정치인, 해군 소장과 앨라배마주 연방상원의원을 역임했다.2. 생애
2.1. 군사 경력
1924년 호텔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네이비 블루 앤 골드>라는 영화를 보고 해군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6년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57년 소련군 폭격기와 잠수함으로부터 미국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건초더미 개념"(Haystack Concept)라는 위장 전술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베트남 전쟁에서 미 해군 항공대 소속[1]으로 복무하던 그는 1965년 A-6 공격기를 타고 28대의 폭격 편대를 지휘하던 중 그의 공격기가 북베트남군 대공포에 당해 격추당하고 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북베트남군에게 잡혀 존 매케인, 제임스 스톡데일등의 미군 포로들이 수용된 " 하노이 힐튼"이라고 불리던 악명높은 호아 로 수용소(Hỏa Lò Prison)에 갇히게 된다. 그는 4년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고, 그 동안 정강이가 시멘트를 채우고 고문자의 체중까지 실린 쇠파이프에 눌리거나 다리가 들린 채 질질 끌려다니는 고문을 당했다.[A]
호아 로 수용소에 수감된 지 10개월 만에 그는 일본 기자와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는다.[3] 덴튼은 제시된 질문에 언뜻 보기에는 "제 정부의 위치가 무엇이든,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정부의 일원이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제 일이고, 제가 살아있는 한 계속 그럴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처럼 적당적당한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4] 그가 전하려던 진짜 메세지는 그의 눈 깜빡임에 담겨 있었다. 평소에 눈 깜빡이는 습관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면서, 모스 부호로 T-O-R-T-U-R-E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의 노력 덕에 전 세계의 언론에 북베트남의 고문이 알려졌으나, 이를 눈치챈 북베트남에 의해 덴튼은 더 가혹하게 보복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다른 수감자들에게 투쟁을 촉구하고 재채기, 훌쩍임 등으로 수감자들만의 암호를 만들면서 저항정신을 잃지 않았다.[A]
모스부호 사건 이후 다른 저항적인 미군 포로들과 함께 호아 로 수용소보다 끔찍한 쿠 록(Cự Lộc) 수용소[6], " 알카트라즈"라고 불리던 북베트남 국방부 뒤뜰의 특수 시설[7]에 수감되었던 그는 파리 강화 협정이 체결 후에야 석방된다. 포로로 잡힌 지 7년하고도 7개월 만이었다. 병원 치료 후 해군에 복귀한 그는 퍼플하트 훈장 2회, 은성훈장 3회 및 여러 훈장을 수훈받고 미군 합참대학장 등의 직책을 지내다 1977년 소장 계급으로 제대한다. 1976년 그가 쓴 포로생활 회고록인 <지옥의 향연>(When Hell Was in Session)은 미국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NBC에 의해 1979년 TV 영화화 되기도 했다.
2.2. 정치 경력
덴튼은 전역 후 친구 팻 로버트슨의 지원으로 CBN의 보수 패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품위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Decency)라는 단체를 만들어 불건전한 TV 프로그램 방영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1980년 고향인 앨라배마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그는 로널드 레이건과 제리 폴웰(Jerry Falwell)의 지원을 받아 민주당 후보인 짐 폴섬 주니어(Jim Folsom Jr.)를 꺾고 당선된다.[8] 재건 시대 이후 최초로 당선된 앨라배마주 공화당 상원의원인 그는 레이건 행정부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표결을 했다. 덴튼은 임기 중 반공주의적 반 소련 국가 안보 정책과 3천만 달러를 투입한 청소년 순결 보장 법안을 주도했고 레이건의 니카라과 내전 개입 또한 지지했다.1986년 상원의원 재선을 도전했지만 흑인 표심이 민주당에 집중되어 민주당 리처드 셸비에게 간발의 차로 밀려 낙선한다.[9] 선거 패배 후 정계를 은퇴한 그는 사망 직전까지 1981년 자신이 만든 보수 성향 자선 재단인 NFF(National Forum Foundation)로 빈곤국 원조 활동을 벌였다. 2014년 89세의 나이로 버지니아주의 호스피스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198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앨라배마 |
|
650,363 (50.15%) | 당선 (1위) | 초선 |
198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02,537 (49.72%) | 낙선 (2위) |
[1]
포레스탈급 항공모함 CV-62 인디펜던스에서 복무했다.
[A]
그의 회고록 <지옥의 향연>(When Hell Was in Session)에 기록
[3]
물론 북베트남 감시가 붙었다.
[4]
하지만 덴튼은 이 대답을 하는 게 북베트남의 고문을 알리는 것보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A]
[6]
별명이
동물원일 정도로 열악한 시설로, 창문이 없는 독방에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7]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고문까지 실시되었다.
[8]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최초의 전직 해군 제독이었다.
[9]
리처드 셸비는 8년 후인 1994년에 공화당에 입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