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정청래
1. 어린 시절
1965년 음력 4월 18일(양력 5월 18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아버지 정해일(1921년생)과 어머니 박순분(1922년생) 사이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현재는 5남매만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형과 둘째 형이 15살 차이가 나는데, 정청래의 부모는 이 시기에 홍역으로 아이 5명을 잃었다고 한다.[1] 고향 금산군에서 석막초등학교와 진산중학교에 다녔고, 대전시로 올라와 대전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고등학교 졸업 후 대입에 낙방하고 상경하여, 서울특별시의 한 유명 재수학원에서 1년간 재수한 후 1985년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85학번)에 입학했다.[2] 재수 때 경험이 나중에 학원을 차렸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 직후 1학년때 과 대표에 출마하며 '나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이후 운동권 활동에 투신하여 전대협 산하 서총련에서 활동했다.
1988년 어느 날, 새벽 2시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을지로의 이름도 위치도 모르는 호텔방으로 끌려갔다. 그 후 팬티바람에 물이 묻은 손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채 4시간 동안 물고문과 무차별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름과 성별 등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한다.
2.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 및 투옥
1989년 10월 13일 서울특별시 정동에 있는 주한미국대사 관저를 점거하여 폭탄 투척 및 방화 미수 사건을 주도하였다. 대사관저를 점거한 후 노태우 대통령의 매국 방미 반대, 그레그 주한미국대사 추방 등을 요구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사관저에 방화 시도 및 사제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대치하던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89년 11월 8일 투옥되었다.1990년 3월 28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보안법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현주건조물방화예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위반, 화염병사용등의처벌에관한법률위반 등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3] 수형으로 인해 1990년 12월 5일 보충역 및 소집면제 처분을 받았고 1991년 출소했다.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되었다.
1996년 학원업을 접고 90년대 후반부터 여의도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 대사관저 폭탄 테러 사건은 그가 정치인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경력으로 작용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회 입성에 성공한 케이스는 주로 87 민주화 항쟁 당시 대학교 학생회장 출신이거나 이후 출범한 전대협 의장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청래는 일개 과대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미 대사관저 점거 투옥 경력을 발판으로 다선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3. 학원 운영
출소한지 몇개월 후인 1992년 정청래는 재수 시절 친구인 양태회와 동업으로 학원을 창업했다. 양태회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출신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의 모태가 된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던 동지였다. 학원 이름은 '길잡이 학원'이었는데, 당시 대규모 시영아파트 단지가 있던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해 있으면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학원이었다. 성산동 시영아파트 단지는 당시 개발 중에 있던 노원구를 제외하면 당시 서울 강북 최대의 아파트 단지였다. 서울에서 매우 특이하게도 소평수 아파트로만 구성된 단지였기 때문에 현재도 단지가 노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초등학생이 매우 많은 지역이다.정청래는 공과대학 출신이었으나 수학이 아닌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편 양태회는 불어불문학과 출신이었으나 국어를 가르쳤다. 정청래는 교육 경험이 없었지만 재수 시절 경험과 문법 위주 강의로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양태회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과외나 학원에서 잔뼈가 굵었고, 나중에는 비상교육을 차려 사교육 재벌이 되는 등 사교육계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장들이 청소와 잡일까지 다해야했다고 말했지만 이런 시절은 개원 후 잠시였고, 이 학원은 곧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길잡이 학원은 불과 2년여 만에 직원이 100여 명일 정도의 엄청난 대형학원으로 성장했다. 이게 어느정도로 대단한 규모냐면 90년대 전국에서 이 정도 이상 규모의 대형학원이 몇 개 안될 정도였다.
당시 길잡이 학원은 마포 성산 지역에서 스파르타식으로 대단히 유명했다. 학원 이름이 '길잡이 학원'이었는데 체벌이 심한 것으로 유명해 동네 초등학생, 중학생 사이에서는 가면 애 잡는다고 애잡이 학원으로 더 많이 불렸다.
길잡이 학원은 90년대 초 마포 성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갑작스런 성공으로 급격히 규모가 커졌던 길잡이학원은 체벌 이외에 제대로 된 시스템이 부재했고 마구잡이로 채용한 강사들의 수준도 들쑥날쑥이라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평도 얻게 된다. 결국 지나친 체벌에 대한 거부감으로 명문대 출신의 실력있는 강사들이 세운 다른 학원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996년 공동원장인 양태회와 정청래가 갈라서며 학원을 접게 되었다. 이후 타인에게 매각한 것으로 보이며, 입시학원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국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대형학원이었던 만큼 매각으로 상당한 거액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태회는 길잡이학원을 접은 직후 비상교육을 창업했고, 한때 대표적인 사교육 재벌 중 한 명으로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정청래는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공하게 된다.
4. 정계 진출
4.1. 2002년 노사모 회원 시절
2002년경 노사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인터넷상에서 '싸리비'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많이 써서 꽤 유명해졌다.[4] 그 후 명계남, 문성근 등과 함께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준비하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지역구 전환이 가능한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무실을 얻어 상근자 30여 명과 함께 착실하게 준비하였다.그 후에도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한 유권자 운동을 하였다. ‘열심히 욕한 당신, 이제 찍어라.’라는 구호를 걸고 ‘대학교 내 부재자 투표함 설치운동’으로 전환해 활동했다. 그 즈음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발생하자,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뱃지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이후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4.2. 2004년 17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2004년 2월, 노무현 지지단체인 '국민의 힘'을 이끌던 당시, 문성근, 이상호 등과 함께 정동영의 지지세력인 '정사모'와 '국참본부'가 주축이 된 '개나리 봉사단'이란 조직에 단체원을 이끌고 들어가면서 정동영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 실질적인 정계 활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열린우리당 안에서 친노이면서 동시에 정동영계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친노의 실질적인 주류가 된 유시민계와 잦은 마찰을 빚게 되면서 친노 안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이후 2달 뒤인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엄청났던 '탄핵 역풍'에 힘입어 44.8%의 득표율을 얻어 한나라당의 강용석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2005년 열린우리당 내 친노 조직 중 하나였던 '국민참여연대(국참연)' 조직에 앞장섰다. 국참연은 친노의 외곽조직을 정치세력화한 것으로 당시 명계남이 의장을 맡았으며, 정청래가 대변인을 맡았다. 정청래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당시 국참연에 공개 25명, 비공개 포함 31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국참연은 당시 국참연 측은 자타가 공인하는 친노 직계였지만 친노의 신주류인 유시민계와 점차 관계가 악화되었다.
2004년 초선 의원 시절부터 정청래는 같은 당의 유시민을 공개적으로 여러차례 비난했다. 정청래는 "노사모 조직에 유시민이 나중에 들어와 플랫폼까지 다 뺏어갔다"고 말하며 아주 깊은 감정의 골을 드러 낸 바 있는데, 정청래가 공식적으로 유시민을 비판한 이유는 유시민이 당내 다른 중진인 정동영, 문희상, 김근태 등 호남계를 맹비난한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유시민은 같은 당의 정동영을 수차례 비난해왔고, 그밖에 문희상, 김근태도 비난하면서 여러 의원들로부터 당내 분열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청래의 유시민 비판은 점차 강도가 강해져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는 " 유시민이 당내 대선 주자인 정동영의 당선을 고의로 방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시민을 "간신"이라 지칭하며 그를 출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동시에 " 청와대가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고 못하고 있다"면서 '치사빤스',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옹졸한 행위'라고 청와대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이때를 전후로 정청래가 사실상 친노와 결별하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동시에 차기 대권주자인 정동영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 하락으로 결국 열린우리당이 해체되었고,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기 얼마전 정청래는 정동영 등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갈아탔다. 이후 대선에서 정동영 캠프에서 홍보위원장 등을 맡으며 정동영의 당선을 위해 헌신했으나 정동영은 이명박에게 패해 낙선하고 말았다.
2007년 7월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 재개정안과 로스쿨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민주노동당 의원 8명, 무소속 임종인 의원[5]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에 정청래 본인이 직접 기고한 글 돌발영상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강용석 후보에게 밀려 37.9%의 득표로 낙선하였다.
4.3. 2012년 19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4년 뒤 다시 민주당 지지세가 강력해졌던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의 김성동 후보와 무소속 강용석 후보를 상대로 54.5%의 득표율을 얻어 경쟁자들을 모두 꺾고 당선되었다.[6]뿐만 아니라 정청래 의원은 당내에서 만들어진 특별위원회에도 자주 참여했다. 주로 권력형 비리와 관련된 부분인데 가장 최근에는 '국정원 댓글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를 맡았고,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사건을 조사하는 진상조사위원회와 국정원 개혁 특위 위원, 정치 검찰 공작수사 대책 특별위원회 등에도 참여했다. #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새로운 당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 선거의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여 김한길 & 안철수 지도부가 어설픈 중도 스탠스를 취하다가 오히려 지지층의 대거 이탈만 불러왔던 것에 대해 본인 스스로 '당 대포'가 되어 당의 최전방 공격수로서 당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겠다는 슬로건으로 지지층의 호응을 얻어 유승희 의원, 주승용 의원, 전병헌 의원 등과 함께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종합 득표에서는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은 주승용 의원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는데 여론조사 분야에서는 전체 1위를 기록하였다.
종합 순위 1위 최고위원이었던 주승용 의원이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 탈당을 하자, 문재인 지도부에서는 문재인 대표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인물이 되기도 했다.[7]
막말 논란으로 말썽이 많지만 19대 국회에선 의정활동 성적이 우수한 편이다. 정청래 의원이 19대 국회의원이 된 시점부터 2016년 2월 5일까지 만든 법안은 무려 170건에 달한다. 이 중에서 45건이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법안을 발의한 숫자로만 따지면 19대 국회에서 10위 안에 드는 상위권이다. 본회의에서 가결된 법안들의 숫자로만 따져도 상위 20위 안에 들 정도로 의정 활동 성적이 좋은 편이다. 수개표 도입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과 해직된 언론인들의 복직과 보상을 위한 특별법, 북한의 영유아들에게 인도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 북한 영유아 지원법'을 제출하기도 했다. 덕분에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와 안전행정위원회 간사를 맡기도 했다. 국회 상임위 간사들은 실질적으로 상임위 운영을 책임지는데 보통 재선 의원부터 시작한다. 4년 동안 간사를 역임했다는 건 그만큼 의정 활동에 대한 당내 평가도 높다는 증거라고 전한다.
일련의 막말 논란들은 그의 영향력과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견인차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김종인 대표에 의해 20대 총선에서 컷오프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4.4. 2016년 20대 총선 컷오프 이후
이후 2016년 1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더불어민주당의 선대위원장 겸 비대위원장으로 영입되면서 선대위와 비대위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문재인 대표 및 최고위원들이 함께 2선으로 물러나기로 결정하자 최고위원들 중 가장 먼저 사퇴 의사를 밝히며 2선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최근 영입된 인사의 멘토를 자칭해서 맡았다.[8]2016년 2월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추미애 의원의 뒤를 이어서 연설을 끝마쳤다. 최종 연설시간은 11시간 40분이다.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의 10시간 18분 최장시간 기록을 경신해 최장시간 연설자가 되었는데, 이후 같은 당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의원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광주 토크 콘서트 현장에서 경신할 생각은 없었는데 시계를 보지 않고 토론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넘어갔다며 은수미 의원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는 뜻을 전했다.
2016년 3월 5일에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서 열렸던 더불어 콘서트 시즌 2 1부에서 말하길 "시간은 이종걸 원내대표가 더 길었는데, 속기록 분량은 자기가 더 많았다."라고 밝혔다. 그만큼 빠르게 말했음에도 그 시간을 버틴 게 대단할 정도인 것이다. 게다가 최초 2시간은 자료나 원고를 안 보고서 프리스타일로 테러방지법을 반대해야 하는 근거를 주장했다. 이런 것을 보면 보좌관 말대로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찬 사람'이 맞는 듯 하다.
2016년 3월 5일, 20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 하의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가 발표한 20대 총선 컷오프 1차 명단 5명에 포함되었다. 언론에서도 그동안 막말 논란으로 정청래가 컷오프 대상 0순위라 예측하면서도 동시에 여당의 공격수로의 입지 때문에 실제로 정청래가 컷오프 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정청래 본인은 가까스로 공천을 통과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컷오프되었다는 발표를 듣고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 어떤 모욕감과 수치심 이런 것들이 온몸을 둘러싸서 동아줄에 감긴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청래가 컷오프되자 민주당과 지지자들 사이에서 큰 후폭풍이 일었다. 정청래 지지자들은 여의도 민주당 당사 앞에서 정청래 공천배제 철회 시위를 벌였다. 주요 진보 언론들은 김종인 대표를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일보는 국회의원 한 사람의 컷오프가 이렇게 크게 화제가 된 적은 처음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정청래 구제론이 일기도 했다. 추미애, 최재성, 원혜영, 박남춘, 진성준, 홍종학 의원 등이 정청래의 구제를 언급했다. 한편 손혜원 민주당 홍보위원장은 부산에서 열린 더민주 정책콘서트에서 “당에 청춘을 바친 사람이자 당을 위해 싸운 사람을 이렇게 내보내서는 안 된다. 무소속 출마를 해서라도 꼭 살아서 당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3월 12일 정청래는 여의도 당사를 방문하여 재심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3월 14일 윤후덕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였지만, 정청래의 재심 신청은 기각했다. 이로서 정청래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
정청래가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할 것인지 여부가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향후 거취에 대한 언론의 수많은 질문에 정청래는 답하지 않고 있다가 고심 끝에 3월 말 마침내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출마를 최종 포기했다. 하지만 김종인 대표에게 섭섭하다고 말했다.
정청래의 지역구인 마포을 지역구에는 손혜원 민주당 홍보위원장이 전략공천되었고,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컷오프 이후 방송 활동을 하고 있으며 판도라에 자주 출연한다.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을 때 언론 인터뷰에서 손 의원을 두둔해주기도 했다. # 하지만 손혜원 의원이 투기 논란으로 차기 총선에 사실상 공천받지 못할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이에 정청래는 손혜원 의원에게 후원금 500만 원을 기부했다. 사실상 마포을 지역구를 다시 물려받기 위한 수순이었다. # 결국 손 의원이 투기와 관련해 불구속 기소되자, 2019년 6월 19일 마포구 을 지역위원장에 임명됐다. #
손혜원 의원의 공천탈락이 기정사실화 된후 500만원 후원금 기부에 대한 서술 뒤의 기사를 확인하면, 마치 공천헌금 하듯 해당 지역의 전의원에게 기부하는 부분을 집는 기사이지, 손혜원 의원의 공천탈락이 기정사실화 됐다는 중앙일보 해당 기사의 어디에도 없다.
투기관련 불구속 기소가 되자 지역위원장에 임명이 됐다는 서술도 해당 연합뉴스 기사를보면 23곳의 지역에 심사가 있었고 해당 날에 12곳의 심사를 완료하여 발표를 한것이다. 기사의 그 어디에도 '결국 기소후 임명'같은 말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컷오프 후 손혜원이 후보로 나오면서 정청래가 바로 옆에 붙어다니며 선거운동을 도왔던건 당시 마포 지역선거를 관심있게 지켜보았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부분이다. 출마할때부터 손혜원 본인은 이번 한번 뿐이라고[9] 못박으면서 시작하기도 했고[10], 선거운동 당시 본인을 정청래라고 소개하며 선거운동을 뛸 정도로 컷오프 당한 정청래의 지역구를 지켜내겠다는 의미가 컸지 같은 지역구에서 계속 출마할 생각은 단 한번도 밝힌적이 없다. 21대 총선이 시작되기 한참 전 민주당 지지자들의 출마하라는 얘기에 잠깐 고민하는 척을 한 뒤, 이젠 의원직은 안한다고 재차 확인발언을 하기도 했다. 위의 서술은 전후관계를 뒤집어서 결과론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4.5. 2020년 21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2020년 4월 21대 총선에 마포구 을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후보로 단수공천됐다. 그리고 과반수를 확보하며 미래통합당 김성동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며 21대 국회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당선 이후 국회 사무처로 제일 먼저 달려가 금배지를 첫 번째로 수령했다. #[11]21대 국회 첫 법안으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기로 했다.
페북 어느 유저가 사유지지만 도로인 곳에 불법 주차하는 차량을 견인 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 달라고 댓글을 남겼고 검토 뒤 법안을 마련했다.
이번에는 불법주정차구역에 주차하는 차량들에 대해 더 강한 처벌을 내리는 법안을 준비했다. 역시 이번에도 댓글에서 시작된 법안이었다.
사설구급차를 막아선 택시기사로 인해 이송 중이던 폐암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택시기사에 관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나오자, 이에 즉각 응급환자 이송 차량운행을 방해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수 있도록 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7월에는 신문이 오보를 1면에 내면 1면에 정정보도를 내게 하는 법을 발의했다. 본인이 2008년 18대 총선 막바지에 겪은 일과 관련이 있는듯.
2021년 6월, 판사 임용에 필요한 법조 경력을 10년에서 5년으로 줄이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
2021년 12월 13일, "인간 이재명을 흐느끼며 읽었다. 이재명은 대통령이 될 실력과 자격이 있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찰 통행세 비난으로 참다 못한 불교계가 완전히 폭발하자 조응천[12]을 필두로 한 이재명계 핵심 관계자들에게 탈당을 요구받았지만, 정작 이들의 주요 지지세력인 팟캐스트에서 정청래가 정당했단 세력이 주를 이루면서 사실상 사과도 없이 지나갔다.
2022년 8월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친이재명을 천명하여 출마, 최고위원 후보 중 비이재명 성향을 표명한 고민정 의원을 제치고 득표율 1위를 달성하며 수석최고위원이 되었다. 어찌보면 8년전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당시 주승용 전 국회부의장에게 밀려 수석최고위원 자리를 놓쳤던 아픔을 갚은 셈이 되었다.
2022년 9월 30일 페이스북에서 "소수의 국내 ISP를 보호하려는 편협하고 왜곡된 애국마케팅을 하다가 국내 CP의 폭망을 불러올 위험천만한 일" 이라며 망사용료에 반대하는 추가 토론회를 예고했지만, 정작 방통위 감사가 끝나고나선 구글 코리아 사장이 위증을 했다며 고발 안건을 제출하는 통수를 치기도 했다.
2023년 2월 6일 대한민국 국회 정치·외교·안보·통일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동훈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김건희 여사 주가 조작 의혹에 대해 질문했지만, 결국 정청래가 한 “장관은 참기름, 들기름 안 먹고 아주까리 기름 먹어요? 왜 이렇게 깐죽대요?”라는 인신공격성 발언만 부각되었다. #
2023년 5월엔 과방위원장을 이어 행안위원장을 이어가기 위해 과방위원장을 스스로 사퇴했으나, 결국 행안위원장이 되지 못했다. 이미 최고위원 겸 과방위원장이 된 것 부터 당 내에서 반발이 심했었는데, 여기에 행안위원장까지 겸하려는 행보에 발목을 잡혀버린 것. # 정청래는 박광온 원내지도부가 자신의 행안위원장 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박광온 원내대표는 이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
이에 대해 정청래는 유튜브에 나와서 대한민국 국회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져서 보고하겠다며 '이미 작년부터 과방위원장과 행안위원장을 맞바꾸기로 합의가 되었기에, 나는 오늘 행안위원장이 될 줄 알고 오전에 과방위원장의 사임서를 냈다. 그런데 의원총회에서 분위기도 안좋았기에 과방위원장만 선출되는 상황이 됐고, 나는 과방위원장 사임서를 철회하고 같이 처리를 하자 했는데 의안과에서 사임서 철회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대한민국 국회의장에게 손을 들고 이 건을 미뤄달라고 했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진표는[13] 국회법 제112조 3항 위반했다. 이의 있다고 손을 들면 표결해야 한다고 했는데 표결도 안하고 방망이를 두들겨, 결국 나만 사임하고 행안위원장은 공석이 됐다. 당내 내부의견이 분분해서 이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개탄스럽지만, 행안위원장에 갈 것'이란 얘기를 했다.
2023년 9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자 정청래는 "같은 당 일부 의원들이 당대표를 팔아먹었다.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고 이재명 지도부는 이재명 당대표를 끝까지 지킬것"이라고 밝히면서 가결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대대적인 보복을 암시하였다. #
2023년 10월 초만 하더라도 '고름', '외상값 받아낼 것' 등의 강경한 표현을 동원하며 가결표를 던진 의원들을 비난하다가 이재명 대표가 공개적으로 통합의 메시지를 내고 유인태 등 당의 원로들에게 쓴소리를 듣자[14] 이후 '처벌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입장을 급선회했다.
2024년 2월 2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제22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나오는 친문 - 친명, 친명 - 비명 갈라치기에 대해 본인이 겪어온 20년 민주당계 정당사를 가져와서 비판했다.
저는 한때
친노로,
친문으로 분류되었고 지금은 언론에서
친명으로 분류합니다.
노무현도 기적적인 광주 경선 승리 후 노풍이 불었고 전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후보 단일화 협의회, 약칭 후단협
국회의원들로부터 대통령 후보직을 내려놓으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때 자당 후보를 인정하지 않고 흔들어댔던 정치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문재인 대표 시절, 저는 그때도 최고위원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표 사퇴하라며
문재인을 흔들었던 국회의원들은 끝내 탈당하고 아예
국민의당으로 출마했습니다. 그때
문재인을 반대하고 떠났던 정치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때 같은 목소리로
문재인을 지키자고 했던 동지들은 또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노무현,
문재인을 지켰던 사람들이 지금은 "
이재명을 지켜주세요" 라고 한다는 사실을
국회의원들은 잘 모르십니까? 민주당은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이재명으로 깃발과 상징이 계승되었습니다. 4년 전 총선에서 친문 아닌 후보 있었습니까? 다
문재인 이름 걸고 후보 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재명은 안됩니까? 이것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몰이해고, 역행입니다.
2024년 2월 28일, 더불어민주당 제227차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
2024년 2월 28일, 더불어민주당 제227차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
4.6. 2024년 22대 국회의원 당선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해서 국민의힘 함운경 후보를 여유있는 격차로 이기면서 4선 고지에 올랐다. 이어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민주당내 강경파 성향 답게 국민의힘 법사위원들과 말싸움을 통한 신경전을 자주 벌이고 있다.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 소추가 가결되면서, 윤석열 탄핵 심판에 소추위원단 단장으로 재판을 이끌게 된다.
[1]
그가
어버이날에 어머니를 회상한 글에 해당 이야기가 잘 나와 있다. 그런 탓에 자기 큰조카보다 자기가 5달 늦게 태어난 막내삼촌이 되었고, 어머니는 당시 그를
낙태하려고
대전시의
산부인과를 2번이나 갔지만, 뱃속 정청래의 태동이 너무 활발했던(...) 탓에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낳았다고. 정청래는 이것을 생존권투쟁이라고 표현했다.
[2]
#
[3]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관저가 내화 처리가 되어 있어 불도 붙지 않아 모두 미수에 그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4]
위의
트위터 계정 아이디도 싸리비다.
[5]
같은 해 1월에 가장 먼저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6]
이때
강용석 후보가
새누리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인 건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 등 여러 병크를 저질러 당에서도 쫓겨났기 때문이다. 득표율은 4%도 안 되었다.
[7]
그래서 당시 정청래 의원은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면 서열 승계에 따라 본인이 당대표 대행이 되기 때문에 비주류가 더이상
문재인의 사퇴를 요구하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8]
파파이스에 출연할 때마다 영입 인사 관련 이야기를 한다.
[9]
물론 이런 말들은 자주 번복 되기도 한다.
[10]
의원직을 수행하는 중에도 계속 이야기 했었고, 결국 이는 자의건 타의건 지켜졌다.
[11]
일 잘하는 1등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의미로 배지를 1등으로 수령했다고 한다.
22대 총선 이후에도 보좌진이 가장 먼저 절차를 밟아 의도치 않게 배지를 가장 먼저 수령했는데, 신인 후배 의원들에게 양보하는 의미로 초선인
박지혜 당선인과 배지를 교환하였다.
#
[12]
이재명과
사법연수원 18기 동기이며 독실한 불자다.
[13]
위키에서 편의성을 위해 호칭을 생략한 것이 아닌, 실제로 '
김진표는'란 표현을 사용했다. 애시당초 지지자들에게 보라며 쓴 글인데다
김진표는 이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14]
유인태는 정청래를 두고 그런 모자란 애라고까지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