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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09:06:59

장 4세 드 브라반트

파일:장 4세 드 브라반트.jpg
성명 장 4세 드 브라반트
Jean IV de Brabant
생몰년도 1403년 6월 11일 ~ 1427년 4월 17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아라스
사망지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아버지 앙투안 드 브라반트
어머니 잔 드 뤽상부르생폴
형제 필리프
아내 에노의 자클린
직위 브라반트 공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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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반트 공국의 공작. 무기력한 통치로 일관하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2. 생애

1403년 6월 11일 프랑스 왕국 아라스에서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 드 브라반트와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모드 홀랜드[1]의 딸인 잔 드 뤽상부르생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415년 10월 24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전한 아버지 앙투안이 전사한 뒤, 12살의 나이로 브라반트 공작이 되었고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후견을 받았다. 이후 1418년 4월 18일 하비에에른 공작이자 에노 백작 빌헬름 2세의 딸이며 프랑스 도팽 장 드 투렌의 미망인인 에노의 자클린과 결혼했다.

자클린은 아버지 빌헬름 2세 사후 에노와 홀란트, 질란트의 여백작이 되었지만, 삼촌이자 새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이 세 지역마저 회수하려 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요한 3세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제국에 확고히 복속하려는 로마 왕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으며 에노로 쳐들어갔다. 이에 자클린은 항전하면서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장 4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데다 심약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요한 3세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다가 1419년 5월 성 마르틴스딕 조약을 체결해 요한 3세에게 12년간 홀란트와 질란트에 대한 전적인 양육권을 넘기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은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결국 남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자클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홀란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마지막 도시였던 레이던 시마저 1421년 초 요한 3세에게 함락당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420년, 브뤼셀 주민들이 무기력한 통치로 일관하는 장 4세에게 반감을 품고 그의 형제 필리프를 섭정으로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장 4세는 도시 외부로 피신해 1년간 숨어 지내다 1421년 필리프와 화해하고 브뤼셀에 돌아왔다.

자클린은 자신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주지 않는 남편 장 4세를 원망했고,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녀는 교황청에 남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으며 성적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한 뒤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마침 헨리 5세 사후 프랑스의 섭정이 된 형 베드퍼드 공작 존의 권세를 질시해 이에 버금갈 세력을 갖추길 희망했던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는 그녀와 결혼하고 저지대 국가에 진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험프리와 자클린은 1423년 2월에서 3월 7일 사이에 에식스주 해들리 마을에서 비밀 결혼을 맺었다. 1423년 10월 20일, 헨리 6세는 험프리의 요구에 따라 자클린과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에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권을 내렸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으로 인정했다.

1424년 10월, 험프리는 자클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한 뒤 11월 말에 몽스에 입성한 후 12월 5일에 몽스에서 에노 백작으로 취임했다. 이에 장 4세는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함께 대항했다. 1425년 1월 6일,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요한 3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에 필리프를 저지대 국가 내 영지들의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요한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과 험프리의 결혼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간통이며,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자클린의 진정한 남편이니 이 영지들의 주권자라고 선포했다. 이후 험프리와 필리프간의 날이 선 편지가 오갔고, 급기야 양자는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이 중재하면서 결투는 취소되었다.

1425년 3월 말, 험프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추밀원에 브라반트 공작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당국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부르고뉴 공국과 갈라서기 싫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험프리가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반트군이 공세를 개시해 5월 중순에 몽스를 포위했다. 몽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강경히 맞섰지만 결국 6월 13일 항복했다. 험프리의 지지자 일부는 처형되었고, 자클린은 헨트에 감금되어 부르고뉴군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자클린은 9월 2일 새벽에 남장을 하고 탈출해 홀란트의 주요 도시인 하우다에 도착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대구파'의 반대 세력인 홀란트의 지주 귀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자클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는 대구파 도시들에서 대규모 민병대를 소집해 자클린을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대구파 민병대는 자클린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학살당하고 부대 깃발을 전부 빼앗겼고, 자클린파 민병대가 역습에 나서 대구파 도시들을 향한 습격 작전을 벌였다.

이렇듯 전쟁의 열기가 갈수록 거세지는 동안, 장 4세는 선량공 필리프에게 브라반트 공국의 통치권과 전쟁을 일임하고 루뱅 대학교를 1425년에 설립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브뤼셀에 조용히 지내다가 1427년 4월 17일에 급사했다. 그는 생전에 자녀를 낳지 못했고, 형제 필리프 드 생폴이 브라반트 공작위를 넘겨받았지만 그 역시 3년 만에 사망하면서 브라반트와 림부르크 공작령은 선량공 필리프에게 넘어갔다. 이후 선량공 필리프는 에노의 자클린과 수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제압에 성공하고 에노, 홀랜트, 질란트까지 확보하면서 저지대 국가의 패권을 확보했다.


[1] 초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켄트의 조앤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