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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a00><colcolor=#000000> 벨기에 제4대 국왕
레오폴드 3세 Léopold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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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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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11월 3일 | ||
벨기에 브뤼셀 | |||
사망 | 1983년 9월 25일 (향년 81세) | ||
벨기에 브뤼셀 월뤼웨생랑베르 | |||
재위기간 | 벨기에인의 왕 | ||
1934년 2월 17일 ~ 1951년 7월 1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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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a00><colcolor=#000> 가문 | 벨기에 가문 | |
이름 |
네덜란드어: 레오폴트 필립스 카럴 알버르트 메인라트 휘베르튀스 마리아 미헬 (Leopold Filips Karel Albert Meinrad Hubertus Maria Migu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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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레오폴드 필리프 샤를 알베르 맹라드 위베르 마리 미셸 (Léopold Philippe Charles Albert Meinrad Hubert Marie Mich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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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레오폴트 필리프 카를 알브레히트 마인라트 후베르트 마리아 미하엘 (Leopold Philipp Karl Albrecht Meinrad Hubert Maria Micha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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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알베르 1세 |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 ||
형제자매 | 샤를, 마리조제[1] | ||
배우자 |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 (1926년 결혼 / 1935년 사망) | ||
메리 릴리앙 바엘[2] (1941년 결혼) | |||
자녀 | 조제핀샤를로트, 보두앵, 알베르 2세, 알렉상드르, 마리크리스틴, 마리에스메랄다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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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의 국왕. 현재 벨기에의 국왕 필리프와 룩셈부르크의 대공 앙리의 할아버지이다.2. 생애
추정계승자 신분이였던 알베르 1세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베르 1세는 벨기에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큰아버지 레오폴드 2세가 아들이 없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3] [4]알베르 1세가 1934년 2월 17일에 서거한 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935년 8월 29일 아스트리드 왕비[5]와 단둘이 루체른 호 근처의 좁은 길을 운전하다가 차가 전복되어 호수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에서 레오폴드 3세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아스트리드 왕비는 사망하였다. 1941년 9월 11일 15세 연하의 릴리앙 바엘과 재혼하였다.[6]
외모도 준수한 데다가[7] 2남 1녀의 자녀가 있고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듯 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5년 만에 발생한 초대형 전쟁이 레오폴드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말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였다. 런던으로 망명한 내각과는 달리, 레오폴드 3세는 연합국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에 항복하는 것을 택했다. 내각은 분노하여 그를 적법한 벨기에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레오폴드 3세는 필리프 페탱처럼 나치 독일의 영향이 미치는 중립 정도를 원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1944년 남동생 샤를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1945년부터 스위스에 머물렀으나 나중에는 독일군에게 사로잡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있었다.
레오폴드 3세의 귀환은 전후 벨기에에서 큰 논란이 되어, 결국 벨기에 정부는 이를 국민투표에 붙이기로 한다. 1950년 3월 12일 국민투표에서 58%의 벨기에 국민들이 왕의 귀환에 찬성했다.[8]
1950년 7월 6년만에 귀국했으나, 이로 인해 총파업이 일어나는 등 논란이 계속되어 복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1950년 8월 헌법상 권한을 장남 보두앵에게 넘기고 1951년 7월 26일 정식으로 양위했다. 이후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983년 9월 2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Astrid av Sverige) | ||||
1녀 |
룩셈부르크 대공비 조제핀샤를로트 (Joséphine-Charlotte, Grande duchesse de Luxembourg) |
1927년 10월 11일 | 2005년 1월 10일 |
룩셈부르크 대공 장 슬하 3남 2녀[9] |
1남 |
보두앵 (Baudouin) |
1930년 9월 7일 | 1993년 7월 31일 | 도냐 파비올라 데 모라 이 아라곤 |
2남 |
알베르 2세 (Albert II) |
1934년 6월 6일 |
파올라 루포 디 칼라브리아 슬하 2남 2녀[10][11] |
|
메리 릴리앙 바엘 (Mary Lilian Baels) | ||||
3남 |
알렉상드르 왕자 (Alexandre de Belgique) |
1942년 7월 18일 | 2009년 11월 29일 | 레아 월만 |
2녀 |
마리 크리스티네 공주 (Marie-Christine de Belgique) |
1951년 2월 6일 |
|
|
장폴 구라쥬 | ||||
3녀 |
마리에스메랄다 공주 (Marie-Esméralda de Belgique) |
1956년 9월 30일 |
살바도르 몬카다 슬하 1남 1녀 |
[1]
이탈리아 왕국 마지막 국왕인
움베르토 2세의 부인
[2]
1916~2002
[3]
아들이 있긴 했으나 폐렴으로 요절했다.
[4]
당시
벨기에 왕실은
살리카법을 따랐다. 지금은 달라져서, 레오폴드 3세의 손자이자 현
벨기에 국왕인
필리프는 슬하에 두 아들이 있지만, 첫째인
엘리자베트가 절대적 맏이계승제로 왕세녀가 되었다.
[5]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의 손녀이다.
[6]
그러나 릴리앙은 왕의 부인이면서 왕비 칭호를 쓰지 않았다.
[7]
고모할머니가 그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다.
[8]
플란데런에서는 72%가 찬성했으며 특히 동부
림뷔르흐주에서는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몰아줬다. 반면 수도
브뤼셀에서는 52%가 반대하여 찬성률이 가장 낮았다.
[9]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등
[10]
필리프 국왕,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비 아스트리드 등
[11]
파올라 왕비 소생의 자식들 외에도, 내연녀 시빌 드 롱샴 남작부인 소생의 사생아 델핀 보엘이 있다.
[12]
1985년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