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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바오퉁

파일:2020042009543259409.jpg

자오 바오퉁(조보동(赵宝桐): 1928년 7월 - 2003년 12월 12일, 향년 75세)

1. 개요2. 소개3. 생애
3.1. 소년기3.2. 한국전 참전3.3. 첫 실전에서 2대 격추3.4. 격추와 추락3.5. 이어진 활약3.6. 종전 후
4.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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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인민해방군 조종사.

2. 소개

랴오닝성(辽宁省) 푸순시(抚顺市) 출신이지만, 그가 태어나던 시절의 푸순은 시로 승격되기 전의 시골 구석이었다. 장성한 후에 새로 창설될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中国人民解放军空军)에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 파견된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中国人民志愿军空军) 소속의 전투조종사로 명성을 떨쳤다. 항미원조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7대를 확인 격추시키고 2대를 대파시켜 한국전에서 활동한 모든 중국 조종사 중에서 최고의 격추 전과를 세웠다.

3. 생애

3.1. 소년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소학교에 막 진학한 일곱 살 때 모친을 병으로 잃어 편부 슬하에서 자라났다.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까지 자오바오퉁이 12살 때 죽자, 그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마을에서 돼지를 치며 생계를 꾸려나간 그는 공부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나, 1942년에 푸순에 석유 공장이 세워질 때 그곳에 들어가 소년공으로 일했다. 1945년 9월에는 중국 공산당의 린뱌오가 이끄는 동북인민자치군(东北人民自治军)에 참가하여 무공대원으로 활동했다. 제2차 국공 내전에서는 임강 전역(临江战役)과 번시(本溪), 마장(马场) 같은 전장을 떠돌며 전투에 참가했다. 1948년 7월에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된 그는 공산당이 갓 점령한 지린시(吉林市)에 있는 지린대학(吉林大学)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당시 지린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동북군정대에 편입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자오바오퉁은 홍커우(汉口)로 옮겨간 학교에서 졸업했다.

1949년 말, 그는 제4항공학교(第四航校)를 통해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에 입대했고, 전투조종사 양성 코스인 갑반(甲班)에 제1기 생도로 보내져 비행 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이듬해인 1950년 10월에 조종교육을 모두 수료했다.

3.2. 한국전 참전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공군이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외치고 있을 때 자오바오퉁은 제3항공사단(空3师) 제7연대(第7团) 제3대대(第3大队)에서 중대장을 거쳐 부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51년 초 그가 속한 3사단은 랴오둥 반도에 있는 랴오허(辽东) 비행장에 진주하여 소련제 최신예 제트 전투기인 MiG-15을 전개시켰다. 자오바오퉁은 이 최신예기를 고작 65시간만을 몰아봤는데, 사실 부하들은 그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10월 20일에 제3항사는 먼저 참전한 제4항공사단의 뒤를 이어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에 있는 안퉁 전선비행장(安东前线机场)에 MiG-15 전투기 50대로 구성된 제1진이 도착했다. 중국 공군은 우선 제트 전투기 훈련이 덜 된 조종사들을 숙달시키기 위한 단련 계획을 세우고, 4항사와 함께 미 공군기의 활동 규율과 성능의 특징을 소개하고 항공 작전을 배우도록 했다. 이어서 대대와 연대 단위로 국경지대와 북한의 작전 공역을 비행하며 지형지물을 익히고 전법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전황이 다급해지고 김일성의 지원 요청이 빗발치자 중국 공군은 보름 만에 첫 공중전에 나서게 된다.

3.3. 첫 실전에서 2대 격추

자오바오퉁이 미 공군 F-84 전폭기 2대를 격추한 것은 1951년 11월 4일로, 제7연대(第七团)의 부연대장 맹진(孟进)이 미그 전투기 22대를 이끌고 미 공군기를 격추할 때였다. 오전 10시에 지상관제소는 128대의 적기가 6개의 편대로 나뉘어 평안북도 청천강 지역 정주(定州)와 박천(博川) 상공에 진입했다는 경보를 울렸다. 중국 공군은 7연대를 발진시켜 적기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했고, 부연대장 맹진은 22명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상 지휘관은 무선을 통해 "가천 상공 고도 5,500 m, F-84, P-80 항공기 20대"라고 상황을 즉각 통보했다.

대부분의 다른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실전은 처음이었던 자오바오퉁은 긴장도 됐지만, 적기와 싸울 생각에 흥분이 앞섰다. 내려다보자 맑은 청천강과 미군기의 폭격에 부서진 시가지가 보였다. 삭주(朔州) 상공으로 날아간 그들은 사단 CP의 안내를 받아 전투대형을 짜고 육안으로 수색을 하며 전진했다. 자오바오퉁이 속한 제3대대는 맹진 부연대장 편대 보다 1,500 m 더 높은 상공에서 엄호를 맡고 있었다. 이때 적기들이 평안남도 개천(价川) 상공으로 빠져나갔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편대장 맹진은 남동쪽으로 항로를 틀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3대대는 좌선회 명령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심쩍은 것을 본 대대장 마오둔캉(牟敦康 : 1921~1951)의 지시로 계속 남쪽으로 날아갔고, 곧 순천(顺川) 상공에 다다랐다.
"주의! 전방에 적기 발견!"

자오바오퉁은 헤드폰에서 대대장의 열띤 목소리를 들었다. 약 6 km 앞에 10여대의 F-84 전폭기가 있었으며 고도 4,000 m에서 상하 2개 편대로 나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오둔캉은 부하들에게 보조 연료탱크 투하를 명령하곤 속도를 높여 적기를 향해 돌진했다. 미군기들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자, 그 수는 24대로 불어났다.
"2중대는 나를 엄호하고 1중대는 돌격하라!"

적기를 향해 돌격하는 대대장 편조의 뒤에는 부편대장인 자오바오퉁과 요기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폭탄을 떨구러 날아왔던 F-84들은 4대의 미그기를 보곤 단번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자오는 너무 속도를 붙였다가 적기 20여 대 사이로 휙 빠져나가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군 편대가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해진 그는 무전기의 리시버에 대고 외쳤다.
"대대장님! 우군 편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마오 대대장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대가 보이지 않더라도 이탈하지 말고 공역을 유지하며 계속 싸워라!"

몇 대의 적기가 곧 그의 후미를 쫓으면서 그가 탄 미그기에 기수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오바오퉁이 침착하게 조종간을 홱 잡아채자 MiG-15는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높이 치솟았고,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아 날개를 번쩍이며 미군기들을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그가 캐노피 뒤로 고개를 돌려 아래쪽 상황을 살피니까 그를 쫓던 적기 중에서 4대가 추격을 포기하고 선회를 하고 있었고, 1대는 실속에 빠져 배를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는 재빨리 러더를 차 반선회를 걸어 비틀거리는 F-84를 향해 강하했다. 그 적기는 어느새 자세를 바로 잡고 급선회하며 꼬리에 붙은 자오를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그는 똑같이 맞받아치며 맹렬한 추격전을 펼쳤다. 마침내, 미군기를 천천히 조준기의 레티클에 겹친 그는 기관포의 발사 버튼을 눌렀다. 그 적기는 이내 추락했지만, 아까 사라졌던 적기 4대가 다시 그의 꼬리에 붙어서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곧 자오의 미그기 뒤에는 3대의 F-84가 줄줄이 따라붙었고 간헐적으로 날아드는 기관총탄이 그의 꼬리 곁을 스쳤다. 그러자 자오바오퉁은 별안간 반전하면서 나선강하 기동을 펼쳤다. 그가 탄 MiG-15는 돌면서, 돌면서 점점 지면에 가까와졌고, 선회율에서 뒤처진 미군기들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지상에서 거의 300 m 고도까지 내려간 그는 기체를 수평으로 돌려 속도를 붙인 다음 또다시 하늘 높이 돌진했다. 그에게 피격된 미군기가 강가 갯벌에 떨어져 불타고 있는 모습이 힐끗 보였다. 마침내 교전을 포기한 미군기들은 편대장의 후퇴 명령을 받았는지 일제히 남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달아났다. 그렇지만 자오바오퉁은 그대로 놔줄 생각이 없었다.
"도망이라고? 그렇게 쉽지 않아!"

미그기의 스로틀 레버를 끝까지 밀어붙여 500, 400, 300 m 까지 미군 편대의 꽁무니에 달라붙은 그는 윙맨을 침착하게 조준해서 다시 포문을 열었다. 쿵! 쿵! 쿵! 쿵! 날아간 37mm 23mm 포탄이 적의 날개에 맞아 터지는 것이 보였고, 단번에 날개를 잃은 적기는 검은 연기를 짙게 내뿜으며 땅으로 곤두박질쳐 언덕 위에 떨어져 대폭발을 일으켰다! 적기의 조종사는 탈출하지 못했다.
24살의 전투조종사 자오바오퉁이 첫 출격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3.4. 격추와 추락

같은 해 12월 2일에는 피아 합쳐 거의 100여대의 전투기가 뒤얽혀 싸우는 장절한 공중전을 펼친 끝에 2대의 F-86을 격퇴한 그는 다른 세이버 전투기의 사격에 기체가 부서져 북한 상공에서 비상탈출했다. 하지만 가벼운 부상을 입는데 그친 그는 다시 출격에 나서 12월 21일에 또 다시 미군기 2대를 격추시켰다.

이날 그는 당직 명령[1]을 받고 애기의 좌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후에 발진 명령이 떨어지며 곧 모든 전투기가 이륙했다. 하늘에는 엷은 안개가 자욱해 앞으로 갈수록 가시거리가 좋지 않았지만 마침내 청천강 상공에서 미그기의 진짜 라이벌인 F-86 편대를 발견했다. 편대장 자오바오퉁은 즉시 무전기로 편대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적기는 바로 우리 밑에 있다! 요격 준비를 빈틈없이 갖춰라!"

선두에서 공격에 나선 그는 1대의 F-86 꼬리를 물고 길게 발포했다. 이 사격에 미 공군의 간판인 F- 86이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자오 편대장은 그 광경을 미처 보지 못하고 사격을 마치고 상승하며 이탈했다. 마침 구름 사이로 시야가 열리자 아래쪽에 적기가 2대 더 있었다. 재차 공격하려고 기체를 굴린 그가 강하 태세에 들어가자, 마침 그것을 발견한 미군기들은 기수를 돌려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건 큰 실수였다. 고도의 우세를 점한 자오 편대장이 급강하를 시작하자 세이버는 겨우 몇 초 만에 따라잡혔다. 그가 달라붙자 적기들이 갈팡질팡대는 것이 보였다. 자오바오퉁은 아직 사격이 충분한 효과를 보기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관포의 탄도를 예측하여 기수를 살짝 들어 2대의 F-86 중에서 뒤쪽에 있는 요기를 조준기로 신중하게 겨누었다. 그가 발사 버튼을 누르자 무슨 횃불처럼 적기를 향해 줄지어 날아간 거대한 포탄이 명중했다. 피탄된 그 전투기가 마치 피를 토하는 것처럼 울컥울컥 연기를 내뿜는 광경이 보였다. 몇 초 동안 더 비틀거리면서 날던 그 적기는 뒹굴다가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것은 그가 두 번째로 격파한 F-86이었다.

탄을 거의 소진한 그가 기수를 돌리려고 하던 순간, 자오바오퉁은 갑자기 오른쪽 뒤에서 날아든 4대의 F-86에게 공격 당했다. 그가 재빨리 기수를 떨구면서 좌선회로 사지를 벗어나려 할 때, 왼쪽에서도 2대의 적기가 마주 날아오고 있었다. 미그기를 포위한 세이버들이 토한 수 백발의 기관총탄이 그리는 궤적에 휩싸인 그의 기체는 날개와 승강타에 차례로 피격당했고 금세 조종성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퍼뜩 "낙하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자오 편대장은 훈련받은 대로 두 다리를 오므리고 사출레버를 당겼다. 캐노피와 함께 좌석 째로 기체 밖으로 튕겨난 그는 이어진 연습 동작에 따라 사출좌석을 발로 차며 벗어났고, 낙하산이 펄럭 펼쳐졌다. 추운 북한의 겨울 하늘에서 낙하한 그는 눈쌓인 작은 언덕 위로 떨어진다. 그가 나풀나풀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던 북한 육군부대가 달려와 그를 구조했다. 북한군 대대본부에 도착한 그는 벌떼같이 몰려든 북한 장병들로부터 뜨겁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가장 좋은 음식들을 그에게 대접했는데 자오바오퉁은 이때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친밀한 정과 국적을 떠난 전우애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조종사가 왔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쫙 퍼졌고, 그날 밤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온 중국 조종사를 환영하는 잔치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자오바오퉁은 기지로 돌아온 후 며칠 쉬었다가 다시 출격을 계속했다.

3.5. 이어진 활약

이틀 후인 12월 23일에도 또 적기를 격파시킨 그는 기지로 돌아오자, 기체는 격렬한 전투에 피탄되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으로 이 전쟁에서 중국이 낳은 첫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자오바오퉁은 참전 한 달여 만에 6대 확인 격추에 더해 미확인 격추 2대라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고 있었다.

1952년 11월 23일에는 부연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6대의 MiG-15로 편성된 편대를 이끌고 미 공군기 40여 대로 구성된 대편대에 달려들어 F-84 전폭기 1대를 또 격추시켰다. 이 무공을 세운 후 자오바오퉁은 제3항공사단의 제7연대장이 되었다.

3.6. 종전 후

한반도 파견에서 세운 무공으로 1급 전투영웅(一级战斗英雄)에 2회나 선정되었고 3등공(三等功)도 1차,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에서 수여하는 2급 자유독립훈장과 3급 국기훈장을 각각 1개씩 수여받았다. 1952년 7월에 베이징에서 열린 제1회 전국체전 개회식에 지원군 귀국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한 그를 마오쩌둥 주석이 직접 환대했으며, 이 자리에서 그의 무공을 다시 한번 크게 치하했다. 이어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만찬 초대를 받기도 했으며 김일성 생전에는 주석궁에 초청받아 만찬을 곁들인 접견을 받기도 했다.

자오바오퉁은 1953년 8월 5일에 인민일보의 민완 여기자 왕진펑(王金凤)과 결혼했다. 결혼 후 한 달도 안 돼 그는 소련의 모스크바 공군대학에 유학길을 떠났다. 어디까지나 중국측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자오바오퉁은 공부로 인한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보균하고 있던 폐결핵이 재발하여 기침과 각혈을 하다가 1955년 4월에 퇴학을 당해 귀국했다고 한다.

1956년부터는 흉부외과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고 다시 공군에 복직했다. 복직할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도입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오바오퉁은 보직에 맞는 계급이 적용되어 공군 중교 계급을 받았다. 그는 공군 제6항공학교 훈련단장, 공군 제6항공학교사령부 부참모장을 지냈다가 1969년에는 공군 제3항공학교 부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8년에 베이징 군구 공군 부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겨 이 보직을 유지하다가 1983년에 퇴역했다.

4. 서훈

통령 표창(通令表彰) 5회
1급 전투영웅(一级战斗英雄)
군공장(军功章) 3회
북한 2급 자유독립훈장(二级自由独立勋章)
북한 3급 국기훈장(三级国旗勋章)


[1] 스크램블 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