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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화교배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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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화교배척사건
1927년 화교배척사건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1931년 화교배척사건 1931년 평양화교 학살

1. 개요2. 개별 사건3. 배경
3.1. 도시 하층민간의 갈등3.2. 계급 갈등3.3. 조선인 경찰과 화교 간 갈등3.4. 언론 문제3.5. 평양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의 친 중국국민당 성향과 일본과의 갈등
4. 결론(강진아 교수)5. 왜곡 시도6. 참고 문헌

1. 개요

『7월 5일 밤. 그 밤은 진실로 무서운 밤이었었다. 역사로서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있은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미의 도,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었다. 하기는 우리가 인류사를 뒤져서 문야의 별이 없이 피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의 박살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있었든가! 나는 그날 밤 발 밑에 질적어리는 피와 횡재한 시체를 뛰어 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곡하든 그 기억을 되푸리하여(내, 비록 늙어 망녕이 들려도 이 기억은 분명하리라!)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오기영, 평양사건회고[1]

1931년을 전후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난 화교에 대한 테러사건.

1931년 7월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화교와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일으킨 반화(反華) 폭력 사건이었다. 이걸 1931년 배화사건(화교배척사건, 반중국인사건)이라고 한다.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화교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 친 중국국민당 성향의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이 제일 많은 평양이었다.

2. 개별 사건

일제강점기 화교배척사건
1927년 화교배척사건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1931년 화교배척사건 1931년 평양화교 학살

3. 배경

3.1. 도시 하층민간의 갈등

도시가 생기면 도시 주변지역들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도시를 지탱하려면 지탱하기 위한 일들이 생겨나야 한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도시화 과정에서 하층민 사이에서는 갈등이 나타난다.[2] 도시가 생겨나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인구가 꾸준히 늘어난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14개부는 평균 87.8%가 증가했는데 대부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온 사람들이다. 증가율은 경성은 59.3%, 인천은 89.8%였는데 평양은 140%다. 농촌에서 도시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중 많은 사람들이 도시 하층민이 되었고 토막촌을 형성해서 '토착민'이 되었다. 그런 무허가 토막 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인천과 평양이었다.[3]

이런 배경으로 도시로 인구는 점점 몰렸지만 경제는 오히려 나빠졌다. 1910년대만 해도 군수경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가 부족했다. 하지만 1920년대로 접어드니 군수경기는 가라앉고 전후공황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경제는 1915~1920년 성장 → 1920년~1931년 → 불황/ 공황, 1931~1937년 성장이었다. 1920년대 경제상황은 불황이었다. 쌀값 지수는 1919년 100 → 1931년 38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살려고 도시로 떠났고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세민, 궁민, 걸인은 1926년엔 전체 인구에서 11%였다가 1931년엔 28%로 늘었다. 실업도 많아져서 1920년대부터 총인구에서 직업이 없는 사람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일자리가 많은 곳이 도시와 그 주변이었다.[4] 그래서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왔다. 하지만 1920년대 조선의 노동자들 중 안정된 직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겨우 10%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계절 요인과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고용상태와 실업상태를 반복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약 100전이었다. 여기서 이걸 물가지수로 나누고 실질임금을 따지면 남는 건 91전 정도였는데 이건 한 달 생활도 간신히 이어갈 금액이었다. 그래도 독신자는 이 정도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가족이 있으면 달랐다.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활은커녕 빚만 늘어났다. [5] 거기다 실업도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협한다고 느꼈던 집단이 바로 화교와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다. [6]

1910년대 산업화와 그에 따른 노동시장이 넓지 않으니 심각한 갈등이 있을 일은 없었다. 일본 '내지' 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군수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부족한 노동력을 벌충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정도였다. 조선에서도 딱히 갈등이 없었다.[7] 1910년대에는 조선이든 일본 '내지'든 심각한 갈등은 없었다. 식민당국은 1911년 5월에 “관영사업장에서 임금이 저렴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중국인 노동자를 이용한 예가 많았으나 앞으로는 중국인 노동자를 가능한 사용하지 말 것이며, 특수한 기능을 지닌 중국인 노동자를 이용할 필요가 있을 시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해 화교 노동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한 바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생업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위처럼 딱히 갈등도 없으면서도 화교 노동자는 일본인이나 한국인보다 품삯이 저렴하면서 힘든 일도 성실하게 해내니 현실을 감안해 1917년에는 관필제7호령(「官秘第7號令」)을 반포하여 화공의 제한된 이용을 허용했다.[8] 하지만 1920년대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군수경기는 가라앉고 공황이 오는데 조선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점점 늘어났다. 조선(특히 평양) 사람들에게 화교는 경제 차원에서 위협이 되었다. 화교들은 1920년대부터 점점 늘어났고 도시 하층민들의 노동권을 위협했다.
<표>조선에 있는 화교의 숫자[9]
1910 11,818
1911 11,837
1912 15,517
1913 16,222
1914 16,884
1915 15,968
1916 16,904
1917 17,967
1918 21,894
1919 18,588
1920 23,989
1921 24,695
1922 30,826
1923 33,654
1924 35,661 ~ 36,653
1925 46,195 ~ 46,197
1926 45,291
1927 50,056
1928 52,054
1929 56,672
1930 67,794
1931 30,571 ~ 36,778
[참고자료:]
1922년 말 기준으로 화교의 62% 이상이 노동자였다. 이후에도 중국인 노동자 이주는 수천명씩 증가했으니 노동자 비율은 당연히 더 늘어났다.[11] 그리고 노동자들은 평안·함경지역에 편중되었다.[12] 1920년부터 산업화에 따라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화교 인구도 훨씬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에 23,989명이던 숫자는 1930년에 67,794명에 이르렀다. 거기다 이 숫자는 계절 노동자는 제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토목 종사자나 농공 종사자 중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봄에 강을 건너왔고 겨울이면 작업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13] 이런 숫자까지 따지면 당시 조선에서 중국 노동자의 숫자는 엄청났다.

1928년 한 해에 인천항만 해도 입국한 중국 노동자의 수는 3만을 헤아렸다.[14]

1920~30년대 당시 중국인 노동자들은 계절에 따른 일정한 이동 패턴이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체로 매년 11월 하순경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구정을 본국에서 보내고 새해를 기다렸다가 3, 4월에 2/3 이상이 다시 조선으로 몰려왔다. 그러니 특정 시즌만 되면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들어오는 게 관측됐다.[15] 이런 게 당시 조선인들에게 더욱 위기감이나 경계를 느끼게 했을 수 있다.

화교의 남녀 성비도 변했다. 1906년 27.8 대 1, 1907년 47.5 대 1, 1908년 25.4 대 1 등 1920년대 전까지만 해도 남초 현상이 심했다. 그러나 1926년 7.3 대 1, 1927년 6.3 대 1, 1928년 5.3 대 1, 1929년 5.0 대 1, 1930년 4.7 대 1이었다. 물론 여전히 남성 중심이었지만 점점 여성의 비중이 높아졌다. 조선에 자리잡고 살던 화교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점은 조선인과 화교 사이에서 갈등 양상이 일상처럼 되거나 다양하고 복잡해질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16] 조선인이 중국인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 것에는 이런 거주 공간도 관련되어 있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잡거하는 상황이었으나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에 분산하면 조선인과 역시 잡거하게 되지만 중심 지역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해서 조선인과는 공간에서 분리되는 양상이었다. 더불어 화교 노동자는 계층 면에서는 조선인 민중과 접촉하는 면도 다른 화교들보다 넓었다. 화교 노동자들은 상민, 농민에 비교하면 활동 기반이 취약했고 인구 이동도 끊임없어서 통제가 어려웠다. 거주공간면에서 사회적인 접촉을 하면서 조선인은 중국인과 충돌하는 계기가 많아졌다.[17]

화교는 전국에 흩어져서 거주했는데 그 중에서도 서울, 신의주, 인천, 평양 등 도시와 그 주변 근교 지역에 집중됐다. 1923년 전체 화교 33,654명 중 경성, 신의주, 인천, 평양 등 11개 도시에 거주하던 화교 수는 15,341명이었다. 약 50%가 도시에 집중됐다.[18] 1930년 평안북도 화교의 직업현황을 보면 총 4,024 종 상업 1,136호, 공업 294호, 농업 및 목축업 1,205, 잡역노무직 1,282호였다. 거기다 농업도 주로 도시민의 소비를 위한 채소 재배였다. 화교의 대부분은 도시와 그 주변에서 도시와 관련된 상업, 공업, 잡역노무직에 종사했다.[19]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화교까지 몰려왔다.

화교도 몰려드는 상황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중국 노동자들을 이기기 힘들었다.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은 조합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을 방(幇)이라고 불렀다. 방은 비숙련 노동자인 고력(기술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 숙련 노동자 수공업자, 기계 공업에 종상하는 숙련 노동자들 같은 사람들이 조직하였다. 이 조직들은 체계가 잡혀 있었다. 고력두라는 지휘자를 두었으며 십 여 명 혹은 수십 명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노동자는 조직에 따라 질서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근면하고 성실했다.[20] 당시 조선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와 비교해 "단체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 "단체적 훈련"이 바로 방의 노동통제와 관리를 말했다.[21] 이런 문제는 조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저항을 사회적으로 하기 힘들게 하였다.[22]

농가들도 조선인보다 중국인을 훨씬 선호했다. 1924년 경성부에서 중국인 야채 재배를 조사했는데 조사자가 일본인 농업 경영자에게 중국인과 조선인의 우열을 물었다. 그러자 "중국인은 경작 기타 일하는 태도에서 다소 일본인에 가깝고 또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근면하다 하지만 조선인 고용인은 좌우간 불평이 많고 재배 기술에서도 중국인보다 열등하며 게다가 급여도 도리어 저렴하지 않은 관계상 중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낫다"고 답변했다. 1924년 경부터 경성부와 근교에 일본인 농가의 중국인 고용이 현저하게 늘어났다. 일본인 지주뿐만 아니었다. 경성 인근에서 중국인이 소작하던 밭의 상당수는 조선인의 것이기도 했다. 이건 평양도 마찬가지였다. 1931년 평양에서 화교학살이 벌어진 뒤 평양 근교 중국인 야채 지배자 200호의 90% 이상이 귀국했다. 그 지주인 조선인은 소작료와 대여한 농경자금을 못 받게 되어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23]

1931년 2월에는 경북 의성군 '안강수리조합'에서 '궁민구제'라는 취지로 고용했으나 그런 취지와 맞지 않게 임금이 싼 화교 노동자만 고용했다.[24] 이것 말고도 화교 노동자들은 여러 공사장을 독점했다.
「1.신의주 안동현에서는 난리와 전황으로 실직된 화교점원 500명이 들어와, 한국인들은 이들에게 모든 노동을 빼앗겼다.『시대일보』1924년 9월 25일.
2.경기도 수해복구 공사장은 수재이재민들이 노동을 위해 몰리지만, 겨울이 되면 화교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형편에 놓였다.『동아일보』1925년 8월 7일.
3.황해도 수리조합의 노동자중 한국인은 500여명이고 화교 노동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배척과 구축을 당하자,화교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東亞日報』1928년 4월 5일.
4.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에 있는 ‘조선수전주식회사’에는 중국 노동자들이 14,000여 명이나 있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중외일보』1929년 4월 22일.
5.南朝鮮鐵道光麗線과 麗水護岸工事에서 축항·방파제 공사에 화교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고 있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1929년 5월 10일.
6.국경철도공사장에서,외국인 노동자고용규정을 위반해가며 전체 5~6천 명 되는 노동자 중에서 80%를 화교 노동자들로 충당하였다. 조선일보(『朝鮮日報』)1929년 6월 23일.
7.災害로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노동자를 고용하겠다던 충남 부여의 鴻山水利組合의 공사에도 화교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고용주가 도당국(道當局)에 허가서를 제출하였다.『朝鮮日報』1929년 11월 9일.」[25]

당시 조선의 언론에서도 '중국인에게 직장을 빼앗기는 건 완력이나 우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의 부정직, 나태함과 다르게 화교는 신용과 근면함이 있다'고 평가했다.[26] 당시 화교들은 몸이 튼튼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집단으로 평가받았다.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화교 노동자들은 햇볕이 뜨거우나 그늘을 찾지 아니하며 일을 한다. 그리고 배고프면 떡 한개를 먹고서 입을 씻을 뿐이다.(중략)노동자들은 하루에 일원 이 십전부터 일원 오 십전까지의 일급을 받는다 하며, 조금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구 십전 내외의 생활비를 쓰고,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삼십전 밖에 쓰지 않는다 한다.(중략) 그리고 그 남아지는 돈을 모아 저희의 본국으로 돌아간다.』[27]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민족적 감성에서가 아니라 생존권의 자위』를 위하여 중국 노동자를 배척해야 한다고 하였다.[28] 1929년 10월 중외일보(中外日報)는 『올 적에는 빈손으로 와서 갈 적에는 큰 돈을 갖고 가는 제비와 같이 오고가는 중국인 노동자군』이라고 비꼬았다.[29]

한국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문제와 임금 인하 문제 때문에 파업할 경우 경영자가 화교들을 대신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30] 예로 원산에서는 조선인들이 파업할 때 화교 노동자를 모집하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영사는 조중 갈등을 걱정해서인지 화교 노동자 모집을 중지하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31] 화교 노동자 문제 때문에 직접 파업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인천의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란 곳은 일본인이 경영했는데 1923년 8월 27일 한국인 노동자 500여 명이 동맹파업을 했다. 그러자 정미소 사장 카토(加藤)는 중국 다롄(大連)에 가서 화교 노동자 18명을 데려왔다. 한국 노동자 7명이 하는 일은 화교 3명이면 충분했고 임금도 한국인보다 쌌다. 카토는 한국 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은 화교들보다 일을 못하고도 임금은 그들보다 더 비싸니 임금을 십전씩 깎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조리를 저지르려 했다. 한국 노동자들은 "도저히 이같이 문명치 못한 공장에서는 사람 노릇을 못하겠으니 단연코 취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오후 8시경 전부 기계에서 손을 떼고 돌아가 버렸다. 1923년 8월 29일 가등정미소에서 일하던 한국인 남녀 300여 명은 다시 동맹파업을 하였다.[32]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수경기는 가라앉았고 전후공황이 시작됐다. 일본 제국에서는 노동시장 긴장이 겉으로 드러났고 화교 배척 움직임이 드러났다. 이건 일본 '내지'의 일본 노동자든 한반도의 조선인 노동자든 마찬가지였다. 1920년 8월 일본 해운노동자들은 중국인 고용을 단속할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33]

한반도에서 1926년 11월 부산 노동단체 간부 등 지역 유지들은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의 성장을 우려하며 배척운동을 조직했다. 1926년 11월 盧相乾 등 부산 노동단체 간부들이 그런 운동을 조직했다.[34]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충돌은 심해졌는데 중국인 노동자 인구가 많던 북방 지역에서 더욱 자주 확인되었다. 신의주에서 조선인 최석순과 중국인이 자전거 문제로 언쟁을 벌이자 양측에서 300명 정도가 가담해서 패싸움을 벌이고(1924) 조선인과 광부와 중국인 광부들이 음료수 문제로 패싸움을 벌인 일(1928)이 있으며 주문한 음식을 잘못 가져왔다고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인 것(1928) 같이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어 두 민족이 충돌을 벌이는 사례들이 많았다. 1927년 이후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 일어났으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인과 화교의 충돌과 갈등은 일상이 됐고 널리 퍼졌다. [35]

총독부는 외국인 노동자 규제는 원칙으로 보면 일본 '내지'와 같은 규정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내지'처럼 엄격히 시행하지는 않았다. 1911년 5월에는 「관영사업에 청국인 사용금지의 건(官營事業ニ淸國人使用禁止ノ件)」을 알려서 관영사업에는 가능하면 중국인을 사용하지 말고 필요할 경우에만 총독부의 허가를 받으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17년 「관영사업에 중국인노동자 사용에 관한 건(官營事業ニ支那人勞動者使用ニ關スル件)」(保親收第415號)을 내놓아 중국인 노동자 사용은 총독의 허가가 아니라 각 사업소 소관 부국서장(部局署長)의 허가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1일 30인 이상을 사용할 때는 소관도 장관의 동의를 얻는 것으로 조건을 내렸다. 1922년 8월 「관영사업에 중국인사용 금지의 건(官營事業ニ支那人使禁止用ノ件)」(保1068號)에서는 사람 수와 무관하게 도지사가 허용하는 걸로 단계를 다시 낮췄다. 1927년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를 수요 노동력의 1/3로 정한다고 규정했다. [36]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대체할 노동력이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선 중국인 노동자 단속을 단속했으나 일본 '내지'와 다르게 소극적이었다. 1929년 기준으로 총독부는 중국인 노동자가 한반도에 흩어져 있으니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걸 인지했으나 노동력 수급이나 자본의 요구를 감안하면 그 고용 범위와 인원수를 현재보다 제한하는 건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은 상황이 달랐다.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중국인 노동자의 필요성이 떨어지자 강력하게 규제했다.[37]

또 근본부터 따지면 조선총독부는 이 노동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조선총독부도 중국인 노동자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단속방침을 세워 단속을 시행했다. 1927년 6월 총독부 보안과는 거주지가 아닌데 허가없이 노동한 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1/3보다 많은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한 고용주에 대한 단속도 실시하긴 했다.[38] 그러나 조선 사회와 총독부의 조치에는 중요한 맥락이 무시됐다.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은 주범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좋은 일자리를 독점했고 거기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점하지 않은 나머지 시장을 놓고 중국인과 경쟁해야 했다. 일본인은 노동 시간이 짦은데도 조선인이나 중국인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았다. 시간당 임금을 따진다면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2~3배 이상 많은 임금을 받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임금은 격차가 있어도 적었다. 토공이든, 목공이든, 석공이든 성격이 다른 일자리들에서도 일본인의 임금은 2배에 가까웠다. "조선인 노동자의 자리를 침식하는 중국인 노동자"의 모습 뒤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숨어있었다. 그러니 식민권력인 총독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실업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존재가 아니었다. [39]

당시 언론에서도 일본인과 대립하는 구도를 대신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대립구도를 부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일본인과 대적할 수 없으니 일본인 대신 중국인이 조선인의 경쟁 대상으로 지목됐다. 예로 동아일보 1924년 9월 22일자 한 사설은 조선인들에게 말하길 "처지가 다른" 일본인에 대한 원망에 집착하지 말고 중국인 사이에 있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설득했다. 언론의 논지 속에서도 조선인은 사회적 공간에서 일본인과 분리되고 중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공간 속에 놓인 것이다. 저항할 희망은 버려 단념하고 대상을 중국인으로 돌린 것이다.[40]

그뿐만 아니라 외교적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예가 미국에서 통과한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문제였다. 미국에서 일본배척 이민법이 통과되려하자 일본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 바로 중국인 노동자 입국 규제에 대한 것이었고 대립 주체는 외무성과 내무성이었다. 내무성은 일본 내부의 노동 문제를 고려해 규제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재미(在美) 일본인의 이민 문제를 우선해서 중국인 노동자 규제를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1924년 5월 15일 미국 의회에선 배일이민법이 통과됐고 7월 1일에 시행됐다.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 정부가 재일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로 퇴거시킨 탓에 미국과 교섭할 때 입본의 입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이 커졌다.[41] 이런 점에서 조선은 일본보다 문제가 훨씬 컸다. 왜냐하면 조선인의 만주 이주 문제가 미국의 일본 이민 문제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륙팽창을 위해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켰다. 이건 중국이 조선인의 이주를 용인해야 가능했다. 중국 동북지역에 거류하던 조선인의 수는 1919년에는 43만 1,198명이였다가 1931년에는 63만 982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1931년 화교의 수는 36,778명 정도일 뿐이었다. 외교 문제에서 일본은 조선 화교를 강력하게 규제할 처지가 아니었다.[42]

실제로 광저우의 중국국민당은 1924년 8월 7일에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일본을 비판했다.
『일본이 미국의 신(新)이민 조항에 대해 거국일치로 반대하면서,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중국에 대해서는 엄혹한 노동자 단속을 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일본은 같은 종족(種族)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취하지 말고, 아세아(亞細亞)인종의 대단결(大團結)을 위해 노력하라』[43]

지리 문제도 규제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한반도 북부의 국경 지역과 서부 해안 지역을 통해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활동할 수 있었다. 1930년 신의주 영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관할 구역인 평안북도와 중국 요령성 간에는 안동-신의주 간 철교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배, 겨울에는 얼음을 통해 검사도 받지 않고 여권도 없이 자유롭게 한반도와 중국을 오갔다. 이동 및 거주 등록이 되어 있지않은 인구 이동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지역에만 한정된 상황이 아니다. 1931년 中國 總領事館의 보고에 따르면 해로로 산동의 옌타이(烟臺), 웨이하이(威海)에서부터 인천, 경성으로 이동하는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옌타이, 웨이하이에서 인천까지는 여권이 없어도 "하루 밤낮"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여권을 소지하지도 않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 수와 동선을 파악하기 어려운 유동인구다. 중국인 '자유' 노동자들에겐 한반도는 자유롭게 오가며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장 중 하나였다. 그러니 총독부가 중국인 노동자 입국을 봉쇄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근본부터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44]

3.2. 계급 갈등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학살 당시 중국공산당 동아시아 삼국 근로대중과 노동자연대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피압박 노동자의 단결 강조는 혁명사관에 충실한 중국학자의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근데 사실과 비교하면 이런 해석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배화사건의 배경에는 노동자들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부유한 화교와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간의 갈등도 강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론으로 노동자 계급 대동단결, 제3세계 피압박민족 대동단결을 외쳤다. 그러나 조선의 많은 사회주의 성향 청년들은 화교를 자산계급이란 점에서 분노하고 증오했다. 노동자 계급간의 경쟁뿐만 아니라 부의 불균등에서 나오는 계급 모순도 민족 모순을 깊게 만들었다.[45]

당시 화교 상인들의 영향력은 이 글을 통해서도 간접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에서 1926년 또는 1927년까지 조선 화교경제는 튼튼한 기초를 지녔다. 이 시기 한성, 인천에서 수입무역에 종사했던 소위 '팔대가'(‘八大家’)의 활약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저장(浙江)의 주단(綢緞), 쓰찬(四川)ㆍ장시(江西)의 하포(夏布), 화북(華北)의 면화, 식량, 마늘, 고추 등 토산품을 수입하였다....이 시기 조선의 전국 시장에서 5곳의 상점 가운데 화교의 것이 반드시 3곳 이상을 차지하였고, 조선에서 화상의 신용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 또한 이 시기 조선 전체 경제력의 70%를 화교가 차지하였고 화교는 당시의 물가를 장악하였다.』[46]

여기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화교 상인들의 영향력이 컸던 건 분명했다. 실제로 화교 상인은 중국과 하는 무역업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조선→중국보다는 중국→조선이 압도적이다.
지수비교
조선→중국(수출) 중국→조선(수입)
1924 326.2 452.9
1925 284.5 510.5
1926 355.9 680.7
1927 446.5 878.1
1928 457.3 712.9
1929 444.1 583.9
1930 397.9 648.4
1927년 말 일어난 화교배척으로 교역액수가 감소했지만 화교 상인의 영향력은 1930년까지 여전했다.[47]

또 화교 농민들도 짧은 시간에 조선에 강력한 경제적 지위를 쌓아올렸다. 조선 화교는 일반 노동자 말고도 농민의 이주가 많은 게 특징이었다. 1910년 1,571명이었던 농민은 1928년에는 11,080명으로 늘어났다. 화교 농민은 처음에는 도시 근교에 땅을 임대하여 가작 노동력으로 주로 채소를 경작하고 시장에 팔았다. 그러다 점점 소작 규모를 늘려갔고 고향인 산동성에서는 계절성 노동자를 고용하여 자본가가 된 사례가 다수 나타났다. 1924년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는 324명의 중국인 채소 농가 98호가 18만 2,592평을 경작하면서 해마다 도매 시세로 7만 엔 이상의 매출액을 올렸다. 1927년 인구 15,000명 구모의 평북 선천(宣川)에는 중국 채소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발단은 화교 농민이 채소 공급을 독점하고 담합했기 때문이다. 1929년 함경북도 회령(會寧)의 약 15,500여 시민의 채소를 공급하는 곳은 모두 중국인 채소 농가였다. 이들 농민 57호의 연 총수입은 4만 여원에 달했고 그 중 절반이 고향인 산동성으로 송금됐다.[48]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는 “주기만 하고 가져오는 것이 없는 조선 사람의 주머니에서 중국인이 빼앗는 돈이 京城府에서만 1년에 876만 원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49]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원인에는 계급 갈등도 있다는 건 당시 상황 전개를 봐도 알 수 있다.

물적 피해를 따져 볼 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돌을 던져서 파괴하는 것이었고 주된 공격 대상은 도시나 읍내의 상점과 점포였다. "평소 도시 하층민의 중국인 상점 및 점포에 대한 선망과 시기가 담긴 범행"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50] 경성의 경우만 봐도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을 알 수 있다. 예로 신설리 패는 7월 4일 밤 경마장 중국인을 습격하러 안암천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때 천변의 점포에서 축음기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니 일행 중 한 명이 "중국인과 조선인이 충돌하고 세상이 불안한데, 이곳 놈은 축음기를 틀고 즐기고 있다니 괘씸하다"고 야찬을 쳤고 주인은 축음기를 껐다. 이 축음기는 도시의 모던 문화(스위트 홈)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인 상점 및 점포에 대한 투석하는 행위는 중국요리집을 드나드는 신사들에 대한 행패와 함께 하층민의 선망과 질시,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51]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끝난 후의 상황에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10월 27일 평양 학살이 일어난 지 4개월이 안 됐을 때 만주 마적에 대한 영화 광고지가 배포됐다. 1931년 윤봉춘 감독, 엑스키네마 제작인 조선 영화였다. 흑백 무성영화로 인천에 있는 한 중국인 자본가의 공장을 배경으로 해서 노사 갈등과 민족 갈등을 다루었다. 주인공은 정의감 넘치는 조선인 공장 감독인데 중국인 공장주와 대립하다가 공장주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알고 보니 중국인 공장주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서 조선인을 죽이고 약탈했던 만주마적이다. 주인공 가족도 당시 현장에 있었다. 공장주의 딸은 그때 마적이었던 공장주가 데려간 주인공의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아버지로 알던 중국인 공장주를 칼로 찌르고 주인공은 만주로 가서 총을 든다. 재만 조선인 문제 그리고, 조선 땅에서 부유한 화교 자본가와 조선인 노동가 사이의 갈등을 다루면서도 조선의 중국인 공장주 = 재만 조선인을 학살하던 만주 마적이라고 설정한 것이다.

이 영화 광고지에는“在滿 백여만 동포는 가는 곳마다 수난을 당해”, “동포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제부터 (조선인의 만주)입국을 막는다[( )는 인용자]”같은 문구가 있었다. 중국 총영사관은 이것이 호외를 날조한 것처럼 보인다며 당연히 검열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52]

함경북도 명천군(咸鏡北道 明川郡)에 있는 상고면 중평동(上古面 仲坪洞)에선 1931년 12월 6일부터 7일까지 이틀간 테러가 발생했다. 잡화상 가게인 원팔성호(源發盛號, 점주 임서방(林書芳))를 향해 조선인들이 테러한 사건이다. 명천군 상고면 중평동에는 화교 농민과 화교 상인이 여럿 있었는데 배화사건과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대다수 화교는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떠나거나 귀국했다. 그러나 잡화상 임서방은 남아 있었는데 외상값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임서방은 빨리 귀국하기 위해 외상값 회수를 심하게 독촉했다. 당시 큰 흉작이 들어 겨우 사는 것도 막막한 가구가 많았는데 이런 독촉을 하자 임서방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과격단체가 주도해 임서방 가게에 테러를 벌였다. 테러에 가담한 자는 모두 18명이었다. 그 중 4명은 명성소년회(明城少年會)였고 다른 3명은 천청년동맹원(川靑年同盟員)이었다. 두 단체는 과격한 사상단체였다. 특히 명성소년회는 “관(官)의 시설에 관해서는 선악을 묻지 않고 비난 공격에 가담하며, 늘 항쟁적 태도를 보이고 주의운동(主義運動)을 위해서 육친도 맹우도 없다고 호언하고 다니는”과격 단체였다. 사건의 주모자인 유창범(劉昌範, 19세)이 명성소년회원 회원이었다. 유창범은 어느날 신문을 보더니 '중국관헌이 만주의 조선인 농민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압박한다'는 기사를 보고 몹시 분노해 보복 수단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몰래 습격해서 쫒아내자는 선동을 했다. 그러자 1931년 11월 이후 이 지역의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임서방은 남아있었다. 유창범은 "소위 대중획득운동(大衆獲得運動)에 일조(一助)를 할 것이며 장래 사상운동(思想運動) 전개에서도 억을 것이 많다"고 믿고 한구범(韓九範)과 함께 12월 7일 오후 6시 경 어부 현일봉(玄日奉, 35세)도 데려와 임서방 가게를 습격했다. 가게 문을 부수고 주먹 크기 돌과 킨 4척 가량 장작개비를 던져 퇴거를 하도록 독촉했지만 임서방은 퇴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 8일 오후 5시 경에 명성소년회원등 더 많은 인원을 모아 전날과 마찬가지로 돌을 던지고 파괴했다.

이후 이들은 이 지역 면협의회원(面協議會員)인 현만복(玄萬福, 38세)이란 자의 집에 갔다. 현만복의 집에는 7명이 부민집회를 하던 중이었다. 현만복은 상고면협의회(上古面協議會)위원이기도 했다. 현만복은 당시 상업에 실패하고 남에게 1500엔을 빚을 지고 상태여서 빨리 갚으라는 독촉을 심하게 받고 있던 차였다. 그런 차에 유창범 무리가 습격하고 테러하는 걸 보니 즐거워했다. 현만복은 '중국인의 재만동포에 대한 압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고 부녀자는 전부 강간당하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이번 임서방을 습격하여 그를 국외에 내쫓으면 그가 현재 소지한 상품은 습격의 혼잡을 틈타 탈취하고 집에 불을 지르자, 만일 경찰에 검거되어도 중평 주재소 수석과 자신은 각별한 사이니까 염려마라. 경찰 측에서도 재만동포의 보복이므로 관대하게 처리할 것”, “임서방은 현재 상고면민(上古面民)에게 외상 2천여 엔을 지우면서, 옛날부터 부당한 이익을 탐해온 자로, 지금 (그를) 외국으로 쫓아내면 그 돈 은 안 갚아도 된다”고 선동했다. 유창범 무리는 그 선동에 찬성해 17명을 모아 오후 7시경에 다시 임서방 집으로 달려갔다. "죽여", "해치워버려"라고 소리치며 약 5분간 돌을 던지고 돌아갔다.

임서방에 대한 테러 행위의 계기는 재만조선인 문제라는 민족 감정이다. 그러나 배경에는 지역 내 금전관계, 화상의 부에 대한 질시 같은 계급적, 경제적 모순이 크게 작용했다. 경찰의 의견에 따르면 "부민(部民)은 누구나 그의 행동에 시달리고 있던 차여서,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쾌재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53]

1931년 11월 초 경상북도 영천군 자지방(慶尙北道 永川郡 慈川地方)에 있었던 중국인 상점 덕취상(德聚祥)에 한 조선인이 오더니 점주 손일신(店主 孫日新)에게 외상구매를 강요했고 경찰은 말려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게 문을 닫으려는 찰나 갑자기 1~2백 여명의 조선인이 상점으로 몰려와 화물을 마음대로 가져가려고 했다. 손일신이 이걸 막으려하자 구타를 당했다. 경찰은 현장에 왔으나 "수수방관할 뿐 아니라, 자기도 장갑 하나를 집어 끼기까지 했다." 때마침 영천군 경찰서장이 도착했다. 손일신은 영천군 경찰서장을 따라 위험을 벗어났다.

1931년 11월 26일 군산중화상회(群山中華商會)는 경성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전라남도 임곡송 정리(全羅南道 林谷 松汀里)에서 이 지역 조선인들이 화교상인 주백괴(周伯魁)를 찾아와 영업을 정지하고 귀국하라고 협박했다고 보고했다. 주백괴는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게 문을 닫고 근처 장성군(長城郡)으로 피난가 군산중화상회에 피난을 갔다.[54]

1931년 12월 8일 저녁 평양부내 화교 상인 요리점들인 홍승루(鴻陞樓), 동화원(東華園), 동승누(東昇樓) 세 요리점에 한글로 적힌 협박장이 우송됐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東華園主人 殿 精神없는 자들아 아직도 조선 내에 거류하는가. 빨리 환국해라. 이번 12월 내에 또 대사변이 생길 터이니 참혹한 귀신이 안 되려면 빨리 귀국해라.
府內 COS軍會 主席一同
2) 東昇樓主人 殿
목하 형세가 극히 위험하니 즉시 영업을 폐지하고 귀국하라. 만일 지체되면 지난 7월 사변보다도 심한 변을 만나지 않으려면 귀국할지어다. 府內靑總一>同 12월7일
3) 지금 형세가 심히 위급함이니 빨리 영업을 폐지하고 환국하여 만일 연연하면 지난 7월 사변보다 극히 맹렬한 변을 만나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속히 귀국하라.
鴻陞樓主人殿 府內刀棒同盟 12월 7일』[55]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난 원인에는 계급적,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56]

3.3. 조선인 경찰과 화교 간 갈등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忠淸南道 瑞山郡 海美面 邑內里) 시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폭력 사건이 벌어졌는데 조선인 행상인 조대현(曹大鉉, 23세)과 신모성(申模聲, 28세)이 중국인 진수선(陳守璿)과 조계주의 가게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구타한 사건이다. 경찰은 부근을 수색해서 가해자 두 사람을 발견하고 주재소에 데려가 취조하였으며 엄중 훈계한 뒤 돌려보냈다. 그러자 조계주는 상해죄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사건과 관련된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대질심문을 했다. 중국인인 조계주는 조선말을 못 했기 때문에 조선말을 잘 하는 통역을 데리고 경찰서에 갔다. 그러자「조선경관은 통역인을 보고 소송을 교사하여 부추긴다고 심문 질책하여 내쫓고, 다시 조계주에게 괜히 일을 만든다고 문책하면서 안건을 끝내게했다.」고 한다. 이후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은 6월 24일에 조계주에게 상해죄로 벌금 20엔을 언도했다. 경찰 측은 이정도 상해사건은 훈방에 그치거나 중해도 기소유예 처분인데 "오히려 너무 과중하게 처벌을 논했다고 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조계주 측이 제기한 민사소송도 민사소송을 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리고 외사과도 같은 내용으로 총영사관에 답장을 보냈다. 경찰은 고소가 들어로면 일단 법률적 절차를 수행했지만 소송과 탄원을 거듭하는 화교 상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57]

1931년 1월 24일 경성화교소학생 폭행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선인 학생들이 지나가던 화교 학생을 구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1년 7월 배화사건이 일어나기 넉 달 전쯤에 일어났다. 중국 총영사관이 외사과에 한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화교 학생들이 봉래정교(蓬萊町橋) 부근을 지나가는데 조선인 학생 5-6명이 화교 학생들을 구타해 한 명(하정란)은 앞니를 다쳤다. 다른 화교 학생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 피해자 가족에게 달려간 뒤 바로 경찰서에 달려가 신고했다. 그러나 조선인 경찰관은 가해자가 「아직 한 사람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잡지 않았다고 한다.「조선총독부 각 파출소의 조선인 경찰관이 우리 국민이 달려가 신고한 사건에 대해 매번 그 직책을 제대로 다하지 않으니,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貴府內各處派出所鮮警, 對於國僑民馳報事件,每不本其職責, 迅爲持平處理, 良爲感事)」고 따지며 「조선의 불량청년들이 왕왕 도로를 가로막고 싸움을 건 것이 이미 수차례였다(朝鮮不良靑年往往路尋毆已有數次)」는 점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외사과장의 주장은 총영사관측 주장과 달랐다. 외사과장은 경찰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경찰은 조선인 순사 이봉천(李奉天)의 보고를 화교학생들의 증언과 합치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기록에 근거해 말하기를 "앞니"를 다쳤다는 하정란은 사실 조선인 음식점으로 도망간 상태였고 조선인 음식점주 김춘식(金春植)에게 보호를 받으며 함께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후 경찰은 신고를 받고는 조선어를 아는 파출소 부근 거주 중국인 임종운(林從運, 24)과 함께 가해자가 도망간 곳으로 보이는 중임동(中林洞) 184번지 도착했다. 그러자 가해생도를 쫒아가던 화교측이 말하길 가해자들이 이미 흩어졌다고 전달했다. 그 말을 들은 경찰은 철수했다. 그리고 중국인측은 싸움 직후 바로 경찰서에 바로 신고했다고하지만 당번 근무자들(홍순태(洪淳泰), 유인현(柳寅顯), 안기승(安基承))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신고를 들은 일이 없다고 한다. 또 한 화교 학생(하정란)이 앞니를 구타당했다지만 출혈 및 전치 손상 같은 외부 상해흔적이 없어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가 "아직 한 사람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사실을 완전히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사실관계가 명백히 갈리는 부분은 "조선인 경찰관"(鮮警)의 증언이었고 중국 총영사관이 지적한 대상도 "조선인 경찰관"이었다. 경성화교소학생 폭행 사건의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이 조선에서 화교가 민족갈등을 빚어내는 관계는 일본인 사이에 있는 관계보다는 조선인 사이에 있는 관계였다는 점이다.[58]

형사, 민사사건에선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나는 사례는 물론 대부분 조선인과 중국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현장에서 경찰과 행정 실무를 담당한 주체도 조선인이었다. 그렇기에 중국인의 처지에서 차별을 느끼게 된 주체는 조선인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총독부의 통치구조에는 상급관료는 일본인, 하급관료는 조선인이라는 구조적 차별 구조가 있었다. 이 구조에 따라 현장에서 중국인과 부딪히던 주체는 주로 조선인이었다.[59]

3.4. 언론 문제

언론도 원인 중 하나였다. 조선인이 화교를 향해 나타낸 경멸적 태도의 유래는 기원을 청일전쟁 이후까지로도 볼 수 있다. 1896년 5월 21일 독립신문에선 중국인을 거머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다만 당시의 멸시 의식은 주로 상층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만 국한되었을 뿐 민중에게 넓게 퍼진 건 아니다. 그러나 1920년부터는 화교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면서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상층 개화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60]

당시 언론에서는 중국인을 ‘흉악한 중국인’, ‘가증스런 중국인’, ‘수상한 중국인’ ‘無道한 중국인’, ‘살기 있는 중국인’, ‘잔인한 중국인’, ‘무지한 중국인’, ‘음흉한 중국인’ 같은 말로 표현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每日申報는 물론 時代日報, 中外日報 에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1920년대에도 반일연대 시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친일 매체 여부를 떠나 전체적인 인식은 저러했다.[61] 언론에선 중국인 거리를 '중국인 거리 = 아편굴 = 악마의 소굴'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했다. 그런 이미지는 매일신보 같은 식민주의적 언론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조선인 언론이 만들기도 하였다. 언론들은 평범한 경제활동을 하는 중국인도 많은 거리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서 과장했다. 중국인 거리에 살던 중국인들 중 일부를 근거해 "대개" 모르핀 중독자로 과장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거리는 음침하고 충중하고 마굴과도 같은 기분이 들고, 그들의 말소리나 음흉한 음성은 어디로 보든지 음모적 민족이다.』, 『중국인의 국민성은 본시 음흉한 것』따위의 국민성이나 종족성을 논하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중국인 거리=마굴'이란 표현에는 이곳을 청소해야 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 들어있다.[62]

3.5. 평양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의 친 중국국민당 성향과 일본과의 갈등

대량학살이 일어난 평양은 조선에서 화교, 중국인 노동자들의 친중국국민당 성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평양 중화상회가 주최가 되어가지고 동일 오전 여덟시부터 부내 총상회사무소에서 청천기 게양식을 거행하였다. 회집자는 약 60여명 으로 각 상점 부분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동회회장 왕수정씨의 강설과 소학교 교장 곽곤씨의 삼민주의에 대한 연설과 북벌 성공 만세를 제창하였다. 구 시가 방면의 중국인의 집에는 모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였다.(「단오에 擧行된 靑天旗 揭揚式 『중외일보』1928년 6월 24일.)

평양 중화상회의 중심인물들은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친 국민당 성향의 행사를 주최했으며 일반 화교들 역시 가정에 청천백일기를 달아서 친 국민당적성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국민당 입당자 수가 아주 적었던 1928년 시점의 기사로서 평양 화교의 친 국민당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28년까지 조선 전체의 중국국민당 입당자는 545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경성에 중국국민당 주조선직속지부가 만들어지고 입당자의 수가 본격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양 화교 사회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 화교 사회에는 경제적 이익을위해 친일 성향을 보인 화교도 일부 존재했던 것 같다. 야채상 왕옥이 이끌었을평양 ‘소채 조합 기성회’ 결성식에 일본인 평양 경찰서장 현하좌등이 참석하고 회칙을 작성해줬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야채상 왕옥을 중심으로 친일 반 국민당 성향의 화교인사는 힘을 결집하여 친 국민당 성향의 지도부를 몰아내고 1929년 평양 화교 상회의 주도권을 탈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는 군산 화교 사회에서도 보인다. 군산 중화상회장 선거에서 친일 성향의 우씨가 관공서 일본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중화상회장에 당선된 사례가 있었다. 그가 당선되자 군산 화교 사회의 오랜 염원이었던 화교 소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은 것으로 보아 중화상회장을 뽑는 것이 선거를 통해 이뤄지며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일본인들이 개입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옥 계열은 중화상회를 탈환한 뒤 관공서의 일본인과 연계해 기존 평양 화교 사회의 친 국민당화를 저지하려하였을 것이다.

1929년은 동북 역치로 중국국민당 중심의 중국통일이 완성된 시기였다. 그래서 평양의 친 국민당세력은 애국적 행사로서 손문 위령제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친일 반 국민당적 성향의 왕옥 계열의 화교들과 마찰이 발생하였고 결국 왕옥이 중화상회장 자리에서 면직되면서 평양의 친 국민당적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이후 평양 화교 사회는 국민당화에 대한 반발을 딛고 친 국민당적이고 애국적인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1929년 11월에 평양에 거주하는 화교 유지 뿐 아니라 일반 노동자까지도 러시아 중국 국경의 군대 위문대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신흥 중국의 국위 선양의 기회로 생각해 푼푼전전이 눈물을 흘려가며 모금했다고 한 데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이러한 평양 화교 사회지도부의 반일 친 국민당화는 1931년 화교 배척 사건 당시 평양 경찰 측에서 화교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박홍우, 2017, 「1931년 화교 배척 사건과 평양 화교 사회」,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p.15-17

4. 결론(강진아 교수)

조선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관점을 복사해 중국을 근대문명 경쟁에서 떨어진 국가로 봤고 그에 따라 우월의식을 일본과 같이 나누었다. 조선에 살던 화교도 그런 관점으로 봤지만 실상은 달랐다. 조선에서 중국인들은 부, 일자리, 시장경쟁력에서 조선인보다 우위에 있었다. 조선인들이 인식한 화교와 실제 화교는 달랐다. 그러니 조선인들은 박탈감을 느꼈고 그런 상황에 분노했다. 그리고 화교를 상대로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비인도적이고 야만스런 테러와 학살로 터졌다.[63]

5. 왜곡 시도

학살과 테러를 당시 조선인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옹호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며 심지어 약탈이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인들의 높은 도덕성을 엿볼 수 있다고 칭송하는 경우도 있다. #

이러한 주장들은 21세기 들어 초강대국에 견줄 정도로 부상하는 중국의 모습을 1920~30년대 중국에 덮어씌우는 역사적 착각에 기반한 것이다. 1920~1930년대 중국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였지만 국제적 강국이기는커녕 서구 열강으로부터 무시받으며 몇몇 지역은 여전히 군벌정치가 횡행하던 가난한 후진국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의 중국인이 명백한 강자라고도 할 수 없다.

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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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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