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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2:12:56

인성왕후

인성왕후 박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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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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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 仁聖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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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 · 선조조 왕대비
공의왕대비 | 恭懿王大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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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종효릉.jpg
효릉 능침
출생 1514년 10월 28일( 음력 10월 1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578년 1월 16일
( 음력 1577년 11월 29일) (향년 63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공의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능묘 효릉(孝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524년 4월 19일 ~ 1544년 12월 14일
조선 왕비
1544년 12월 14일 ~ 1545년 8월 17일
조선 왕대비
1545년 8월 17일 ~ 1578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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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반남 박씨
부모 부친 금성부원군 박용
(錦城府院君 朴墉, 1468 ~ 1524)
모친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
(聞韶府夫人 義城 金氏, 1490 ~ 1550)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녀[1]
배우자 인종
종교 유교 ( 성리학)
전호 효모전(孝慕殿)
존호 공의(恭懿)
휘호 효순(孝順)
시호 인성왕후(仁聖王后) }}}}}}}}}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계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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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2대 인종대왕 왕비. 본관 반남.

2. 생애

1514년(중종 9년)에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직계 증손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 1544년(중종 39년)에 즉위하면서 정식 왕비가 되었다. 1년 뒤인 1545년(인종 2년)에 남편 인종이 짧은 재위 끝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인종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로 올라갔으며, 2년 뒤인 1547년에 공의(恭懿)의 존호를 받아 공의 왕대비가 되었다.[2]

1567년(명종 22년), 명종 후사[3] 없이 승하하면서 중종의 서손인 선조 명종 양자로 입적되면서 즉위하였다. 그런데 이미 대왕대비의 자리가 비어있었음에도 대왕대비로 승봉(昇奉)되지 못하였으며, 아래 동서이자 선조 양모 인순왕후가 선조의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4] 지병으로 천식과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실록에 의하면 사망 2년 전부터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해져서 궁녀들이 그녀를 방석에 앉힌 채로 들고 자리를 이동시켜 주었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노쇠했던 탓에 결국 1577년(선조 10년), 6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5]

3. 평가

온화한 왕비였지만 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었던 탓에 과부로 외롭게 살았다. 본인은 물론 남편인 인종도 성격이 너무 착할 뿐만 아니라 효자였기 때문에 남편 인종 세자 때부터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며, 문정왕후도 이는 인정했는지 인종 사후 인종의 외가를 숙청하면서 인성왕후나 인성왕후의 친정은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인성왕후가 자식이 없었던 탓에 자기 아들 왕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은 문정왕후와 맞설 입장이 아니었으니 굳이 숙청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6]

시어머니인 문정왕후 1565년(명종 20년)에 사망한 지 2년 지나고 시동생 명종도 사망하고 시손자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했는데, 3년 지나고 나서 조카며느리뻘이자 같은 집안[7] 의인왕후 선조 왕비가 되자 인순왕후와 함께 선조의 비인 그녀를 예뻐했다. 워낙 의인왕후의 인물됨이 괜찮았기 때문에 두 대비들이 유독 예뻐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에는 을사사화의 위훈 삭제 문제로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을사사화의 공신들을 인정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통 후계자 명종을 즉위시킨 공'인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명종이 즉위할 당시 '누군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이 명종을 즉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실제 인성왕후가 권력을 쥐지 않았고 권력 욕심도 없었던 현실과는 별개로, 왕실에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다음 서열이며 승하 인종 왕비였던 인성왕후가 명종의 즉위를 방해한 그 '누군가'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 사람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한, 인성왕후는 계속 '정당한 왕위 계승자의 즉위를 방해한 인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인성왕후 본인은 정치적 실권이나 영향력이 없었으므로 본인이 위훈삭제를 직접 요구할 수는 없었고 그만큼 괴로움은 더 컸다. 하지만 위훈삭제 문제는 상당히 정통성에 있어 민감한 부분이라 당대 임금인 선조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자칫하면 공신의 위훈 삭제 문제로 터진 기묘사화와 비슷한 일이 터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위훈삭제 문제는 명종 정통성 문제와 연결되는데, 선조 본인도 명종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넓게 보면 선조 본인의 정통성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석에 누운 인성왕후의 하소연을 들은 뒤 '어쩌다 임금이 되어서 이런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구나'라며 탄식했을 정도. 결국 선조는 인성왕후가 승하하기 직전에 결단을 내려 위훈삭제를 명하였다.
을사년(乙巳年)의 공신을 삭제하고, 윤임(尹任) 【찬성】 ·유 【계림군】 등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 대비(인성왕후)의 병이 계속 낫지 않았는데도
궁인들이 대부분 을사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계레 붙이들이었으므로, 대비가 그 공신을 삭제하려는 것을
원망하여 언제나 (上)의 앞에서 대비의 증세가 심할 정도로 이르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하루는 (上)이 문안한 뒤에 그대로 나아가 뵙고서
'녹훈(錄勳)한 것은 바로 선조(先祖)에서 한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합니다.
외정(外廷)의 의논을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니,

대비가 '견딜 수 없다(不堪)' 고 잇따라 부르짖으면서,
'국가의 큰 일을 어찌 미망인(未亡人)을 위해서 가벼이 고칠 수 있겠소.’ 하였다.

이 물러나서 계단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대비가 소리를 내어 통곡하니,
상이 듣고 자리를 가져다가 계단 아래에 앉아 머리를 떨군 채 한동안 있다가 늙은 궁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사가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아 먹으면 일생을 편안히 보낼 터인데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이르러 난처한 일을 만났다.' 하였다.

며칠 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해졌는데 대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하(地下)에서도 죄명(罪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말을 마치자 손발이 모두 싸늘해졌다.
궁인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상이 즉시 나아가 뵈었으나 이미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중전도 와서 서로 대하여 울었다.

상이 대비에게 아뢰기를, '녹훈을 삭제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소서.' 하니,
대비가 기쁜 빛을 나타냈는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상이 물러가자 다시 깨어나서 사람을 보내어 에게 사례하기를,

'상의 은혜가 망극하여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다음날 대비가 승하하였다.
- 《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 1577, 명 만력(萬曆) 5년) 11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4. 가계

5. 대중매체에서

인종이 대중매체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고 인성왕후도 존재감이 없을 뿐더러 설령 나온다 해도 비중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8] 역사대로 착하고 인자하게 묘사된다.
파일:풍란 인성왕후.png
《풍란》에서의 인성왕후
파일:여인천하 인성왕후.png
《여인천하》에서의 인성왕후

6. 참고 문서


[1] 인성왕후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서출이다. [2] 일각에서는 문정왕후의 성격 때문에 왕대비로 진봉도 못받았다고 오해하는데 실록에서도 대비가 이미 된건 둘째치고 아무리 대왕대비가 된 천하의 문정왕후라도 선왕의 왕비를 대비로 진봉하지 않는건 매우 큰 권력 남용 행위이자 무리수이다. 설사 인성왕후를 경계했다고 하더라도 딸조차 없어서 권세가 없다시피 한 인성왕후를 대비로 진봉하지 않는건 문정왕후 입장에서도 말이 안되며 인성왕후의 친정이자 명문가인 반남 박씨 가문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쓸데없이 만드는 꼴이다. [3] 후사는 원래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없었다. [4] 그 이유는 선조가 명종 인순왕후 슬하로 입적된 사왕(嗣王)이었기 때문이다. 인종 직계가 단절되고 명종 직계 왕실의 적통을 잇게 되면서 인순왕후 인성왕후보다 수렴청정의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종 명종 중종의 적통 아들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인성왕후를 대왕대비로 올리는 것은 며느리인 대비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대왕대비로 승봉되었던 정희왕후 소혜왕후와 같은 경우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5] 인순왕후는 40대 초반이라는 당시 기준에는 노인 대접 받던 나이로 인성왕후보다 2년 일찍 사망하였고 인성왕후는 60대로 당시 기준 완전한 노년이라 오히려 장수했다. [6] 인성왕후의 친정과 반남 박씨 가문도 엄연히 명문가이다. 아무리 힘이 쎈 왕이라도 아무런 명분도 없이 본인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명문가를 숙청하는것은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 편에 알아서 기거나 가만히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7] 인성왕후의 증조부와 의인왕후의 6대조가 형제다. 친가쪽에서는 인성왕후에게 의인왕후는 증손녀뻘이다. [8] 그나마 여인천하에서는 비중이 좀 많은데 이것도 해당 사극 내용 특성상 문정왕후가 주역인지라 인성왕후를 안 등장시킬 수도, 비중을 공기 수준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많을 수 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