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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02:13:58

이철수(군인)

대한민국 공군 대령
이철수
Lee Chul-su
파일:SSI_20101117015505.jpg
[1]
출생 1966년 6월 2일 ([age(1966-06-02)]세)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읍
( 함경북도 어랑군 어대진로동자구)
역임보직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57추격비행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
공군대학 안보정책과정 교관
합동군사대학교 공군대학 항공전력학 처장
공군본부 항공전투발전단 교리발전처 부처장
공군본부 항공정보단 북한공군전술선임분석관
복무 조선인민군 공군
1986년 ~ 1996년
대한민국 공군
1996년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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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가족관계 아버지 이춘상
전처 이성옥
장남 이명진
장녀 이명심[2]
부인 박지영[3]
학력 삼지연인민학교 (졸업)
삼지연중학교 (졸업)
조선인민군 공군 비행군관학교[4] (졸업 및 임관)
연세대학교 대학원( 미래캠퍼스) (정치외교학 / 석사)[5]
신체 170cm, 66kg
임관 특별임관[6]
최종 보직 57추격비행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 (조선인민군 공군)
공군본부 정책관 (대한민국 공군)
최종 계급 대위 (조선인민군 공군)
대령 (대한민국 공군)
상훈 3급 국기훈장
3대 혁명훈장
보국훈장 삼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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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수를 돌리다4. 대한민국 공군에 합류하다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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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웅평의 귀순 이후 1996년 MiG-19기를 타고 탈북,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조선인민군 공군 출신의 북한이탈주민.

탈북 직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으며, 대한민국 공군에서 26년 간 복무한 후 최종 계급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군사특기는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공군 모두 조종이었으나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출신 성분의 특성을 고려하여 실제 전투기 조종 임무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인민군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라는 점을 살려 조선인민군 전략, 전술 분석 및 전투정보 등을 교육하는 교관직 임무를 주로 수행했었다.

2. 생애

함경북도 어랑군 출신이다. 즉,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으로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읍 출신이다.

아버지는 삼지연공항에서 1987년까지 군관으로 군복무를 했다.[7] 2대가 북한 공군에서 복무한 셈이다.

북한 공군 군관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해 비행사가 되기를 꿈꾸다가 1982년 경성군 소재 공군 비행군관학교에 입학해 4년간 훈련을 받고 1986년 북한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3. 기수를 돌리다




그렇게 대위까지 진급했으나 조선인민군 공군 인사과정에서 불이익을 보고 이러한 현실에 귀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1996년 5월 23일[8], 평안남도 순안군 온천비행장 에서 자신에게 배정된 미그-19를 이끌고 황해남도 태탄군 쪽으로 남하, NLL을 넘어서 수원 군비행장에 우리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안착했다.[9][10][11]

예능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인터뷰로 밝힌 사실에 따르면, 8살 아이가 김정일에게 바칠 자두밭에 뿌려진 설탕[12]을 몰래 먹다가 걸려서 공개총살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고[13], 이에 대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아무리 잘못했어도 어린 애를 그렇게 죽이는가? 이건 너무한 게 아니냐?" 그 일에 대해 비판을 하였으나 그 믿었던 친구가 하필 부대 내의 있던 프락치였던지라 상부에 고자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70명 앞에서 공개적으로 생활총화를 비롯한 사상투쟁을 당한 뒤에도 집단으로 왕따를 당하는 치욕스런 경험을 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억울한 감정이 올라올 정도로 치를 떨고 있는 트라우마라고 한다. # 그런데 그 공개총화가 한 번이 아니라 수 년이 지나도 지속되었고, 감시 또한 귀순 직전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사격훈련을 하는데 보위원이 권총을 뽑아든 채로 감시하거나 전투기 훈련을 할 때마다 무장 전투기들이 싹 다 붙어서 날고, 이 과정에서 이철수가 이웅평 다음으로 귀순할 거 같다는 의심병에 가까운 억지를 내놓으며 다시 사상투쟁 강단에 세우려는 등 완전히 숨도 못 쉬도록 괴롭혔다고 한다. 그것도 당사자는 정작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도 이탈할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결국, 이철수는 "내가 귀순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북한에 남아있으면 곧 죽을 것이 뻔하니 살아남기 위해서 탈북을 선택했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자기들이 등떠밀어서 왔지. 내가 오고 싶어서 왔나?" 라고 분노하는 심정으로 인터뷰를 했다.

탈북 과정에서 몰고 온 미그기 보상금을 포함한 정착금 4억 7800만원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령하였다.[14] 사실 군 보로금 정책에 따라 온 정착금은 전임 탈북 파일럿 이웅평이 같은 기종인 미그-19를 가져와서 그렇게 값어치가 없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같이 가져온 미그-19 전투기에 대한 정비와 운영 및 북한 공군 편제에 대한 전술이 적힌 교본이었다고 한다. 미그-19 자체는 2억 2천을 책정했지만, 나머지가 그 이상이었다고. 참고로 그당시 한강 주변 33평(약 109㎡) 아파트의 시세가 평균 2억 3천만 원 할 때였다. 그리고 24종 58점에 달하는 유류품이 있었는데 그중에 상술한 교본은 물론 북한 공군용 조종사 헬멧 G-Suit, 비행복안에 입은 운동복도 있었지만 당시 신형 군관용 권총인 백두산 권총의 실물과 실탄, 탄창 2개, 권총집도 있었다.

귀순 당시의 소지품이나 발싸개를 반으로 잘라 착용하고 있었던 것 등 북한의 열악한 사정을 그대로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

4. 대한민국 공군에 합류하다

파일:이철수.jpg

탈북 당시 기자회견에서부터 이미 대한민국 공군에 복무하기를 간절히 희망했고, 공군본부에서 이를 받아들여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이후 국군 동화교육, 정치외교학 석사학위 위탁과정을 거쳐 2003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201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철수는 탈북자로서 10번째 대령 진급자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I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다부동 전투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2018년 사망). 3번째와 4번째는 1955년에 야크-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다. 5번째는 1960년에 미그-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대한민국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사망), 7번째는 1970년에 미그-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에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8번째가 1983년 2월에 미그-19로 귀순한 이웅평 대령(2002년 작고),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귀순 당시 육군 상위)이다.[15][16]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가 1996년 귀순한 이철수 대령이다.

그렇게 군생활을 하다 2022년 7월 31일 부로 공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복무 중 잡음도 전혀 없었고, 건강 역시 문제가 없으며, 전역 이후에도 대외적 활동을 드물게나마 이어가는 등 현시점에서는 가장 성공적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적응한 북한군 출신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7]

5. 기타




[1] 귀순 후 대한민국 공군 소령 임관 당시 사진. [2] 본인이 직접 밝힌 탈북 동기 및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가족들은... [3] 충남대학교 출신 연구원 [4] 함북 경성군 위치 [5] 미래캠퍼스 소속 대학원생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은 신촌캠퍼스와 미래캠퍼스가 통합되어 있다. [6] 임관구분에는 ' 현임 1'로 되어 있으며, 인사행정 상으로 공군사관학교 35기와 동기로 취급받고 있다. 박인호 전 공군참모총장과 동기인 셈. [7] 귀순 당시에는 예편 상태로, 노병으로 대우받으며 기업소 지배인으로 근무중이었다고 한다. [8] 본래 5월 9일 이착륙 숙달훈련 도중 탈북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연료가 너무 적고 동료들의 눈을 피해 대열을 이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판단하여 일단은 단념하고 다음 기회를 노렸다. 2주만인 5월 23일 훈련에서는 맨 마지막 기체인 3번기를 배정받았고 그 날 하늘이 도왔는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연료도 만재 수준인 2,110L로 평소보다 더 많이 채워져 있었다. 성공적으로 탈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철수 대위는 이륙 12분만에 주저없이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탈북에 성공했다. [9] 본래는 청주비행장(현 청주국제공항)에 착륙하려고 했는데 계기판을 보니 연료가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간 청주까지 가지도 못하고 추락하겠구나 싶어서 제일 먼저 고속도로에 비상착륙하려 했지만, 북한과 달리 주행중인 차량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고, 최후의 수단으로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기 위해 산 쪽으로 기수를 돌렸는데 그때 구름 사이로 수원비행장의 활주로가 보여서 다시 기수를 수원 비행장 쪽으로 돌렸다. 이때 연료 눈금은 어느새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간신히 수원비행장 활주로에 안착했다. [10] 수원비행장에 착륙해서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남한측이 무려 10분 동안 무반응인 것에 어리둥절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F-5 2대와 F-4 2대가 수원비행장에서 스크램블 했는데, 이철수 대위의 미그-19는 긴급착륙을 위해 속력을 낮춘 상태에서 저고도로 비행해, 시속 800km의 속도로 날아간 팬텀기가 미그-19를 포착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렸고, 덤으로 공군방공관제사령부의 IFF도 미그-19를 국군 수송기로 잘못 착각해 앞서 스크램블한 F-5 한 대를 귀순기로 판단하는 초대형 오류가 벌어진 상태였다. 수원 비행장에 착륙했다는 통신에도 레이더에선 오산 비행장으로 가는 것으로 표기되는 것에 계속 의문을 표한 관제사사령관이 제10전투비행단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착륙사실을 확인 받고 나서야 작전이 종료되었다. [11] 이 귀순과정에는 한 가지 의의가 더 있는데, 이철수 대위가 착륙한 수원 비행장 인근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전역에는 공습경보가 발령된 것에 반해, 가장 중요한 수도인 서울은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서울의 방공망이 아예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철수 대위가 귀순하러 온 것이었으니 다행이었지, 진짜로 북한이 공습하러 온 것이었다면 큰일이었을 거다. 당연히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의 방공망은 전격 재정비되었다. [12] 자두를 달게 하기 위해서 묻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13] 북한에서 가장 큰 목표가 최고 지도자의 안녕과 만수무강인데 만수무강하려면 좋은 것을 먹어야 하므로 저런 짓을 하면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한 것이다. [14] 2023년 화폐가치 기준으로 10억 정도 된다. [15] 특히 신중철 대령은 북한군 병으로 입대해 강건종합학교를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과 1, 2등을 다투는 학교에서의 엘리트였고, 이후 상위까지 진급하며 북한군에서도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북한군의 전술을 온전히 배운 장교로, 북한군의 전술과 실무를 전부다 깨고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 귀순을 했다는것은 정부로서는 초 고가치 정보들이 뭉텅이로 품에 들어온것 이었다. 신중철을 통해 북한군의 자세한 전술과 전략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왔고 심지어 당시엔 발견도 못하고있던 제4땅굴을 7년 뒤 수km오차로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이후 그는 정보사령부로 전입하였고 해당 부대에서 대령으로 초고속 승진한 뒤 모든 전방부대를 찾아 북한군의 입장에서 어디가 취약점인지 철저하게 분석하며 우리군 작전체계에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 [16]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로 여겨지고 있다. # 당시 국정원 정보사령부, 기무사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가 만들어낸 전략과 전술들이 이번에는 고스란히 북한이나 중국의 손에 들어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중철 대령은 북한출신이기 때문에 진급상한선이 사실상 대령까지였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중철과 비슷한 동기뻘들 이었던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학군단 출신 대령들이 한명두명 준장 소장으로 진급을 하며 상급자로 마주해야하는 순간이 너무 많아졌고 급기야 그들과 다투는 일이 생겼고 결국 그는 회의감을 느끼고 1995년 홧김에 전역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복무기간 20년을 못채워 군인연금 대상자가 되지 못했고, 취업도 쉽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불운이 겹쳐 1997년 IMF가 찾아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7] 이웅평 대령도 잡음 없이 국군에 적응하고 김만철 일가를 설득하러 대만으로 가기도 하는 등 국군에 몸담아 공군 생활을 했지만 현역 복무 중 건강 악화로 인하여 2002년에 간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사망했다. 현역 복무 중 병사하였으므로 제적 처리 되었으며 (복무 중 사망한 군인의 경우 제적 처리된다. 헬기 추락으로 순직한 조근해 장군의 경우에도 역대 참모총장 약력에 "공군 제적"으로 되어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8] 고난의 행군으로 온 인민이 염장무(무짠지)로 끼니를 때우는 상황이 오자 김정일은 " 군인들만큼은 세가지 반찬을 먹이라"고 지시했는데, 그 해결책이 북한군이 주 반찬으로 사용하는 염장무를 모양만 다르게 썰어서 세가지 반찬이라고 퉁쳤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