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고대 지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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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어 Ἰσαυρία영어 Isauria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의 옛 지명. 갈라티아와 킬리키아 사이의 내륙 타우루스 산간 지역에 해당한다. 현대의 보즈크르 및 콘야 주 일대이다. 고대 말(5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에 제대로 통합되지 않고/못하고 로마령 한가운데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던 산악 민족의 땅이자 제노(로마) 황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시기에는 동로마 제국 황실 근위대를 배출한 지역으로 각광받았다.
2. 역사
이사우리아 부족이 세운 이사우라 팔라아아 (옛 이사우라)와 이사우라 네아 (신 이사우라)의 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연맹이 있었다. 이사우리아 인들은 인근 라코니아, 킬리키아 평원의 도시들을 종종 약탈했다. 기원전 300년경 페르디카스가 타우루스 산맥 기슭의 험준한 요새인 이사우라 플라이아를 포위하자, 주민들은 항복 및 복속하는 대신 스스로 방화하여 불타는 것을 택하였다.[1] 기원전 70년대 폼페이우스의 킬리키아 해적 소탕전 당시, 기원전 75년 proconsul 플라비우스 세르빌리우스는 이사우리아 지역을 침공, 이사우라 네아를 포위해 식수를 차단하여 복속시킴으로써 이사우리쿠스 칭호를 받았다.서기 6년, 카시우스 디오는 이사우리아 인들이 전쟁이 나서 패배할 때까지 인근을 약탈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한때 갈라티아 왕국에 속했다가 로마 제국령이 되었지만 이사우리아는 독립성을 유지했고, 3세기에는 황제를 칭했다가 패배한 트레벨리아누스의 망명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4세기 초엽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사우리아-리카오니아 속주를 설치했고, 그후 이사우리아 속주가 신설되어 갈라티아 남부도 포괄했다. 5세기 무렵에는 이코니움을 포함한 피시디아가 분리되고 팜필리아 동부가 이사우리아에 더해져 셀레우키아 (실리프케)가 이사우리아의 새 주도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404년과 409년 등 대규모 약탈을 이어가자 동로마 제국의 장군 아르바자키우스가 토벌에 나섰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사우리아 지역은 현지 출신의 제논 (타라시코디시아 루숨블라다디오테스) 황제가 등극한 후에도 자치를 유지했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492 ~ 497년에는 이사우링ㄱㆍ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사우리아 지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에야 완전히 복속되었다. 7세기 말에는 레오 2세를 필두로 한 이사우리아 왕조가 들어섰다. 7-8세기 이사우리아 인들은 제국의 군인과 장군으로 활약했고, 한때 근위대의 중추를 이루기도 했다. 다만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 여겼다.
11세기 룸 셀주크가 점령한 후 이사우리아 지명은 잊혀졌고, 1901년에야 이사우라 유적이 특정되었다. 유적이 꽤 남아있는 이사우라 필라이아와 달리 이사우라 네아는 거의 남은 유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