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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45:40

윤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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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하
尹永夏 | Yoon Young ha
파일:external/file2.instiz.net/fe20668799f54883489e1d29543be805.jpg
출생 1973년 11월 24일
경기도 시흥군 혹은 인천시[1]
사망 2002년 6월 29일 (향년 28세)
서해 북방한계선
본관 남원 윤씨
학력 송도고등학교 (졸업)
해군사관학교 ( 학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 영어영문학 / 석사)
신장 178cm[2]
군사 경력
임관 해군사관학교 (50기)
복무 대한민국 해군
1996년 ~ 2002년
최종 계급 소령[3]
최종 보직 참수리 357호 정장
참전 제2연평해전
상훈 충무무공훈장

1. 개요2. 생애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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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윤영하/youngha2.jpg
제2연평해전 보름 전인 2002년 6월 14일, 생전 모습[4]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쏘란 말이야...!!"
제2연평해전 당시, 그의 생전 마지막 명령 중 하나.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고속정의 정장.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영웅들 중 한 명이며, 서해 NLL을 목숨바쳐 사수한 해군의 참군인 중 한 명이다. 비록 전투 초반에 저격총에 맞아 전사했지만,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본인의 임무를 다하며 후배 장교들 및 부하 사병들의 귀감이 된 인물이다.

2. 생애

파일:attachment/윤영하/youngha1.jpg
해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윤영하 소령[5]
1973년, 경기도 시흥군(또는 인천시)에서 예비역 해군 대위 윤두호(해사 18기)[6] 씨와 어머니 황덕희 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남동생으로는 윤영민 씨가 있다.

아버지 윤두호 씨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예비역 대위 복무 5년 차에 전역한 후, 해운 회사에 근무했다. 덕분에 윤영하 소령도 초등학교 시절 3년 동안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국 생활의 영향으로 영어에 굉장히 능통했었다고 한다. 귀국한 후에는 인천 소재의 모 중학교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92년 해군사관학교 입학, 1996년 해사 50기로 졸업 및 해군 항해 소위로 임관했다. 계봉함 갑판사관, 제118조기경보전대 상황장교, 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했다. 1999년 인하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1년 1월 참수리 357호 고속정의 정장으로 취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오전, NLL을 넘어 남하하며 도발한 북한 해군 8전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반 684호의 선수에 장착된 85mm 전차포에서 발사한 초탄이 조타실에 명중했으며, 이 영향으로 그는 포탄의 파편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조원들을 독려하고 고통을 참아가며 지휘를 계속했다. 부상을 당한 상태로 "쏘란 말이야...!!"라고 다 쓰러져가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일어서서 지휘를 시작했으며,[7] 교전 개시 4분 후인 10시 30분 경, 그는 "엎드려!"라고 하며 함교 및 갑판에 있는 승조원들에게 총탄을 피해 엎드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참수리 357호정의 함교에 또다른 포탄이 한 발 명중해 폭음과 파편으로 함교가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그를 포착한 684호의 저격수[8]가 쏜 78식 저격보총에 의해 등 쪽에 한 발을 저격 당해 심한 관통상을 입었으며, 함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그는 그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결국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본 당시 상병 박동혁 수병(의무장)이 심폐소생술과 지혈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9] 그는 사후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추서,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시신은 장례식 후 화장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여담으로 연평해전 영화 개봉 전, 그의 동기였던 이성민 소령과 1년 1기수 후배였던 이동진 소령이 나온 뉴스에서 윤영하 소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 동기 기수들과의 모임 자리를 가질 때마다 가수 의 노래 중 하나인 < 천상연>을 자주 불렀다는데,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계속 그 노래만 불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윤영하 소령이 전사하자, 참수리 357호정의 지휘권은 부장이었던 이희완 중위[10]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희완 중위 또한 교전 중 오른쪽 무릎 밑부분을 통째로 절단당했고, 왼쪽 다리에도 8cm 크기의 관통상을 당했다. 무려 아홉 차례의 대수술 끝에 왼쪽 다리는 겨우 살려냈지만, 오른쪽 다리에는 결국 의족을 달아야 했다. 그러나 이희완 중위가 한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지휘해준 덕분에 대한민국 해군은 그 날 승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날, 윤영하 소령을 포함하여 6명의 무고한 해군 장병들이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3. 기타

4. 관련 문서


[1] 묘비에는 인천 출생이라 적혀있다. 시흥군 출신이 맞는다면 소래읍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2] # [3] 제2연평해전 당시는 대위로 사후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4] 당시 2002년 월드컵의 열광이 불던 시기였다. MBC 뉴스데스크는 국군장병들의 월드컵 응원 모습도 중계했는데, 우연히 참수리 357호정의 승조원들의 모습을 방영하고 일부 장병들을 인터뷰했다. 그런데 그 중 참수리 357호의 정장이었던 윤영하 대위(당시)도 포함된 것. 제2연평해전 이후 MBC 뉴스데스크는 그들의 전사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이 방영을 다시 요약본으로 틀어주었다. [5] 여담으로 해사 졸업 직전이었던 1996년 1월, KBS 시사교양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해당 영상 [6] 여담으로 윤두호 씨는 1970년 6월 29일, 공교롭게도 32년 뒤 아들이 전사한 날짜와 같은 날, 북한 해군의 4t급 간첩선을 나포하여 무공 훈장을 받았다. 기사 [7] 실제로 당시 참수리 358호의 부장이었던 장근영 중위가 해전 직후의 뉴스 인터뷰에서 윤영하 소령으로부터 이런 무전을 받았다며 그의 말투까지 재현해주었다. 해당 영상. 1분 8초부터. [8] 북한 해군 서해함대는 제29해상저격여단 등지에서 특수교육을 받고 증원파견된 저격수를 함교에 배치하여 고속정 간 근접전 및 적함 지휘관 등의 인원들을 최우선 무력화하는 데에 응용한다. 결국 윤영하 소령은 무방비 상태의 함교에서 그대로 85mm 초탄 파편상을 입고, 이후 저격수에게 피격까지 당하고 만 것. 만약 그가 포탄 파편 때문에 전사했다면 관통공 및 구경 이모저모를 살펴볼 때, 당장 구경이 12.7mm까지만 되어도 신체 절단 등의 극단적인 외상 흔적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없었다. 그리고 입관 전, 부친 윤두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시신에는 등 쪽에만 외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저격수에 의해서 전사했을 확률이 높다. [9] 그리고 그에게 응급조치를 한 박동혁 수병도 심한 중상을 입었으며,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84일 후인 9월 20일,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리고 박 수병의 몸에서는 무려 2.65kg이나 되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총탄과 파편이 나왔다. [10] 당시 계급. 이희완 중위는 21년 후인 2023년 말, 대령으로 전역하여 국가보훈부 차관으로 일하고 있다. [11] 4:23 [12] 생전 윤영하 소령은 독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