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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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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80,#ddd> 일생 | 일생 | |
가족 | 직계존속 | 고조부 윤득실 · 증조부 윤취동 · 조부 윤영렬 · 아버지 윤치소 · 어머니 이범숙 | |
아내/비속 | 아내 공덕귀 · 딸 윤완구 · 딸 윤완희 · 아들 윤상구 · 아들 윤동구 | ||
역대 선거 | 제4대 대통령 선거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4.19 혁명 · 5.16 군사정변 | ||
기타 | 이승만 정부 · 장면 내각 · 윤보선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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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윤영렬 尹英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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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4년 4월 15일 | ||||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現 충청남도 아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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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9년 11월 4일 (향년 85세) |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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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관 | 해평 윤씨 | |||
자 | 백웅(白熊) | ||||
부모 | 아버지 윤취동, 어머니 고령 신씨 | ||||
배우자 | 한진숙 (1851 ~ 1938, 1867년 결혼) | ||||
자녀 |
장남 윤치오 차남 윤치소 삼남 윤치성 사남 윤치병 장녀 윤활란 오남 윤치명 차녀 윤노덕 육남 윤치영 칠남(요절) 삼녀 윤씨 팔남 윤치정 사녀 윤길희 오녀 윤인희 구남 윤치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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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 ~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윤취동의 아들이자 윤웅렬의 동생이며 윤치호의 숙부, 윤치영 전(前) 서울시장의 아버지, 윤치소의 아들인 윤보선 전(前) 대통령의 조부이다.2. 생애
조카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학식이 모자라서 글을 못 읽지만 수완과 판단력은 좋았다고 평가된다. 1938년 조카 윤치창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치창에게 "집이 돈에 비해 너무 큰 것 같지 않냐?"고 말한 것이 그 증거. 1867년[1] 한진숙[2]과 결혼해서 6남 2녀[3]를 두었다. 16세 때인 1869년 장남 윤치오를 낳았다. 자식도 많이 낳고 장수[4]해서 1927년 회혼례도 올렸다.3. 여담
여성 편력이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색마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여러 부인을 거쳤으며 자녀가 무지하게 많다. 총 20명이 넘는다.[5][6]
[1]
당시 13세. 다만 당시 기준으로는 조금 일찍 결혼한 편이지 아주 이른 편은 아니다.
[2]
1851년생으로 남편 윤영렬보다 3살 연상이다.
[3]
첩이 낳은 자식까지 합치면 9남 5녀.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자식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4]
2개월만 더 살았다면 5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모든 연대를 살 수 있었다. 조카 윤치호가 윤영렬의 자식들이 늙은 윤영렬을 잘 돌보지 않아 윤영렬이 말년을 빈곤하게 살았다고 자기 일기에 적은 바 있으니 자식들이 정성껏 돌보았다면 1940년대까지 살았을 수도 있었다.
[5]
의친왕, 육종관(
육영수의 아버지)와 더불어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
[6]
81세에도 아들을 낳았으니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