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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점령하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경찰 |
나치 점령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의 모습을 담은 영상. 게토에 막 도착한 유대인들,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 견장을 찬 유대인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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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 중에는 독일놈들에게 유대인 소수를 넘겨 주면 나머지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어. 최소한 그들 자신은 구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지.
- 블라덱 슈피겔만
- 블라덱 슈피겔만
나치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점령지에 유대인들의 게토를 설치했는데, 게토 내에서 치안 유지를 하던 유대인들을 흔히 유대인 경찰이라고 한다. 주요 자료는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고했다.[1]
2. 설명
유대인 (Jüdische) 게토(Ghetto) 경찰(Polizei) 완장 |
유대인 경찰들은 딱히 제복이 지급되지 않고 사복 정장을 착용했으며, 대신 완장과 배지, 경찰 정모를 지급받았다. 권총과 같은 화기는 지급되지 않았기에 곤봉 만을 휴대했다. 이들은 주로 유대인들을 국외추방하여 집결캠프(Konzentrationslager)[2]로 보낼 때 투입됐다. 그들이 관리하는 게토의 다른 유대인들보다 특별한 우선권 같은 건 없었고 독일군의 명령에 따랐다. 특히 절멸캠프(Vernichtungslager)[3]로 보낼 때 이런 현상은 더 심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경찰 첫 지휘관은 유제프 셰린스키(Józef Szeryński)였다. 4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수용된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유대인 경찰이 2,500명이나 됐다. 우치(Łódź) 게토의 경우 1,200명, 르부프(Lwów) 게토는 500명 수준이었다.
우치 게토의 유대인 경찰. 이들은 모자나 완장 없이 포제 배지로 경찰임을 나타냈다. |
보고를 받는 유제프 안제이 셰린스키(Józef Andrzej Szeryński) 경찰국장. 보고자는 당시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 경찰 2인자였던 야쿠프 레이킨(Jakub Lejkin).[4] |
유럽에서는 유대인 혈통임에도 유대인에 혐오감을 품은 이들이 꽤 있었고 셰린스키도 그랬다.[5] 유대인의 정체성이 혈통보단 유대교라는 종교적 역할이 강했기에 그런 것인데 나치는 그딴 거 없고 조부모 중에 한 명만 유대인이 있어도 유대인 취급했다. 셰린스키 역시 그랬던 탓에 셰린스키라는 성씨 대신에 솅크만(Szenkman)이라는 독일어화된 성씨를 썼고 게토에 들어가 유대인 경찰이 됐다. 1942년에 같은 유대인 경찰인 이즈라엘 카나우(Izrael Kanał)가 그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셰린스키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6]가 일어나 유대인 저항 단체인 유대군사연합(Jewish Military Union/Żydowski Związek Wojskowy)과 유대저항조직이 게토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나치에 부역한 유대인을 처형하자 처형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유덴라트(Judenrat, 유대인 평의회)가 나치에 저항적인 게토에서는 유대인 경찰이 동원돼 이들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유대인 경찰 중 일부가 이스라엘에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상황을 참작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3. 평가
폴란드의 역사가로 게토와 유대인 경찰을 연구한 에마누엘 링겔블룸(Emanuel Ringelblum)은 이들을 가리켜 때에 따라서는 독일인보다도 더 잔인했다고 표현했다.[7]수용소에서 다른 포로들을 관리할 권한을 지녀 다른 포로를 박해하던 카포(Kapo)[8]도 평가가 나쁘지만 유대인 경찰은 일반 부역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도. 나중에 나치 전범들과 함께 이스라엘 정부의 추적을 받았고 전후에 도망치다가 다른 유대인이나 지역민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일부는 해방 후 소련군에 협조하여 동유럽 공산정권에서 신분을 세탁하고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소련이 동유럽을 위성국화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 같이 소련에 협조적인 실무자들이 필요했던 탓에 소련군에 협조하는 유태인 경찰들 일부가 처벌받지 않고 공산정권에 중용되었기 때문이다.[9]
4. 미디어에서
홀로코스트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다.-
피아니스트에서는 집결캠프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분리하러 나온 유대인 경찰 지휘관이 웃으며
SS 장교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유대인 경찰 지휘관: Well. off they go to the melting pot.(결국 저렇게들 죽으러 가는군)
그 외에 주인공인 블라덱 슈필만의 친구들이 유대인 경찰이라 블라덱의 가족들은 죄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10] 끌려갈 때 이들이 블라덱만은 자신의 등 뒤에 숨겨서 빼준다.[11][12] 스필만 외에도 은근히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이 연줄이 있는 유대인 경찰들에 의해 빼돌려져 목숨을 건지긴 했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서도 등장한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회고에서 나치 못지 않게 지독한 놈들이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래도 블라덱 역시 자기 사촌 두 사람이 유대인 경찰에 속해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여기서는 유대인 경찰들이 친위대 제복과 흡사한 검은색 제복과 제모를 착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친독 협력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독자가 구분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일수도 있다. 그 중 하나인 하스켈은 블라덱의 장인 내외를 구해주겠다고 재물을 홀랑 받아먹고는 버리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블라덱이 늘 욕을 했지만 어쨌든 자기 목숨을 많이 살려 주긴 했기 때문에 종전 후에는 그에게 선물을 줬다고 한다.
- 현대에 유대인 국가가 세워지지 못했다는 가정을 한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의 소설 제목에 이 이름이 차용되기도 하였다. 단 시대적 배경은 현대로 제2차 세계 대전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1]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wish_Ghetto_Police
[2]
나치가 각지의 유대인을 솎아내 모으던 곳. Konzentrationslager는 영어로 쓰면 Concentration Camp인데,
보어 전쟁 당시 영국군이 보어 공화국들의 저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보어인들을 단체로 수용하던 캠프에서 기원한다. 보어 전쟁을 기억하는
영국인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격리수용을 위해 똑같은 이름의 집결캠프를 차린다는 사실을 알고 히틀러가 영국을 엿먹인다고 생각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3]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같은 곳을 말한다.
[4]
보고를 하는 야쿠프 레이킨은 원래
변호사였는데 1942년 10월 29일에 유대저항조직 소속인 엘리아시 루잔스키(Eliasz Różański)에 의해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살해되었다. 독일 검찰에 의해 셰린스키가 조사를 받느라 부재였던 1942년 5-7월에는 그가 경찰국장을 맡기도 했다.
[5]
이런 경우가 많았기에
영어 위키백과에는 항목이
따로 있다. 사실 비단 옛날일만은 아니다.(...)
데니스 카푸스틴처럼 유대인 혈통임에도
아돌프 히틀러를 추종하거나 나치임을 자처하고,
예브게니 프리고진처럼 이런 나치즘을 종종 이용해먹는 무리들이 있다.
[6]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발생한 유대인들의 봉기. 절멸캠프로 유대인들을 2차로 끌고 가려고 하자 일어난 무장봉기로 약 한 달간 게토를 기반으로 독일군과 유대인 경찰을 공격했다. 빈약한 무장 때문에 결국 독일군에게 진압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무장봉기였다.
[7]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일제강점기 때
노덕술,
하판락 같은 조선인 고문경찰들이 일본인 고문경찰보다 더 잔인했다는 평을 듣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경찰들도 백인들보다 더 잔혹하게 흑인들을 탄압한 나머지 백인 경찰들도 기겁할 정도였으며,
콩고 자유국 시기
벨기에에 부역하며 흑인들을 잔혹하게 탄압한 군인들도 대다수가 백인 장교들 휘하의 흑인 병사들이었고,
루안다-우룬디 지역에 살던
후투족들은 이민족인
벨기에보다도
투치족 기득권층들을 더욱 증오했다고 한다.
[8]
굳이 비교하자면 유대인 경찰은 말 그대로 민간사회(그러나 어디까지나
유대인 관리 구역)에서의
경찰, 카포는 유대인 수감소의
교도관이었던 셈이다.
[9]
이것도 해방 후에 국가 운영을 위해 미국에 협조적인 실무자들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미군정 하에서 중용된
노덕술,
하판락같은 조선인 고문경찰들이 반공주의자로 신분을 세탁하고
이승만 정권에서 권세를 누린 것과 판박이다.
[10]
아우슈비츠에 이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곳이다. 이렇게 들으면 덜 잔인한 곳인가 하겠지만 실상은 더욱 끔찍한 곳이었다. 아우슈비츠는 노동수용소 역할도 겸했던 반면 트레블링카는 절멸수용소였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사망률이 60% 정도인 반면 트레블링카에서는 99.97%에 육박했다.
[11]
물론, 슈필만은 가족과 떨어졌다는 생각에 다시 가려고 했지만 다른 유대인 경찰들이 막아섰고 이차크가 기어코 잠시 자리에서 벗어나 슈필만의 멱살을 잡고 "널 살려준 거야! 뭐하고 있어? 빨리 가라고!"라고 소리친 뒤 다시 돌아간다. 이차크는 슈필만에게 먹고 살기 힘들면 유대인 경찰에 가입하라고 말했는데 처음 들으면 이 사람이 동족을 판 악인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 장면 하나로 그가 뼛속까지 악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스필만은 독일이 패망했을 때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12]
전쟁이 끝나고 슈필만은 자신을 숨겨주고 먹을 것까지 챙겨준
빌헬름 호젠펠트라는 장교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찾다가 소련군의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소련군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명단을 보고 있었는데 이때 이차크가 있었다.
이번에는 유대인 경찰이 아니라 소련군 완장을 차고 돕고 있었다고 한다. 호젠펠트는 수용소로 끌려가 고문과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