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 트레블링카 | 베우제츠 |
소비보르 | 헤움노 | 마이다네크 |
↑ 수용소 구내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역. 현재 트레블링카의 내부 구조물은 남은 것이 전무하고 사진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를 찍은 소수의 사진, 수용소 내부의 동물원을[1] 찍은 사진이 전부다. 트레블링카 역은 수용소에서 약 6km 떨어져 있었는데 앞서 간 열차가 희생자들을 수용소에 하차 시키는 동안 뒤에 있던 열차들은 트레블링카 역에서 대기했다. |
↑ 트레블링카 모형 전체를 확인하려면 이곳 참조. |
↑ 트레블링카 추모비. |
1. 개요2. 건설, 운영 초기3. 구조, 학살 과정4. 주요 간부
4.1. 슈츠슈타펠 / SS
5. 트레블링카 봉기6. 폐쇄와 발견7. 희생자 수8. 전후4.1.1.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4.1.2. SS 중위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4.1.3. SS 소위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4.1.4. SS 하사 '프랑켄슈타인'
빌리 멘츠(Willi Mentz)4.1.5. SS 중사 하인리히 마테스(Heinrich Matthes)4.1.6. SS 중사 에리히 푹스(Erich Fuchs)4.1.7. SS 하사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
4.2.
유대인 경찰[clearfix]
1. 개요
- Obóz zagłady w Treblince, SS-Sonderkommando Treblinka(Treblinka II) ( 폴란드어)
- Das Vernichtungslager Treblinka ( 독일어)
- Treblinka extermination camp ( 영어)
'트레블링카' 이름이 붙여진 수용소는 '트레블링카 I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II 수용소'가 있었는데, 1941년 9월에 지어진 '트레블링카 I 수용소'는 노동수용소였으며, 1942년 7월에 지어진 '트레블링카 II 수용소'가 바로 절멸수용소였다.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위해 만들어졌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II 수용소)는 폐쇄할 때까지 가장 빠른 속도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곳으로서, 1942년 7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단 15개월간 운영되면서[2] 약 80만~92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1943년 10월 20일 해체되어 사라졌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끔찍한 곳이었음에도 아우슈비츠의 악명에 가려 이 수용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증거가 철저히 인멸되었던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종종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 불린다. 자세한 실상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서를 참고.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 수용소를 완전히 파괴하여 증거를 인멸했다.[3] 하지만 학살 규모가 너무 심각해서 소련군은 이곳에서 인골과 유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전후 시간이 흘러 홀로코스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면서 결국 이곳이 절멸수용소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후 1960년대 이스라엘의 나치 사냥꾼들에 의해 트레블링카의 간부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고 1964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트레블링카 재판으로 살아남은 주요 간부 상당수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2. 건설, 운영 초기
↑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총독부는 지도에 총독부(Generalgouvernment)라 표시된 지역[4]과 커즌 선(붉은 선) 너머 갈리치엔 구역을 합친 영역이다.[5]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폴란드 침공 시작부터 나치 수뇌부, 특히 히틀러와 괴벨스 등은 유대인 절멸을 하나의 옵션으로 고려하고 있었지만 바로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일단 게토에 수용되었으며 1941년 상반기까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먼저 이들을 마다가스카르 같은 오지에 대규모로 추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루블린 근교 등에 유대인을 격리하는 마을을 새로 짓는 등 계획을 일부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개막과 함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처리 방침은 빠르게 '절멸'로 기울어졌다. 1941년 8월 히틀러가 구두로 유대인 절멸을 결정했으며, 1941년 10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루블린의 SS 경찰 사령부 오딜로 글로보츠닉에게 구두로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시했고, 1941년 12월에는 폴란드 총독부가 3개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중 1개( 베우제츠)를 건설 중이었다. 1942년 1월 20일 행정부 책임자와 친위대 핵심 지휘관이 모인 가운데 열린 반제 회의에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문제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되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절멸수용소 중 가장 늦게 착공되어 1942년 7월 완공되었다.
수용소를 짓기 전 이 지역은 석회석 광산이 있던 곳으로 근처의 공업 도시들과 잘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숲 속에 가려 은폐되어 있었다. 또한 광산의 여러 기계 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SS는 이곳을 절멸수용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로 꼽았다. 절멸수용소를 짓기 전 1941년 9월 이미 나치는 이 위치상 이점 때문에 노동수용소인 트레블링카 I 수용소[6]를 지었고. 반제 회의에 의한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1942년 4월 절멸수용소인 트레블링카 II 수용소를 착공하여 1942년 7월 완공 시켜 가동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첫 희생자들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었다. 수용소가 완공된 직후 1942년 7월 22일 밤 바르샤바 게토에서 처음으로 6,000명의 희생자가 수용소로 왔고, 존더코만도로 쓸 극소수가 추려진 후에 나머지는 다음날 새벽 학살되었다. 이송 직전 이미 바르샤바 게토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7월 21일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Judenrat) 의장이던 아담 체르니아코프에게 찾아가 상세한 인구 통계와 게토 지도를 제출하라 명령하고, 이튿날 7월 22일 일찍 다시 아담 체르니아코프에게 찾아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전원을 '동쪽'에 '재정착' 시킨다 통고하며 매일 6,000명 씩 게토 한가운데 있는 철도역 야적장(Umschlagplatz, 움슐라그플라츠)으로 집결 시키라고 명령했다. 물론, 만일 매일 6,000명 씩 보내지 않으면 100명의 유대인 인질과 체르니아코프의 아내를 처형하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40량으로 구성된 텅 빈 화물 기차가 인근에 정차하고 있을 때 체르니아코프는 '재정착'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게토에서 가장 취약한 인원이었던 고아들은 남게 해 달라고 나치 행정부에 간청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치 행정부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오히려 고아들도 광장으로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자 체르니아코프는 좌절감에 빠져 그의 일기장 마지막에 "그들이 내 손으로 직접 내 동포인 아이들을 죽이라 한다. 나는 이제 죽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쓰고 재정착 시작 이튿날 7월 23일 청산가리 캡슐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 1942년 8월 초(5~7일 추정)에는 존경받는 의사이자 교육학자이던 야누시 코르차크가 그가 돌보던 유대인 고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아이들과 함께 행진하며 손을 잡고 안심시켜 그들이 공포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8]
하지만 이렇게 가동된 트레블링카의 초기 운용 방식은 엉성했고, 당시 간수로 복무하던 친위대원들이 보기에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대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일단 트레블링카에 도착하셨죠.[9]
도착하니까 슈타디라는 담당 보좌관이[10]
수용소를 보여주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마침 우리가 지나갈 때 가스실 문을 여는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감자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공포와 충격에 빠졌죠.
그렇게 돌아와서는 각자 가지고 온 여행 가방 위에 앉아
모두 노인네처럼 흐느꼈어요.
유대인 중에서 매일 100명씩 선발해서
구덩이까지 시체를 끌고 가는 일을 시켰어요.
저녁이 되면 우크라이나 경비들이
그 사람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거나 때려죽였고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요.
8월이라 무더위가 한창이었습니다.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파도처럼 일렁거렸죠. 가스 때문에요.
시체에서 나오는 가스 말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대략 6~7 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가
전부 시체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모래만 얇게 덮여 있었고요.
거기다가 덥기까지 했으니 이해가 가시죠?
지옥이 따로 없더라고요.
직접 목격하신 건가요?
네, 딱 한 번 첫째 날에요. 다들 구역질하면서 울었어요.
우셨다고요?
네. 울기도 했죠.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악취가 지독했어요.
수 킬로미터씩이나요?
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요.
사방에서 냄새가 났습니까? 수용소 밖에서도?
어딜 가나 났죠. 바람에 따라 달랐어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이동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도착하는 사람들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다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위에서는 바르샤바 게토를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고 싶어 했거든요.
반면 가스실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굉장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규모가 작았거든요.
유대인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하루에서 이틀, 어떤 때는 사흘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닥칠 일을 예감하고 있었겠죠.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확신까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자기 딸의 손목을 긋고
이어서 자기 손목까지도 그어버리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독을 삼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 다큐멘터리 ' 쇼아'의 클로드 란츠만 감독과 전 트레블링카 간수 프란츠 수호멜의 인터뷰 中. 수호멜은 이때 큰 충격을 받고 당시 수용소장 에베를에게 임무에서 빼 달라고 했으나, 에베를은 그를 사지(死地)인 독소전쟁 전장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수호멜은 이에 굴복하여 계속 학살업무를 수행했고, 전후 이로 인해 7년간 복역하였다.
초대 수용소장이던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은 효율적인 학살 시퀀스를 만들지 못했다. 단기간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26만의 유대인이 몰려들자 끊임없이 공회전을 돌리던 엔진은 자주 고장났다. 그럴 때면 광장에 가득찬 유대인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해 학살했다고 한다. 시체 처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10마일 밖에서도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이곳에서 학살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주변에 확실히 알려졌다.[11] 수용소가 가득 차는 바람에 화물칸에서 내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나치의 학살을 더디게 했다. 나치는 한 달 만에 에베를을 해임했고 후임으로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장이던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을 앉혔는데, 이 괴물은 가장 오래 소장으로 앉아 있으면서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완성했다.도착하니까 슈타디라는 담당 보좌관이[10]
수용소를 보여주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마침 우리가 지나갈 때 가스실 문을 여는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감자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거예요.
우리는 당연히 공포와 충격에 빠졌죠.
그렇게 돌아와서는 각자 가지고 온 여행 가방 위에 앉아
모두 노인네처럼 흐느꼈어요.
유대인 중에서 매일 100명씩 선발해서
구덩이까지 시체를 끌고 가는 일을 시켰어요.
저녁이 되면 우크라이나 경비들이
그 사람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거나 때려죽였고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요.
8월이라 무더위가 한창이었습니다.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파도처럼 일렁거렸죠. 가스 때문에요.
시체에서 나오는 가스 말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대략 6~7 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가
전부 시체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모래만 얇게 덮여 있었고요.
거기다가 덥기까지 했으니 이해가 가시죠?
지옥이 따로 없더라고요.
직접 목격하신 건가요?
네, 딱 한 번 첫째 날에요. 다들 구역질하면서 울었어요.
우셨다고요?
네. 울기도 했죠.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악취가 지독했어요.
수 킬로미터씩이나요?
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요.
사방에서 냄새가 났습니까? 수용소 밖에서도?
어딜 가나 났죠. 바람에 따라 달랐어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이동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도착하는 사람들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다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위에서는 바르샤바 게토를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고 싶어 했거든요.
반면 가스실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굉장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규모가 작았거든요.
유대인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하루에서 이틀, 어떤 때는 사흘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닥칠 일을 예감하고 있었겠죠.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확신까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자기 딸의 손목을 긋고
이어서 자기 손목까지도 그어버리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독을 삼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 다큐멘터리 ' 쇼아'의 클로드 란츠만 감독과 전 트레블링카 간수 프란츠 수호멜의 인터뷰 中. 수호멜은 이때 큰 충격을 받고 당시 수용소장 에베를에게 임무에서 빼 달라고 했으나, 에베를은 그를 사지(死地)인 독소전쟁 전장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수호멜은 이에 굴복하여 계속 학살업무를 수행했고, 전후 이로 인해 7년간 복역하였다.
3. 구조, 학살 과정
1943년 8월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트레블링카 구조 설명 영상 |
트레블링카 수용소 자체와 관련 자료들은 거의 파기되었기 때문에 수용소의 구조는 한동안 알 수 없었지만 1964년 트레블링카 재판에서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수용소는 크게 수용소 관리 인원들이 있던 1구역, 기차역과 광장이 있던 2구역, 가스실과 소각로가 있던 3구역으로 나눠졌다.
1구역은 다시 두 구역으로 세분화되어있었는데 한 구역은 직원 구역(Living Camp)으로서 수용소 본부 겸 수용소장 숙소 및 집무실·간부 숙소·경비병 숙소·간부와 경비병들이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숲과 야외 '카페테리아'·'동물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 구역은 수용소장 이하 SS 간부와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의 사무 및 생활을 위한 구역이었으며, 이 구역 내에서도 독일인 SS 간부와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의 막사는 서로 급을 달리하여 구분해놓았다. 다른 한 구역은 수감자 구역(The Ghetto)으로서 유대인 존더코만도들이 숙면을 취하고 식사를 하며 점호를 받는 구역이었는데, 대형 막사 하나와 변소와 수감자들의 점호를 위한 광장으로 구성되었다. 수감자 구역은 당연히 존더코만도의 탈출 방지를 위해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며 일과가 끝난 밤부터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일찍까지 문이 잠겼다. 대형 막사와 변소는 수감자 구역에서도 광장을 사이로 마주보고 멀찍이 위치해 있었고, 대형 막사 내부는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일반 남성 수감자 숙소·일반 여성 수감자 숙소· 카포 숙소·부엌·세탁실·세면실·재단실과 제화실 등 작업실들·양호실[12]로 구성되었다. 광장은 주로 매일 점호를 위해 존더코만도들이 집합할 때 사용되었지만, 존더코만도의 노동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일요일 오후에 허락된 휴식 중 열리곤 했던 존더코만도 악단의 연주를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수용소 간부들은 1구역의 수감자 구역을 조롱하려는 의도에서 게토라고 불렀다.
여기 보시면 이 서류가[13]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데요.
'Bfe'. 기차역을 말하죠.
이 노선에만 기차역이 총... 8개나 돼요.
여기가 트레블링카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우키니아 기차역입니다.
그러니까 라돔(Radom)을 지나서 바르샤바 구역까지
이렇게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문서를 수신한 곳이 8곳이나 되는 거죠.
여기 8개의 역을 지나갈 때마다
각 기차역 담당자에게 통보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을 왜 두 장씩이나 썼을까요?
여기 보이는 PKR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죽음의 기차를 뜻하는 약자예요.
그런데 트레블링카에 열차가 도착하면
곧바로 비워냈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 출발하는 빈 열차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거죠.
아시다시피 비어 있다는 뜻인 단어 레어(leer)를 나타내는
알파벳 L이 여기 이렇게 표시되어 있고요.
뤽라이퉁 데어 레어추게스(Rückleitung der Leerzuges)
'빈 기차의 귀환'이라고 쓰여 있군요.
여기 보세요.
숫자를 매기는 방식에서 교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9228변에서 9229번, 이어서 9230번, 9231번, 9232번.
전혀 특별할 것 없이
일반 열차를 운행하는 거나 다름없었던 거죠.
죽음의 열차였는데도요!
네, 죽음의 열차였는데도 말이에요.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시면
어느 한 게토에서 내부를 비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기서 기차가 출발해 트레블링카로 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9월 30일 4시 18분에 출발한 거죠.
적어도 계획된 일정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1시 24분에 트레블링카에 도착해요.
이건 길이가 아주 긴 열차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늦게 도착한 거고요,
여기 '50G' 표시가 보이시죠.
사람들을 가득 채운 화물칸이 50개였다는 뜻입니다.
중량이 굉장히 '무거웠던' 수송이었던 거죠.
트레블리카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4분,
오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15시 59분에 열차가 다시 출발합니다.
그사이에 기차에 실려 있던 것을 내리고
청소까지 한 다음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거죠.
그렇게 빈 기차에 다시 일련번호를 매긴 거고요.
그러니까 이 기차는 오후 4시경에
트레블링카에서 또 다른 작은 도시를 향해 출발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을 실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새벽 3시에 다시 트레블링카를 향해 출발해서
다음 날 도착했어요.
그러면 이 두 열차가 같은 열차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럼요. 같은 열차죠. 이 둘은 같은 열차입니다.
매번 번호만 바뀐 거고요.
그렇게 트레블링카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새로운 수송이 또 있었겠죠.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던 겁니다.
매번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방식으로 운행을 반복했으니까요.
이 기차는 또다시 트레블링카로 돌아가서는
최종적으로 9월 29일 쳉스트호바에 도착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죠.
이게 바로 '노선 지침'이라고 부르던 서류입니다.
열차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는 가정으로 계산을 하면
이런 식으로 '노선 지침'을 한 번 시행할 때마다
약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만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으로 잡아서요.
그런데 이런 문서에 이렇게까지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트레블링카에 다녀온 입장에서
거기 현장과 이 문서를 동시에 보니까...
지금 제가 이 종이를 이렇게 손에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건 서류 원본이에요.
당시 행정을 집행하던 관료들도
이걸 두 손으로 직접 들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죽은 사람들은 더는 말이 없으니까요.
- 트레블링카로의 이송 과정에 대한 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설명. < 쇼아> 196~199p에서 발췌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데요.
'Bfe'. 기차역을 말하죠.
이 노선에만 기차역이 총... 8개나 돼요.
여기가 트레블링카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우키니아 기차역입니다.
그러니까 라돔(Radom)을 지나서 바르샤바 구역까지
이렇게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문서를 수신한 곳이 8곳이나 되는 거죠.
여기 8개의 역을 지나갈 때마다
각 기차역 담당자에게 통보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을 왜 두 장씩이나 썼을까요?
여기 보이는 PKR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죽음의 기차를 뜻하는 약자예요.
그런데 트레블링카에 열차가 도착하면
곧바로 비워냈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 출발하는 빈 열차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거죠.
아시다시피 비어 있다는 뜻인 단어 레어(leer)를 나타내는
알파벳 L이 여기 이렇게 표시되어 있고요.
뤽라이퉁 데어 레어추게스(Rückleitung der Leerzuges)
'빈 기차의 귀환'이라고 쓰여 있군요.
여기 보세요.
숫자를 매기는 방식에서 교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9228변에서 9229번, 이어서 9230번, 9231번, 9232번.
전혀 특별할 것 없이
일반 열차를 운행하는 거나 다름없었던 거죠.
죽음의 열차였는데도요!
네, 죽음의 열차였는데도 말이에요.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시면
어느 한 게토에서 내부를 비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기서 기차가 출발해 트레블링카로 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9월 30일 4시 18분에 출발한 거죠.
적어도 계획된 일정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1시 24분에 트레블링카에 도착해요.
이건 길이가 아주 긴 열차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늦게 도착한 거고요,
여기 '50G' 표시가 보이시죠.
사람들을 가득 채운 화물칸이 50개였다는 뜻입니다.
중량이 굉장히 '무거웠던' 수송이었던 거죠.
트레블리카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4분,
오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15시 59분에 열차가 다시 출발합니다.
그사이에 기차에 실려 있던 것을 내리고
청소까지 한 다음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거죠.
그렇게 빈 기차에 다시 일련번호를 매긴 거고요.
그러니까 이 기차는 오후 4시경에
트레블링카에서 또 다른 작은 도시를 향해 출발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을 실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새벽 3시에 다시 트레블링카를 향해 출발해서
다음 날 도착했어요.
그러면 이 두 열차가 같은 열차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럼요. 같은 열차죠. 이 둘은 같은 열차입니다.
매번 번호만 바뀐 거고요.
그렇게 트레블링카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새로운 수송이 또 있었겠죠.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던 겁니다.
매번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방식으로 운행을 반복했으니까요.
이 기차는 또다시 트레블링카로 돌아가서는
최종적으로 9월 29일 쳉스트호바에 도착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죠.
이게 바로 '노선 지침'이라고 부르던 서류입니다.
열차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는 가정으로 계산을 하면
이런 식으로 '노선 지침'을 한 번 시행할 때마다
약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만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으로 잡아서요.
그런데 이런 문서에 이렇게까지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트레블링카에 다녀온 입장에서
거기 현장과 이 문서를 동시에 보니까...
지금 제가 이 종이를 이렇게 손에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건 서류 원본이에요.
당시 행정을 집행하던 관료들도
이걸 두 손으로 직접 들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죽은 사람들은 더는 말이 없으니까요.
- 트레블링카로의 이송 과정에 대한 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설명. < 쇼아> 196~199p에서 발췌
운영 초기,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로의 추방은 두 편의 화물기차에 의해 이뤄졌는데, 당시 폴란드의 열차망은 독소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혼잡해서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까지 고작 100여 km 오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이 동안 화물칸 유대인들은 음식과 식수도 제공 받지 못했고 수용소에 도착 전에 상당수가 사망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우 수용소로 향하던 화차는 수용소에서 6km 정도 떨어진 트레블링카 역에 정차했다. 트레블링카의 기차역은 위장되어 있었는데 번듯한 역사가 지어져 있었고 역사 내부엔 시계, 시간표, 트레블링카 근처를 목적지로 표를 파는 매표소 간판이 그려져있었다. 위장의 목적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이곳이 더 먼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가는데 잠시 들렀다 가는 환승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내리진 않았고, 앞서간 열차가 수용소에 희생자들을 하차 시키는 동안 유대인들은 역에 정차한 화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술했듯 역에서 대기하던 유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엄청난 갈증으로 고통 받았는데, 이때 주변 지역에 살던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려 했으며 화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유대인들을 향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목에 손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며 경고를 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역사에 근무하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들이 막았으며, 고통 받던 유대인들로 인해 화차 내가 시끄러워지면 화차 문에다 총을 쐈다고 한다. 가끔 화차의 창문을 넘어 탈출하는 유대인도 있었는데, 화차에서 나온 순간 경비병에게 처형되었다고 한다. 앞서 간 열차가 빈 화차를 끌고 돌아오면 대기하던 다음 열차가 수용소로 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 근처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트레블링카는 위장은 했지만 화차 내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때쯤 되면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고 한다. 학살 속도가 더뎌진 1943년에는 곧장 수용소로 향한 듯 하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하차 작업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했는데, 경비병과 간부들이 직접 희생자들을 매질하며 내리게 했다. 하지만 이미 게토에서부터 무작위 총살을 수없이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이곳에서도 그 비슷한 가혹행위가 일어나고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은 역사 뒤에 있던 광장으로 가서 일단 물품들을 내려놓고 대기했고 아픈 사람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그리고 저항하는 인원들은 광장 한 켠에 있던 적십자가 그려진 가짜 양호실로 보내져 대기했다.
절멸수용소들이 다 그랬듯이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저 몰살만이 목적이었기에 분류 작업은 없었다. 이곳으로 보내진 유대인들은 당초 '노동 부적합 인원'으로 분류되어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여지 없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트레블링카에 보내진 유대인들이 잠시나마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상대적으로 젊고 강해보여서 존더코만도로 뽑히는 것뿐이었다.[14] 다시 돌아와서, 광장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게 존더코만도들이 다가와 다음 기차를 타기 전에 샤워를 시켜준다며 따라오라고 했고 그들은 광장 옆 격리된 곳에 있던 탈의실에서 옷을 벗었다. 이들이 광장에서 떠나면 양호실에 있던 약자들은 뒤에 숨겨져 있던 7m 깊이의 거대한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을 따로 끌고 나온 이유는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시간을 단축 시키기 위해서였다. 총살은 SS 하급분대지도자 빌리 멘츠(Willi Mentz)에 의해 이뤄졌는데, 트레블링카가 폐쇄될 때까지 이 인간 손에 직접 처형 당한 유대인은 수천 명에 달했으며 수용소 인원들은 이 인간을 프랑켄슈타인이라 불렀다.
학살의 마지막 과정까지 희생자들을 속였던 아우슈비츠에서와 달리, 트레블링카의 희생자들은 탈의실에서부터 채찍을 얻어맞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이들이 '샤워실'로 향할 때는 좁은 숲길을 지나야 했는데 SS는 자기들끼리 이 길을 '튜브' 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다. 트레블링카의 '튜브'는 나치의 절멸수용소들 중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였는데, 먼저 지어졌던 베우제츠의 '튜브'는 직선이어서 학살 구역이 일부 드러났고 그 다음 지어진 소비보르의 튜브는 곡선으로 만들었으나 너무 길어서 희생자들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트레블링카의 '튜브'는 거리가 짧으면서 곡선으로 만들어져 학살장을 감추면서도 희생자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일행이 가스실에 도착하면 먼저 저항의 가능성이 큰 남자들부터 집어넣어 학살했고,[15] 그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여성과 아이들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샤워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공포에 질려 발작했고 일부는 자신도 모르게 배변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트레블링카를 방문한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는 이런 관행이 비효율적이라고 서술했다. 운영 초기에는 학살의 속도가 이송되는 유대인 수를 따라잡지 못해 상술했듯 유대인을 실은 기차가 트레블링카 역 등 주변 역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블링카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하루에 약 12,000명을 학살할 수 있었고 시설이 증설된 1942년 말에는 25,000명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주변 역에 있던 화차의 대기 시간은 대개 하루를 넘지 않았다. 구 가스실 건물에는 6개의 가스실이 있었고 신설 가스실에는 10개의 방이 있었는데, 신설 가스실 건설 이후엔 구 가스실은 이송되는 유대인이 너무 많을 때만 다시 가동했다. 하지만 여전히 6개의 가스실을 가지고 있던 소비보르, 베우제츠보다 학살 용량이 컸다.[16]
↑ 트레블링카 신설 가스실. 확대 가능. 샤워실처럼 위장되어 있었고 건물 가장자리에 엔진 2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 엔진의 배기가스가 샤워기를 통해 각 가스실로 흘러들어갔고,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각 가스실에 붙은 밖으로 통하는 큰 문을 통해 시체가 꺼내졌다. 희생자들은 사진에 나온 건물 왼쪽, 그러니까 사진 상에서 엔진실이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들어왔다. 출처는 ARC(Aktion Reinhard Camp) 홈페이지로 라인하르트 계획에 따라 지어진 절멸수용소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이트다.
처음 지어진 가스실은 밀폐된 3개의 지상 건물들을 이어붙여 만들었고 상술했듯 내부에 6개의 가스실이 있었다. 수용소의 전력공급실에는 소련군의 전차에서 제거해 온 큰 엔진이 있었는데, 이 엔진의 배기가스가 배출되는 파이프가 땅 속을 통해 가스실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엔진을 공회전 시켜 일산화탄소를 가스실로 흘려보냈고 약 20분 뒤 가스실의 희생자들은 모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프란츠 슈탕글이 수용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1942년 9월 10개의 가스실을 가진 새로운 건물을 거대하게 지었고 이때에는 독일제 엔진을 부착했다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증언이 엇갈렸기에 확실치는 않다. 연료는 과거엔 디젤이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지금은 가솔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스실 문의 경우, 프란츠 수호멜의 증언에 따르면 비아위스토크에 널려 있던 소련군 벙커들에서 떼어왔다고 한다. 방탄 처리된 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가스실에서의 학살이 끝나면 존더코만도들이 시체를 수레에 태워 밖으로 내보냈다. 1943년까지 이 시체들은 매장 처리되었으나 카틴 학살의 증거를 독일이 발굴한 이후 매장이 증거인멸에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1943년 3월 매장된 시체들을 꺼내어 소각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그 뒤 시체를 소각할 거대한 구덩이를 팠고 뼛가루는 모래와 섞여져 주변의 넓은 지역에 흩뿌리거나 거대한 구덩이(Mass Grave)를 파서 묻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폐쇄될 때까지 이 방식을 유지했고 아우슈비츠의 ' 치클론 B 방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 구덩이를 파는 트레블링카의 굴착기. 트레블링카 내부에서 촬영되었다. 트레블링카에는 기종이 다른 굴착기가 2대 있었다.
수용소에는 SS 해골부대 소속 인원이 20명 정도 있었고 대부분 수용소의 간부였다. 경비병은 약 100여 명 정도였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중 독일군에 편입된 자들이었다. 이들의 편입이 자발적이었는지는 상당한 논란거리인데, 확실한 것은 1941년 말 소련군 포로수용소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기 전에도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한 소련군 포로가 여럿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대가 점차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자 나치는 소련군 포로 중에서 학살대를 새로 선발했는데, 그 중 '트라브니키(Trawniki men)'라 불린 부대가 악명 높았다. 이들에게 직접 총살 당한 유대인, 슬라브인도 수만에 달했다. 트레블링카에서 근무한 슬라브인 경비병들도 비슷한 맥락으로 선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용소의 더럽고 끔찍한 일들은 1000여 명의 존더코만도들이 맡았다. 이 중 1구역에 살던 700명의 존더코만도들 역할에 따라 3가지 색깔의 삼각형 중 하나를 패용했는데, 파란색 인원은 화물칸에서 유대인들을 하차 시키고 이미 사망한 유대인들을 꺼냈다. 빨간색 인원은 광장에 쌓인 희생자들의 물건을 분류했고, 노란색 인원은 이 물품들을 품질에 따라 다시 분류하고 물품에 붙은 다윗의 별을 제거했다. 노란색 인원 중 일부는 물품들 속에서 현금이나 보석을 모았다. '죽음의 유대인(Totenjuden)'으로 불린 나머지 300명의 존더코만도들은 3구역에 살았는데 이들은 가스실에서 시체를 꺼낸 뒤 매장하거나 소각하는 일을 맡았다. 존더코만도들은 수시로 경비병들에게 구타 당했는데 그럼에도 멍이 든 상태로 일을 하러 나왔다면 희생자들을 속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즉각 처형되었다. 끔찍한 환경 때문에 많은 존더코만도들이 밤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 대부분의 존더코만도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원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강한 인원만이 끝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으며'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인원은 바로 그날 가스실로 보내졌다.
트레블링카는 존더코만도들에게 지옥이면서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곳이었다. 이렇게 '생명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곳에 '동물원'이 있었다. 1943년 초 이곳에서 근무하던 SS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자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은 경비병들이 주둔하는 구역 내의 작은 건물을 개조해 동물원을 만들도록 했다. 이 건물 주변을 철창으로 두른 뒤 근처 숲에 사는 여우, 사슴 등을 잡아와 키웠다고 한다. 동물원 외에도 존더코만도로 처음 뽑힌 인원은 그 날 밤까지 아이러니로 가득 찬 이런 노래를 외워야만 했다.
Fest im Schritt und Tritt und der Blick geradeaus, immer fest und fest in die Welt geschaut, marschieren Kommandos zur Arbeit! Für uns gibt’s heute nur Treblinka, das unser Schicksal ist. Drum haben wir uns auf Treblinka eingestellt in kurzer Frist. 당당한 발걸음으로 저 멀리 똑바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언제나 용감하고 활기차게 우리 모두 일하러 걸어 나가세.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모두의 운명 트레블링카뿐이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트레블링카와 한 몸이 됐다네. Wir kennen nur das Wort der Kommandanten, und nur Gehörsamkeit und Pflicht. Wir wollen weiter, weiter leisten, bis dass das kleine Glück uns einmal winkt – Hurra! 오로지 사령관님의 명령에 따라 복종하고 의무를 다하면 된다네. 아낌 없이 봉사하고 또 봉사하세. 그 언젠가 조그만 행운이 우리에게 손짓할 때까지, 만세! (노래를 다 부른 후) 이제 됐나요? 이 노랜 저밖에 모를 겁니다. 할 줄 아는 유대인이 이젠 없을 거예요.[출처] |
부헨발트에서 잠시 근무한 적 있던 부수용소장 쿠르트 프란츠가 부헨발트의 제소자들이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에 직접 가사를 만들어 붙인 노래로 트레블링카의 간부들은 존더코만도들에게 자주 이 노래를 시켰다. 이 노래 말고도 존더코만도들이 불러야 했던 노래는 몇 가지 더 있었다고 한다. 아래 4장에서 후술하겠지만, 클로드 란츠만 감독과 인터뷰했던 트레블링카 전 간부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은 인터뷰 당시 란츠만의 요청으로 이 노래를 직접 불러주었다.
4. 주요 간부
4.1. 슈츠슈타펠 / SS
4.1.1.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
Franz Stangl (1908. 3. 26. ~ 1971. 6. 28. )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슈탕글 문서 참고하십시오.
4.1.2. SS 중위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
자세한 내용은 이름프리트 에베를 문서 참고하십시오.4.1.3. SS 소위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
(1914년 1월 17일 - 1998년 7월 4일)
1914년 1월 17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쿠르트 프란츠는 1929년부터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1935년에 독일 국방군 육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37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후 토텐코프 사단에 배치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일했다. 1939년부터 그는 T4 작전에 동원되어 1942년 4월에 베우제츠 강제수용소로 배속되었다. 1942년 8월에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로 이동한 쿠르트 프란츠는 프란츠 슈탕글 소장 아래에서 부소장으로 일했다. 2대 수용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이 수용소장이었을 때 수용소 2인자였다. 후술하겠지만 SS 의무실에서 근무하던 유대인 율리안 호롱지츠키를 의심해 첫 번째 봉기 시도를 좌절시켰다.
1943년 6월에 친위대 소위로 승진한 후 1943년 8월부터는 트레블링카가 폐쇄되는 11월까지 소장으로 일하며 본인의 사디즘적 기질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자행했으며,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훗날 그가 잔악 행위를 매우 즐겼다고 증언했다. 1943년 8월 말 마지막 학살 이후 슈탕글이 트리에스테로 발령된 뒤 수용소장이 되어 수용소 철거를 지휘했다. 전후 미군의 포로가 된 쿠르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하여 다시 요리사로 일했지만 1959년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내의 잔학 행위로 트레블링카 재판을 받았다. 1965년 트레블링카 재판으로 종신형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1993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1998년에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4.1.4. SS 하사 '프랑켄슈타인' 빌리 멘츠(Willi Mentz)
↑ 왼쪽에서 2번째가 빌리 멘츠
가짜 '양호실'에서 가스실 이동을 지체 시킬 수 있는 인원을 직접 총살한 간부.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그의 증언에 따르면 비르트가 시켰다고 한다. 비르트는 빌리 멘츠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면서 그의 눈 앞에서 직접 유대인 몇 명을 총살했고, 빌리 멘츠에게 남은 유대인들을 총살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직접 총살이 빌리 멘츠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존더코만도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항상 양호실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얀 의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시무시하게도 처형 때도 의사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이송된 유대인 뿐 아니라 수백 명의 존더코만도 역시 이 자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존더코만도들은 그를 프랑켄슈타인 또는 건맨이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전후 숨어 지내다가 1964년의 트레블링카 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78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풀려났다가 출소 후 3개월 뒤 사망했다.
4.1.5. SS 중사 하인리히 마테스(Heinrich Matthes)
앞서 설명한 트레블링카의 세 구역 중 '학살 구역'의 책임자였다. 존더코만도들에겐 죽음의 사신과도 같았던 인물로 깔끔함에 매우 집착해서 수레를 제대로 씻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더코만도 둘을 그 자리에서 처형한 적도 있었다. 1942년 말 존더코만도 사이에서 티푸스가 돌 때 감염자 8명을 '가짜 양호실'로 보낸 적이 있었고, 어떤 존더코만도가 작업 중 물을 마셨다는 이유로 처형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시로 존더코만도들을 구타했다고 한다. 구타 당해 멍이 들거나 일을 못하게 되면 그 존더코만도는 그대로 처형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 뒤, 다른 거의 모든 간부들처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받아 트리에스테로 발령 받았고 전후 숨어 살다가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 종신형을 끝까지 살다 사망한 듯 하다.
4.1.6. SS 중사 에리히 푹스(Erich Fuchs)
라인하르트 3개 절멸수용소의 처형용 엔진 설치를 담당하는 기관(機關) 담당관이었다. 전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66년 소비보르 재판으로 4년형을 선고 받았다.
4.1.7. SS 하사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
1907년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태어난 주데텐 독일인으로 1979년 서독 바이에른의 알트외팅(Altötting)이라는 체코와 가까운 마을에서 사망했다.
압색 담당관으로 물품의 압류와 수집, 유대인 여성들을 위장된 가스실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고 인정되어 1964년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67년 석방되었다. 트레블링카 재판 때부터 출소 후 사망할 때까지 트레블링카에 대한 증언을 많이 했는데, 현재 알려져 있는 트레블링카의 상세한 정보 상당량이 이 자의 증언에서 나왔다.
그의 자세한 증언을 듣고 싶다면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대작 다큐멘터리 쇼아(Shoah, 1985)[18]를 보기 바란다. 1부의 중간 부분~2부의 앞부분에 걸쳐 클로드 란츠만이 노령의 프란츠 수호멜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조금씩 나온다.[19] 트레블링카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증언에 의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에서 증언이 서로 상충되어 정확하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프란츠 수호멜의 증언 중에선 이 문서에 적힌 내용과는 사소한 부분에서 다른 것이 조금 있을 수 있지만 그 차이의 범위가 크지는 않다. 이 트레블링카 문서 역시 쇼아에 나온 증언들을 상당 부분 참고해 작성했다. 란츠만과 수호멜 인터뷰 전문 영어 번역.
그와 란츠만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트레블링카가 무얼 하는 곳인지 몰랐다고 한다. 나치 상부는 그가 유대인 '재정착지'로 가서 그곳의 제단사와 신발장이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1942년 8월 20일 7명의 동료와 함께 트레블링카로 처음 발령되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슈타디에 하사[20]가 수용소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줬어요. 우리가 지나가고 있을 때, 그들은 가스실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시체들이 마치 감자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장면은 우릴 공포에 질려 떨게 만들었어요. 우린 돌아와서 짐을 놓고 앉아서 늙은 여자처럼 울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에베를에게 갔습니다. 우린 그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베를은 "그럴 수 없네, 내 사람들은 너무 지쳤어. 넌 여기 머물러야 해." 이후 우린 다시 에베를을 찾아갔습니다. "대위님. 전 이걸 견딜 수 없습니다. 전 너무 약하다구요. 여기서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에베를이, "수호멜, 그냥 하기 싫다고 말하게나. 그냥 말하게. 그럼 난 너를 니가 있어야 할 곳에 보낼 거야."
(란츠만: '니가 있어야 할 곳'이라구요?)
전방이요. 그곳은 그저 언제 죽는 지를 증명하는 곳이었습니다.
(란츠만: '니가 있어야 할 곳'이라구요?)
전방이요. 그곳은 그저 언제 죽는 지를 증명하는 곳이었습니다.
4.2. 유대인 경찰
4.2.1. 유대인 경찰 국장 유제프 안제이 셰린스키(Józef Andrzej Szeryński)
오른쪽 인물이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경찰 국장인 유제프 안제이 셰린스키이다. 참고로 왼쪽 인물은 SS 상급돌격지도자이자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의 초대 소장인 이름프리트 에베를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유대인 경찰을 통솔하던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경찰'의 1인자이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가 바르샤바 게토에 위치해 있어서 사실상 주요 간부나 마찬가지였다. 유대인 혈통임에도 유대인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솅크만(Szenkman)이라는 독일풍의 성씨를 썼으며,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탄압하고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 시키는 일종의 중간관리직 역할을 담당했었다.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모습 때문에 유대인들도 그를 증오했으며, 심지어 같은 소속인 유대인 경찰이었던 이즈라엘 카나우(Izrael Kanał)가 그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나치 내부에서도 유대인들 중 이 인물만큼은 신뢰가 두터웠는지 위의 사진처럼 나치의 고위 간부랑 찍은 사진도 존재하며, 1942년 독일 검찰에 의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난 1943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아 나치측에서 특사로 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나서 유대인 저항 단체인 유대군사연합(Jewish Military Union)과 유대저항조직이 게토를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나치의 간부들과 유대인 경찰들을 처형하자 청산가리를 먹고 음독자살했다.
4.2.2. 유대인 경찰 부국장 야쿠프 레이킨(Jakub Lejkin)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경찰'의 2인자였던 유대인 경찰이다.
자신의 직속 상관인 셰렌스키가 1942년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갔을 때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경찰국장 권한대행을 맡은 적도 있었다.
이 인물도 셰렌스키처럼 악랄한 유대인 경찰이었는지, 1942년 10월 29일에 유대저항조직 소속인 엘리아시 루잔스키(Eliasz Różański)에 의해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암살 당한다.
5. 트레블링카 봉기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존더코만도들은 오랫동안 봉기를 준비했다. 폴란드군의 군의관이던 율리안 호롱지츠키(Julian Chorążycki)는 트레블링카 SS 의무실에서 근무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봉기를 계획하고 인원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노란색 인원이 모은 돈을 받아 경비병을 매수하려 했으나 1943년 4월 안타깝게도 수용소 간부에게 의심을 사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독을 먹고 자살해 비밀을 유지했다. 그 뒤 역시 폴란드군 군의관이었던 베레크 라이헤르(Berek Lajcher)가 리더를 이어받았고 6월 15일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그러나 계획은 연기되었는데, 당시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진압된 이후 이곳으로 보내진 봉기군 중 하나가 수류탄을 숨겨와 탈의실 주변에서 터뜨려 SS를 여럿 죽였다. 이 사건으로 패닉에 빠진 SS는 수용소의 경계를 강화했고 수용소로 들어오는 희생자를 대폭 줄였다.[21] 하지만 일감이 줄면서 존더코만도들은 쓸모가 없어진 자신들이 곧 다음 차례라는 걸 직감했고 더는 계획을 지체하지 못했다.
1943년 8월 2일 40명의 경비병들이 근처에 휴가를 보내러 떠난 사이 존더코만도들은 무장 봉기를 개시했다. 복제한 열쇠를 이용해 무기고의 문을 연 이들은 20정의 소총과 20개의 수류탄, 그리고 소정의 권총으로 무장해 경비병들을 공격했다. 700명의 존더코만도들은 수용소 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가스 처형의 원료인 석유 저장고를 폭파 시키며 분전했지만 무기가 너무 적었고 이들 중 리더였던 라이헤르를 포함 500명이 수용소 내에서 전사했다. 200명이 살아남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화선을 미처 끊지 못했기 때문에 수용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은 주변 부대에 지원을 요청해 이들의 탈출을 막았다. 이들 중 절반이 추격 당해 사망했지만 나머지 약 70여 명은 폴란드 국내군에 의해 구조되거나 현지 마을에서 숨겨준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종전까지 생존한 사람은 단 67명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칼만 타이그만(Kalman Taigman)이란 분은 후일 트레블링카의 존더코만도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지옥. 완전한 지옥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절대 상상하지 못한다. 살인자들, 작은 것까지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모두 죽이는 뼛속까지 살인자인 놈들."[22]
"It was hell, absolutely hell. A normal man cannot imagine how a living person could have lived through it – killers, natural-born killers, who without a trace of remorse just murdered every little thing." #
"It was hell, absolutely hell. A normal man cannot imagine how a living person could have lived through it – killers, natural-born killers, who without a trace of remorse just murdered every little thing." #
6. 폐쇄와 발견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한동안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학살을 계속했고, 8월 21일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이송된 유대인들을 마지막으로 살해한 뒤 트레블링카에서의 학살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트레블링카 봉기로 인해 수용소 시설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있었고 수용소 운영을 계속하다간 또 다시 대규모 봉기가 터질 위험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중부 폴란드의 유대인 거의 전부가 트레블링카에서 사라진 뒤였기에 루블린의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cnik)은 어차피 없애야 될 이 수용소를 좀 더 빨리 없애기로 했다. 8월 말 루블린에서는 프란츠 슈탕글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을 보조하는 임무를 내려 트리에스테로 발령냈고 부수용소장이던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를 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새 수용소장의 지휘 하에 수용소 해체가 시작되었다. SS는 남아있던 존더코만도들에게 시설을 완전히 없애도록 해 증거를 인멸했다. 가스실은 벽돌 단위로 해체되었고 바로 그 자리에 해체된 벽돌로 농가를 세우고 주변에 루피너스라는 꽃을 심어 농장처럼 만들어 수용소의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인 SS 경비병 한 명을 가족들과 함께 상주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주변 지역에 있던 약 700채의 민가들까지 완전히 파괴해 없앴다.트레블링카의 해체가 거의 완료되어가던 1943년 10월 19일 폴란드 유대인이 거진 절멸되었다고 본 폴란드 총독부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종료했다.[23] 이미 아우슈비츠의 학살 시설이 거대하게 완비되어 있었기에 나치는 유럽 전역에 아직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수용소 해체를 맡았던 마지막 존더코만도들은 차례차례 20~30명 단위로 총살되다 마지막 200명의 존더코만도가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되면서 모두 사망했다. 소비보르 역시 10월 14일 대규모 봉기가 성공하는 바람에 트레블링카처럼 해체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트레블링카와 자신들의 존더코만도들을 처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트레블링카 해체 후 대략 한 달 뒤 사라졌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몰아낸 소련군은 1944년 8월 16일 트레블링카에 입성했다. 소련군은 이곳에서 소량의 인골과 유품들을 찾아냈는데 소련의 나치 전쟁범죄 조사 위원회가 나와 조사를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전후 나치의 홀로코스트 정황이 명백해지면서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재차 단행되었다. 이때 참으로 추악한 일이 일어났는데, 희생자들의 금품을 찾고자 폴란드 각지에서 인간들이 찾아와 이곳의 땅을 헤집어놓았고 이 때문에 시체 소각 구덩이, 미처 꺼내지 않고 매장했던 시체의 유골 등이 엄청나게 드러났다. 이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절멸수용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1945년, 폴란드 각지의 한량들에 의해 파헤쳐진 트레블링카의 터.
↑ 역시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트레블링카의 마지막 흔적. 충격적이게도 땅 위에 드러난 하얀 것들은 사람 뼈다.
7. 희생자 수
최대의 게토인 바르샤바 게토, 역시 가장 큰 게토 중 하나였던 비아위스토크 게토의 유대인을 포함해 폴란드 중부의 유대인 거의 전부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제외한 5개 절멸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약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유대인은 봉기로 살아남은 67명을 제외하곤 모두 학살되었다고 추정되기에 트레블링카 이송 자료만 있다면 바로 희생자 수치로 더해지게 된다고 한다.↑ 회플러 전보(Höfle Telegram).[24] 확대 가능. 13/15의 숫자들을 보자. 큰 숫자들 위의 작은 숫자는 12월 31일 직전 2주간 각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수이다. L은 루블린(마이다네크), B는 베우제츠, S는 소비보르, T는 트레블링카를 나타낸다. 트레블링카의 경우 5가 하나 빠진 오타이다. 5를 추가할 경우 전체 합계인 127만 4166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 숫자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 보고서인 코어헤어 보고서(Korherr Report)[25]에 나온 것과도 일치한다.
1965년 마지막 수용소장 쿠르트 프란츠 재판 때에 뒤셀도르프 재판부는 트레블링카의 희생자 수로 70만을, 1970년 프란츠 슈탕글 재판 때엔 90만으로 늘려 인용했다. 하지만 여전히 150만까지 추정하는 학자도 있는 등 희생자 수 산출에 있어 편차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2000년 영국이 회플러 전보를 공개하면서 희생자 수를 좀 더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회플러 전보에 따르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단 5개월동안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희생자 수는 713,555명으로 트레블링카 희생자 수를 산출할 때 확정된 최소 수치로서 언급된다. 하지만 12월 11일부로 학살이 종료된 베우제츠와 달리 트레블링카는 학살 속도가 더뎌지긴 했어도 1943년 8월까지 학살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희생자가 71만 명보다 확실히 많을 것으로 추정해서 보통 80~90만 정도로 본다. 이에 따라 트레블링카 수용소 박물관은 80만을 인용하고 있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 박물관은 87만을 인용한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87만~92만으로 본다. 80만 이하를 인용하는 학자들은 항상 '최소'라는 단서를 붙이고, 일부 학자들은 120만까지로 보기도 하는데 이 수치는 신빙성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수치 중 최대치이다.
아우슈비츠가 절멸수용소로 개조된 이후 약 30개월 동안 110~130만이 학살되었는데 트레블링카에서는 단 13개월만에 80~90만(이들 중 70만은 5개월 동안)이 학살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 전후
아우슈비츠는 노동수용소의 기능도 겸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조금 있었던 데다 구조물 상당부분을 미처 파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넘쳐나서 전쟁 직후부터 광범위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트레블링카는 완전히 철거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해서 전쟁 직후 꽤 오랫동안 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던 루돌프 회스는 빠르게 조사를 받고 1947년 목이 매달렸지만 트레블링카의 간부들은 1940년대가 다 지나가도 학살 혐의조차 받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흘러 나치 사냥꾼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1964년 살아남은 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판이 진행되어 대부분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1967년에는 수용소장이던 프란츠 슈탕글이 잡혀 재판을 받았고 1970년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한편 1958년 폴란드 조각가 프란치셰크 두셴코가 가스실이 있던 자리에 8m 높이의 추모비를 세워주면서 트레블링카 추모지가 생겼다. 이후 추모지에는 17000개의 화강암을 땅에 박았는데, 이 17000이란 숫자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의 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돌들 중 몇몇에는 폴란드 도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철도 받침목이 추모지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것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들어가던 철도의 실제 받침목은 아니고 역시 60년대에 추모의 성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64년에는 폴란드의 국가 순교자 추모지로 지정되었는데, 이때의 행사에는 30,000명의 사람과 함께 트레블링카 봉기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참관했다.
'산 자들의 행진'[26]은 아우슈비츠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이루어지는데, 홀로코스트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하는 단체 유대인들은 보통 아우슈비츠로 가기 전날 트레블링카를 먼저 들러 산 자들의 행진 행사를 한다고 한다.
종전까지 살아남은 존더코만도 중 마지막 생존자인 사무엘 빌렌베르크가 2016년 예루살렘에서 9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기사.
[1]
수용소 관리 인원의 '정신 건강'을 위해 SS는 수용소에 소규모 동물원을 만들었다. 사실 건물 하나 규모의 사육장으로 동물'원'이라 할 수는 없었고 새 몇 마리, 주변 숲에서 잡아온
여우 등의 동물들을 키웠다고 한다.
[2]
학살은 1943년 8월까지. 나머지 기간은 수용소 해체 기간.
[3]
아우슈비츠는 절멸수용소 겸 노동수용소여서 잠시 동안이라도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수용소 규모가 크고 건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며, 라인하르트 작전 하 절멸수용소 폐쇄(1943년 11월경) 후에도 1년 이상 유대인 학살을 계속했기 때문에 구조물을 모두 파기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의 간부들은 전후 신속히 조사를 받고 처벌될 수 있었으나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즉시 모두 학살했기 때문에 이런 구조물이 필요 없었고, 극소수의 존더코만도와 주둔군만 수용할 시설 그리고 학살장만 갖추면 되었기 때문에 증거 파기가 무척 쉬웠던 데다 여유 시간도 많았다.
[4]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 총독부 영역.
[5]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총독부 영역에 추가됨.
[6]
트레블링카 II 수용소보다 더 일찍 건설되어 더 오래 운영되면서 20만여 명이 거쳐갔다.
[7]
체르니아코프는 전쟁 직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기를 썼는데, 유대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유대인을 구해낼 수는 없었지만 일기로써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대인들이 겪고 있던 일을 기록했다. 유대인 게토의 참상을 특히 잘 담고 있는 이 일기장 역시
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다. 체르니아코프는 자살 직전 유대인위원회 동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내게는 힘이 없다. 애통하고 연민이 끓어 가슴이 떨린다. 이 모든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나의 행동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음을 모든 이가 알아줄 것이다."
[8]
그 후 1979년에 코르차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UN에서 세계 아동의 해를 제정하였다.
[9]
이텔릭체로 표기된 부분은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질문이다. 또한 강제 개행된 부분은 오류가 아니며 클로드 란츠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성했다.
[10]
친위대 하사 오토 슈타디에(Otto Stadie)를 의미한다. 희생자들을 트레블링카 역에서 가스실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11]
1942년 7월 22일 첫 이송 때부터 주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죽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상했다고 한다. 이들을 죽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죽일지는 몰랐으며, 이토록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한 번에 죽인다는 것에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수용소 주변의 보안이 아직 철저하지 못해서 일부 주민들이 수용소 내에서 들리는 끔찍한 비명,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듣고 주변 언덕에 올라가 희미하게나마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고 하며 가끔
우크라이나 경비병이 와서 총을 겨누며 돌아가라고 했다 한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수용소장 교체 후엔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오는 즉시 사살하게 했다.
[12]
총살을 위한 위장 양호실 '라자렛(lazaret)'이 아니라 진짜 경미한 부상이나 가벼운 병에 걸린 존더코만도가 일을 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수용소 운영 초기 간부들은 부상이나 병증이 있는 존더코만도는 발견 족족 '라자렛(lazaret)'으로 끌고 가 총살했지만, 수용소 운영에 요긴한 '전문 인력'에 결핍이 발생하고 트레블링카로 오는 수송에 공백기가 발생하자 경미한 부상이나 가벼운 병이 있는 존더코만도에 한해서 최대 3일 간의 휴식을 허락했다. 물론 그 기간 내에 낫지 않는 수감자는 '라자렛'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물론 제대로 된 의약품이나 전문적인 치료는 제공되지 않았고 존더코만도 중 선발된 1명의 '
간호사'의 보살핌 아래 침대에 누워 쉴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단, 존더코만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의약품 약간을 훔쳐 의무실에 있는 존더코만도 환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긴 했다.
[13]
강제개행된 부분은 오류가 아니며,
클로드 란츠만이 일부러 그렇게 구성했다. 이탤릭체 부분은 란츠만 본인의 대사다.
[14]
물론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90만 가까운 사람 중에 존더코만도로 뽑히는 사람 수는 극히 적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렇게 뽑힌 존더코만도들도 더 강해보이는 유대인이 들어오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처형되었다.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사람 중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트레블링카 봉기에서 살아남은 67명의 존더코만도뿐이었다.
[15]
가스 주입은 독일인 SS가 우크라이나 경비병에게 "이반, 물!"이라 소리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 디젤 엔진을 돌려 그 배기가스를 주입하게 했다고 한다.
[16]
1943년 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경우 가스실 건물이 5개 있었고 각 건물마다 가스실이 하나씩만 있었지만 그 가스실 하나하나가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의 가스실보다 압도적으로 컸고 시체 소각로까지 한 건물에 통합되어 정말 공장과 같이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학살 효율은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보다 훨씬 높았다. 이 가스실들은 라인하르트 계획이 한창 시행 중이던 1943년 3월 완공되었다. 나치는 대량학살장이 많으면 증거인멸에 좋지 못했기 때문에 되도록 절멸수용소를 줄이려 했는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학살 효율이 대단히 높은 데다 1943년 말이 되면 라인하르트 계획으로 폴란드 유대인 거의 전부를 절멸 시킨 터라 비교적 이르게 계획을 종료 시킨 뒤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만 남기고
폴란드 내 절멸수용소들을 폐쇄했다. 폴란드 유대인이 거의 사라진 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유럽 각지의 유대인, 그 중
헝가리 유대인을 집중적으로 학살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희생자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집단도 헝가리인인데 약 110만의 희생자 중 45만 명이 헝가리인이었다. 폴란드 유대인 희생자는 30만, 비 유대계 폴란드인은 7만 명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디젤 엔진이 작동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밤새도록 서 있어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출처]
클로드 란츠만,
쇼아, 필로소픽, 153 ~ 154p.
[18]
프랑스의 유대인 감독 클로드 란츠만(Claude Lanzmann)이 1985년 절멸수용소의 유대인 생존자들, 현지 폴란드인, 일부 살아남은 나치 간부, 홀로코스트 학자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모아 만든 9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당시를 직접 기록한 시각 자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증언과 인터뷰로만 구성되었으며, 생존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도록 일부러 당시 그들이 하던 일들을 비슷하게 재연하게 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중 하나지만, 감독이 '
반유대주의적인 폴란드'의 시각을 가지고서 홀로코스트 당시의 폴란드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구성을 해 큰 논란이 되었다. 홀로코스트와 폴란드인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골치 아픈 논쟁거리인데, 확실한 건 당시의 폴란드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긍정적이었는지 또는 부정적이었는지 어느 한 가지로 칼 같이 단정해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인종이 뭐건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건 어딜 가나 똑같다. 더군다나 인간의 극과 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이레나 샌들러 같이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도운 의인도 있었지만 SS에 부역한 자도 있었고, 유대인들을 추방해줬다며 좋아하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을 보고서 쇼아를 찾아보실 분이 있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할 것이다.
[19]
인터뷰는 1976년 4월 27일 다큐멘터리 제작 초기에 수호멜에게 500 도이치 마르크(약 300달러)를 지불하고 영상으로 기록하지 않을 것, 그리고 수호멜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란츠만은 인터뷰 장소에 몰래카메라를 숨겨 인터뷰를 모두 영상으로 기록했고 그의 작품에 영상 일부를 담았다. 전범이었던 수호멜이 란츠만의 이런 행동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쇼아 상영 이후 일부 학자들이 이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20]
Otto Stadie. 수용소장의 행정 보조관이었다.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 받았다.
[21]
게토 봉기 진압 후 트레블링카로 이송될 예정이던 약 50,000명의 유대인들은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2]
그는 1942년 말 19세에 트레블링카로 보내져서 존더코만도가 된 뒤 무려 8개월 이상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일했다.
[23]
라인하르트 계획이 종료된 뒤 뒤이은 반란이 두려웠던 루블린 사령부는 다시 절멸수용소를 가동하는 대신, 루블린 게토와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아직 남아있던 약 43,000명의 유대인들을 '수확제 작전(Aktion Erntefest)'이란 끔찍한 이름으로 1943년 11월 3일과 4일 단 이틀만에 모두 총살했다. 희생자 수치가 불확실한 볼라 학살을 제외하고 나치가 저지른 단일 집단학살 중 가장 규모가 큰 학살이다.
[24]
SS 돌격대지도자 헤르만 회플러가 1943년 1월 11일 베를린의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보낸 일급 기밀의 전보로 1942년 12월 31일까지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워진 절멸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수를 보고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이 입수한 독일의 자료들 중에서 2000년 기밀 해체되어 공개되었다. 에니그마로 작성되어 상당히 암호화 되어있어서 각 수용소들은 이니셜로만 표기되었는데(예를 들어 트레블링카는 T, 베우제츠는 B), 영국의 암호 해독가들이 해독했다.
[25]
1943년 1월 SS 통계국장 리하르트 코어헤어가
하인리히 힘러에게 보낸 보고서로 1939년부터 1942년 12월 31일까지 폴란드 총독부와 바르테란트 관구에서 학살된 유대인 수를 보고한 자료이다. 이 보고서에도 폴란드 총독부의 4개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 수는 127만 4166명으로 나온다.
[26]
March of the Living. 홀로코스트를 추모하기 위해 전 세계의 유대인 청소년들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아우슈비츠에서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 행진하는 교육 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