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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3:04:07

우크라이나 교향곡

1. 개요2. 발견3. 진짜 작곡가는?4. 왜 역(逆)도용을 했나?5. 소련 정부의 책임6. 이후7. 여담

1. 개요

옛 양식에 의한 우크라이나 교향곡 G단조
Ukrainische Sinfonie im alten Stil g-moll
Ukrainian Symphony in the old style in G minor


1948년에 발견된 소련 음악사 사상 최초의 교향곡으로 여겨진 곡.

2. 발견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국립극장 자료실에서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한 이는 유대인 작곡가인 미하일 골드시테인(Михаил Гольдштейн)이었다. 그는 작곡 활동 외에 도서관 사서로도 일하고 있었는데 오데사 음악원과 국립극장의 고문서 보관소와 자료실 소장 문서를 조사하다가 찾아냈다고 밝혔다.

발견된 자필보에 있던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교향곡 제21번, 미콜라 옵샤니코-쿨리콥스키(Микола Овсянико-Куликовский, 1768-1846)가 1809년에 작곡. 오데사 극장에 헌정함."
골드시테인은 이 곡의 작곡자인 옵샤니코-쿨리콥스키에 대한 조사 결과도 같이 발표했다. 비록 자료 미비로 많은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지만 헤르손 지구의 대지주로 예술 후원과 작곡 활동을 취미로 삼아 20여 곡의 교향곡을 비롯한 작품을 남겼고 1810년에 오데사 극장을 위한 전속 관현악단을 조직해 헌납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교향곡이 발견되기 전까지 소련 음악사에서 최초 교향곡으로 기록된 곡은 '러시아 5인조'의 멤버들이었던 알렉산드르 보로딘 혹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곡 제1번이었지만 서구의 클래식 유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 초에 교향곡이 나왔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고 곧 소련의 음악적 자존심을 드높이는 대발견으로 대서특필되었다.

곡은 고전적인 3악장 형식으로 간결하게 작곡되었지만 곳곳에서 우크라이나 민요의 어법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마지막 3악장은 카자크 춤곡의 리듬과 멜로디를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뚜렷한 민족성의 표출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몇십 년 후에야 동유럽 지역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던 '국민악파'의 작풍을 일찌감치 예견한 놀라운 작품이기도 했다.

이 곡은 발견된 이듬해인 1949년에 오데사와 키예프에서 연주되었는데 곡이 작곡되고 초연된 지 140년 만의 재연이었다. 1951년에는 소련 국립 음악출판소에서 악보가 간행되었고 3년 뒤인 1954년에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지휘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소련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서 첫 녹음을 취입했다.

동시에 음악학자들이 이 곡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는 일도 많아졌는데 그 중 키예프 음악원의 작곡 교수이자 음악학자인 글레브 타라노프가 골드시테인이 발견했다는 옵샤니코-쿨리콥스키의 자필보를 분석해 발표한 논문도 있었지만 이 논문은 그야말로 충공깽의 진실을 밝히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3. 진짜 작곡가는?

오랜 연구 끝에 타라노프가 내린 결론은 '이 곡은 옵샤니코-쿨리콥스키의 작품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곡이 옵샤니코-쿨리콥스키 작품이라는 골드시테인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여 소련 최초의 교향곡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소련 문화성을 비롯한 당국자들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결론이었는데 그들은 곡의 최초 발견자였던 골드시테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골드시테인은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그 교향곡, 사실 내가 썼소."

4. 왜 역(逆)도용을 했나?

1917년 오데사에서 태어난 골드시테인은 원래 바이올린 연주가를 지망했지만 손을 다치는 바람에 꿈을 접고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어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었는데 유대인에 대해 공격적이고 부정적이었던 평단에서는 골드시테인의 작품을 3류라고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다.[1]

비평들은 대개 '우크라이나 전통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이 엉터리로 버무려 만든 졸작' 이라는 논지였는데 골드시테인은 '비록 러시아인은 아니었지만, 베토벤도 자신의 현악 4중주곡에서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사용해 걸작을 만들었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돌아온 비평가의 대답은 정신승리 그 자체였다.
"베토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모든 예술 활동이 국가와 당의 통제 밑에서 이루어지던 소련 사회에서 비평계로부터 부정적인 평을 받는다는 것은 작곡 활동 자체 뿐 아니라 음악가로서 생계를 영위하기가 무척 힘들어진다는 문제를 낳았다. 골드시테인은 자신을 혹평한 비평가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몰래 역관광 계획을 세웠고 결국 생각한 것이 이 역도용이었다.

골드시테인은 사서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고문서를 쉽게 열람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을 살려 비교적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오선보에 고전 형식으로 교향곡 하나를 작곡해 좀 드물어 보이는 이름의 가공 인물을 만들어 작곡가로 써넣었다. 웬만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곡의 진위를 파악하기는 힘들었고, 결국 소련 정부는 제대로 낚여 버리고 말았다.

5. 소련 정부의 책임

물론 이 낚시 사건의 1차적인 책임은 역도용을 했던 골드시테인에게 있었지만 소련 정부라고 떳떳하게 고개 들고 있을 입장도 아니었다.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선전부터 때리고 보자는 막무가내식 논리로 인해 일개 음악인에게 너무 어이없게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스탈린 집권기 이후 소련 사회의 경직성과 선전 중심의 사회 분위기로 볼 수 있는데 사회주의 대국으로 이미지를 일신하기 위해 온갖 '최초의 발견' 사례를 마구잡이로 끼워맞췄고 이 과정에서 교육 활동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엉터리 선전에 무방비로 이용되었다. 가령 시베리아에서 매머드 화석이 발견된 점을 들어 ' 러시아 코끼리의 고향이었다'고 가르친다거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프랑스에서 들여온 바게트를 '도시 빵' 이라고 멋대로 이름을 바꿔 사전에 싣는 등 온갖 왜곡과 날조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교향곡' 이라는 수식어는 뭐든지 최초 혹은 최고임을 과시하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소련 사회에서 충분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골드시테인의 역도용 낚시는 매우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 곡의 금관악기 파트 악보들에 당시의 악기들로는 연주하기 불가능한 대목이 많았다는 등의 실증적인 의혹 제기[2]도 소련 정부의 자뻑 가득한 선전 공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6. 이후

골드시테인은 옵샤니코-쿨리콥스키 명의의 교향곡 외에도 비슷한 사례의 역도작을 했음을 추가로 폭로했는데 자신이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공표한 밀리 발라키레프의 '즉흥곡' 과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알붐블라트(소곡)'도 자작곡이었고 1963년에 열린 전 소련 작곡 경연대회에서도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해 입상했다는 것까지 추가로 밝혀졌다.

소련 정부는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렸고 마침내 골드시테인 일가를 '희대의 사기꾼이자 반역자' 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골드시테인 자신뿐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 한창 활동하던 동생 보리스 골드시테인마저 연주 활동을 금지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두 형제는 1963년에 동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물론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미하일은 이후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영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서독에 정착해 1989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골드시테인이 이주함과 동시에 그가 실명으로든 가명으로든 작곡한 모든 작품의 악보 발행과 공연, 녹음, 방송은 소련 내에서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이미 해외로 반출된 악보와 음반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골드시테인 자신도 서독에 정착한 후 함부르크의 시코르스키 음악출판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 교향곡 악보를 다시 출판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골드시테인 작품에 대한 금지령도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그와 그의 작품은 러시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골드시테인의 고향이었고,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는 평가가 비교적 후한 편이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이 녹음한 음원도 1996년에 같은 레이블인 멜로디야에서 CD로 재발매되었는데 이 때도 초판 LP와 마찬가지로 옵샤니코-쿨리콥스키의 교향곡 제21번으로 표기되어 나왔다. 정신 못 차렸구만 그나마 해설지에는 이 곡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고 있다지만.

하지만 소련뿐 아니라 서방에서도 이 곡이 연주되는 빈도는 지극히 낮았으며 녹음도 거의 전무했다. 지금도 이 곡을 음반으로 들으려면 므라빈스키의 멜로디야 음원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한 때 베토벤 작품으로 여겨졌던 예나 교향곡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쪽은 분명한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사례라서 흑역사로 남을 듯하다.

7. 여담


사실 '우크라이나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교향곡은 이 곡 외에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2번 교향곡이다. 이 작품은 8년 이상의 오랜 고민과 수정 끝에 1880년에 완성된 곡으로 4악장으로 이뤄진 교향곡이다. 작품 전체에 우크라이나 민요를 직·간접적으로 사용한 이 작품을 들은 차이콥스키의 친구이자 음악평론가였던 니콜라이 카슈킨은 " 소러시아, 우크라이나"라는 제목을 붙여 줬다. 이후 이 곡은 소러시아/우크라이나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차이콥스키는 이례적으로 세 개의 우크라이나 민요를 인용하고 있는데 차이콥스키 문서에도 나오듯이 그의 본래 뿌리가 우크라이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뿌리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확고한 생각과 애정으로 작품을 만들고 연주했다는 것을 단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소러시아라는 제목이 많이 쓰였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자 차이콥스키의 본래 의도대로 우크라이나라는 제목을 쓰는 게 맞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

이런 식의 역(逆)도용을 행한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프리츠 크라이슬러를 들 수 있다. 크라이슬러도 자작곡에 대해 '그딴 걸 쓸 시간에 공연 한 번 더 하라'는 식의 야유를 들은 데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이라 동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1] 나치 독일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고 해도 소련도 유대인에게 관대한 곳은 아니었다. 소련은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공산주의 사상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유대인을 박해해선 안 된다고 했지만 유대인은 공산주의가 싫어하는 강렬한 민족성 + 깊은 신앙심으로 인해 소련에서도 탄압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에 지식인과 예술인을 포함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스탈린 베리야의 사주로 암살되거나 적국 첩자로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마찬가지로 비밀스러운 탄압이 계속 가해지고 있었다. [2] 대표적으로 2악장에서 트럼펫 듀엣으로 연주되는 주제. 당시 트럼펫은 밸브가 없는 내추럴 트럼펫이어서 그저 배음열 내의 음들만 제한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나오는 주제는 밸브 트럼펫 아니면 연주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