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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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延年생몰연도 미상
전조의 인물. 자는 계해(季海). 서주 광릉군(廣陵郡) 강도현(江都縣) 출신.
2. 생애
왕연년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불행히도 양친을 모두 잃는 상을 당하고 말았다. 왕연년은 상 중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고, 흐느끼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슬퍼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을 뿐이었다. 이후 상을 마치고 숙부를 봉양하면서 다시 효자로 이름을 높였다.어느 날, 마을에 도적이 들어 숙부의 외손자를 포함한 왕연년의 사촌동생들이 납치당하는 일이 있었다. 왕연년은 스스로 숙부의 외손자만이라도 구하겠다 청하고, 직접 도적의 소굴로 찾아가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어릴 적에 고아가 되었으나, 저희 숙부께서 저를 거두어 양육해주셨습니다. 제가 대신 남을 테니 부디 저 숙부의 외손자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에 감명받은 도적들은 왕연년을 의사(義士)라 칭송하면서 왕연년과 외손자를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훗날 왕연년은 전조의 조정에 임관하였고, 관직은 태재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