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나무위키:프로젝트/중국 근현대사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신사군 군장 | ||
본명 | 예웨이쑨(葉為詢) | |
정체 | 葉挺 | |
간체 | 叶挺 | |
한국식 독음 | 엽정 | |
영문 | Ye Ting | |
자 | 희이(希夷) | |
출생 | 1896년 9월 10일 청나라 광둥성 꾸이산 현 | |
사망 | 1946년 4월 8일 중화민국 산시성 흥현 헤이차산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보정 육군사관학교 졸업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없음( 무신론) |
[clearfix]
1. 개요
중국공산당의 군인, 정치가. 1924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듬해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했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국민혁명군의 초공작전에 맞서 싸웠고 중일전쟁 시기 신사군의 지휘관을 맡아 국민혁명군과 협력했다. 그러나 환남사변 때 국민혁명군에게 붙들려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6년 석방된 후 보구 등과 함께 옌안으로 돌아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예팅은 1896년 9월 10일 청나라 광둥성 꾸이산 현에서 태어났다. 예팅의 조상은 허난 엽현에서 남쪽으로 방랑하다가 증조부 시기에 꾸이산 현에 정착했다. 예팅의 조부 예한초(葉漢初)는 의술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을 진료했고 아버지 예씨산(葉錫三)은 젊은 시절에 바다를 건너 말레시아로 가서 농장에서 일하며 열대 과일 재배 기술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지 11묘에 열대 나무를 재배해 생계를 꾸렸다.예팅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농지를 경작했고 여섯살 때 마을 학당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11년엔 혜주부(惠州府)의 소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1911년 4월 27일 동맹회 일파가 광저우에서 봉기했다가 모두 사살된 '황화강 사건(黃花岡事件)'의 영향을 받고 앞장서서 변발을 잘랐다가 학교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 그후 그는 혜주 중학당에 들어가 공부했고 신해혁명이 터질 무렵엔 2살 더 많은 황춘(黃春)과 결혼했다.
예팅은 1912년 광저우의 육군 소학교에 입학해 1914년 12월에 졸업하고 허베이로 올라가 허베이 육군 제2예비학교에 입학해 군사 관련 지식을 익혔다. 그후 그는 1916년 말 우등생 자격으로 보정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기에 <신청년> 등의 간행물을 읽고 공산주의가 제시한 이상향에 감명을 받아 중국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18년, 예팅은 보정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본래 유럽으로 유학가려고 했지만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그만뒀다. 이때 계계군벌의 루룽팅이 예팅을 혜양현 현장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예팅은 이를 거절했고, 1919년 쑨원과 광둥군 총사령부의 하자연(何子淵)의 추천으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1920년, 쑨원은 광둥군에게 계게군벌의 모룽신(莫榮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발발한 황피경 전역(黃皮徑戰役)에서, 예팅은 자신이 이끄는 부대보다 4배나 많은 적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격파해 광둥군 내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동년 10월에 공병영 부영장에 취임했고 1921년에는 건국 육해군 대원수부의 경호단 제2영장으로 전임되었다.
1922년 6월, 광둥군 총사령관 천중밍이 북벌을 고수하는 쑨원과 첨에한 갈등을 벌인 끝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통부를 포위했다. 이때 예팅은 총통부의 앞마당을 지켜서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그후 1924년에 소련으로 가서 동방 노동자 공산주의 대학에서 공부했고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12월, 예팅은 왕뤄페이(王若飛) 등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5년 2월엔 홍군 학교 중국반으로 전입하여 군사 과목을 공부했다.
2.2.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가담하다
1925년 9월, 예팅은 중국에 귀국해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장을 지낸 후 제4군 제12사단 제3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간부 훈련과 신병 훈련 계획을 제정하여 부대에 대해 "사조(四操)", "삼강(三講)" 정책을 시행해 군율을 확고히 잡았다. 특히 그는 정치 교육을 중시해 부대 내에서 부정부패와 탐욕 척결 운동을 전개했다.1926년 1월 중순, 예팅은 국민혁명군의 하이난 섬 공격에 참여했고 5월에 북벌의 선봉을 맡아 허난 전선으로 진군해 우페이푸의 직예군벌군과 맞붙었다. 그의 군대는 6월 5일 이틀 간의 전투 끝에 허난 유셴성(攸縣城)을 공략했고 8월에 허베이 함녕 정사교 공략전에 참가해 정사교의 후방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정찰한 후 이 길을 통해 적의 후방을 습격해 승리를 거뒀다.
1926년 8월 3일, 국민혁명군 제4군, 7군이 직예군벌군과 하승교에서 맞붙었다. 이때 예팅의 군대가 먼저 적의 진영을 점령하자, 각 부대는 즉시 전과를 확대해 하승교를 공략했다. 그후 9월엔 우창을 포위해 성벽을 폭파시키는 작전을 지휘했다. 예팅은 이같이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북벌 명장'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가 속한 제4군은 '철군(鐵軍)'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우창 공략전에서 예팅의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1영 영장 카오우안(曹淵)이 전사했다. 그런데 북벌군 2사단장 류즈(劉峙)는 우창 공략전에 가담하지 않다가 우창이 점령되었을 때 제일 먼저 우창에 입성해버렸고, 국민당은 도시에 먼저 입성한 류즈를 우한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 예팅은 당의 이같은 결정에 화가 나 육군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가족과 재회했다가 반년간 당의 조사를 받는 처분을 받았다.
1927년 1월, 국민정부는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이전해 사무를 봤고 국민혁명군은 편재를 확대 개편했다. 이때 에팅은 제25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뒤이어 11군 제24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에게 현상금을 걸면서도 북벌을 지속하기로 했다. 이에 에팅은 우한 정부군의 북벌에 가담했고 우한 정부에 반기를 든 하두인(夏斗寅)을 격파했다. 이후 그는 6월에 11군 부군장을 겸임했다.
2.3. 국민정부의 초공작전에 맞서다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가 이끄는 우한 정부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결정했다. 이에 7월 19일 중국 공산당 및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한 정부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단번에 진압되었고 우한 정부는 7월 26일 각 기관의 중국 공산당 당원들을 해임하는 조치를취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자체 무장 조직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예팅은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 허룽, 주더 등과 함께 난창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일시적으로 성공해 난창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국민 정부가 곧바로 반격을 가해왔고, 8월 3일에 홍군은 난창에서 광둥성으로 남하했으나 그 과정에서 국민혁명군과 광둥군, 현지 주민들의 습격을 받으며 점차 지리멸렬해졌다.홍군이 광둥성 다푸현의 산허바(三河壩)에 도착한 후, 저우언라이는 주력을 챠오산(潮汕) 지역으로 남하시키고 소련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이후 예팅은 주더와 함께 삼허바에 남아 적의 추격을 막았고 9월 23일부터 10월 2일까지 남하해 챠오산에 도착했다. 이후 챠오산 전투 과정에서 한때 챠오산 지역을 공략하는 듯 했으나 끝내 대패하고 말았고 홍군의 잔여 병력은 광저우로 퇴각했다. 이때 예팅은 중병에 걸린 저우언라이와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1927년 12월 11일, 예팅은 홍콩에서 광저우로 돌아와 공농홍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광저우에서 즉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민테른에서 파견온 독일인 공산주의자 하인츠 노이만(Heinz Neumann)으로부터 '패배주의자'라는 호된 질책을 받았다. 12월 12일, 국민혁명군과 현지 군대가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타이레이(張太雷)와 노이만은 반격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관음산으로 차를 타고 갔다. 그러던 중 민명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장타이레이가 총에 맞아 숨졌고 홍군은 이로 인해 지리멸렬해졌다. 이후 장파쿠이가 이끄는 군대와 격렬한 시가전을 벌인 홍군은 완패를 면치 못하고 도주했다. 예팅은 이때 일반복을 착용하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이후 예팅은 1928년 홍콩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일본, 소련을 거쳐 중국에 귀환해 중국 공산당 제6차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리리싼과 왕밍에게 패배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군대를 저버리고 홍콩으로 도피한 행적 때문에 군무이탈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에팅은 이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공산당을 탈퇴한 뒤 독일로 망명했고, 거기서 독일 현지의 기사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때 에팅은 국민당 좌파세력의 일원인 덩옌다, 천여우런, 쑹칭링 등이 결성한 '제3당'에 합류했다.
1930년 봄, 저우언라이는 베를린으로 가서 예팅과 긴 대화를 나누며 혁명은 자기 자신을 고려해서는 안된다며 그에게 공산혁명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또한 독일에 체류하고 있던 랴오성즈(廖承志)도 예팅을 격려했다. 이후 예팅은 군사 문제를 집중 연구했으며 군사 공학과 군사화학을 연구했고 지뢰 제조 등의 기술을 배웠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에팅은 중국에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가을, 예팅은 마카오에 도착했으나 쉽사리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은거했다. 그러다가 1933년 11월, 예팅은 차이팅카이, 장광나이 등의 초청을 받고 푸저우로 가서 복건사변 이후 수립된 '중화중공 인민혁명정부'에 가담했고 중국 공산당 대표 장윈이(張雲逸)와 접촉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곧바로 진압에 착수해 중화중공 인민혁명정부를 붕괴시켰고, 예팅은 1934년 마카오로 돌아가 리지선과 천밍수 등이 조직한 중국 전국혁명 연맹에 가해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장제스는 예팅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초청했지만 예팅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터진 후, 예팅은 장파쿠이의 초청을 받아 서안으로 가서 장제스가 사살될지라도 봉천군벌을 무력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허잉친에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허잉친이 듣지 않자 별 소득 없이 떠났다.
2.4. 신사군의 지휘관
1939년 샹잉, 저우언라이, 예팅.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예팅은 상하이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그가 남방의 홍군 유격대를 이끌고 항일 전쟁에 참여하길 청했다. 예팅은 그의 요청에 동의를 표하며 새로 조직된 부대를 '신사군'으로 부르라고 건의했다. 이후 1937년 9월 28일, 국민정부는 국민혁명군 육군 신사군 군단장에 예팅을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측은 탈당한 적이 있는 예팅을 군단장에 임명하는 것에 꺼림칙해했고 보구와 예젠잉에게 "보증을 서라"고 요구했다.
1937년 11월 초, 예팅은 마오쩌둥의 초청으로 옌안을 방문했고, 마오쩌둥은 예팅이 리리싼, 왕밍 등의 과도한 비난으로 어쩔 수 없이 공산당을 탈당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했다. 예팅은 중앙당 학교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연설하며 자신이 탈당한 것에 대해 자책했고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당외 인사로 근무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후 예팅은 난징과 우한 사이를 오가며 신사군의 조직을 위해 편제와 무기, 군량미 확보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국민정부는 신사군의 편제와 월급을 정식으로 확정했다.
신사군은 난징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했고, 예팅은 국민혁명군 제4군대장으로서 장군 계급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주요 임무는 제3전구와의 협력과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예팅은 중국 공산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사군 핵심기밀과 관련된 중국 공산당위원회의 모든 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샹잉(項英)과 신사군의 일련의 전략 문제에 있어서 의견 차이를 보였고, 독일에서 체류하는 동안 채식주의자가 된 것에 대해서도 샹잉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1938년 6월 초, 예팅은 신사군의 자금 지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한으로 향했다. 그는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에게 신사군 상황을 보고하면서 자신이 군단장이지만 실권이 없어서 생기는 고충을 털어놓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사군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건의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즉시 신사군 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해 샹잉을 주임, 예팅을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신사군 위원회의 실제 역할을 미미했고 예팅은 여전히 발언권이 없었다. 예팅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중국 공산당 장강국에 전화를 걸어 군장직을 사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8월 8일, 왕밍, 저우언라이, 보구는 예팅을 찾아가 이를 만류했지만 예팅은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
그러던 중 샹잉이 옌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 6기 6중 전회에 참가했는데, 예팅은 그 사이에 군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1월 광둥성의 제1군단장 위한모우(余漢謀)는 예팅을 동강 유격전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공산주의자인 예팅이 동강에서 무장조직을 결성하는 걸 혀용하지 않았고 기회를 타서 신사군을 장악하려 했으며, 중국 공산당 역시 예팅이 신사군에 잔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즉시 충칭에서 에팅과 만나 설득해 신사군으로 복귀시켰다.
1939년 2월, 저우언라이는 안후이성 징현 운령에서 예팅 등 여러 군 장교들과 만나 신사군 수뇌부문제를 처리하면서 "남향을 굳건히 지키고 동쪽에서 전투를 벌이며 북쪽으로 나아가라"는 전략적 방침을 제시했다. 예팅은 1939년 3월 신사군의 대적 작전 보고서를 국민정부에게 보고했다. 그후 그는 5월에 북쪽으로 진군해 장강을 건너 신사군 제4지대 정비에 나섰으며 신사군 강북 지휘부를 구성했다. 이 때 그는 신사군 제4지대 사령관인 고경정(高敬亭)에게 양극지(楊克志), 조옥복(曹玉福)의 군무이탈 사건의 책임을 물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들어 고경정의 당적, 군적을 제적한 뒤 청룡장에서 처형했다.
그후 그는 충칭으로 가서 신사군 편제 비용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그의 요구를 거부하고 샹잉과의 관계가 제대로 개선되지 않자, 에팅은 다시 사직하고 마카오로 돌아갔다. 1940년 5월, 저우언라이의 권유를 받은 예팅은 신사군으로 돌아갔으며 그해 10월에 완난(皖南)에서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장제스로부터 칭찬받았다.
2.5. 환남사변
1940년 10월 19일, 허잉친, 바이충시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의로 신사군에게 한달 안에 황하 북쪽으로 이동하고 복건성과 산둥성의 두 지역과 북동쪽 국경 지역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공산당은 이를 거부하면서도 완남에 주둔한 신사군을 양쯔강 북쪽으로 이동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샹잉의 신사군은 그마저도 따르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았고, 신사군과 국민당군은 해군 노선과 안전 조치, 신속한 철수 경비와 보급 문제에 대해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국민정부의 제3전구는 처음에 서남 신사군에게 동진 후 쑤난에서 북상해 양쯔강을 건너는 노선을 허가했다. 그러나 1940년 11월 29일, 류사오치 등이 신사군이 계속 황하 이남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실시하게 했고, 이에 격노한 국민정부는 서남 신사군의 동진을 불허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측은 국민당이 제시한 직접 북상 방안을 음모로 간주했고 신사군은 동진을 거쳐 쑤난에서 북상하는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다가 국민정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중국 공산당 중앙은 샹잉, 예팅 등에게 철수를 계속 미루는 걸 비판하며 당장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샹잉은 12월 28일 회의를 열어 중앙이 지정한 북상 노선 대신 남쪽으로 돌아가 삼계, 닝궈, 천목산 등을 거쳐 장강으로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1월 4일 밤, 신사군 9000여 명은 경현 운령 지구를 출발해 강소 남부를 거쳐 장강 이북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부대가 무림 지역을 향해 진군하던 중 국민혁명군이 "신사군이 명령을 어기고 국군 제 40사단을 기습 공격했다"는 이유로 신사군 부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가했다. 제3전구의 제32집단군 만여 명이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신사군에 총공격을 가해왔고, 신사군은 삽시간에 완패했다. 신사군은 국민혁명군의 포위망 외곽 진지인 성담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나, 샹잉은 머뭇거리며 긴급회의를 거듭한 끝에 본영으로 되돌아갔다.
1월 9일, 부지휘관 샹잉과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 등이 무단으로 신사군 군영을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1일에 샹잉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예팅과 라오수스에게 지휘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후 에팅은 라오수스와 함께 분전했으나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 신사군 7천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고 말았으며, 결국 1월 14일 그는 3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국민혁명군의 포로가 되었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을 반군이라고 선포하고 예팅을 군사법정에 회부했다. 그후 예팅은 상라오(上饒) 이촌에 구금되었고 1941년 말에는 충칭으로 보내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에팅은 장제스로부터 전향 요구를 수차례 받았으나 거절했고 1943년 1월 허베이로 보내져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2.6. 최후
중일전쟁 이후, 예팅은 비밀리에 충칭으로 압송되었다. 그후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 협상 끝에, 1946년 3월 4일 한단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마파우(馬法五) 국민혁명군 제11전구 부사령관과 교환하는 조건하에 예팅이 석방되었다. 이튿날, 예팅은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 공산당에 재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3월 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예팅의 복귀를 허락했다. 이후 에팅은 보구, 왕뤄페이 등과 함께 미군 C-46 수송기를 타고 충칭시에서 출발해 옌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4월 8일 산시성 성현 헤이다산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중국공산당은 시신을 헤이다산에서 아라시현 공항으로 운구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옌안으로 이송하게 했다.현지인들은 사고 소식을 접한 뒤 영구를 가로막고 조문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진수분국은 비행장에서 성대한 추모식을 개최했고 마오쩌둥은 해방일보에 추도사를 발표하여 "인민을 위해 죽은 이들의 이름은 영원히 영광으로 남으리라."고 밝혔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으나 조사결과 단순한 사고사였음이 밝혀졌다.
3. 평가
중국공산당 주류사학은 예팅의 난창봉기 주동자로서의 활약과 중국 공산당의 홍군 창건에 뛰어난 공헌을 한 것을 높게 평가한다.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탄생한 후, 녜룽전은 천이(陳毅)에게 "예팅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신사군에서 두 명의 원수가 나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팅은 1989년 1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가 중 하나로 확정되었고 2009년 9월 신중국 영웅 100인의 모범 인물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예팅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가 1939년에 신사군 제4지대 지휘관 고경정을 처형한 일에 집중되었다. 해방군 군사과학원장 왕보일(王輔一)은 고경정은 무고를 당한 것이며 예팅은 공산당 중앙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장제스의 명령을 받들어 고경정에 대한 처형을 집행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고경정 처형 사건은 중국 공산당 내 분파 갈등이 촉발된 것이지 예팅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반박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4. 가족 관계
예팅은 1925년 리슈원(李秀文)과 결혼해 9명의 자식을 낳았다.- 장남 예정다(葉正大, 1927~2017)는 소련 모스크바 항공 연구소 항공 제조부를 졸업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제6기 연구소 부국장을 맡았으며 국방 과학 기술위원회 부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1988년에 중장 계급을 수여받았다.
- 2남 예정밍(葉正明, 1931~2003)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무부 과학기술 컨설턴트 및 중국 응용기술 응용협회 소장을 역임했다. 예정밍의 아들 예다잉(葉大鷹)은 화표장, 금계장, 백화장을 전부 수상한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 3남은 아기 때 죽었다.
- 4남 예화밍(葉華明)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지상 미사일 개발에 관한 전문가이며 선전셴커그룹 회장이다.
- 장녀이자 다섯째 자식인 예양메이(1935~1946)는 부모와 함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 딸 예젠메이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 아들 예정광은 류허에너지투자그룹의 회장이다.
- 아들 예치광은 새격그룹에서 기계부 부장으로 근무했다.
- 막내아들 예아지우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모와 함께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