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山田右衛門作생몰년도 미상
일본 에도 시대의 인물. 시마바라의 난의 내통자이자 동시에 유일한 생존자.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요모사쿠(与茂作), 호는 유안(祐庵) 혹은 고안(古庵)이었고, 세례명은 조안( 요한) 혹은 리노였다. 위키피디아 이에키 히로타카(家木裕隆)의 논문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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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쿠사 시로 진중기, 야마다 에모사쿠 作[1][2] |
정확한 생몰년도는 불명이나[3] 10살부터 포르투갈 출신의 사람에게 서양화 그리는 법을 배워[4] 시마바라의 번주들이었던 아리마 나오즈미, 마츠쿠라 시게마사, 마츠쿠라 카츠이에를 섬기는[5] 전속 서양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는 히젠(현 나가사키 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던 마을 쿠치노츠[6]의 촌장으로 살고 있었는데, 머지않아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한다.
加津佐の理右衛門が大将となって私の家を取り巻いて焼き払おうとしたので、
いろいろ詫び言してのがれましたが、二十八日には又押し寄せて息子を人質にとりましたので仕方なく乱に加わりました
카즈사의 리에몬이 대장이 되어 저의 집을 둘러싸고 태우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둘러대서 겨우 빠져나갔으나, 28일째에는 다시 몰려와 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에 가담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번의 사람에게 에모사쿠가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츠루타 쿠라조(鶴田倉造)의 저서 Q&A 아마쿠사 시로와 시마바라의 난(Q&A 天草四郎と島原の乱)에서 발췌
いろいろ詫び言してのがれましたが、二十八日には又押し寄せて息子を人質にとりましたので仕方なく乱に加わりました
카즈사의 리에몬이 대장이 되어 저의 집을 둘러싸고 태우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둘러대서 겨우 빠져나갔으나, 28일째에는 다시 몰려와 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에 가담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번의 사람에게 에모사쿠가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츠루타 쿠라조(鶴田倉造)의 저서 Q&A 아마쿠사 시로와 시마바라의 난(Q&A 天草四郎と島原の乱)에서 발췌
처자식을 인질로 잡혀 반란에 억지로 가담하게 된 에모사쿠는 마을 사람들 전원과 함께 성에서 농성하는 처지가 되었다. 글을 쓸 줄 안다는 식자층이라는 이유로 지도자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 바로 다음 가는 지위인 부장에 앉혀진 에모사쿠는 반란군을 위한 깃발에 그림을 그리거나,[7] 야부미[8]의 내용을 작성하는 일을 도맡게 되었다.
総攻撃の日時をあらかじめ知らせて下されば、わたしの手の者で城中に火をつけて回り、
混乱のなか船で落ち延びさせると偽り、四郎時貞を生け捕りにして進ぜましょう
총공격할 때를 미리 알려 주시면, 제 수하로 하여금 성안에 불을 지르고 돌아다니게 하고선
혼란해질 때를 틈타 시로 도키사다에게 배로 달아나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생포하여 투항하겠습니다.
에모사쿠가 썼지만 전해지지 못한,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생포 작전의 일부.
아무도 몰랐던 일본사 그 후의 전말(誰も知らなかった日本史 その後の顚末)에서 발췌
混乱のなか船で落ち延びさせると偽り、四郎時貞を生け捕りにして進ぜましょう
총공격할 때를 미리 알려 주시면, 제 수하로 하여금 성안에 불을 지르고 돌아다니게 하고선
혼란해질 때를 틈타 시로 도키사다에게 배로 달아나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생포하여 투항하겠습니다.
에모사쿠가 썼지만 전해지지 못한,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생포 작전의 일부.
아무도 몰랐던 일본사 그 후의 전말(誰も知らなかった日本史 その後の顚末)에서 발췌
수비대장으로서 2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기도 했으나, 어떻게든 반란군에서 빠져나갈 틈만 노리던 에모사쿠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막부군과 내통하며[9] 식량과 탄약이 다 떨어져가던 성 내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물론, 처자식을 구해줄 것과 자신처럼 반란군에 억지로 가담하게 된 민간인들을 구해달라는 내용[10]을 보내왔으나 이내 아마쿠사 시로 생포 작전을 담은 야부미가 발각되고 만다. 스파이 혐의로 하라 성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모자라 온 병력이 집중되는 성의 광장에서 반란군들에게 처자식이 살해당하고 뒤늦게 들이닥친 막부군에게 에모사쿠 본인도 처형당할 뻔하나, 그동안 보내왔던 야부미를 보여줘서 자신의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11] 에모사쿠를 본 마츠다이라 노부츠나가 애써 살려주었다고도 한다.
난이 진압된 후에는 에도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고,[12] 그 후 키리시탄들을 감별하고 수사하는 말단 관리[13]로서 에도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4] 노부츠나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 후로는 그림 솜씨를 살려 형벌을 받는 방화범이나 처형당한 키리시탄을 그림으로서 일종의 범죄예방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저잣거리에 에모사쿠의 그림이 공고로 붙여질 때면 범죄율이 잠시 낮아졌을 정도라고 하니 상당히 잘 그렸던 모양.
자세히 소개해보자면, 메이레키 대화재가 벌어지고 난 후 흡연마저 민감하게 단속하던 시기에 번소의 창고를 담당하던 보초가 전복 껍데기에 몰래 불씨를 챙겨와 담배를 피우다 다다미를 태워먹는 일이 발생했을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노부츠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격노해 그 보초에게 참형을 내렸고,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아[15] 에모사쿠에게 보초가 담배를 피우다 다다미를 태워버린 모습과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라 명했다. 에모사쿠는 분부대로 그림을 두 장 그려 노부츠나의 저택 내 발길이 제일 많이 오가는 곳에 전시해두었고, 그 생생한 그림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화재에 대해 강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에모사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여러 설이 갈리는데, 에도에 죽을 때까지 남아있었다고도 하고, 말년에 다시 키리시탄으로 돌아가 귀향한 뒤 나가사키에서 병사했다고도 하며, 동남아시아[16]로 건너가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않았다고도 한다.[17]
3. 그 외
마츠쿠라 부자(父子)의 폭정과 기독교인 박해로 인해 들고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인물.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도였음에도 같은 교우들에게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가족들이 몰살당했다는 비극을 겪었지만, 의외로 이 사실이 세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대중매체에서의 에모사쿠는 그저 배신자, 악당, 기회주의자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 #1 #2에모사쿠가 그린 작품들은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이 많지만,[18] 실력을 짐작케하는 일화가 더 있기도 하다. 신동이라 불렸을 정도로 일찍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모란, 소, 말, 노인[19] 등등 소재를 가리지 않았던데다 그 정교함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금손도 실수할 때가 있었으니, 좀 더 나이를 먹고 그림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에도로 상경했을 때의 일이었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눈에 든 요모사쿠는 그의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림' 을 그려보라는 명을 받게 된다. 요모사쿠는 고향의 샘물이 없다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했는데, 높으신 분 앞이라 긴장했는지, 아무리 그래도 문자 그대로 움직이게끔 그리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탓인지 샘물이 있었음에도[20] 생각만큼 멋진 그림이 안 그려졌다. 실망스러운 결과물에 이에미츠가 타박하자, 너무나도 먼 길을 온지라 물의 힘이 약해져서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변명을 했다고. 당연히 이에미츠는 화를 냈고, 에도에서의 요모사쿠의 평판도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요모사쿠는 에모사쿠로 개명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아리마 가문의 전속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
고향 나가사키 측에서는 '억울하게 휘말린 사람' 겸 화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모사쿠의 집터와 위령비는 문화재로 남아있으며,[21] 이에미츠와의 일화에서 언급된 샘물터인 요모사쿠가와(与茂作川)도 남아있긴 하다. 요모사쿠가와는 차나 커피를 우려내는데 쓸 물을 길어오는 약수터처럼 쓰이곤 했지만, 먼 훗날 당국에서 상류에 댐을 지으며 공구리질을 해서 환경이 파괴된 나머지 현재는 그곳에서 솟는 물을 마실 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22]
Fate/Samurai Remnant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치에몬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최후의 생존자라는 점이 겹치기 때문. 단 모티브만 따왔지 동일인물은 아니다.
[1]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전시되고 있다.
[2]
LOVVADO SEIAOSACTISSIMO SACRAMENTO는
포르투갈어로 '지극히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여, 찬미받으소서' 라는 뜻이다.
[3]
에도로 연행되었을 당시가 66세, 향년 83세라는 설도 있으니 1570년대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1575년에 태어나 1657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4]
세미나리요(セミナリヨ/seminário), 즉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신학교에서 종교와 그림, 포르투갈어에 대해 배웠다고도 한다.
이탈리아인
신부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
[5]
본디 가신으로서 몸 담고 있었던 아리마 가문이 휴우가국으로 떠나자, 새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6]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상륙해
덴쇼 소년사절단을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근현대에는 인근 탄광의
석탄을 수출하는 항구로 발전했지만 쇠퇴, 현재는
돌고래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7]
이것이 상단의 이미지에 나온 아마쿠사 시로 진중기(天草四郎陣中旗)이다.
십자군의 깃발,
잔 다르크의 깃발과 함께 세계 3대 군기(世界三大軍旗) 혹은 세계 3대 성기(世界三大聖旗)의 한 축으로 취급되기도 하나,
세계 3대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일본에서만 거론되는 소재에 불과하다.
[8]
시문(矢文). 화살에 문서를 묶어 날리는 것.
[9]
그 중에서도 옛 주군이었던 아리마 가문과 내통했다고 한다.
[10]
성 내에는 마지못해 농성하는 자들도 있습니다(城中には心ならずも籠城した者もいる)라고 쓰여 있었다.
[11]
일찍 투옥되어 있던 바람에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늦게 알아버렸다고 한다. 반란군들에게 뭐라고 변명하거나 간청해보지도 못하고 다짜고짜 감옥으로 던져져서 처자식의 목숨을 구할 틈도 없었던 모양.
[12]
이 당시 쓰여진 취조문, 야마다 에모사쿠 진술서(山田右衛門作口書)는 성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다뤄지고 있다.
[13]
정확하게는
메아카시라는, 하급 경찰 내지는 용역 비스무리한 평민 신분의 관원이었다고 한다.
[14]
후미에 중 일부는 에모사쿠가 그린 그림이 쓰였다고 한다.
[15]
그러잖아도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해 겨우 수습 중이었는데, 여지껏 경고했음에도 무감각하게 굴며 제2, 제3의 대화재를 발생시킬 뻔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자체에 분개한 것.
[16]
필리핀으로 갔을 거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17]
막부가 해외로 나간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했던 까닭에 그가 동남아시아로 나갔다면 본인의 의사가 있었더라도 귀국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8]
서양풍으로 그려진 그림 중 작자가 불분명한
서양기사도(西洋騎士図)나
태서왕후기마도(泰西王侯騎馬図) 또한 에모사쿠의 작품일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오야항입선도(大屋港入船図)라는 그림 또한 야마다 에모사쿠가 그렸다고도 한다. 출처: <원 사료로 지은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原史料で綴る 天草島原の乱)>, 츠루타 쿠라조 作
[19]
특히 노인을 그린 남만 스기도(南蛮杉戸)라는 그림은 나가사키의
혼레이지라는 사찰에 바쳤다고 한다.
[20]
이에미츠가 정말 큰 기대를 품고 부하들을 시켜 일부러 길어오게끔 했다.
[21]
오늘날 집은 허물어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 작은
차고가 들어섰다. 집이 남아있었을 당시의
사진이 있기는 하다.
[22]
본디
잉어,
황소개구리,
뱅어,
장어 등이 서식하고 있기도 했으나
숭어, 작은
복어,
송사리 정도만 남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