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口 彊
1916년 3월 16일~ 2010년 1월 4일
1. 개요
일본의 선박기술자, 교사.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원폭 2번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1] 2010년 93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나가사키현 출신이다.
2.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당시 야마구치는 29세로[2]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유조선 설계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당시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야마구치, 이와나가 아키라, 사토 쿠니요시 이렇게 세 명의 기술자를 3개월 일정으로 동사의 히로시마 조선소에 파견 근무시키고 있었다. 8월 6일은 장기 출장 마지막 날이었기에 야마구치와 동료들은 다들 일찍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구치가 여행 허가 인감을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을 떠올려서 인감을 찾으러 갔다. 핵이 투하된 시각인 아침 8시 15분쯤 야마구치는 폭심지에서 3km쯤 떨어진 조선소의 야적장을 걷고 있다가 폭발을 목격하였다. 야마구치는 섬광을 “거대한 마그네슘 덩어리가 타오르는 불빛 같았다”고 회고했다. 야마구치는 반사적으로 길 옆에 난 하수구 도랑으로 몸을 날렸지만, 원폭의 굉음에 고통스러워하다가 기절한 채 폭풍에 몇십 미터쯤 날아갔다. 기적적으로 야마구치는 근처 감자밭에 있는 감자 포대 더미 위에 떨어지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잠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어요.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잘 볼 수가 없었어요. 마치 영화관에 가서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검은색 공필름이 소리 없이 돌아가면서 희미한 빛이 스크린에 비추었다 사라졌다 하는 느낌 같았어요.
하지만 야마구치는 고막이 파열되고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태양이 폭발한 건지 의심할 정도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날 왼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그는 야적장에서 함께 출장 온 두 동료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방공호로 기어가 일단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기차역이 아직 운영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셋은 역으로 이동했다. 폭격의 영향으로 다리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이동을 위해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강을 헤엄치는 등의 고생을 겪은 끝에 철도가 운행되는 지역까지 간신히 걸어갔고 그 날 밤에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기차역과 열차 모두 화상을 입은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바다로 떨어져 있는 규슈의 자기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944년 9월 9일 혼슈와 규슈를 잇는 칸몬 터널이 생겼고 또한 원폭 하에서도 철도가 제대로 복구되었기 때문이다.[3]
3. 나가사키 원폭 투하
야마구치는 고향인 나가사키에 8일 아침 도착할 수 있었다. 사토와 이와나가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야마구치는 그날 아침 병원에 갔다. 담당 의사가 그의 학교 동창이었지만 그의 화상이 너무 심해 처음에는 동창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아니냐며 경악했다고 한다.8월 9일 아침 그는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로 출근했다. 엔지니어들을 히로시마로 파견한 과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장은 단 하나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게 말이 되냐고 화를 내며 야마구치가 심하게 다쳤고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며 꾸중을 하자[4] 야마구치는 과장에게 추가적으로 설명하려 했고 바로 그때, 야마구치는 히로시마에서 봤던 섬광을 또 보게 된다. 그때가 11시 2분쯤이었는데, 섬광을 본 야마구치는 반사적으로 엎드렸고 그 모습을 보고 거들먹거리며 뭐라 말하려던 과장은 순식간에 먼지에 휩싸여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편 동료들은 야마구치가 돌아왔을 때 살아 돌아왔다며 반겨주었고, 야마구치가 히로시마에서 겪었던 폭탄이라면 건물 창문을 닫아 두었다간 폭발의 충격에 날아든 유리파편에 얼굴과 눈 등을 크게 다칠테니 닫지 말고 전부 열어두라 충고하여 건물 유리창을 전부 열어두었는데 그 직후 폭탄이 터져 유리 탓에 다친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야마구치는 원폭의 섬광, 폭풍, 버섯구름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귀신인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필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는 폭심지에서 또 3km 거리에 있었다. 두 번 다 맞고 살아난 것도 기적인데 두 번 다 3km 남짓 떨어져 있었다는 우연까지 겹친 셈이다.
사실 미쓰비시 조선소는 나가사키의 핵심 군사시설로, 나가사키 원도심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그가 재직한 조선소는 원폭의 목표 그 자체였다. 어떤 의미로는 그 조선소 때문에 나가사키가 원폭의 표적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당일 기상 문제로 원폭 투하가 당초 예정지에서 북서쪽으로 3km 정도 어긋났고, 산이 많은 나가사키에서 폭압이 넓게 퍼지지 않아 조선소는 몰살을 면했다. 그 때문에 야마구치는 히로시마 때와 달리 직접적으로 다치지는 않았지만 폭풍으로 인해 붕대가 벗겨지면서 화상을 입은 자리가 노출되었다. 그래서 고열과 구토로 인해 몇주간 고생했다.
가족들은 방공호로 잘 대피해서 모두 무사했다. 히로시마에서 남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들은 아내가 화상 연고를 마련해 놓고 대피했기 때문이다.
한편 사토와 이와나가는 좀 더 운이 좋았다. 사토는 그 시간에 폭심지에서 좀 더 떨어진 나가사키 야적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날 오전 중 직원들이 사토에게 히로시마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있던 중 섬광을 보았고, 원폭이라는 걸 알아차린 사토는 곧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사토는 상처 하나 나지 않고 안전하게 구조되었다. 이와나가는 그 시간 전철을 타고 있다가 창문을 통해 섬광을 보았지만 전혀 다치지 않았다.
4. 그 후
야마구치는 패전 후 피폭으로 고생한 데다 미쓰비시 중공업이 재벌해체의 대상이 되면서 실직하여 주일미군 통역사와 교사 생활을 거쳤다. 이후 미쓰비시에 다시 선박 엔지니어로 복귀했다. 야마구치는 백내장, 급성 백혈병 등의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그는 원폭 후유증 때문에 40대 초에 대머리였고 상처 때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2009년 위암이 발병해 93세인 2010년 사망했다. 이 위암은 원폭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반전 운동을 했다.부인 히사코 역시 각종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했으나 88세까지 장수하고 신장 질환과 간암으로 사망했다. 아들 카츠토시는 1945년 2월 태어났는데 원폭에서는 살아남았으나 59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야마구치 부부는 1950년대 초 딸을 둘 낳았는데 딸 나오코는 평생 아팠으며, 딸 토시코도 평생 낮은 백혈구 수치로 불안에 떨었다.
5. 기타
영문 위키백과
[1]
자신이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2번을 모두 겪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여러명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된 경우는 야마구치 쓰토무가 유일하다.
[2]
출처:
조선일보 2017년,
2009년 영국 인디펜던트 인터뷰,
2009년 영국 가디언 보도.
2015년 A&E 텔레비전 네트워크.
[3]
물론 그것을 복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머리를 다쳐 정신이 이상해진거라며 내가 보낸 거지만 미안하다 했다고 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내용에서 거들먹 거리며 말을 하려 했다는 인터뷰 내용으로 볼 때 진심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특유의 완곡어법으로 빈정거리려 했던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