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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사상 및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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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330066> 일생 생애
가족 배우자 이혜련 · 장남 안필립 · 장녀 안수산
사상 민족개조론
성향 사회민주주의
사건사고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 단체 신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흥사단 · 독립협회 · 한국독립당 · 국민대표회의 · 대한인국민회
기타 연통제 · 도산공원 · 대성학교 ·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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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혁명론3. 민족개조론 및 개인주의
3.1. 이광수에 따른 오해
4. 선별적 폭력활동5. 재정마련 중요성 강조6. 점진전쟁론7. 지역감정

1. 개요

안창호의 사상 및 견해를 정리한 문서.

2. 혁명론

과거 인식, 현재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자가 아닌 독립전쟁론자이자 혁명론자였는데 본인의 연설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혹자는 혁명수단에 의하여 완전한 독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실력이 없고 또 단계를 밟지 않은 때문이다. 차라리 자치를 먼저 얻고 그리고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창도하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 이유는 일본 정부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자치를 허용할 시기가 빠르기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은 그들의 준비에 다망을 극하고 있다. 그 자치제가 시행되기에 이르렀을 때에 있어서 여하한가를 말하건대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내지 일본 동화자만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 있어서의 지면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에 있고 그리고 국내의 경제 또한 그들의 수중에 있으므로 정래 독립할 기회가 있어도 자치를 얻는다는 것은 절망일 것이다. 또 일파에서는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칭하나 이것 또한 불가하다. 자본 지력 경험이 부족한 아 민족은 가령 일본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할 수 없다. 하물려 우리에게 실력과 문화의 진보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에 있어서랴. 이제 한국 내의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불쌍한 우리 동포는 동으로 일본의 공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북으로는 만주의 황야에서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음은 실력양성의 주창자의 이상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생명의 부활을 위해서는 혁명의 한 길이 있을 뿐이며 그것을 유력하게 함에는 보편적이고 또 유력한 일대혁명당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산만적 운동보다도 조직적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혁명을 공산주의로 하자! 무정부주의로 하자! 복벽(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 운동을 하자! 하여 각각 자기의 의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는 '민족혁명'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대혁명적 조직'을 성립한 후에 일치적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에 부치지말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안창호, 1926년 7월 8일 연설[1]

심지어 이런 자치론, 준비론에 대한 비판은 신채호 조선혁명선언과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또한 안창호의 최측근 동암 차이석은 안창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선생의 혁명이론은 곧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었으니 민족 내부적으로는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의 일종인 체계적 방법을 세우고, 밖으로는 대동세계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우리 민족 자신의 힘으로써 원수인 적 일본 제국주의에 초멸하여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한 후 급속히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을 기초로 하여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네 가지 평등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원만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은 또 민중적 혁명을 주장했으니 한국 혁명사업이 소수 독재자의 손에서 나와서도 안되며 또는 특수계급이 좌우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반드시 전민족적 총단결로 추진되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혁명의 무력화를 주장했으니 장차 전 민족이 총무장하여 나섬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며 독립이 이루어지고 나면 곧 바로 국가건설에 종사하고 더 나아가 국제평등과 세계공영에 기여하자는 것이다.」[2]
안창호는 본인이 직접 실력양성론이란 건 자치론과 묶어서 같이 부정했으며, 오히려 측근들은 적극적 혁명론이나 전쟁론을 주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3. 민족개조론 및 개인주의

춘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이란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처럼 설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안창호를 잘못 인식하는 데 영향을 줬다. 그러니 이광수의 주장 = 안창호의 주장이라는 것부터 틀렸다.

안창호가 말한 '민족개조론'이란 일제에게 해방돼서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전제 아래,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독립된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길러서 독립국민에 맞는 자격을 갖게 하겠다는 것으로 혁명투사를 만들기 위해 개조를 주장한 것이었다.[3] 안창호는 통합과 함께 개인주의를 중시했다. 예로 미국을 예로 들면서 개인주의가 강해서 공동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으나 실제로는 잘만 한다면서 개인주의와 공동주의를 배타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개인이 조직에 참여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근거해야 하고, 그래야 조직의 뿌리가 강해진다고 보았다. 민족의 힘이라는 것도 개개인의 힘에 나오는 것이라 봤다.[4]

또한 사적인 관계나 사상적 관계로만 통합해서도 안 되고 통합된 조직은 사상적 통합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안창호에게 통합이란 '실제적인 일', '구체적인 사업'을 위해 결합해서 단결하는 것을 말했다. 당연히 사상통합을 말한 게 아니니 개개인의 의견 차이, 갈등, 대립이 없는 통합을 말한 게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싸움은 당연한 것이며,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만일 싸우지 않으면 충성 있는 지도자라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개개인의 논쟁과정은 당연하게 생각했다.(다만 이건 같은 조직에서 하는 것을 말하며 조직을 분리해서 다른 별개 조직이 되어서 싸우는 것은 반대함) 다만 그런 논쟁 절차를 거치고 합의가 이루어져서 '공론'이 이루어지면 복종해야 된다는 것이 안창호의 조직론이었다. 이 공론은 위에서 말했듯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과 사업을 말하며 이데올로기와 달랐다.[5]

안창호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통합과 조직을 이루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이데올로기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는 다른 집합적이고 공식적인 이념체계이며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합의되는 의사결정이나 결의사항과도 다르지. 안창호는 집합적이고 공식적인 이념체계에 근거한 통합을 좋아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일과 계획을 위해 개개인들이 결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6]

안창호는 개인역량강화를 중요시했는데, 그건 바로 이런 개인주의를 중요시하는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민족이 하나가 돼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개인주의에 근거하여서, 개개인이 존재가 있는 '실제적인 일'과 '구체적인 사업'을 위해서 조직을 이루어야된다는 게 안창호의 조직론이었다.

그와 달리 춘원은 '자치론'을 전제한 것이라서 주장의 전제부터 달랐고 민족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도덕성에 근거한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주장이라 목표도 다르다.[7]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의 영향을 따른 것이란 주장은 이광수 자신의 주장일 뿐이다.[8]

3.1. 이광수에 따른 오해

춘원이 소개한 안창호 = 실제 안창호로 보는 건 정말의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예로 이광수는 흥사단운동을 안창호의 독립운동 본류인 것처럼 소개했는데, 안창호가 흥사단운동을 중시하긴 했으나 안창호 자신이 말한 것처럼 흥사단은 독립운동단체가 아닌 별개의 단체라고 생각했다. 안창호 선생에게 흥사단 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었고, 별개의 혁명가를 기르는 단체였다.[9]

곽림대는 '안도산'1966 이란 도산의 일대기 책을 썼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하며 해방 후의 안창호에 대한 인식에 한탄하였다.
지금 국내에서는 도산을 간디 같은 인물로 만들기로 생각하는 있는 줄 아는데, 나의 부탁은 제발 도산을 간디 같은 인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도산은 간디가 알지 못하고 내놓지 못한 흥사단주의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도산은 삼군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펼치는 것이 꿈이었고, 워싱턴(1732~1799)과 링컨처럼 이성을 위해 일하려는 인물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10]
곽림대는 도산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했고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체포되었는데, 차이석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고문을 받아 거의 병신이 되었다."고 할 만큼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겨우 풀려난 뒤에는 미국으로 망명후에 도산의 곁을 지킨 사람이다.[11]

또한 안창호의 사상을 이어받은 최측근 차이석은 한국독립당 당의를 설명하며 브라질의 청원식 독립운동과,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같이 타협적인 것이 아니라, 강성적인 적극적 독립운동이 당의라 설명했다.[12]

4. 선별적 폭력활동

안창호는 계획에 따라서는 폭력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로 안창호는 청년비밀단을 사용한 유격전법을 한 전략으로 구상했다.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국내 동포를 민족적 각성을 하게하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다.[13] 예로 미 의원단이 방한한다고 하자 광복군총영, 대한광복군결사대 등을 통해 강렬한 폭력투쟁을 지휘했다. 광복군총영 본부는 서울, 평양, 신의주 3곳에 폭탄의거를 할 계획을 추진하고 결사대원을 선발해 잠입시키고도 하였다. 예로 서울에서 계획한 활동은 종로경찰서 이완용의 집, 서울역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나 1920년 8월 21일에 일제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14]

안창호가 반대했던 것은 폭력활동이 아니라 조직되지 않은 소수 인원들이 산발적으로 거행하는 테러활동이었다. 안창호가 생각하기에 의열투쟁은 통일된 조직에 근거한 군사적 작전으로 해야 옳은 것이다.[15]

또한 안창호는 1919년에 연통제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국내조직으로 연통부를 세운 것이다. 연통제란 도, 군, 면 단위로 임시정부 국내조직인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시도였다. 역시 안창호가 주도한 활동이다.[16] 연통부의 활동에는 폭력적 활동도 포함되어있다.

예로 연통 각 부에서 담당하는 주요사무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장차 외지에서 動兵하여 전쟁을 개시할 시는 군인 · 군속의 징모, 군수품 의 정발·수송에 관한사항.[17]
1919년 12월 함경북도에선 관련자들이 일본제국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는데, 일본제국 경찰에 따르면 연통제의 활동은 이러했다.
(1)군자금 모집, (2)군 사상의 경험이 있는 자를 보고할 것, (3) 일본관헌을 습격할 것, (4) 병기탄약을 조사 보고할 것, (5)시위운동을 할 것, (6) 일본관헌 및 군대의 상황을 내사 보고할 것, (7)시위운동 때문에 살해되고 또는 부상한 자의 주소 씨명을 조사 보고할 것[18]
또한 연통부에서는 매 5일마다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긴급사항은 즉시 보고해야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군사상 지식 · 경험이 있는 자의 주소 • 씨명 · 연령 및 약력.[19]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조건 중 하나로 "(대한)제국시대의 군인이나 의병이나 기타 군사의 지식 경험이 있는 자를 조사 통일하여야 할 것이오, 없던 군대를 신조(新造, 새로 만듦)하여 싸우려 하니 군사에 관계 있는 자들이 다 모여서 작전을 계획할 필요가 있소." 하고 주장하며 군사 유경험자를 찾아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다.[20]

5. 재정마련 중요성 강조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위해 매우 필요한 활동으로 재정마련을 들었다. 독립운동은 참가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재정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가 없다. 안창호는 그걸 잘 알았고, 자금운동과 재정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21]

예로 연통제 활동이 있던 시절에 하던 주요사무 중에는 징수 같은 자금운동이 있었다.[22]

또한 미주동포들에게 "직접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라도, 재정을 감당하는 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군에게 보내서 지원해 달라." 하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23]
안창호는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고 주장했고 그 원인을 유교라 주장했다. 유교의 원인으로 재(財)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죽자죽자고는 하는데 자금문제는 따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낮추어 보는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상 돈이 안 나오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돈이 없어도 일이 되는 줄 아는 까닭… 그래서 독립도 글자나 말만으로 되는 줄로 아는 까닭」
그리고 모든 조직적 활동은 재정지원에 따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다녔다.[24]
안창호는 독립전쟁과 재정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다.[25]
「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
「여러분,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
「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
이윽고 독립운동가 중에서 재정마련운동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했다.
「나는 우리 독립운동자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일인도 없음을 볼 때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26]
안창호는 "무슨 일이든지 하고,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바치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다 일하시오. 여기서 할 일이 없거든 서북간도에 가서 농업을 하시오. 독립운동하노라 하면서 노는 자는 독립의 적이오.」[27]
따로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이런 재정지원활동과 자금운동을 중요시했는데, 안창호가 온건운동가나 실력양성론자라고 단단히 오해받는 큰 원인이 바로 이런 재정에 관한 현실적 인식이라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안창호가 딱히 온건운동가라서 한 말이 절대 아니며, 혁명에 필요한 것이 근본적으로는 무엇인가를 알면서도 쉬쉬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직설적으로 논했을 뿐이다.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 같은 곳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지고 광복군에 들어가 훈련받는 것만으로 독립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돈을 모으다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기부를 해줘야 재정을 굳건히 할 수 있다는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당연한 것을 논한 것이다.

6. 점진전쟁론

그는 기본적으로 점진전쟁론을 견지하였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었던 이동휘와 같은 급진적인 전쟁론자와 갈등을 빚었다. 그가 생각하는 바는 대략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 되는 것이 다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 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여운형은 이러한 안창호의 뜻을 따랐는데 여운형이 일본의 초청을 받고 일본행을 결심하자 여운형을 변호하면서 이동휘와 갈등하였다. 이동휘는 "일본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극구 반대했으나 안창호는 여운형을 믿고 일본행을 권유하였고 노잣돈까지 주었다고 한다. 이후에 여운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회유에 굽히지 않고 도쿄 테이코쿠 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일본 정계를 술렁이게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적을 알아야 하니까니 가서 니야기를 들어보라우. 이거 얼마 되딘 않지만."
"허나 임정 안팎에서 야단들입니다."
"뭐,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28]

7. 지역감정

윤치호 일기 1933년 10월 4일자[29] 내용에서 윤치호가 여운형 신흥우에게 듣기로,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30] 안창호는 한용운에게도 "독립 후에는 서북파가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서북파는 그간 박대받아 왔고 기호파는 지난 500년 간 지은 죄가 크다"라는 내용의 지역감정을 피력한 적이 있으며 이에 실망한 한용운이 다시는 안창호를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 정도를 떠나 서북민으로서의 울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이 부분의 진위여부 자체가 미심쩍은 점이 있는데, 전후 맥락이 동아일보에서의 이광수의 이적이었던 데에 반해 당시 여운형은 < 조선중앙일보>[31] 사장이었고, 신흥우[32]는 윤치호와 대립이 심했는데 먼저 기호파 동맹을 제안한 점이 부자연스럽다. [33]

다만, 오류가 의심되는 1933년 10월 4일자 외에도 <윤치호 일기>에서는 꾸준히[34] 안창호의 지역감정에 대해 언급됐다.

안창호 윤치호의 관계를 보면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지어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지금에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위인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신세가 나뉘었지만, 윤치호도 안창호와 함께 수십 년간 개신교 활동 및 계몽 활동에 투신하였고 윤치호는 안창호의 석방과 병 치료는 물론 안창호의 장례까지 치러준 오랜 친구라 악의적인 비방을 목적으로 없는 얘기를 지어냈으리라 보는 건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일화와 <윤치호 일기>를 종합해 볼 때 과거에는 강한 지역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늦어도 1935년에는 지역감정의 문제점을 느끼고 타파하려고 개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32~133쪽에서 재인용 [2] 2)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복 차이석평전, 2005, 역사공간, 258쪽에서 재인용 [3] 박만규, 도산 안창호의 개혁사상과 민족개조론, 역사학연구 61, 2016, 244~245) [4]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57~258) [5]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59~260 [6]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 [7] 박만규, 도산 안창호의 개혁사상과 민족개조론, 역사학연구 61, 2016, 245 [8]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5쪽 [9]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4, 138쪽 [10]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6쪽 [11]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7쪽; 차이석, 안창호 선생 피포 정형 및 그 약력, 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복 차이석평전, 2005, 237쪽 [12] 장석흥, 차이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162쪽, 2014) [13]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3 [14]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5~116쪽 [15]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5~116 [16]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04~105 [17]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7쪽 에서 재인용 [18]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7쪽 에서 재인용 [19]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8쪽에서 재인용 [20]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8쪽 [21]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2 [22]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32쪽 [23]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261) [24]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 [25]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 [26]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 [27]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 [28]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이기에 서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한다. [29] 한국사 총설 DB에서 공유 기능을 지원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블로그 링크로 삽입. 원문을 읽고 싶은 사람은 위 링크에서 "윤치호일기"를 검색 후 "한국사료총서"탭의 "尹致昊日記 十"을 열람하자. [30] 여운형 신흥우가 이에 대해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는 맥락에서 들었다. 윤치호 스스로는 믿지 않지만 기호 지방 사람들은 사실인 줄로 알더라는 말이 당일자 일기에 덧붙여져 있다. [31] 현재의 < 중앙일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32]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름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인물로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이 시기 윤치호와 대립이 심했다가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게 된다. [33] 윤치호가 부풀린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이다. [34] 1920년 8월 30일, 1921년 5월 2일, 1924년 3월 4일, 1931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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