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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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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3대 황제
악바르 1세
اکبر اول
파일:mostra-akbar-roma.jp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아불파트 잘랄웃딘 무함마드 악바르
ابو الفتح جلال الدين محمد اكبر
출생 1542년 10월 25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라지푸타나 우메르코트(عمرکوٹ)[1]
사망 1605년 10월 27일 (향년 63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아그라 파테푸르 시크리(फ़तेहपुर सीकरी)[2]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556년 2월 11일 ~ 1605년 10월 27일 (49년)
전임 후마윤 (제2대)
후임 자한기르 (제4대)
부모 아버지: 후마윤 황제 (1508 ~ 1556)
어머니: 하미다 바구 베굼 (1527 ~ 1604)
자녀 슬하 5남 6녀
3남 자한기르 (1569 ~ 1627)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통치
2.2.1. 군사 정복
2.2.1.1. 북인도 평정2.2.1.2. 인도 중부 정복2.2.1.3. 라지푸타나 정복2.2.1.4. 인도 동부, 서부 정복2.2.1.5. 아프가니스탄 원정2.2.1.6. 칸다하르 점령2.2.1.7. 만사브다르 제도
2.2.2. 내치
2.2.2.1. 경제 발전2.2.2.2. 종교의 관용2.2.2.3. 외교 관계
3. 평가4. 악바르 영묘5. 기타

[clearfix]

1. 개요

악바르·아크바르 대제( 페르시아어: اکبر اعظم / Akbar-i-azam)[3] 무굴 제국의 제3대 황제이다.

군대와 제도 개편으로 제국의 힘을 키우고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쳐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도 포용했으며, 지역 강국 정도였던 무굴 제국을 진정한 제국으로 끌어올린 명군이다. 재위기간에 있는 동안 세운 업적들을 보면 ' 대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행정 개편을 통해 체계적인 정부 구조를 확립했고, 수많은 영토를 정복해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설립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예술을 사랑해 수많은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문화를 진흥시켰다. 그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경제나 영토나 모든 면에서 몇 배 이상 급성장을 이루었고 당대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힌두교도들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티무르의 후예였다는 점과 치토르 요새 점령 시 행했던 무자비한 학살극 등으로 인해 인도인들 중에서도 그를 증오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4] 하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제외하면 하늘이 내린 성군으로 평가하고, 펀자브 시크교도들도 대제라고 부르며 존경한다.[5] 방글라데시에서도 일부 벵골인 민족주의자를 제외하면 관대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그가 티무르의 후예라는 점 때문에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또한 인도인들 역시 악바르가 후임자인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에 비하면 종교의 자유를 크게 중시했던 현군(賢君)이었기에 그렇게까지 평가가 나쁘지는 않고 좋게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즉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가릴 것 없이 범인도권에서 두루 존경받는 군주로 생각하면 된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악바르의 아버지이자 무굴 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은 엄청난 풍운아였다. 그는 부황 바부르에게 신생 무굴 제국을 막 물려받았을 당시 나이가 22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밖에서는 셰르 샤 수르라는 거대한 적이 무굴 제국을 공격해들어왔고 안에서는 형제들이 후마윤을 내쫒고 황위를 잡아보겠답시고 계속 음모를 꾸미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후마윤은 셰르 샤 수르에게 연속으로 대패해 수도 델리마저 버리고 저 멀리 신드 지방으로 도망가야 했다. 이 피난길 와중에 들른 오아시스 도시에서 황후 하미다 바누 베굼이 낳은 아이가 바로 악바르였다.[6] 하지만 후마윤의 상황이 워낙에 최악이었고, 아이가 험난한 망명 생활을 버티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후마윤은 악바르를 그가 태어난 오아시스 도시에 맡겼다. 악바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것.

그렇게 악바르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른 채로 오아시스 도시인 암라코트에서 몇 개월을 보냈다. 이후 후마윤의 형제였던 아스카리 미르자가 악바르를 암라코트에서 발견해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로 데려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상황을 알 필요가 있는데, 후마윤은 셰르 샤 수르에게 패한 이후 황위를 노리던 형제들과 사실상의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카불을 통치하던 후마윤의 형제 캄란 미르자는 후마윤이 도움 요청을 했을때 가뿐히 무시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델리를 잃은 후마윤이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로 신드를 거쳐 저 먼 페르시아까지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다만 악바르의 경우는 달랐던지 아스카리 미르자는 어린 악바르를 카불로 데려왔고, 악바르는 캄란 미르자의 후궁들과 함께 조용히 성장했다.

이후 후마윤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에게서 막대한 지원을 받아 대군을 거느리고 북인도 지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적대했던 형제 캄란 미르자를 단죄하고자 했고, 아스카리 미르자를 격파한 뒤 바로 캄란 미르자마저 꺾어버렸다. 캄란 미르자의 실정에 이미 민심이 떠난 상황이었기에 후마윤은 정통성을 내세워 손쉽게 캄란 미르자를 무릎꿇리고 카불을 탈환했다. 카불을 되찾은 후마윤은 카불에 머무르던 악바르와 몇 년만에 재회한다. 후마윤은 감격에 겨운 상봉 이후 성대한 연회를 열었고, 그를 위해 싸우다 죽은 그의 형제이자 신하였던 힌달 미르자의 재산과 직위를 모두 악바르에게 넘겨주었다. 악바르는 9살의 어린 나이에 가즈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4살에는 힌달 미르자의 딸인 루카이야 술탄 베굼과 잘란드하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마저 되찾은 후마윤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옛날에 자신을 쫒아낸 셰르 샤 수르가 세운 수르 왕조는 셰르 샤 수르가 죽은 이후 휘청거리면서 내전에 시달리며 망조가 심하게 들어버렸다. 온갖 도시들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르 왕조에 반기를 들면서 후마윤이 북인도로 귀환하기에는 최적의 타이밍이 조성된 것이다.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가 빌려준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어 수르 왕조의 혼란 덕택에 빠르게 북인도를 재정복했고, 1555년에는 델리를 탈환했다. 그렇게 기껏 무굴 제국을 북인도에 재건한 후마윤은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후마윤은 델리 탈환 1년 만에 왕궁 도서관에서 책을 품 가득 들고 가던 중 망토에 발이 걸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실족사하면서 사망해 버렸다. 세계사적으로도 허무한 죽음 중 하나로 꼽힌다.[7] 어쨌든 후마윤이 죽어버리자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악바르가 새로운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2.2. 통치

2.2.1. 군사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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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악바르 대제 치세에 사실상 확립되었으며 이 무굴 제국의 영토와 현재의 힌디어 우르두어 사용 영역은 대부분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2.2.1.1. 북인도 평정
후마윤 황제가 막 나라를 되찾은 직후 어이없는 죽음[8]을 맞이한 뒤 악바르가 왕위에 올랐을 무렵 악바르의 나이는 겨우 13살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바이람 칸이 재상이 되어 섭정을 맡게 된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악바르는 즉위하자마자 시련을 맞는다. 옛 수르 왕조의 잔당들이 다시 힘을 모아 후마윤이 죽자마자 델리로 쳐들어왔고, 결국 악바르는 델리를 빼앗기고 후방으로 후퇴하기를 강요받았다. 게다가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에도 북부인들의 침략이 일어나면서 카불로부터 도움마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터라 악바르의 입지는 바늘 위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섭정인 바이람 칸이 반격을 위해 무굴 제국의 봉신들에게 총동원령을 선포했지만 이들마저 시큰둥했고, 바이람 칸이 수차례 봉신들을 으르고 윽박질러서야 겨우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군대를 소집한 바이람 칸은 수르 왕조의 여러 세력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시칸다르 샤 수르와 정면 격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제 일이 바빴던 시칸다르 샤 수르는 악바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무굴 군대가 접근해오든지 말든지 최대한 싸움을 피했다. 오히려 수르 왕조의 또다른 세력이었던 헤무가 더 큰 위협이었다. 수르 왕조의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헤무는 스스로를 힌두의 황제로 선포하고 무굴 제국을 갠지스 평원 전체에서 몰아낼 것을 천명하며 무굴 제국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바이람 칸은 직접 군대를 지휘해 1556년 11월 5일 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의 군대를 대파하고 델리와 아그라를 수복했다. 델리를 수복하면서 안정감을 되찾은 무굴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칸다르 샤 수르까지도 무너뜨렸다. 악바르의 군대는 연이어 라호르, 물탄을 되찾았고 1558년에는 대도시 아즈메르도 집어삼켰다.

델리로 돌아온 악바르는 카불에 있던 일족들 모두를 델리로 옮겨오도록 명령했다. 이제 무굴의 중심지가 아프가니스탄 카불이 아니라 북인도의 델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후 1559년부터 무굴 제국은 라지푸타나 지방과 말와 지방으로 확장을 거듭했는데, 악바르가 섭정 바이람 칸과 갈등이 불거지면서 확장 정책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18세에 이르러 어느새 성년이 된 악바르가 더이상 바이람 칸의 지휘를 받기 싫어하면서 바이람 칸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악바르는 자신의 유모인 마함 앙가와 주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1560년 봄에 바이람 칸을 체포해 파직했고, 그를 메카로 순례를 보내버렸다. 바이람 칸은 메카로의 순례길 도중 반대파들의 꼬드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펀자브에서 악바르의 진압군에 패배했다. 악바르는 그의 공로를 참작해 메카로 순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지만 바이람 칸은 여행 도중 그를 싫어하던 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9]
2.2.1.2. 인도 중부 정복
이렇게 바이람 칸을 몰아내고 무굴 제국의 유일한 권력자로 떠오른 악바르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바이람 칸의 실각 직후은 1560년부터 악바르는 군사 원정을 재개했고, 이복형제인 아담 칸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겨 말와 지방으로 원정을 보냈다. 아담 칸은 성공적으로 말와의 지배자 바즈 바하두르를 물리치고 말와를 정복했는데, 아담 칸이 대책없이 항복한 군사와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전리품들을 싸그리 약탈하면서 민심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면서 악바르의 격노를 샀다. 게다가 아담 칸이 무함마드의 후손을 죽여버리면서 악바르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고 결국 아담 칸은 군사령관 지위에서 쫒겨났다. 참고로 바즈 바하두르는 아담 칸과 악바르 사이의 불화를 틈타 일시적으로 말와 지방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악바르의 진압군에게 쓸려나가면서 바로 쫒겨났다.[10] 이후 말와 지방은 무굴 제국의 완전한 행정 구역들 중 하나로 편입된다.

그렇게 말와를 확고히 무굴 제국에 편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악바르는 하루도 마음 편할 새가 없었다. 특히 황족들이 기회가 날때마다 반란을 일으키거나 멋대로 행동하면서 악바르의 골치를 썩였다. 위에서 언급한 아담 칸은 이후에도 패악질을 부리다가 결국 화가 뻗친 악바르에 의해 아그라의 궁궐 발코니 너머로 던져져 죽었고,[11] 1550년대 초반에 우즈베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악바르의 형제이자 카불의 왕인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을 새 황제로 추대했다. 악바르는 1556년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을 설득해 악바르의 제위를 인정하고 다시 카불로 돌아가도록 만들었고 반란을 모획한 우즈베크인 부족장들은 자루에 넣어 코끼리들이 밟고 지나가게 만들어 죽여버렸다.[12] 이후 추가적인 반란을 우려한 악바르는 지방 곳곳에 황제 직속 총독들을 파견해 무굴 황족들의 힘을 크게 제한했다.

1564년에는 중앙아시아의 구릉 지대인 가르하를 공략했다. 원래 가르하는 인구도 거의 없고 땅도 척박한 곳이었지만,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하며 특히 군마를 포함한 말들이 특산품이었기 때문에 악바르가 이 곳에 눈길을 돌렸다. 당시 가르하 지방은 라지푸트족의 전사 여왕 두르가바티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결국 악바르의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13] 무굴 제국은 가르하를 집어삼키며 수많은 말들과 함께 가르하에 쌓여있던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그대로 흡수했다. 다만 여기서도 잠시 잡음이 일었다. 당시 악바르는 우즈베크인들의 반란을 상대하느라 아사프 칸에게 군대를 맡겨 대신 원정을 치르게 했는데, 이 아사프 칸이 승리 후 전리품들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포획한 1,000여 마리의 코끼리들 중 고작 200마리만 악바르에게 보냈던 것. 악바르가 아사프 칸을 추궁하자 아사프 칸은 우즈베크로 도망쳤다가 추격을 받아 결국 항복했다. 악바르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대신 목숨을 남기고 원래 관직을 회복시켜주었다.
2.2.1.3. 라지푸타나 정복
파일:파테푸르시크리.jpg
정복 후 기념 성격으로 세워진 파테푸르 시크리

그렇게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 지방 대부분을 정복한 악바르의 다음 목표는 라지푸트인들이 살던 라지푸타나 지방이었다. 라지푸타나 지방은 현재 인도의 라자스탄에 대응하는 상당히 거대한 지방으로, 이 곳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기껏 정복해놓은 북인도 영토가 언제든지 측면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위협이 존재했다. 때문에 악바르는 북인도를 완벽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선 반드시 라지푸타나를 정복해 후환을 없애야만 했다. 무굴 제국은 라지푸타나 지방의 수많은 라지푸트 소국들에게 사신을 보내 당근과 채찍을 곁들여 이들을 길들였다. 대부분의 라지푸트인들은 악바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항복을 선언했지만 오직 두 명의 군주만이 거부했다. 각자 메와르의 왕이던 우다이 싱과 말와르의 왕이던 찬드라센 라토르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특히 우다이 싱은 이전 바부르와 북인도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던 라나 상가의 후손으로 라지푸트의 수많은 왕들 중 가장 서열이 높았다. 즉 우다이 싱을 굴복시키지 않고선 라지푸타나를 무굴 제국이 틀어쥐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악바르는 우다이 싱을 굴복시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 우다이 싱이 다스리던 메와르의 수도는 요새도시 치토르였는데, 아그라에서 구자라트로 향하는 최단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라지푸타나 지방의 핵심 거점이었기에 치토르 요새만큼은 반드시 함락해야만 했다. 악바르가 대군을 이끌고 메와르를 침공하자 우다이 싱은 자이말과 파타, 이 두 장군을 시켜 치토르 요새를 방비하게 하고 정작 자신은 메와르의 산골짝으로 도망쳤다. 치토르 요새는 4개월에 걸친 공성 끝에 함락당했고, 악바르는 치토르 내부에 남아있던 민간인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14] 전투에서 승리한 악바르는 아그라로 돌아와 승전식을 열었다. 치토르 요새를 버리고 도망간 우다이 싱은 다시는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되찾지 못했고 악바르도 더이상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15]

악바르는 치토르 요새를 함락한 여세를 몰아 1568년에는 인도 최고의 요새라고 불리던 란탐보르 요새마저 함락했다. 당시 란탐보르 요새는 라지푸트인들이 소유한 요새들 중 가장 험준하고 성벽이 높아 인도 대륙 전역에서도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요새였는데 허무하게도 두 달도 안 되어 함락당했다고 한다. 치토르 요새에 이어 마지막 방어선이던 란탐보르 요새마저 털리자 더이상 라지푸타나에서 악바르와 무굴 제국에 대항할만한 세력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모든 라지푸트 왕들이 무굴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악바르는 라지푸타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1569년 아그라에서 남서쪽으로 37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시크리'를 세웠다.[16] 이로써 악바르의 라지푸타나 정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2.2.1.4. 인도 동부, 서부 정복
북인도를 평정하고 말와, 라지푸타나 정복까지 끝마친 악바르가 눈길을 돌린 곳은 부유한 동부의 벵골 지방과 서부의 구자라트 지방이었다. 벵골 지방은 벵골 만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로 향하는 교역로로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 인도 내부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알짜배기 지방이었고, 구자라트 지방은 아라비아 해를 따라서 유럽 중동으로 향하는 해양 길목에 위치한 황금 같은 땅이었다. 악바르는 일단 구자라트를 먼저 합병하기로 결정한다. 벵골 지방에는 이미 무굴 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 미치고 있기도 했거니와 상황이 그다지 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바르는 일단 해안가를 접한 구자라트를 먹어서 북인도 지방에서 생산한 물화들을 해양 무역로를 통해 수출하고자 했다. 악바르는 구자라트인들이 자신을 추대했다는 명분을 내걸고 1572년 구자라트로 남하했다.

1572년에는 구자라트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였던 아마다바드를 정복했고, 1573년에는 구자라트의 반군을 모두 데칸 고원 너머로 내쫒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자라트의 수많은 부유한 해안 도시들도 무굴 제국 아래 무릎을 꿇었다. 무굴 제국은 이로 인하여 구자라트의 엄청나게 부유한 해안가 항구도시들과 교역로를 바로 손 안에 놓게 되었고, 더이상 무굴 제국의 해양 교역을 가로막을 수 있는 세력은 북인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 구자라트를 통치하던 무자파 샤 3세는 자리에서 쫒겨나 옥수수 밭을 전전하다가 결국 무굴 군대에 사로잡혔다. 다만 악바르는 그에게 왕으로서 자비를 베풀어 작은 집 한 채를 내려주고 평생 조금씩 연금을 지급해주었다고.

구자라트마저 점령한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돌아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개선문을 세웠다. 다만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구자라트로 돌아가야만 했다. 기존의 구자라트 반란군들이 아프간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기 때문. 악바르는 6주가 걸릴 거리를 무려 11일 만에 돌파해 구자라트 아마다바드로 진입했고 1573년 9월에 대승을 거두었다. 악바르는 수많은 반란군 지도자들의 머리를 잘라버린 후 그들의 머리를 쌓아 탑을 만들어 반란군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이렇게 한 번 더 구자라트를 밟아주고 나자 더이상 구자라트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구자라트는 매년 5백만 루피에 달하는 엄청난 세입을 더해주는 무굴 제국의 알짜배기 땅으로 변모했고 무굴 제국의 국력은 크게 증가했다.

이렇게 구자라트를 완벽히 평정한 악바르에게 걸리적거릴만한 세력은 벵골 지방의 아프간 잔재 세력들만 남아있었다. 저 옛날 셰르 샤 수르를 따르던 아프간계 귀족들 중 일부가 동쪽의 벵골로 이동해 힘을 키우며 무굴 제국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슐라이만 칸은 무굴 제국을 자극하기를 꺼렸지만 슐라이만 칸이 죽고 그의 아들 다우드 칸이 왕위를 물려받으며 상황이 변한다. 1572년 왕위에 오른 다우드 칸은 아버지와는 달리 무굴 제국의 우위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완전히 악바르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한 악바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벵골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을 떠났다. 이후 악바르는 1575년 투카로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 지방이 완전히 무굴 제국 내에 편입되었다.[17]
2.2.1.5. 아프가니스탄 원정
구자라트와 벵골까지 무굴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며 북인도 전부를 먹어치운 악바르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지 1581년까지는 더이상의 군사 원정을 중지하고 파테푸르 시크리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1581년에 그의 형제이자 카불의 군주였던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이 펀자브 일대를 침공하자 악바르는 다시 원정에 나선다. 이전에도 우즈베크인들의 사주를 받아 자신의 제위를 노린 전적이 있던 무함마드 하킴이었기 때문에 악바르도 더이상은 그를 좌시할 수 없었고 결국 아예 싹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한 것. 그러나 정작 하킴의 본거지인 카불로 가려드니 문제가 터졌다. 무굴 장군들이 추운 카불까지 굳이 진군하기를 싫어했고, 병사들은 미신 때문에 인더스 강을 건너가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악바르가 8개월치 급료를 미리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581년 8월에 악바르는 가볍게 카불을 함락했고 바부르의 영전에 참배한 뒤 3주 정도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정작 원정의 단초를 제공한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은 무굴 대군이 접근하자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산맥으로 달아나버렸다고. 이후 악바르는 그의 누이인 바크트-운-니사 베굼에게 카불을 맡긴 뒤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악바르가 떠나자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이 다시 카불로 돌아왔고, 악바르는 그의 죄를 사해준 다음 실질적인 카불의 통치는 그에게 맡겼으나 명목상 카불 총독직은 여전히 바크트-운-니사 베굼에게 남겨두었다.

그렇게 형제의 반란을 꺾었지만 악바르는 함부로 북인도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너머 옛적 바부르가 쫒아낸 우즈베크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크인들은 압둘라 칸 샤이바니드 아래 하나의 세력으로 모여 거대한 규모의 대군을 이루었고, 결국 무굴 제국에 위협이 될 정도의 군세를 모았다. 악바르는 이들의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1585년부터 약 15년에 걸친 긴 기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인도에 머물며 제국의 북부 국경을 강화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부족들 중 무굴 제국을 적대하는 부족들도 많았고, 워낙에 민족 구성이 복잡해서 하나의 단일한 세력 하에 뭉쳐 있던 것이 아니었던 터라 이들 모두를 따로따로 상대해야만 했던 악바르의 고충은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86년에 악바르는 우즈베크의 지도자 압둘라 칸과 협상을 맺었다. 협상의 내용은 대강 압둘라 칸의 군대가 사파비 왕조를 공격할 때 무굴 제국이 중립을 유지해주는 대신, 압둘라 칸이 무굴 제국에 적대적인 아프간 부족들에게 지원을 하지 않고 우즈베크인들을 국경 너머로 물린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압둘라 칸이 개입할 가능성을 없애버린 악바르는 협상이 끝나고 마음놓고 적대적인 부족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악바르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하게 아프가니스탄을 청소했고, 수많은 요새들을 지어 부족들을 감시했다. 특히 개중에서도 반발이 강했던 유슈프자이 부족의 경우에는 몇 년에 걸쳐 산맥 안쪽에 가두어놓고 물자를 끊어 항복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악바르는 수백 개에 달하는 아프간 부족들로부터도 충성을 얻어냈다.

악바르가 압둘라 칸과 협상을 맺어 국경선을 확립하긴 했지만 악바르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중앙아시아 지방을 정복해 옛 티무르 제국의 강역을 복원한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중앙아시아의 부족들이 반-무굴 동맹을 구축해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에 악바르의 끈질긴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는 못했고, 후대 황제인 샤 자한이 17세기 중반에 잠깐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잃었다. 다만 악바르가 무굴 제국의 북부 국경에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제국의 북부 국경 하나만큼은 확실히 안전이 보장되었다. 마치 중국 북부에서 흉노족이 넘어오듯이 당시 인도에서도 북부의 산악 민족이 내려오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황제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주둔하다보니 더이상의 침략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1601년에 우즈베크인들의 구심이었던 압둘라 칸이 죽고 우즈베크인들이 사분오열되자 제국 북부에 악바르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모조리 사라졌다.
2.2.1.6. 칸다하르 점령
우즈베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제국 북부에 길게 체류하는 동안, 악바르는 북부 뿐만 아니라 서쪽의 사파비 왕조와 접한 서부 국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인더스 계곡을 평정해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고자 했는데, 1585년에는 카슈미르 일대를 굴복시켰고 발티스탄과 라다크 등 티베트 계열의 지방 일부도 무굴 제국으로 합병했다. 1586년에는 아프간 부족들 중 하나였던 발루치 일족들을 투항시켜 충성 맹세를 받아냈고 신드 주 남부 일대까지 모조리 점령하면서 거의 옛 고르 왕조에 필적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정복하게 된다. 이때 악바르가 점령한 영토는 상당히 넓었는데, 현재의 파키스탄 전체와 아프가니스탄의 발루치스탄 일대, 그리고 마크란 해안 일대 등이 모조리 무굴 제국의 영토일 정도였다.

서부의 걸리적거리는 부족들을 청소한 악바르의 눈에 띄었던 곳이 칸다하르 지방이었다. 고대 인도의 간다라에서 이름을 딴 칸다하르는 옛 티무르 시절부터 무굴 제국과 인연이 있었던 곳으로 무역로의 중심이자 상업이 발달해 많은 이들이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칸다하르 지방은 후마윤이 지원의 대가로 사파비 왕조 타흐마스프 1세에게 선물한 이후 30년 동안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고, 명목상 사파비 왕조와 무굴 제국은 동맹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빼앗기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타마하스프 1세가 사망하고 사파비 왕조가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싸우며 동부의 칸다하르에 신경쓸 여력이 사라지자 상황이 변하게 된다.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 싸우느라 정신이 팔려있고, 우즈베크인들은 그 틈을 타 칸다하르 지방으로 밀고 내려오니 칸다하르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악바르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파비 왕조가 정신을 못차리는 틈을 타서 칸다하르를 수복하고자 들었는데, 1593년에 사파비 황족이던 로스탐 미르자가 황실 분쟁에서 밀려나 무굴 제국으로 귀화하면서 칸다하르에 개입할 명분이 생겨났다. 악바르는 로스탐 미르자를 앞세워 칸다하르 분쟁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당시 칸다하르 총독이던 모자파 후사인 역시 사파비 왕조를 배신하고 무굴 제국에 항복했다.[18] 결국 1595년에 칸다하르는 무굴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참고로 이로 인해 사파비 왕조와의 관계가 악화되긴 했지만 아예 파탄난 수준은 아니었다. 사파비 황제들이 오스만과 싸우느라 더이상 적을 늘릴 여유가 없었던 탓이 크다. 무굴과 사파비 황제들은 친서를 교류했고 동맹을 유지했다고 한다.[19]

악바르는 칸다하르 정복 이후에도 데칸 술탄국들에 대한 원정을 지속했다. 1595년에는 아마드나가르 요새를 공략해 베라르 일대를 얻어냈고 1599년에는 아시가르 요새를 공격해 부르한푸르를 정복했다. 이후 악바르는 각자 아마드나가르, 베라르, 칸데시 수바[20]를 설립해 황족에게 수바들의 관리를 맡겼다. 다만 천하의 악바르마저도 데칸 고원 일대를 완벽히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나마 데칸 고원의 북쪽 소왕국 일부만을 건드렸을 뿐이지 본격적으로 데칸 고원을 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무굴 제국이 데칸 고원을 정복한 것은 후임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러서였다. 악바르는 1605년에 이질[21]로 사망했다. 그가 죽을 당시 무굴 제국은 동쪽으로는 벵골 만에서 서쪽으로는 신드에 이르는 거대한 대제국을 이룩했다. 지역 강국에 불과했던 무굴 제국을 북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압도적인 대제국으로 탈바꿈시켜놓은 셈.
2.2.1.7. 만사브다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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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브의 모습 코끼리 기병
악바르의 군사 정책을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만사브다르 제도다. 만사브다르, 혹은 만사브다리(منصبدار) 제도라고도 부르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제국에 대규모의 상비군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각자 토후와 지방 권력자들이 조금씩 병사들을 끌고와 한 곳에 모여 무굴 황제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조선 제승방략과도 유사한 전술이다. 무굴 제국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오는 이 지방 권력자들을 '만사브'라고 부르며 군사령관의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만사브는 총 33개의 계급으로 나뉘었고, 최하 10명에서 최고 5,000명까지 황제의 주둔지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5,000명 이상의 대군을 끌고 올 시 지나치게 발언력이 강해져 황제의 지위마저 위협할 수 있으므로 허가치 않았다.

일부 황족들과 몇 안되는 최고위 라지푸트 대귀족들은 만사브다르 내에서도 특전을 받아 최대 1만 명까지 지휘가 가능했다. 물론 이들 모두가 황제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고 이견을 제시하는 즉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만사브들이 데리고온 병사들에게는 중앙 정부가 지출을 부담했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봉급을 주는 게 아니라, 일단 만사브에게 병사들의 봉급을 지불하면 만사브가 알아서 자기 군사들에게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중앙 정부는 병사 뿐만 아니라 만사브들에게도 따로 위로금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퍼주어야 했다. 보통 1,000명을 지휘하는 만사브는 월급 8,200루피, 3,000명을 지휘하면 17,000루피, 5,000명을 지휘하면 30,000루피 정도를 후하게 지급했다.

만사브들은 이렇게 후하게 봉급을 받는 대신 어느 정도 군대를 유지하고 통솔할 책임이 있었다. 5,000여 명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만사브를 예를 들면, 최소한 340필의 군마, 100마리의 코끼리, 400마리의 낙타, 100마리의 당나귀와 160량의 수레 정도는 무조건 구비하고 있어야했다. 또한 당시 무굴 군대의 핵심이었던 기병의 경우 중앙 정부에서 직접 기준을 세워두고 만사브에게 간섭했다. 특히 말은 여섯 개의 등급으로, 코끼리는 다섯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세심히 관리했다. 만사브들은 기수 1명 당 반드시 2마리 이상의 군마를 준비해 번갈아 타고 다닐 수 있게 해야 했고, 기병 하나하나를 따로 기록에 남겨서 황제에게 보고서를 매달마다 올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사브의 지위는 세습이 아니었다. 만일 이를 세습직으로 물려줄 수 있게 한다면 지방에서 상비군을 육성하여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하지만 이는 사실상 악바르부터 아우랑제브까지의 시기에만 그럭저럭 지켜졌고 무굴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하자 아무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만사브가 명목상으로는 군사령관이긴 했지만 군대=권력=사회적 지위였던 근세 인도에서 만사브는 곧 그 지방의 최고 권력자를 의미했다. 만사브는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제에게 따로 징세권 등도 하사받으며 막대한 특전을 누렸다. 이렇게까지 우대해줬으니 만사브라는 계급이 고착화되는 것은 당연지사. 중앙집권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인도 대륙에서 만사브의 힘은 날로 강해졌고, 후일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는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황제 직속 총독의 말마저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며 무굴 제국의 몰락에 일조하기도 한다.

2.2.2. 내치

2.2.2.1. 경제 발전
악바르가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이유는 그가 영토 확장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도 함께 이룩했기 때문이다. 특히 악바르 황제는 자신이 정복한 영토들을 단순히 묶어놓는 수준이 아니라 경제 무역망에 통합해 진정한 의미로서의 통합을 꾀했다. 악바르는 무역과 경제가 제국을 통합하는 길이라 믿었기에 경제 발전에 대단히 많은 신경을 썼는데, 각 지방의 총독들에게 상인이 관할 구역에서 도둑맞은 화물을 배상할 의무를 부여해 상인들이 마음놓고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가 하면 무역로마다 '라다르'라고 하는 경비대를 설치해 도적 떼들이 설치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수레나 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도록 길들을 닦는 데도 신경을 써서, 카불에서 인도로 향하는 길을 깔끔하게 포장해놓기도 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업적들 중 하나가 바로 동전의 발행이다. 악바르의 동전 주조는 단순히 무굴 제국을 넘어서 인도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이정표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악바르의 선황이던 바부르 후마윤은 무굴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도 버거워서 동전 따위를 주조할 여력이 없었지만 악바르의 재위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기반이 마련되며 동전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 특히 악바르가 무려 50년이라는 기나긴 재위기간도 '동전'이라는 요소를 실험해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에서도 세종대왕이 화폐를 도입하려다 실패한 것과 같이, 물물교환 사회에 본격적으로 화폐를 유통하기 위해선 긴 시간 동안 일관적인 통화 정책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악바르가 주조한 동전은 꽃 무늬가 새겨진 독특한 모양의 원형 동전이었다. 악바르의 동전에는 페르시아어 샤하다가 새겨져 있었고 별다른 장식은 없었다. 나중에는 악바르의 초상화가 새겨진 황금 금화도 주조되었는데, 이건 악바르가 만든 게 아니라 악바르의 후계자 자한기르가 만든 화폐다. 이 금화는 '모후르'라고 불렀고 무굴 제국 내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화폐였다. 참고로 악바르 재위 후반에 주조된 동전들에는 악바르를 신으로 모시는 '딘 이 일라히'의 내용을 새겨놓은 동전도 있다. 어쨌든 악바르의 화폐 정책은 후계자 자한기르의 재위를 거치며 이어내려져가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무굴 경제의 정점을 찍은 샤 자한의 재위기에 그 전성기를 맞는다.

악바르는 셰르 샤 수르의 세금 정책을 도입했다. 이전까지는 전국의 농토들을 비옥도에 따라 계급을 나눠 일정한 비율의 곡물을 세금으로 걷어갔다. 다만 이 방법은 기준을 황실에서 측정하는,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곡물가격을 기준으로 세율을 정했기 때문에 일반 농부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세법이었다. 악바르는 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지방관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게 만들었지만 부정부패가 지나치게 심해지자 1580년 이 방법마저 폐지하고 '다살라'라는 새로운 세법을 시행했다. 다살라는 지년 10년 간의 평균 수확량을 측정하고 그 3분의 1만큼을 납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비옥도에 따라 비슷한 토질의 농토를 하나로 묶는 등 여러 차례 개정되었고, 덕분에 농부들의 세금 부담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제 지역 실정에 맞게 세금을 걷어왔다. 악바르는 미개척지나 휴양지의 개간을 크게 장려했고 농부들이 이런 땅들을 개간했을 시에는 세금을 받지 않았다. 또한 지방의 토후들과 권력자들은 농부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어려울 때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고 필요할 시 농부들에게 양질의 종자를 제공해야할 의무도 존재했다. 대신 지역 토후들에게는 농부들이 수확한 곡물들의 상당량을 그대로 떼어갈 수 있었다. 지방 토후들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았던 무굴 제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농부들에겐 자신의 경작지를 자손 대대로 물려줄 권리가 보장되었다. 참고로 악바르는 세금 징수관들을 크게 불신했다. 그래서 전체 봉급의 4분의 3만을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4분의 1은 징수관이 세금을 모두 걷어와야만 따로 지급했다.
2.2.2.2. 종교의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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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요새 내의 악바르 교회. 1580년 악바르가 초청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1600년에 세운 가톨릭 성당으로, 1610년 악바르는 (다음 황제가 되는) 자한기르와 후샹 등의 왕자들을 이곳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게 했다.[22]

악바르 대제가 후임 샤 자한, 아우랑제브 등의 황제들과 확연히 차별되는 부분이 바로 종교 부문이다. 악바르는 기본적으로 수니파 무슬림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세속주의적인 스승들에게 굉장히 자유로운 종교관을 교육받았으며 죽을 때까지도 여러 종교들을 존중하면서 살았다. 애초에 무굴 제국이 단순한 지역 강국 정도에서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악바르의 이러한 종교 관용 정책 덕택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인도에는 무슬림들보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힌두교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단순히 힌두교도들을 찍어눌렀다면 제국의 성장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악바르가 좋아하던 구루 나낙, 카비르, 차이타냐 등의 성자들과 페르시아 시인 하페즈 등이 종교의 관용을 외쳤던 인물들이었기에 악바르 역시 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악바르의 재위 초창기에는 이슬람의 다른 종파인 시아파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시행했다. 시아파를 믿었던 군주의 무덤이 수니파 성인과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군주의 묘를 파묘하도록 지시하기도 했고, 시아파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시아파 신도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흘러 1570년대에 이르자 수피즘 등 다양한 종교들을 접하고 악바르의 생각이 바뀌었고, 후반기부터는 시아파에게도 더이상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덕분에 무굴 제국에서는 더이상 수니파-시아파 간의 고루한 싸움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만일 일어난다 해도 황제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580년에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관용적인 악바르에 반발해 반란이 일어나자 악바르는 이들을 강경진압하고 주요 울레마[23]들을 불러모아 스스로 칼리파임을 선포하며 전 인도의 무슬림을 아우르는 종교 최고지도자임을 확실히 했다.[24]

한편 힌두교에 대해서도 다른 무슬림 군주들에 비해서는 대단히 부드러운 자세를 견지했다. 악바르는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교도들이 다시 힌두교로 재개종한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보통 이슬람에서 개종을 최악의 부정한 짓으로 취급하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디왈리 축제 등 힌두교의 축제들을 직접 주관하기도 했고 브라만교 사제들이 자신의 몸에 보석 띠를 두르고 부적을 붙이게 하는 등 웬만한 세속주의 군주 못지 않게 자유로운 종교관을 보였다. 몇 백년 동안 무슬림 왕조들에게 탄압받아온 북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악바르를 성인이라고 칭송했고 그를 찬양하는 찬가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후계자인 자한기르 샤 자한도 소 도살을 금하고 오직 갠지스 강의 물만 마시는 등 악바르의 힌두 관용 정책 일부는 물려받았다.[25]

자이나교와도 관련이 많았다. 악바르는 자이나교의 성자가 6개월 동안 단식 수행을 하는 것을 목격하며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그는 그 성자를 파테푸르 시크리의 궁전으로 초대해 직접 자이나교의 교리를 전해듣는 등 자이나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때 악바르는 성자로부터 다양한 교리와 철학들을 전수받으며 문화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성자와의 접견 이후 악바르는 육식을 금하는 자이나교를 본받아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동물들의 도살을 금하는 등 친자이나 정책들을 폈다. 자이나교에 대단히 호의적이던 악바르 대제는 팔리타나 등 자이나 성지를 순례할 때 자이나교도들에게 걷어들이던 순례세를 폐지했다. 게다가 궁정에 자이나 교리를 적은 경전을 배치하고 틈틈이 자이나 성자를 초대하는 등 죽을 때까지 자이나교에 막대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특히 시크교 문헌에 따르면 악바르 대제는 여러 차례 시크교 구루인 아르준과 만났으며, 그가 통합한 선대 구루들의 가르침을 전해주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특히 구루 아르준이 시크교의 성서인 《그란트 사히브》를 정리, 저술하고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그때 악바르 대제에게 한 통의 보고가 날아왔는데, 바로 시크교의 구루 아르준이 저술하고 있는 문집에 이슬람을 모욕하는 구절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악바르 황제의 북행길에 황제가 성자였던 바이 붓다와 바이 구르다스를 만났는데, 구루 아르준의 저작의 사본을 전해받은 뒤 찬가를 읽고 나서 오히려 매우 흡족해했으며, 오히려 값비싼 옷과 51 모후르 금화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황제의 암묵적인 용인하에 시크교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부와 영향력 또한 확대할 수 있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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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푸르 시크리의 '이바닷 카나'.

이렇게 종교의 자유를 좋아했던 악바르는 나중에 자신을 섬기는 종교를 창시하기까지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들을 토론하게 하고 이 토론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궁궐에 '숭배의 집'이라는 이름의 이바닷 카나를 짓고 여러 종교의 현자들을 불러 영성에 대해 토론하도록 시켰는데, 이 토론은 할때마다 과격해져서 가끔씩 참여자들 간에 고성이 오가거나 욕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파테푸르 시크리에서의 종교 토론은 날이 갈수록 그 주제가 과격해지고 토론의 폭과 내용도 대단히 심오해졌다. 나중에는 심지어 쿠란의 정당성이나 신의 존재에까지 주제가 닿았는데, 신을 절대불가침으로 여기던 이슬람 정통 신학자들의 눈에는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정통 신학자들은 제발 토론을 멈춰달라고 악바르에게 탄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악바르가 주최한 토론의 본 목적은 여러 종교들이 한 곳에 모여 토론함으로써 통합과 화합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감정이 앞서다보니 화합이라는 최종 목적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악바르의 종교에 대한 시야는 이 토론을 통해서 급격히 넓어지게 된다. 그는 이 토론에서 얻은 종교적 교리와 깨달음을 토대로 스스로 새로운 종교 '딘 이 일라히'를 창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슬람, 힌두, 시크, 자이나 등 다양한 종교에서 취할만한 것을 취해서 자신만의 교리를 만든 것이다. 다만 딘 이 일라히를 '종교'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다. 딘 이 일라히의 내용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자비와 근면을 중시하는 등 거의 윤리학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악바르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무슬림이었으니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만의 윤리학을 내세웠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라는 의견이 현대 학계의 주류이다.
2.2.2.3. 외교 관계
악바르의 재위기간인 1500년대 후반에는 포르투갈이 막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무굴 제국과 포르투갈이 접선한 시점은 악바르가 구자라트를 손에 넣은 1572년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구자라트에 항해 기지를 짓고 점차 인도와의 교역을 트고 있었는데 구자라트를 무굴 제국이 집어삼키면서 포르투갈과 무굴 제국의 접촉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 것. 포르투갈인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악바르는 이들을 제국의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이 페르시아 만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금했고 끝까지 포르투갈인들을 경계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에서의 해상 패권을 바랐지만 매년 인도양을 통해 메카로 성지순례를 보내야했던 무굴 제국은 도저히 양립하기가 힘들었던 것도 이유가 컸다.[27]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한 것은 아니었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초청해 신약성경의 내용을 경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도에 자리잡은 무굴 제국과 저 멀리 아나톨리아에 있는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이라면 크게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슬람의 최대 성지이자 필수적인 순례지였던 메카 아라비아 반도가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기 때문에 무굴 제국은 싫으나 좋으나 오스만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악바르의 재위기는 오스만 제국 최고의 전성기인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와 겹쳤기 때문에 오스만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악바르는 수 차례 오스만 술탄에게 선물과 값비싼 보물들을 보내는 등 오스만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고, 메카에는 직접 사신단을 파견하여 4년 동안 머무르게 했다. 이 사신단들은 4년 동안 메카에 머무르며 순례를 온 가난한 인도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과 포르투갈 간의 갈등이 일어나자 무굴 제국은 오스만의 편을 들어 포르투갈과의 일시적 동맹 관계를 청산했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와는 관계가 애매해졌다. 원래 사파비 왕조는 후마윤에게 군대를 지원해주는 등 전통적인 동맹 관계였지만 무굴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관계 재정립에 들어가며 애매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둘다 똑같은 수니파였기 때문에 같은 입장이었던 반면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이질적인 입장이었다. 특히 악바르가 사파비 왕조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칸다하르 지방을 먹어버린 탓에 사파비 왕조와의 관계는 예전같지 못했고, 칸다하르 합병 직후에는 거의 10년 넘게 양국 간 외교관계가 단절되기까지 했다. 다만 샤 아바스가 새로운 사파비 황제로 즉위하면서 1587년에 외교 관계가 복구되었지만 무굴 제국과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하고 지낸 것도 아니라서 황제들 간에 선물이나 친서를 주고받으며 기본적인 관계는 유지했다고.

3. 평가

50년에 가까운 치세 동안 지역 강국에 불과했던 무굴 제국을 북인도 전체를 다스리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탈바꿈시키며 무굴 제국의 부와 영토를 3배 넘게 늘렸다. 경제에 관심이 많아 인도 전역을 하나의 경제권을 묶어 민생에 신경을 썼으며,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여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들을 끌어안았고 그 어떤 무슬림 군주보다 세속주의적인 면을 보였다. 군사면 군사, 경제면 경제, 종교면 종교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군주로 생각하면 된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은 열려있는 개방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굉장히 유연한 형태를 띠었다.

악바르의 업적은 사회적으로도 다양하다. 비무슬림들에 대한 인두세를 없애 힌두교도들의 불만을 줄였고 사티 풍습을 폐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으며 결혼 연령을 높여 조혼을 금하는 여성 우대 정책도 실시했다. 여성들을 차별하는 풍조가 강한 현대의 극단주의 이슬람과 비교하면 오히려 그때가 더 나을 정도의 여성 우대였던 편에 속한다. 또한 아프간계 민족 출신이던 악바르는 라지푸트족들을 포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라지푸트 공주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기존 왕족들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한편 인도 각지의 족장들에게 관직을 내려 통합에 힘썼다. 모든 귀족들을 33등급으로 나누어 체계적인 행정구조를 만드는가 하면 '만사브다르' 제도를 만들어 군사 제도까지 확실히 정비했다.

인도인들은 악바르 대제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다. 물론 치토르 요새를 점령했을 당시 많은 힌두 반란군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 때문에 일부 욕을 먹는 부분도 있지만 웬만하면 좋게 쳐주는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악바르가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정책을 펴고 힌두교 교리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기 때문. 후임 아우랑제브 등이 힌두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해서 거의 인도인들에게 악마로 여겨지는 것에 비하면 악바르 대제의 이미지는 성인군자에 가깝다. 인도인들에게 무굴 제국의 이미지가 썩 좋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악바르는 유난할 정도로 힌두교도들에게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의 한족들이 청나라 강희제에 대해 생각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인도 교과서에도 악바르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있고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대왕과 함께 인도 역사의 기념비적인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파키스탄에서는 의외로 평가가 그저 그렇다. 이슬람 극단주의적인 면이 강한 파키스탄에서, 종교의 관용을 중시했던 악바르의 행보는 썩 달가운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파키스탄에서 악바르를 천시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오히려 힌두교도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던 아우랑제브의 인기가 더 높은 경우도 많다. 파키스탄의 교과서에는 오히려 아우랑제브 시절을 무굴 제국의 전성기로 평가하면서 그에 대해 긴 서술과 주석을 달아놓고 있지만 악바르 대제의 경우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누락한 것도 많고 서술 분량도 아우랑제브에 비하면 확연히 적다고 한다. 특히 악바르 대제가 라지푸트인들과의 융합을 꾀하면서 이들에게 존중을 베풀었던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한마디로 말하면 관용 따윈 필요없었고 무조건 이슬람을 밀어붙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악바르의 자유주의적인 정책 덕분에 무굴 제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의 몽골인(특히 외몽골인) 민족주의자들이 원나라 쿠빌라이 칸[28]에 대해 생각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파키스탄의 세속주의자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악바르 대제가 지금의 방글라데시 땅을 정복한 것 때문에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특히 한때 방글라데시를 지배했고 현재까지도 방글라데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이 무굴 제국을 자신들의 전신격 국가로 여기는 점 또한 방글라데시에서 악바르 대제를 포함한 무굴 제국의 명군들에 대한 평가가 호평과 혹평을 넘나들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 보니 방글라데시에서 비벵골계 주민들이 대체로 악바르 대제를 좋게 평가하는 반면, 벵골인 민족주의자들은 경우에 따라 악바르 대제를 침략자로 여기며 증오하기도 한다. 그래도 악바르 대제가 대체로 벵골인을 포함한 피지배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푼 편이었다는 점 때문에, 방글라데시 내에서 악바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적어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의 파키스탄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로힝야족의 경우 자기 조상들이 지금의 방글라데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바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전형적인 제3자의 입장이다. 현대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인도 제국 시절에 지금의 미얀마 땅으로 이주한 치타공인(벵골인의 지파)들의 후손이 아니라 7세기에 지금의 미얀마 땅으로 이주한 아랍 상인들의 후손에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힝야족은 스스로를 무굴 제국과 무관한 민족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4. 악바르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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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서쪽 시칸드라에 위치한 악바르 영묘. 타지마할과 약 6k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악바르가 승하하고 그의 후계자 자한기르가 4년 동안 지었으며 총 150만 루피가 건설비용으로 소모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의 무덤은 1691년, 증손자인 아우랑제브가 증조부의 정책을 뒤엎고 인두세를 부활시키자 벌어진 폭동 때 약탈당했다. 이때 악바르 대제의 시신도 부관참시에 이어 불태워졌다고... 이후 인도 제국의 조지 커존 경이 1905년 복구 공사를 명령했고 상당수의 건물들이 이때 복구되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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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 ~ 1585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29] 파테푸르 시크리의 전경


[1]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신드주 미르푸르하스지방 우메르코트구 우메르코트 [2]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지방 아그라구 파테푸르 시크리 [3] 2018년 기준으로 교과서 표현은 대부분 '아크바르 대제'로 되어 있다.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가 ' 아크바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는 동일한 페르시아어 인명에 대해서는 "벨라야티, 알리 악바르", "나테크누리, 알리 악바르"로 규정 용례를 제시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알라후 아크바르할 때 그 아크바르이다. [4] 중국에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청나라 강희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5] 후술할 종교의 관용 부분 참조 [6] 정확한 출생 날짜는 1542년 10월 25일이다. [7] 웃지 못하게도 증조할아버지도 어이없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 바부르가 그렇게 뒤를 이었다. 심지어 증조할아버지의 사인은 새하고 놀다 추락사라고... 결국 악바르의 할아버지 바부르는 11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8] 도서관 계단에서 자기 옷자락에 휘말려 발을 헛디딘 뒤 넘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9] 바이람 칸의 부인은 남편이 죽어 어린 아들과 함께 다시 무굴로 돌아왔고 악바르는 그녀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대했다. [10] 바즈 바하두르는 목숨만 건져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1570년에 죽었다. [11] 악바르는 아담 칸이 확실히 죽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미 머리가 깨진 아담 칸을 끌고 올라와 다시 한번 더 발코니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12] 악바르도 처음에는 이들을 봐주었지만 하도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참다못해 제거해버린 것이다. 몽골에서는 군주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관례가 있어 고위 귀족은 자루에 넣고 밟아 죽이곤 했다. [13] 이후 악바르는 두르가바티의 남편에게 가르하의 총독직을 맡겼다. [14] 후대에 악바르가 지탄받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치토르 요새의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지만 악바르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5] 우다이 싱의 후계자 프라타프 싱이 끈질기게 저항하긴 했지만 1576년 할디그하티 전투에서 대패하고 얌전히 쪼그라들어 산간 지방에 박혔다. [16]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17] 벵골의 오리사 지방만이 무굴의 봉신국인 카라니 왕조의 영토로 남았다. 한편 다우드 칸은 도망쳤다가 힘을 길러 다시 무굴에 도전했지만, 또 패배해 목이 잘렸다. [18] 로스탐 미르자와 모자파 후사인 모두 항복 후 융슝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모자파 후사인의 딸은 악바르의 손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19] 당연히 불화는 물밑에 존재했다. 참고로 악바르 이전까지는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 사이에서 사파비 쪽이 약간 더 우위에 있었다면, 악바르 이후부터는 무굴 제국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게 달랐다. [20] '수바'하고 해서 무굴 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이었다. [21] 대장에서 발병하는 급성 또는 만성 질병이다. 전형적인 증세로는 액체와 같은 소량의 설사에 피와 점액이 섞여 나오며 심한 복통이 따른다. [22] 이때 가톨릭 세례명까지 주어졌다 [23] 이슬람의 법학자들을 의미한다. [24] 참고로 당시 무슬림 세계의 공통 칼리파는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였지만, 악바르는 스스로를 인도의 칼리파로 자칭하고 오스만 제국이 인도 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버렸다. [25] 악바르는 심지어 갠지스 강에서 200마일 떨어진 펀자브 지방에 머무를 때에도 갠지스 강에서 물을 길어 오도록 해서 그 물만을 마셨다. [26] 하지만 악바르 대제가 죽고 나서 자한기르 황제 대에 이르러 시크교와의 우호관계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자한기르 항목 참조. [27] 악바르는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함포와 군함을 수입해 구자라트에 해군을 창설하고자 했지만 무굴 제국의 해상 진출을 두려워한 포르투갈인들을 당연히 거절했다. [28] 한족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가속화시킨 것 때문에 몽골인 민족주의자들에게 평가가 좋지 않다. [29] 사원의 정문인 불란드 다르와자는 구자라트 원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의 용도를 겸한다. [30] 물론 학계에서는 파테푸르 시크리가 버려진 것도 아니고 성자를 기념하려고 지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악바르가 죽을 때까지 중요한 도시였고, 수도를 새로 지은 이유는 라호르와 델리 등 대도시들 간의 수도 경쟁을 완화하고 인도 중부의 정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31]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꼽히는 징기스칸 또한 타종교에 관용적이고, 종교인들끼리의 토론을 즐긴데서 둘의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