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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00386a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 愛新覺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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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건립일 | 1616년 2월 17일 | ||
창립자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 ||
現 수장 | 진위장[1] | ||
국가 |
후금 대청국 만주국 |
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
한자 | 愛新覺羅 |
[clearfix]
1. 개요
아이신기오로(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한자: 愛新覺羅[2])는 후금과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실 가문이다. 만주, 만주족 역사상 마지막 왕조이며, 중원과 중국인을 지배한 중원의 마지막 정복왕조이기도 하다.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660년에 아이신 기오로 가문의 핵심 지파는 378명이었고 1915년에 29,292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최근 3세기 동안 후금(後金)과 청(淸)나라의 황제는 수많은 후비를 거느렸고, 그들의 자손도 공족(公族)의 지위로 인해 많은 첩을 거느린 데다 중국의 다자(多子)·다손(多孫)을 숭상하는 오랜 전통 풍습 때문에 애신각라 가문의 자손들이 빠르게 번성했다. 현재 애신각라씨는 30만~4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3] 청나라 멸망 직후 일부 만주족이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4]과 러시아 등 중국의 주변국에도 아이신 기오로 가문의 생물학적 후손이 소수나마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멸망 직후 해외로 망명한 만주족의 후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5] 일본에도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후손인 아이신카쿠라 이[6]와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이 있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왕사 문서 참고하십시오.청나라는 만주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에 의하여 세워졌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7][8]이라 하고, 허투 아라(흥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라고 불리었다.
청나라 멸망 이후에는 만주족들은 대부분 한족 성씨로 이름을 바꾸었다. 애신각라(아이신기오로)씨뿐만 아니라 뉴호록(니오후루)씨, 과이가(구왈기야)씨 같은 만주족 고관의 성씨들은 대부분 한족처럼 훈이나 음의 하나를 따서 한자성으로 바꾸었다. 아이신기오로씨는 김씨로 많이 바꾸었는데, 아이신(Aisin)이 금을 뜻하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출신을 눈여겨본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만주국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3. 작위
청나라의 황족에게는 친왕 또는 군왕의 작위가 내려졌다. '친왕'과 '군왕'은 만주어 '호쇼이 친왕(和碩親王·화석친왕)'과 '도로이 기윤왕(多羅郡王·다라군왕)'이란 작위를 간략히 부르는 약칭이며, 1636년에 '청(淸)' 국호 및 황제가 선포되면서 후금 시절 '암바(大) 버일러(貝勒·패륵)'와 '호쇼이 버일러'가 왕작 형태로 변화된 것이었다. 때문에 친왕이라는 작위에 딱히 황족이라는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고, 오삼계·상가희·경중명 등도 '호쇼이 친왕'으로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순치제 당시까지는 화남 지방을 외번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할하지 않고 간접통치하는 체제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때문에 청 초기에는 한족 출신의 항장(降將)을 왕으로 책봉한 삼번(三藩)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강희제는 삼번의 철번을 시도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원 전역의 직할통치를 실현시켰다. 삼번의 철번 이후로는 종친과 몽골 각부 족장이 아닌 인물들에게 더이상 왕작이 수여되지 않았다.청나라의 종친 작위는 독특하게 운영되었는데, 품계가 주어지지 않는 최고 서열 작위 8종을 설치하고 이를 '입팔분공(入八分公)'으로 불렀다. 친왕과 군왕의 봉호는 대체로 1글자인 존호가 지정되었고, 이를 '호쇼이 ○친왕'·'도로이 ○기윤왕' 식으로 결합했는데, 그 약칭 또한 '○친왕'·'○군왕'이 되었다. 입관 이전에는 2글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나중에 1글자로 고쳐지기도 했다. 승택친왕(承澤親王)이 그 예인데, 이후 한 글자인 장친왕(莊親王)으로 고쳐졌다. 또한 청나라의 경우 황족 포함 모든 만주족이 북경을 포함한 전국 주요 대도시에 소재한 팔기주방 내에서 거주할 의무가 있었는데,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한족을 사사로이 괴롭히는것을 막으려는 목적과 한족과 섞여살며 동화되지 않은 팔기의 군사조직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황족도 만주족 전용 주거지역인 북경성의 '여(呂)'자 모양 구획 중 북쪽 작은 사각형 지역 내에 거주해야 했으므로, 이전의 다른 왕조들처럼 자신의 임지로 부임하지 않았고 관저인 '왕부(王府)'가 주어졌다.
그리고 황자라고 하여 무조건 친왕 작위를 수여한 것이 아니라, 황자는 일반적으로 버일러 작위를 받은 뒤 공과에 따라 승강되는 개념이었다. 작위의 세습에는 제한이 있었으며 대체로 아버지의 작위에서 몇 단계 낮은 작위에서 출발하는 특례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일부 친왕과 군왕 작위는 대수(代數) 제한도 없고 강등도 없게 하여 세습하도록 하는 특권이 부여됐는데, 이것을 세습망체(世襲罔替)[9]라고 한다. 세습망체의 혜택을 받은 친왕과 군왕들을 속칭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고 했다. 정말
역사상 세습망체를 받은 친왕과 군왕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들 작위 모두가 처음부터 철모자왕이었던 것은 아니고 개국공신 대부분은 관례적으로 선조와 같은 계급으로 하오기의 기주 직위와 함께 세습이 이뤄지던 것을 건륭 연간에 황제의 권위로 공식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시조들의 여러 논란으로 인해 오랜 기간 홀대받았던 한자가 다른 세 예친왕작은 건륭제 대에야 시조들이 공신으로 인정받아 철모자왕 작위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작위명이 바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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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쇼이 예친왕(和碩禮親王):
1636년 창설, 정홍기 기주
시조는 누르하치의 2남인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그의 7남 만다하이가 손친왕작을 받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다이샨의 손자에게까지 작위가 이어졌다가 도르곤 숙청 때 만다하이가 도르곤의 재산을 빼돌린 혐의가 드러나 추탈되었고, 이후 8남의 아들이자 삼번의 난과 대만 복속에 공을 세운 기여슈가 강친왕(康親王)에 봉해져 가문이 이어지다가 건륭 연간에 다이샨, 도르곤, 도도에 대한 재평가에 힘입어 영은의 대부터 작위명이 강친왕에서 예친왕으로 개봉되었다. 예친왕은 정홍기의 기주 직위를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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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
1 | 예열친왕(禮烈親王) | 다이샨(代善) | 1636~1648 | 1583~1648 | 시조 | |||||||
2 | 손간친왕(巽簡親王)(패륵) | 만다하이(滿達海) | 1648~1652 | 1622~1652 | 제7자 | |||||||
3 |
- 회민패륵(懷愍貝勒) |
창아다이(常阿岱) | 1652~1659 | 1622~1652 | 장남 | |||||||
4 | 강량친왕(康良親王) | 기여슈(傑書) | 1659~1697 | 1645~1697 | 다이샨의 손자 | |||||||
5 | 강도친왕(康悼親王) | 춘타이(椿泰) | 1697~1709 | 1683~1709 | 제5자 | |||||||
6 | 강수친왕(康修親王) | 총안(崇安) | 1709~1733 | 1705~1733 | 아들 | |||||||
7 | 강간친왕(康簡親王) | 바르투(巴爾圖) | 1733~1753 | 1674~1753 | 기여슈의 제4자 | |||||||
8 | 예공친왕(禮恭親王) | 영은(永恩) | 1753~1805 | 1727~1805 | 총안의 제2자 | |||||||
9 | - | 소련(昭槤) | 1805~1816 | 1776~1829 | 아들 | |||||||
10 | 예안친왕(禮安親王) | 인지(麟趾) | 1817~1821 | 1756~1821 | 총안의 손자 | |||||||
11 | 예화친왕(禮和親王) | 전령(全齡) | 1821~1850 | 1817~1850 | 장손 | |||||||
12 | 예각친왕(禮恪親王) | 세탁(世鐸) | 1850~1914 | 1843~1914 | 제3자 | |||||||
12 | 예각친왕(禮恪親王) | 세탁(世鐸) | 1850~1914 | 1843~1914 | 제3자 | |||||||
13 | 예돈친왕(禮敦親王) | 성후(誠厚) | 1914~1917 | 1864~1917 | 아들 | |||||||
14 | - | 성곤(誠 堃) | 1917~1929 | 1886~1929 | 양자 | |||||||
15 | - | 준명(濬銘) | 1929~1945 | 1918~1951 | 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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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1 | 예통친왕(豫通親王) | 도도(多鐸) | 1636~1649 | 1614~1649 | 시조 | |||||||
10 | 예후친왕(豫厚親王) | 유전(裕全) | 1820~1840 | ?~1840 | 아들 | |||||||
11 | 예신친왕(豫愼親王) | 의도(義道) | 1841~1868 | 1819~1868 | 제2자 | |||||||
12 | 예성친왕(豫誠親王) | 본격(本格) | 1868~1898 | 1846~1898 | 아들 | |||||||
13 | - | 무림(懋林) | 1899~1913 | 1892~1913 | 양자 | |||||||
14 | - | 단진(端鎭) | 1913~1945 | 1909~1962 |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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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1 | 예충친왕(睿忠親王) | 도르곤 | 1636~1650 | 1612~1650 | 시조 | |||||||
2 | 패륵(貝勒) | 도르보(多爾博) | 1650~1673 | 1643~1673 | 양자 | |||||||
3 | 진국공(鎭國公) | 蘇爾發 | 1673~1708 | ?~1708 | 아들 | |||||||
4 | 진국공(鎭國公) | 塞勒 | 1708~1729 | ?~1729 | 아들 | |||||||
5 | 보국각근공(補国恪勤公) | 功宜布 | 1744~1746 | ?~1746 | 제5자 | |||||||
6 | 예각친왕(睿恪親王) | 여송(如松) | 1746~1770 | 1737~1770 | 아들 | |||||||
7 | 예공친왕(睿恪親王) | 순영(淳穎) | 1778~1800 | ?~1800 | 아들 | |||||||
8 | 예신친왕(睿愼親王) | 보은(寶恩) | 1801~1802 | 1777~1802 | 장남 | |||||||
9 | 예근친왕(睿勤親王) | 단은(端恩) | 1802~1826 | 1788~1826 | 순영의 제4자 | |||||||
10 | 예희친왕(睿僖親王) | 인수(仁壽) | 1826~1864 | 1810~1864 | 제6자 | |||||||
11 | 예각친왕(睿愨親王) | 덕장(德長) | 1864~1876 | 1838~1876 | 장남 | |||||||
12 | 예경친왕(睿敬親王) | 괴빈(魁斌) | 1876~1915 | 1864~1915 | 장남 | |||||||
13 | - | 중전(中銓) | 1915~1939 | 1892~1939 |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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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1 | 이현친왕(怡賢親王) | 윤상(胤祥) | 1722~1730 | 1686~1730 | 시조 | |||||||
2 | 이희친왕(怡僖親王) | 홍효(弘曉) | 1730~1778 | 1722~1778 | 제7자 | |||||||
3 | 이공친왕(怡恭親王) | 영랑(永琅) | 1779~1799 | 1746~1799 | 제2자 | |||||||
이친왕 추존 | 면표(綿標) | - | 1770~1799 | 제2자 | ||||||||
4 | 이각친왕(怡恪親王) | 혁훈(奕勛) | 1799~1818 | 1793~1818 | 장남 | |||||||
5 | - | 재방(載坊) | 1819~1821 | 1816~1821 | 장남 | |||||||
6 | - | 재원(載垣)[10] | 1825~1861 | 1816~1861 | 혁훈의 제2자 | |||||||
7 | 이단친왕(怡端親王) | 재돈(載敦) | 1864~1890 | 1827~1890 | [11] | |||||||
8 | - | 부정(溥靜)[12] | 1891~1900 | 1849~1900 | 장남 | |||||||
9 | - | 육기(毓麒) | 1902~1945 | 1900~1948 | 장남 | |||||||
10 | - | 항추(恒樞) | 1917~1979 | 장남 | ||||||||
11 | - | 계운(啓運) | 1945~ |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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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
1 | 공충친왕(恭忠親王) | 혁흔(奕訢) | 1850~1898 | 1833~1898 | 시조 | |||||||
2 | 공현친왕(恭賢親王) | 부위(溥偉) | 1898~1936 | 1880~1936 | 손자 | |||||||
3 | - | 육첨(毓嶦) | 1936~1945 | 1923~2016 | 제7자 |
}}} |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1 | 경희친왕(慶僖親王) | 영린(永璘) | 1820 | 1766~1820 | 시조 | |||||||
2 | 경량친왕(慶良郡王) | 면민(綿愍) | 1820~1836 | 1797~1836 | 제3자 | |||||||
3 | - | 혁채(奕綵) | 1837~1842 | 1820~1866 | 양자 | |||||||
4 | - | 면제(綿悌) | 1842~1849 | 1817~1849 | 영린의 제5자 | |||||||
5 | 경밀친왕(慶密親王) | 혁광(奕劻) | 1849~1917 | 1838~1917 | 양자 | |||||||
6 | 경정친왕(慶貞親王)[14] | 재진(載振) | 1917~1947 | 1876~1947 | 장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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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 생몰년 | 선대와의 관계 |
1 | 순현친왕(醇賢親王) | 혁현(奕譞) | 1872~1891 | 1840~1891 | 시조 |
[1]
金毓嶂,
선통제의 이복 조카이며 직계로는
도광제의 현손자이다.
[2]
애신각라 또는 애신교라
[3]
가문의 비핵심 인구까지 합치면 영문 위키의 서술과 배치되지 않는다.
[4]
청나라 멸망 직후
일제 치하 조선으로 망명한 만주족이 일부 존재했다.
[5]
만주국 멸망 직후나
문화대혁명이 있었던 시기에도 일부 만주족이 해외로 망명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6]
일본의 안과 전문의이며, 문춘 인터뷰에 의하면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의 후손이라고 한다.
#
푸이의 손자뻘 항렬이라 한다.
[7]
후금(後金)이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조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부르는 별명일 뿐, 정식 국호는 그냥 금이었다.
[8]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변경했다.
[9]
총 12개 가문이며 문자 그대로 대대로(世) 이어 받으며(襲) (작위의) 교체(替)도 없다(罔)는 뜻이다.
[10]
함풍제의 고명 팔대신 중 한 사람.
신유정변 때 사사.
[11]
윤상의 제4자 영랑군왕 홍교(寧良郡王 弘晈)의 현손
[12]
의화단의 난 책임으로 일시 작위 폐지
[13]
시호 '현(賢)'은 만주국에서 받았다.
[14]
시호 貞은 사시(私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