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초대 상부상서 | ||
정체 | 愛新覺羅 載振 | |
간체 | 爱新觉罗 载振 | |
한국식 독음 | 애신각라 재진 | |
영문 | Aisin-Gioro Zaizhen | |
자 | 육주(育周) | |
출생 | 1876년 3월 31일 | |
청나라 직예성 북경 | ||
사망 | 1947년 12월 31일 (향년 71세) | |
중화민국 상하이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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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가정교육 | |
직업 | 외교관,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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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황족. 아이신기오로 이쾅의 아들로 만주 친귀 중에 두각을 나타냈으나 양취희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흔히 이름만 불러 재진이라고 한다.2. 생애
만주족 양황기 출신으로 경친왕 이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건륭제의 4세손이다. 1894년 2등 진국장군(二等鎭國將軍)에 습봉(襲封)되면서 관직을 시작했다. 광서제 연간에 관직 생활을 시작한 만주족의 젊은 친귀들 중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내정행주(內廷行走), 두등전사대신(頭等專使大臣) 등을 지냈다.1902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즉위식에 참석했으며 그길에 프랑스,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을 두루 방문했다. 1903년 일본에서 열린 제5회 권업박람회를 참관하고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극찬하면서 일본의 본질은 시정촌제(市町村制)의 실시에 있다면서 중국이 우선적으로 지방자치와 헌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점진적인 개혁을 지지하였다.
이후 신정에 참여하여 상부 설립을 청하여 초대 상부상서에 임명되었다. 1907년, 아버지 이쾅이 군기대신에 임명되자 농공상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때 위안스카이의 심복 돤즈구이에게 많은 뇌물을 받은 양취희 사건을 일으켰다가 훗날 섭정왕이 되는 순친왕 재풍의 조사를 받았고 위안스카이의 개입으로 혐의없으로 결론이 났으나 5월 17일, 사직을 청하였다. 서태후가 사직을 윤허하면서 물러났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위안스카이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오십번째 생일 때 그를 예방하고 형으로 모시는 등 아첨하여 어사 강춘림의 탄핵을 받았다. 광서제 말년에 위안스카이가 짜이전을 황대로 추대한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서태후가 믿지 않아 공론화되진 않았다.
선통제 즉위 후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으나 명예직에 불과한 어전대신, 외교사절단 단장 등을 지냈다. 1911년, 필덕원 고문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조지 5세의 대관식에도 대표로 참석했다. 동삼성 시찰 중 몽골 왕공들에게 과거엔 나라가 망하면 그저 주인이 바뀌었으나 이젠 나라가 망하면 노비로 전락한다면서 청실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상하이로 피신했다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이쾅이 사망한 후 대총통 리위안훙으로부터 경친왕 작위를 세습받는 것을 허락받았으나 이후 아편에 취하여 남은 재산을 가지고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았다. 1924년 북경정변이 발생하자 겁을 먹고 상하이의 영국 조계지로 피신하여 상공업 투자에 종사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지내다가 1947년 12월 31일에 사망했다. 차오루린(曹汝霖)·주작주(朱作舟) 등은 그가 격변기 속에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사시(私諡)를 '貞'이라 하였고, 그 위패에 '경정친왕 재진'이라고 썼다.
3. 참고문헌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젊은 만주친귀 집단의 정치적 지향과 좌절, 1900~1911, 윤욱, 동양사학연구 118호, 동양사학회.
- 청말 황족의 관직 임용양상과 입사경로, 송미령, 명청사연구 50호, 명청사학회.